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20
019
창피한 순간이 지나가고, 어찌어찌 설치가 끝났다.
“여기, 사인 부탁드립니다.”
이재상 메카닉이 태성에게 인수증을 내밀었다.
“아, 예.”
태성이 인수증에 제 이름을 아무렇게나 휘갈긴 뒤 이재상에게 넘겨주었다.
“여기요.”
“예, 고객님. 설치 완료입니다. 그럼… 앞으로 즐거운 플레이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하하… 하하하….”
태성을 바라보는 이재상의 눈빛은…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정체가 뭐지?’였다.
‘예… 제가 바로 캡슐 푸어들의 왕입니다….’
태성은 그런 이재상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이런 허름한 단칸방에 사는 가난뱅이가 하이퍼 캡슐인 오우거의 오너라는 건 태성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예, 뭐. 그럼….”
태성이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
“휴.”
태성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쪽팔려 죽는 줄 알았네… 내가 왜 이걸 생각 못 해서….”
그렇게 말하는 태성의 시선은 어느새 방 안으로 향해 있었다.
비좁은 단칸방.
누런 벽지, 퀴퀴한 곰팡내, 구석구석 쌓인 먼지들….
너저분하기 짝이 없는 방 안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캡슐인 오우거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딱 사람 하나가 쪼그려 누울 수 있는 공간만을 남겨둔 채로 말이다.
“빚….”
태성이 중얼거렸다.
“갚으면 집부터 옮겨야겠네. 얘를 여기다 두니까 너무 없어 보이잖아.”
오우거를 이런 단칸방에 둔다는 건 하이퍼 캡슐에 대한 모독이었다.
“돈 많이 벌자.”
태성은 부자가 되어 꼭 이사를 가리라고 마음먹고는, 오우거를 향해 다가섰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캡슐의 설치가 완료되었으니 사용자의 개인 정보가 담긴 VR유심(USIM) 칩을 꽂고, 노트북과 연결해 BNW의 클라이언트를 다운로드해야 했다.
게다가 하이브 게임즈 코리아에 홀로그램 공인인증서와 홍채, 지문, 치아 등 태성 고유의 개인 정보 역시 보내 인증까지 받아야 했다.
가상 현실이 보편화된 시대이니만큼, 보안과 인증 절차 역시 매우 까다로워졌기 때문이었다.
***
한 시간 후.
사용자 인증과 BNW 클라이언트 설치까지 완료한 태성은 곧장 오우거에 탑승해 게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스윽.
태성이 오른 손바닥을 강화 유리로 된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사용자 인증, 완료!]그러자 오우거의 뚜껑이 열렸다.
“스마트키가 있어야 시동이 걸린다고 했지….”
최상급 알칸타라 시트에 몸을 뉘인 태성이 손에 쥔 보라색 크리스털 스틱을 오른쪽 하단에 조심스레 꽂아 넣었다.
우우웅…!
그러자 전기로 구동되는 오우거의 엔진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낮게 으르렁거리다 이내 곧 정숙해졌다.
“다르네.”
오우거는 엔진 사운드에서부터 기존에 사용하던 구형 캡슐과는 확연히 다른 고급스러움을 보여주었다.
“그래픽이 어떨까?”
하이퍼 캡슐이라는 오우거가 얼마나 리얼한 그래픽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아무리 가상 현실 프로그램이 보편화된 시대라고 해도, 100퍼센트 현실과 같을 순 없는 법.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현실이 아니라는 괴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우거는 초고성능 사양을 가진 괴물이었고, 그런 오우거에 탑승한 태성의 동조율은 무려 96.5퍼센트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짜’ 가상 현실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 보자.”
태성 기대감을 잔뜩 머금고, 카본 재질로 이루어진 헤드기어를 착용했다.
[브레이브 뉴 월드에 접속하시겠습니까?] [Yes!] [브레이브 뉴 월드에 접속합니다.] [로딩 중….] [17%… 59%… 99%….] [100%]게임을 시작합니다!]
마지막 알림창과 함께, 태성은 눈을 감았다.
***
번쩍!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모험가 지크프리트가 비어만 영지의 중앙 광장에 현신했다.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 중 지크를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중앙 광장에 설치된 워프 게이트는 이계에서 온 모험가(플레이어)들의 편의성을 위해 설치해놓은 것, BNW 속 뉘르부르크인(NPC)들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일일 뿐이었으니까.
“뭐지?”
BNW 접속한 지크는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감각을 의심해야만 했다.
“뭐가 이렇게… 리얼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수없이 많은 외부적 자극들….
오가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 부는 바람에 섞여 든 고소한 빵 굽는 냄새, 따사로운 햇살,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돌바닥의 울퉁불퉁한 질감,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게 분명한 희미한 시궁창 냄새….
달랐다.
확실히 달랐다.
구형 캡슐?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단언컨대, 지크가 나름 잘나가던 시절에 사용하던 프리미엄 캡슐도 지금 느껴지는 이 사실적인 감각의 반도 채 재현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이게… 하이퍼 캡슐의 성능…!”
지크는 오우거의 성능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재벌 3세인 정치호가 왜 그렇게도 오우거에 집착을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르구나… 확실히 달라… 현실인 것 같아… 아니… 이건 현실이야….”
가상 현실 세계를 그 어떤 괴리감 없이 현실처럼 구현해낼 줄이야….
하이퍼 캡슐이란 미사여구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 감각이라면… 더 잘 싸울 수 있겠는데?”
전투적 감각 역시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예리해졌을 게 분명했다.
“가자.”
지크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 달라진 감각이 그의 전투적 피지컬을 얼마나 올려 주었을지를….
***
광장을 나선 지크가 도착한 곳은 역시나 용병 길드였다.
다시 찾은 용병 길드는 한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창구 직원인 제리코의 말마따나 이곳 비어만 영지는 정말이지 코딱지만 한 곳이었다.
오가는 모험가들의 숫자가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뉘르부르크인 용병 역시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용병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라고는 고작 사냥꾼들이 전부라고도 했으니, 파리가 날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오, 자네 왔는가!”
창구 직원 제리코가 지크를 반겼다.
“일을 좀 하고 싶습니다.”
“의욕적이군.”
“강해지고 싶으니까요.”
몸이 잔뜩 달아올라 있는 지크는, 한시라도 빨리 퀘스트를 받아 전투에 나서고만 싶었다.
“좋네. 내 일감을 줌세.”
제리코가 비어만 영지의 영지민들로부터 들어온 민원서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흠. 자네에게 줄 일감이 있기는 한데….”
“……?”
“가능할지 모르겠군. 아니, 안 되겠어.”
제리코가 고개를 저었다.
“뭡니까, 그 일감이라는 게?”
“그게 말일세….”
제리코가 다소 난감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변이 늑대 무리 퇴치라네.”
“변이 늑대요?”
“자네의 재능이 비범하긴 하지만, 아직 변이 늑대들을 상대할 때는 아닌 것 같아서 말야.”
“하겠습니다.”
지크가 냉큼 대답했다.
“그게 진심인가? 괜찮겠어?”
제리코가 놀라 물었다.
“이보게, 지크.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변이 늑대들은 강해. 맹수가 변이한 존재들이니만큼, 결코 만만하게 볼 것들이 아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나. 내 다른 의뢰를….”
“아닙니다.”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하겠습니다.”
“허허… 내 괜히 말을 꺼낸 것 같은데….”
“일단 해보죠. 어차피 전 불사의 존재니 크게 걱정하실 건 없을 텐데요.”
“뭐, 그거야 그렇지만….”
“정확한 의뢰 내용이 뭡니까?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흠. 자네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내 어쩔 수 없지. 남쪽으로 가 보게. 가서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부커티 할아버지를 만나보게. 그분이 자네에게 일을 줄 거야.”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죠.”
“허허, 행동력 보게. 팔팔하니 좋아 보이는군. 배짱도 두둑하고.”
“별말씀을요.”
그렇게 대답한 지크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용병 길드를 나섰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알림창이 떠올랐다.
[목장을 지켜라!]•분류 : 일반 퀘스트
부커티 할아버지의 목장을 습격하는 변이 늑대 무리를 퇴치하라.
•진행률 : 0%
•보상 : 금화 20개
내용은 볼 것도 없이 간단했다.
***
부커티 할아버지의 목장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목장 일꾼들은 저마다 농기구를 움켜쥔 채 보초를 서고 있었고, 양 떼나 소 떼의 눈망울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에 차 있어 보였다.
게다가 푸른 초목 곳곳에 검붉은 핏자국들이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있었기에, 변이 늑대들의 횡포가 극심하다는 걸 짐작게 했다.
“부커티 할아버지를 찾아왔는데요.”
지크가 지나가던 일꾼을 향해 말했다.
“흠, 모험가로군.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일꾼이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크를 흘겨보았다.
“하긴. 이런 코딱지만 한 영지에 강한 모험가가 있을 리 없지.”
“…….”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요즘 같은 흉흉한 시기에 이런 애송이의 손이라도 절실하니….”
순간 지크는 일꾼의 약자 멸시에 뚜껑이 열릴 뻔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역시 보이는 게 중요하다니까….’
자고로 첫 인상은 있어 보이는 게 최고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부커티 어르신께서는 저쪽 언덕 너머에 계시네. 어서 가보게. 피부가 검은 노인이 부커티 어르신이라네.”
지크는 일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목장 주인인 부커티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부커티 할아버지 되십니까?”
지크가 피부가 검은 흑인 노인을 향해 물었다.
그는 다섯 명의 사냥꾼들과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뭐야. 모건 프리먼이랑 완전히 똑같이 생겼잖아?’
황당하게도, 부커티 할아버지는 할리우드의 유명 흑인 배우인 모건 프리먼과 완전히 판박이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 모험가로군. 그래, 내가 부커티라네.”
“변이 늑대들 퇴치를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래? 흠. 고맙네만… 가능하겠나? 변이 늑대들은 매우 사납다네. 아, 자네를 무시하는 건 아니니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 보아하니 그리 경험이 많지 않은 친구 같아서 하는 말이야.”
“걱정 마십시오. 최소한 제 한 몸은 지킬 정도는 되니까요.”
“뭐, 그렇다면 한 손 거들어주면 고맙지.”
부커티는 지크를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냥꾼들은 달랐다.
“뭐야. 저런 애송이가 변이 늑대들을 퇴치하겠다고?”
“쯧. 모험가가 얼마나 없으면 저런 애송이를… 용병 길드도 어지간하군….”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모험가는 좋겠군. 죽지도 않고.”
“불사의 몸이니 만용도 부릴 수 있는 것이겠지.”
“방해나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사냥꾼들이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지크는 그런 사냥꾼들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강해질 텐데, 지금 무시를 좀 당한다고 해서 기분 나쁠 건 없었다.
저 사냥꾼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높은 곳까지 올라가게 될 테니까.
그러고 싶으니까.
“변이 늑대 무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크가 모건 프리먼, 아니 부커티에게 물었다.
“놈들의 소굴은 나도 모른다네. 워낙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바로 그때였다.
– 메, 메에에에-!!
양 떼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느,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
“놈들이 온다!”
사냥꾼들이 소리쳤다.
‘대낮에?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지크는 변이 늑대 무리의 과감함에 놀랐다.
보통 늑대와 같은 맹수들은 야심한 밤 어둠을 틈타 사냥에 나서기 마련이 아니던가?
“저, 저기다!”
부커티가 저 멀리 언덕을 가리켰다.
컹, 컹컹!
그곳엔 거의 10여 마리에 달하는 변이 늑대들이 무섭게 질주해오고 있었다.
“뭐, 알아서 찾아와주니 좋네.”
지크의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꽈악!
그의 손아귀가 무쇠 곤봉을 움켜쥐었다.
저벅, 저벅!
지크가 마주 달려오는 변이 늑대 무리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 이보게!!”
부커티가 그런 지크를 향해 소리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