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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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로 공사… 가로등 설치… 쓰레기 매립지 선정… 으음. 이번 달도 예산이 빠듯하군. 끄응!”
미켈레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틱, 티익!
그런 미켈레의 왼손은 무려 네 개나 되는 주판-계산할 때 쓰는 도구-을 쉴 새 없이 튕기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예산 편성을 위해 숫자 놀음을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구리 동전 한 닢조차 쪼개고 쪼갤 정도로 치밀하게 예산을 편성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주판을 네 개나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켈레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 인재인지를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전하께서 벌어 오실 5만… 5만… 크흠! 4만 골드가 더해지면 얼추 맞을 것 같긴 한데. 그냥 5만 골드 다 받아낼 걸 그랬나.”
만약 지크가 들었으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도 남았을 혼잣말이었다.
“아니지. 전하께서도 엄연히 왕이시니 내탕금이 필요하긴 하시겠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겠군.”
생각 같아선 5만 골드를 모조리 뜯어다가 국가 예산에 편성하고 싶었지만, 미켈레는 지크의 품위 유지비를 위해 참기로 하고 다시금 서류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래. 전하께서 괜한 사고만 안 치신다면 1만 골드가 부족해도 어찌 어찌 메꿀 수 있을….”
그러던 중.
뚜욱!
깃펜이 갑작스레 부러졌다.
“……!”
미켈레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왜일까?
문득 지크와의 대화가 떠오르는 이유는.
[나 교황청 다녀올게.] [거긴 왜 가십니까?] [용병 길드에서 의뢰가 들어왔거든.] [신성 콘스탄틴 제국 교황청과 황당파 간의 내전에 참전하시는 겁니까?] [응.] [다녀오시지요. 대신에….] [으응?] [제발 사고만 치지 마십시오. 특히, 외교적으로 문제가 벌어질 만한 사고는 절대로 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 내가 뭔 사고를 치고 다닌다고 그래. 나 못 믿어?] [예. 못 믿습니다.] […….]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너, 너무해….] [모쪼록 부디 외교적 사고만 치지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나만 믿어! 사고 안 칠 테니까!] [예, 제발 그러시기를 바랍니다.]왜 하필 깃펜이 뜬금없이 부러지던 순간 그 대화가 떠오르는 걸까?
부르르!
미켈레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몸서리쳤다.
“하하. 아, 아니겠지.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거다. 전하께서 또 사고를 치실 리가 없다. 하하. 하하하. 기분 탓이다, 기분 탓.”
미켈레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려 애썼다.
그러나….
“크흠. 크흐음!!!”
아무리 진정하려 노력해 봐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고 불안한 것이 어째 감이 이상했다.
“아니다. 전하를 믿어보자.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설마 전하께서 사고를 치실까.”
미켈레는 지크를 믿어보기로 했다.
***
같은 시각.
의 어느 술집에서는….
“결국 통수 치기로 하신 겁니까?”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랑 어떻게 같은 편을 먹어? 도저히 못 봐 주겠다.”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승구가 지크의 의견에 강하게 동의했다.
교황청이 벌이고 있는 학살극과 그에 동참하는 게이머들의 행태는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눈 뜨고 봐 주기가 힘들었다.
마치 인간의 밑바닥을 본 느낌이랄까?
학살극에 동조하고 있는 게이머들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며 쾌감을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게이머들의 대부분은 NPC들을 그저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죄책감 따위는 1도 없을 테지만.
물론 그건 지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지크는 적으로 만나는 NPC들을 죽일 때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 중 적을 죽이는 것과 아무 이유 없이 학살극을 벌이는 건 명백히 다른 문제였다.
“뀨우! 햄찌도 이 통수 찬성한다!”
“저 역시 전하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햄찌와 그랭구아르도 지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일단은….”
지크가 마나 포션의 뚜껑을 뽕! 하고 딴 뒤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를 쓴 덕분에 현재 마나가 0이라서 보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를 치긴 했으니까, 이 도시에 있는 제네시스 길드 놈들이랑 교황청 놈들 제거하고 빠지자. 그냥 가자니 기분 엿 같잖아.”
지크는 암살에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이런 좁은 도시에서의 게릴라전이라면 충분히 많은 제네시스 길드원들을 제거하는 게 가능했다.
“길드원들한테 공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공지는 니가 써. 니가 부길마니까. 나 교황청 통수 치고 황당파로 넘어간다고 알리고, 웬만하면 교황청 진영에서 플레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자.”
“알겠습니다.”
“나는 우리 길드원들이 여기서 NPC들이나 학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대부분 싫어하지 않을까요? 길드 설립 이유가 제네시스 길드 쳐부수는 건데, 같은 진영에 있는 것도 불쾌해할 사람들 많을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자, 일단 움직여보자.”
“예, 형님. 저는 로그아웃 해서 전체 문자 돌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승구가 로그아웃한 직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건….”
지크가 죽은 여성 NPC의 손에 남편의 유품이라던 목걸이를 꼭 쥐여주었다.
그 목걸이는 딱 봐도 전설 등급의 값비싼 아티펙트 같았지만, 지크는 그것에 손대지 않았다.
“잘 간직하고 가셔요.”
비록 진짜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크는 죽은 NPC의 명복을 빌어주며 술집을 나섰다.
꽈악!
그런 지크의 손아귀는 을 정말이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
에서는 교황의 의지에 따른 정화 작업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 학살극을 주도한 건 누가 뭐래도 채형석과 제네시스 길드원들이었다.
이틀 전.
동부 콘스탄틴 제국의 프레드릭 황제를 만나 가격 협상을 한 채형석은 그 길로 교황청으로 향했다.
그리고 교황의 대리인이자 현 교황청의 실세이면서, 이단심판관인 로물루스 추기경을 만났다.
이단심판관은 이단심문관의 상위 직책으로서, 교단에서 이단자들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업무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보수는 가짜 황제 놈보다 최소 1.5배는 더 쳐드리겠소. 본 교황청은 예전부터 귀하와 귀하가 운영하는 길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감사합니다.] [이 성스러운 성전에 그대와 그대가 이끄는 길드가 합류해 주다니 이 얼마나 큰 은총이오? 이름 없는 신께 찬양을!] [찬양을!]이단심판관 로물루스 추기경과 채형석은 죽이 무척이나 잘 맞았다.
[헌데, 디자이어 경.] [예, 추기경 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말인데… 교황 성하를 대신해 이단자들에게 심판을 내려줄 수가 있겠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가짜 황제에게 협력한 이들은 모두 이단자들이라오. 그런 마귀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모조리 교화시킬 수 있다면야 가장 좋겠지만, 아무래도 인간이란 어리석기 마련이지.] [……?] [본 교황청에서는 개전 초기에 이단자들의 도시 몇 개를 정화할 생각이라오. 그래야 마귀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또 교화되지 않겠소?] [본보기… 말씀이십니까?] [껄껄! 말귀를 아주 잘 알아듣는구려! 그렇소. 본보기를 보여야 마귀들이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겠소? 약간의 정화 작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가 있소.] [그럼 그 정화 작업을 저희가 대신 해드린다면….] [흠흠!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이겠소? 인간이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 대한 신앙뿐일 것이오.] [그 정화 작업, 저희가 하도록 하지요.]채형석은 로물루스 추기경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이 추악한 제안에 응했다.
[마귀들이 남기고 간 재물들은 주님께서 저희 모험가들에게 내려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껄껄!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신 분이라오!] [과연 은혜로우십니다.]NPC들을 학살해주는 대신 그들이 남긴 각종 재물과 아티펙트를 챙길 수 있다니….
‘그깟 22억 일주일 만에 갚아주마.’
안 그래도 돈이 필요했던 채형석으로서는 이게 웬 떡인가 싶은 제안이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 따위 가려본 적 없는 채형석은, 굳이 지크에게 갚아야 할 빚이 없었어도 이 제안에 응했을 테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교황청과 제네시스 길드의 이 추악한 거래로 인해 의 정화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의 어느 거리.
“야! 교황청에서 계집들은 죄다 살려서 데려오래!”
“왜? 데려다가 성노예로 쓸 건가?”
“그럴 거 같진 않던데? 전봇대 같은 걸 세워놓고 그 밑에 장작을 까는 거 보니까….”
“아. 구우려고 그러는 건가? 화형? 마녀사냥같이?”
“그런가 봐.”
교황청으로부터 하달된 명령을 받은 제네시스 길드원들은 여자를 찾아 거리를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와!”
“하, 한 번만 살려주세요! 모험가님! 제, 제발….”
“닥쳐!”
“꺅!”
“아오! 이거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야! 다들 뭐 해! 빨리 이년 끌고 나와!”
제네시스 길드원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아리아 시의 여자들을 사냥하는 한편,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캬! 스트레스 풀린다!”
“옛날에 군인들 보면 민간인 학살 같은 거 하잖아? 이래서 하는 건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오오! 이 집 금고에 금화 개 많음! 거의 돈 1,000만 원은 되겠는데?? 아싸!”
제네시스 길드원들에게 있어서 이번 정화 작업은 스트레스 해소와 용돈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집엔 뭐가 있을까나. 룰루랄라.”
한편, 제네시스 길드원 중 하나는 화형에 쓸 여자 NPC를 찾을 겸 돈 되는 귀중품도 찾을 겸 웬 저택에 들어섰다.
“오. 뭔가 있어 보이는….”
그 순간.
퍼억!
찬란하게 빛나는 철퇴가 그 제네시스 길드원의 머리통을 부숴놓았다.
“다시 닫아.”
“예, 전하.”
제네시스 길드원을 죽인 지크가 슬쩍 눈짓을 하자 그랭구아르가 재빨리 저택의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1분 후.
“야! 너 혼자 터는 거냐! 이 치사한 새끼야!”
“같이 털자!”
제네시스 길드원 둘이 저택 안으로 진입해왔다.
퍼억!
그중 한 명은 지크가.
퍽!
다른 한 명은 거대화한 햄찌가 앞발을 휘둘러 처치했다.
“이 저택 개꿀인데?”
지크가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 지크의 뒤쪽에는 제네시스 길드원들의 시체가 꽤 많이 쌓여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뀨! 그렇다! 이 저택 훌륭한 덫이다!”
저택의 규모가 으리으리해서 뭔가 털 만한 것들이 많아 보였기 때문일까?
제네시스 길드원들은 파리지옥에게 유혹당한 벌레처럼 저택 안으로 끊임없이 진입해오고 있었다.
그때마다 지크는 문 앞에서 대기를 타고 있다가 그들의 뚝배기를 부숴놓으면 되었다.
그렇게 죽인 제네시스 길드원들의 숫자가 벌써 50여 명.
“슬슬 움직이자.”
지크는 이쯤에서 이 매력적인 덫을 손절하기로 했다.
“여기 약빨도 떨어진 것 같고, 곧 내 소식이 알려질 거야. 이제 움직여야 해.”
그때였다.
“모험가님!”
원래 이 저택에 살고 있던 여성 NPC가 지크를 붙잡고 울먹였다.
그 여성 NPC는 이 저택의 유일한 생존자였는데, 때마침 지크 일행의 등장으로 운 좋게 목숨을 구한 케이스였다.
“모험가님! 제발 제 여동생을 구해주셔요!”
“여동생이요? 여동생이 어디 있는데요?”
“교황청의 군대를 환영하는 행사에 나갔다가 소식이 끊겼습니다. 제발 제 여동생을 구해주셔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상… 그 아이는 이제 이 세상에 남은 제 유일한 피붙이입니다. 흑, 흑흑흑….”
지크는 그런 여성 NPC의 부탁을 쉽사리 수락할 수가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교황청의 군대는 남녀노소,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해대고 있었기에 여자 NPC의 여동생의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모험가님! 제발 부탁입니다! 찾아봐 주시기라도 하셔요! 만약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저희 가문의 가보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여성 NPC가 지크에게 다시금 애원했을 때.
띠링!
지크의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