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290
289
강남의 모 한우 전문점.
지글지글!
숯불 위 소고기가 육즙을 흘리며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야.”
천우진이 태성을 향해 물었다.
“너 왜 그래? 애꿎은 고기는 왜 쑤셔대고 난리야?”
천우진이 그렇게 물은 이유는, 소고기라면 환장하던 태성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쿡쿡 찌르며 깨작거리기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한태성. 괜히 밑밥 깔지 마라. 오늘은 우울한 한태성 컨셉이냐? 우울하단 핑계로 밥값 먹튀 할 생각하지 마라.”
천우진이 어림없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오늘도 먹튀 당하면 천우진이 아니라 개우진이다! 개우진!’
두 번 연속 태성에게 밥값을 먹튀 당한 천우진은 오늘은 절대로 속지 않으리라고 굳은 다짐을 하고 있었다.
“컨셉질 안 통한다. 밥 먹자, 태성아.”
“말 시키지 마라.”
그러자 태성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오늘은 먹튀 안 하니까 걱정 말고.”
“구라 치네.”
“장난할 기분 아니다.”
“끝까지 컨셉 잡는 거 보소?”
“아! 좀!”
짜증을 낸 태성이 벨을 눌러 직원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고객님.”
“이 테이블 계산 먼저 해주세요.”
태성이 자신의 신용 카드를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2분 뒤.
“38만 9,000원 결제되셨습니다.”
직원이 태성이 건네주었던 신용 카드와 영수증을 가지고 왔다.
“어? 진짜 니가 사는 거냐?”
“이거 안 보이냐?”
태성이 천우진의 코앞에 영수증을 들이밀었다.
“안 그래도 우울하니까 말 시키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으음?”
“후!”
태성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내자 천우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지? 얘 갑자기 왜 이래?’
천우진은 태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성에게는 딱히 나쁜 일이랄 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일뿐이었다.
최근에는 BNW 최초의 전쟁 콘텐츠인 에서 기여도 1위를 기록하며 떠오르는 신성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돈이야 말할 것도 없이 많이 벌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청담동 100평대 아파트에 살고, 차는 페라리를 끌며, 월수입은 최소 억 단위인 태성에게 뭐 그리 우울한 일이 있을까?
“너 무슨 일 있냐?”
천우진이 태성에게 물었다.
“혹시 어머니라도 아프시냐?”
“건강하시다.”
“아니면 여동생이 학교에서 뭔 사고라도 쳤어?”
“모범생이거든?”
“그럼 나 몰래 어디 불법 도박이나 주식에 투자했다가….”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왜 그리 죽을상을 하고 있어?”
“아. 몰라. 묻지 마라.”
태성이 피곤하다는 듯 안면을 감쌌다.
“야. 승구야.”
“예, 우진 형님.”
“쟤 왜 저러냐?”
“그게….”
그때, 태성이 승구에게 손사래 쳤다.
“야! 말하지 마!”
“예, 형님.”
뭔가 낌새를 챈 천우진이 승구를 닦달했다.
“아! 뭔데! 왜 니들끼리만 비밀 공유하냐!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좀! 나도 같이 알자!”
“됐어!”
“야! 한태성! 너 진짜 그러기냐!”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진 후.
“그게 그러니까….”
결국, 천우진의 닦달을 이기지 못한 태성은 자신이 어째서 우울한지를 실토했다.
***
하루 전.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결혼이라니! 정략결혼이라니!!!”
프로아 왕국의 인장, 즉 옥쇄가 찍힌 협정서를 본 지크는 로그아웃을 멈추고 절규했다.
“저쪽 세상에서 푹~ 쉬다 오시죠. 한 일주일쯤 쉬다 오셔도 됩니다.”
미켈레가 그런 지크에게 냉소를 지었다.
“곧 결혼하실 분이신데 그 정도의 시간쯤이야 필요하겠지요.”
“야… 너 이거… 누구 멋대로….”
“프로아 왕국 국왕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전하 대리인의 멋대로입니다. 잊으셨습니까? 저 전권 위임받았습니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어차피 자업자득이시니 저항은 포기하시죠.”
“자업자득이라고?”
“전하께서 사고를 치셔서 일이 꼬인 거 아닙니까.”
“그, 그건….”
“저는 전하께서 치신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엘론델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거든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후후후.”
그 순간.
‘브륜힐트 님이 수선화 마을에 나타난 이유가 이거였어?!’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지크는 브륜힐트가 왜 뜬금없이 수선화 마을에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고, 곧… 뵈어요오오. 헤에….]신성 콘스탄틴 제국을 떠나올 당시 브륜힐트가 보였던 부끄러움 가득한 모습과 묘한 여운 역시도 기억해냈다.
‘아.’
지크는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느낌에 그만 쓰러질 뻔했다.
명분.
교황청의 뒤통수를 쳤던 게 미켈레로 하여금 에 도장을 찍게 하는 빌미가 될 줄이야!
“저, 저기….”
모든 걸 깨달은 지크가 미켈레를 향해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미켈레 님?”
“아. 왜 이러십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다시는 사고 안 칠게요. 네에?”
“안 됩니다.”
“미켈레 님… 제발….”
“안 바꿔 드립니다.”
“앞으로는 착실하게….”
“바꿀 생각 없습니다.”
“제발….”
“빨리 돌아가시죠.”
지크가 왕의 체면마저 잊은 채 빌었지만, 미켈레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미 협정서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정략결혼은 프로아 왕국과 엘프 왕국 엘론델 간의 정식 외교 문서입니다. 절대로 못 뒤집습니다.”
“아….”
“그러게 도대체 왜 사고를 치셨습니까? 제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끔?”
“…….”
“기왕 이렇게 된 거, 푹 쉬다 오시시지요.”
미켈레가 그렇게 말했을 때.
‘튈까?’
지크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쨍그랑!
당장에라도 창문을 깨고 프로아 왕국에서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어차피 잡히겠지.’
지크는 프로아 왕국과 엘론델의 추적으로부터 자취를 감출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제네시스 길드와 오즈릭 교단이 호시탐탐 프로아 왕국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국왕인 그가 도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미켈레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지크에게 덧붙였다.
“혹시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혹시나 도주하시거나 협정을 파기하신다면….”
“…….”
“엘론델과의 심각한 외교적 분쟁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후후후.”
“외교적 분쟁….”
“무책임하게 나라를 또다시 전쟁의 위기 속으로 밀어 넣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지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엘론델이 지크에게 큰 빚을 지긴 했지만, 일단 협정서에 도장을 찍은 이상 이 정략결혼을 파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륜힐트가 제아무리 엘프 제일의 추녀일지라도 그녀는 엘론델의 공주였다.
만약 협정을 파기하기라도 하면?
‘이건… 절대로 못 물러….’
끝이었다.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의 왕이 엘론델을 우습게 보고,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공주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전하께서는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
“그러니 받아들이시죠. 후후후.”
지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주르륵….
대신에 가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
“…그래서.”
지크의 사연(?)을 들은 천우진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부하로 부리는 NPC한테 통수를 맞고 NPC랑 결혼하게 생겼다고?”
“어.”
태성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모태솔로에 첫 키스도 안 해본 니가?”
“어.”
“결혼을 NPC랑 해?”
“그렇다고!!!”
태성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화끈!
태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와.”
천우진이 혀를 내둘렀다.
“한태성 이거 혼모노네. 혼모노야.”
“…….”
“현실에서는 모태솔로인데 게임 속에서는 엘프 왕국의 공주랑 결혼한다고? 대박. 너 그냥 게임 속에 들어가 살아라.”
“놀리지 마라.”
“이 정도면 거의 게임이 인생이고 현실이 게임인….”
“놀리지 말라고.”
“야. 솔직히 말해 봐.”
“뭘?”
“너 사실 인간의 몸을 지배하는 NPC 아니냐? 왜? 그런 SF 소설들 많잖아. 인간의 몸을 지배한 AI가 현실을 배회하면서 지구 멸망의 음모를 꾸미는… 으악!”
천우진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태성이 된장국을 떠먹던 숟가락을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적당히 해라.”
태성이 천우진에게 경고했다.
“나 지금 나름 심각하거든?”
“으, 으응….”
“휴우.”
태성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자괴감 오진다. 현실에서 여친 한 번 못 만들어본 주제에 게임 속 NPC랑 결혼이라니….”
“그, 그냥 편하게 생각해라. 결혼 시뮬레이션한다고 생각하고. 하하. 하하하.”
“아! 몰라! 몰라!”
태성이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
게이머 한태성이 현실에서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때, 게임 속 프로아 왕국에서는 국왕의 결혼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국왕 전하께서 결혼하신대!”
“진짜? 그럼 왕비 마마는 누가 되는데?”
“엘프 왕국 엘론델의 공주라던데?”
“뭐?! 엘프 왕국? 엘론델? 전설 속 엘프 왕국의 공주가 우리 국왕 전하랑 결혼한다고?”
“그렇다는데?”
프로아 왕국의 백성들은 지크의 결혼 소식에 놀라는 한편 매우 기뻐했다.
“국왕 전하께서 결혼하신다!”
“전하께 드릴 조공을 준비하자!”
“신전에 가서 전하의 원만한 결혼 생활을 기도해야지!”
지크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심은 이미 MAX를 찍었으므로, 프로아 왕국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후후. 잘 진행되고 있군.”
미켈레는 지크의 결혼 소식을 발표한 직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미켈레의 옆에는 신성 콘스탄틴 제국의 행정에 관련된 서류들이 천장에 닿을 만큼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러나 미켈레는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전하! 소신은 분골쇄신의 정신으로 서류를 해치울 테니 전하께서는 몸으로 국가를 위해 이바지하시지요!’
이만하면 피도 눈물도 없이 업무를 떠넘기는 무책임한 상사에 대한 복수는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미켈레였다.
물론 그 복수가 결과적으로 보자면 지크에게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전혀 없는 ‘착한 복수’이기는 했지만.
“그럼 이제… 초대장을 작성해볼까?”
미켈레는 깃펜을 들었다.
***
지크의 결혼에 관한 소식은 미켈레의 초대장을 타고 프로아 왕국과 우호 관계에 있는 모든 국가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초대장이 도착한 곳들 중 하나에는 북부의 강인한 민족인 노르드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으음?”
노르드족의 왕 라이언베르트는 초대장을 펴보고는 놀랐다.
“동생이 결혼을 해? 상대가… 흐음~. 엘프 왕국 엘론델의 공주로군. 그때 봤던 그 여기사인가?”
라이언베르트는 지난 당시 보았던 브륜힐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흐음. 엘프 왕국 엘론델의 공주이자 비행 기사단의 단장이라니. 거, 동생이 여자 하나는 참으로 잘 골랐구먼. 껄껄껄!”
라이언베르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라이언베르트는 부활한 불사왕에게서 노르드족을 구원한 지크를 친동생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에, 이 소식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강인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일부다처제 풍습이 있는 노르드족에게 있어서, 훌륭한 신붓감과의 결혼은 언제나 축하할 일이었다.
그러나….
“자, 잠깐!”
라이언베르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만약 이 소식이 잉그리드의 귀에 들어간다면….”
“들어간다면?”
“악! 깜짝이야!”
라이언베르트는 자신의 집무실 문가에 선 잉그리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빠?”
“으, 으응?”
“그게 뭐죠? 보아하니 프로아 왕국에서 온 것 같은데요?”
잉그리드가 서슬 퍼런 눈을 하고는 라이언베르트에게 물었다.
“이, 이건 말이다. 어… 음, 그러니까. 프로아 왕국에….”
“보여주세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
“좋은 말로 할 때 보여주세요.”
“잉그리드야, 일단 이 아빠의 말을….”
“지. 금. 당. 장. 보. 여. 주. 세. 요.”
“그게 말이다.”
“순순히 보여주시지 않으시겠다면….”
잉그리드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스릉-!
그녀의 검이 칼집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힘으로라도 빼앗겠어요.”
“잉그리드야! 일단 진정하고….”
“야압!!!”
어느새 칼을 빼든 잉그리드가 라이언베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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