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83
182
미친놈.
그랑카브리오가 날 보며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웃음 속에 담긴 광기에 치를 떨었고, 몸서리쳤다.
저 미소 앞에 스러진 목숨이 몇이나 될까?
만 명?
10만 명?
혹은 100만 명?
저 미친 황제는 황위에 오른 직후부터 지금까지 근면 성실하게 살육을 해댄 살인마였다.
그런 자가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왜 웃지 않느냐?”
…라고 말하며.
“웃어라. 짐의 암컷이여.”
“…….”
“이제 너는 짐의 암컷이 되었는데, 어찌 웃지 않는 것이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는 그 추잡하고 저급하며 오싹하리만치 섬뜩한 말 앞에 무참히 유린당해야만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
“너는 짐의 암컷으로서 영원히 짐의 곁을 지키게 될 것이다. 현재에도 짐의 사후(死後)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큭큭, 큭큭큭!”
난 이 너저분한 미친놈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알아들었더라면.
사후에도 이 악귀의 곁에 머물게 될 거라는 그 말을 알아들었더라면.
그냥 죽어버렸을 텐데.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내 한 목숨보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저 미친놈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생존을 선택했다.
깔끔한 죽음이 비참한 삶보다 낫다는 걸 미처 몰랐던 거다.
그렇게 20년의 시간이 흐르고.
“넌 나와 같이 가야만 한다… 큭, 큭큭큭… 너는 날 벗어날 수 없어… 너는 내 암컷이니까….”
미친놈은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내게 집착을 보였다.
나는 그 미친놈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마냥 고귀하고 아름다울 것만 같았던 사랑이라는 게 이렇듯 추악하고 역겨워질 수도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에 대한 그 미친놈의 집착은 악마조차도 제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미쳐 있었다.
나는 그 미친놈이 삶을 마감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마법사들에게 붙들려 어딘가로 옮겨졌고, 육체와 영혼을 분리당했다.
분리된 나는, 내 영혼은 어떠한 상자 안에 갇히게 되었다.
누구도 내게 말해준 적 없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먼 훗날.
그 미친놈이 부활하는 날.
그 미친놈은 이 상자를 열어 새로운 육체에 나를, 내 영혼을 심을 계획이었다.
현재에도, 사후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영원히’ 나를 곁에 둘 거라던 미친놈의 말은 결코 거짓말이나 허풍 같은 게 아니었던 거다.
나는 그렇게 되기 싫었다.
미안하지만, 사후에도 먼 미래에도 그 미친놈의 ‘암컷’이 되어 그 미쳐버린 사랑에 유린당하기 싫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절대로.
***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나는 되살아난 미친놈이 내 영혼이 깃든 상자를 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갇힌 상자에 나의 사념을 실었다.
내 평생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그 미친놈의 박해에 평생토록 고통받았던 그 남자의 노랫소리만이 내 영혼이 갇힌 상자를 열 수 있도록 빌었다.
그 미친놈이 나를 두 번 다시는 차지할 수 없도록….
***
환영이 끝난 직후.
“이, 이거… 도대체 뭡니까?”
지크는 너무나도 황당하게 말을 제대로 잇질 못했다.
“그러니까… 여기 든 여인의 영혼이 황후의 것이라고요?”
“그렇단다.”
치천존이 약간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 상자 안에 든 것은 희대의 폭군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황후의 영혼이란다.”
“미친….”
“결혼을 약속했던 사내가 있었지만 미친 황제 그랑카브리오의 노리개가 되어 평생을 고통받아야만 했던…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고통받고 있는 여인의 영혼이지….”
“황후가 결혼을 약속했던 사내는 황궁악단의 가수였고요? 태양왕의 아리아를 잘 불렀던?”
“그렇다.”
“그러니까 성궤를 열려면 안에 갇힌 황후의 영혼을 달래야 되겠네요? 태양왕의 아리아를 불러서?”
“바로 그것이지.”
지크는 그제야 퀘스트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근데 황후의 영혼이랑 히든 클래스랑은 무슨 관계지?’
물론 의문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현재로서는 모든 걸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상태.
‘일단 퀘스트나 깨자.’
지크는 더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퀘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태양왕의 아리아란 노래의 악보는 어디서 구합니까?”
“그건 나도 모른단다.”
치천존이 어깨를 으쓱했다.
“한 50년 전쯤이었나? 제국의 황립 예술 아카데미의 어느 남자 가수가 그 악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 확실치는 않구나.”
“제국 황립 예술 아카데미라… 어쩌면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으음?”
“여기 계실 거죠?”
“그야 당연하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지크가 치천존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 인간 여러모로 쓸모가 많단 말이야.’
지크는 그랭구아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절정의 실력을 가진 남자 가수.
그리고 제국의 황립 예술 아카데미 출신의 예술가.
현재로선 그랭구아르야말로 이 퀘스트를 풀 열쇠였으니까.
***
프로아로 귀환한 지크는 곧바로 그랭구아르를 불러 태양왕의 아리아에 대해 물어보았다.
“태양왕의 아리아 말씀이십니까? 흐음.”
그랭구아르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그거라면 동창 중에 그 곡의 악보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짜요?”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라고 하던데 실제로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아깝다. 들어 보셨으면 악보 같은 건 필요 없었을 텐데.”
지크는 그랭구아르가 절대 음감에 완전 기억 능력자라는 사실-얄밉지만-을 기억해내고 아쉬워했다.
“그 친구가 미술 전공이었습니다.”
“아하?”
“물론 예술 아카데미에서는 1, 2학년 때 모든 종류의 예술에 대해 기본은 하게끔 공통 과목으로 배웁니다만….”
“……?”
“아쉽게도 그 친구는 지독한 음치였습니다. 하하.”
“그, 그랬군요.”
“어쨌거나 전하께서 필요하시다고 하시니 동창들에게 편지나 통신을 보내 그 친구의 행방을 한번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랭구아르 사관님.”
“별말씀을.”
다음 날 오전.
지크가 로그인했을 때, 그랭구아르가 보고했다.
“전하, 그 친구를 찾았습니다.”
“그래요?”
“한번 찾아가 보시겠습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갑시다.”
지크는 햄찌, 그리고 그랭구아르와 함께 태양왕의 아리아의 악보를 가진 이를 찾아 나섰다.
똑똑!
그랭구아르가 꽤 멋진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아, 예. 저는 그랭구아르라고 합니다.”
“그랭구아르라면… 혹시 아가씨의 동창이신 그…?”
“맞습니다.”
“오오! 이럴 수가! 대륙 최고의 천재 예술가를 이렇게 뵙게 되다니! 이거 영광입니다!”
놀랍게도, 집사는 그랭구아르를 무려 ‘대륙 최고의 천재 예술가’라고 불렀다.
‘그냥 연예인이나 하지. 뭐 한다고 사관을 해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재능 낭비도 저 정도면 중죄 아냐?’
지크는 그랭구아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 인생이라는 게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가 있었다.
“한데 어쩐 일로 찾아오셨는지… 아가씨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예.”
“흐음.”
집사가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현재 아가씨께서는….”
그때였다.
“그랭구아르!”
집사의 어깨 너머로 굉장한 미인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오! 줄리안느!”
“정말 오래간만이야! 근데 너… 엄청 잘생겨진 것 같은데? 원래도 잘 생겼었지만….”
“하하….”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그게….”
그랭구아르가 용건을 말하려던 때였다.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
“날 자꾸 그런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줄리안느가 싸늘한 말투로 집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제가 가문의 수치이자 치부가 된 건 사실이지만,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던 동창생조차 만나지 말라는 건가요?”
“그, 그건….”
“그랭구아르는 학창시절부터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친구니까, 집사님께서는 이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아빠한테는 비밀이란 거 잊지 마시고요.”
어찌 된 영문인지, 오가는 말을 듣자니 줄리안느에게는 어떠한 사정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와.”
“고마워.”
“거기 일행분들도 들어오세요! 어머! 귀여워라!”
줄리안느가 햄찌를 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줄리안느?”
“응?”
“근데 너… 혹시….”
그랭구아르의 물음에 줄리안느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응, 맞아. 나 임신했어.”
그렇게 말하는 줄리안느의 배는 남산만 해서, 누가 봐도 만삭이었다.
“8개월 차야.”
“아, 아가씨!”
“닥치세요.”
집사가 끼어들자 줄리안느가 서릿발과도 같은 한마디를 했다.
“어….”
덕분에 그랭구아르는 말을 좀처럼 잇지를 못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연이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어… 줄리안느…?”
“응?”
“그게… 으음… 뭐랄까….”
“결혼해서 임신한 거 아냐. 사랑해서 하게 된 거지.”
“아!”
“사랑이 그런 거 아니겠어?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마침 아빠도 안 계시니까.”
자리를 옮긴 후.
재잘재잘-
그랭구아르와 줄리안느는 오래간만에 만난 동창답게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야기꽃을 피워나갔고.
‘어떻게 하면 채형석을 부술 수 있을까?’
그러는 동안 지크는 무릎 위에 앉은 햄찌를 쓰다듬으며 제네시스 길드와의 일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기를 약 한 시간여….
“그런데 어쩐 일이야? 너무 갑작스러운걸?”
“일단 여기 계신 분부터 소개할게.”
적당히 뜸-목적이 있어 찾아온 게 맞지만, 예의상 안부가 우선이라는 뉘앙스를 주기 위해-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랭구아르가 줄리안느에게 지크를 소개했다.
“이분은 프로아 왕국의 국왕이신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전하셔. 내가 모시는 군주시지.”
“어머!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난 또 네 매니저인 줄 알았잖아! 죄송합니다, 전하. 줄리안느 데 르누아루아라고 합니다. 백작가의 여식입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아이고! 아닙니다!”
졸지에 그랭구아르의 매니저(?) 취급을 받아버린 지크는 기분 나빠할 틈도 없이 황급히 줄리안느를 뜯어말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줄리안느가 그 만삭의 몸으로 지크에게 귀족들의 예법으로써 인사하려 했기 때문이다.
“홑몸도 아니신데… 그저 작은 나라의 왕일뿐입니다.”
“하지만….”
“편히 앉아 계시죠. 제발요.”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줄리안느가 자리에 앉은 후.
“줄리안느. 혹시 기억나?”
그랭구아르가 물었다.
“뭐?”
“태양왕의 아리아.”
“당연히 알지. 우리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곡인걸.”
“오늘 전하를 모시고 널 찾아온 이유가 그 곡 때문이야.”
“갑자기 그 곡은 왜?”
“극비 사항이라 자세히는 말해줄 수 없지만, 우리 전하께서 그 곡의 악보가 꼭 필요하시거든. 악보를 보여주기가 정 그러면 그냥 악기로 한 번 연주만 해줘도 돼.”
“넌 완전 기억 능력자에다 절대 음감이니까?”
“응.”
“안 돼.”
줄리안느가 고개를 저었다.
“으응?”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만, 그냥은 못 줘.”
“어째서?”
“조건이 있어.”
그렇게 말한 줄리안느가 고개를 돌려 지크를 바라보았다.
“전하.”
“예?”
“소녀가 실례를 무릅쓰고 감히 전하께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전하의 왕국에 집과 일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집과 일자리요?”
“제가 여길 떠나 홀로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요. 이 집은 정말이지 숨 막히는 곳이거든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리고….”
“……?”
“한 남자를 찾아주세요.”
***
그로부터 30분 후.
부들부들…!!!
지크는 한 장의 몽타주를 움켜쥔 채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놈의 연계 퀘스트… 으… 으으으…!!!”
지크가 줄리안느로부터 받은 퀘스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륙에서 김서방 찾기]그랭구아르의 동창 줄리안느에게 프로아 왕국에서의 집과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그녀의 연인이자 뱃속 태아의 아버지인 모험가 를 찾아오기.
•보상 : 태양왕의 아리아 악보
•진행률 : 0%
– 좋은 집 제공(실평수 150평 이상의 고급 저택)
– 일자리 제공(프로아 예술 아카데미의 미술 교사)
– 모험가 찾아오기
히든 클래스가 담긴 성궤를 여는 데 가장 중요한 퀘스트는 다름 아닌 줄리안느를 임신시킨 후 연락이 끊겨버린 모험가, 그러니까 게이머를 찾아서 데려오는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