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324
323
“도, 도대체 왜? 자네트 님이 치료까지 해주셨는데?”
지크는 오늘 아침보다 더 삐쩍 말라버린 브륜힐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말라가는 병에 걸린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성녀의 초고위급 치료를 받고도 상태가 더 나빠질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게 어떻게 된….”
그때였다.
“생명의 그릇이 깨졌기 때문이니라. 이미 깨진 그릇에 물을 퍼 담아 봤자 무엇 하겠느냐? 결국에는 다시 샐 뿐이니라.”
사부가 불쑥 나타나 지크의 말을 받았다.
“사부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연락을 드려 국사 어르신을 모셨습니다. 왕비마마의 병세가 워낙에 깊어 국사 어르신이 아니면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사부가 프로아 왕국에 와 있는 이유를 미켈레가 지크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꽤 합리적으로 보였다.
왜?
전지전능한 사부라면 브륜힐트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사부님….”
지크가 조심스레 사부에게 조언을 구했다.
“제 안사람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사부님께서는 아십니까?”
“본좌가 그런 것도 모르겠느냐?”
“역시….”
“이 아이가 이렇게 된 이유는 뱃속 아기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서이다.”
사부가 딱 잘라 브륜힐트의 병을 진단해 주었다.
“산모의 영양분은 제한되어 있는데 뱃속 아기의 성장 속도는 무려 세 배나 빠르다.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니겠느냐?”
“아!”
“본능적으로 산모의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구나. 몇 달은 굶은 흡혈귀도 이 정도는 아닐 게다. 물론 의도한 게 아니라 아기로서도 살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겠지만 말이다.”
“사랑의 나무… 때문인 겁니까?”
“꼭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랑의 나무는 충분한 대자연의 에너지를 공급한 것 같구나.”
“그럼 어째서….”
“어쩌면 배 속의 아기가 하이 엘프일지도 모르겠구먼.”
“하이 엘프요?”
지크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면 엘프.
다크 엘프면 다크 엘프.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엘프는 하프 엘프.
그러나 라는 건 처음 들어보았다.
“하이 엘프란 엘프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로만 태어나는 존재니라. 엘프가 100만 명이 태어나면 그중 한 명이 하이 엘프로 태어날까 말까 하지.”
“그런 종족이 있었습니까?”
“그렇다. 엘프는 완벽에 가까운 유전 인자를 지닌 존재이지만, 하이 엘프는 완벽 그 자체니라. 역사상 태어났던 모든 하이 엘프들은… 20살이 되면 마스터를 찍고 100살이 되면 그랜드 마스터를 찍곤 했다.”
“예?!”
“하지만 기이한 일이로구나. 인간과 엘프의 사이에서는 하프 엘프가 나와야 하거늘….”
사부 역시 뱃속 지크와 브륜힐트의 아이가 하이 엘프인 게 의외라는 듯 그 길고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정화 작업 때문인 겐가?”
“정화 작업이요?”
“본좌가 네 녀석을 뜯어고칠 당시에 그 열등하고 쓰레기 같은 유전 인자도 모조리 바꾸어 놓았지.”
“그, 그러셨습니까?!”
“몰랐느냐?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 네 녀석 같은 쓰레기가 불과 100일 만에 그리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본좌의 정화 작업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야!”
멍청한 지크에게 호통을 친 사부가 나름의 추론을 늘어놓았다.
“흐음. 아무래도 네 녀석의 우월한 유전자와 이 아이의 우월한 유전자가 만나 하프 엘프가 아닌 하이 엘프가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그렇군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태어나기는커녕 일주일 내로 산모와 아기 둘 다 굶어 죽겠지.”
“안 됩니다!”
지크가 펄쩍 뛰었다.
‘굶어 죽어? 절대 안 돼! 그런 무능한 남편, 무능한 아빠는 사절이야!’
지크는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직 제대로 먹여 살려보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처자식을 굶겨 죽이기는 싫었다.
그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니겠는가?
“사부님.”
지크가 간절한 표정으로 사부에게 말했다.
“저는 아기가 하프 엘프나 하이 엘프인 건 별로 관심 없습니다. 저는 그냥 제 아내를 살리고 싶습니다. 아기도요. 사부님. 부디 이 못난 제자에게 아내와 아기를 구할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지크가 넙죽 엎드려 절했다.
“껄껄! 거 녀석 참!”
그러자 사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멍청한 녀석아! 네 녀석은 본좌의 아들 같은 녀석이거늘! 그럼 이 아이가 무엇이겠느냐? 본좌의 며느리고 손주 녀석이다. 본좌가 며느리와 손주가 굶어 죽어 가는 꼴을 두고 보겠느냐?”
“사, 사부님!”
“물론 본좌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방법을 알려줄 터이니, 네 녀석이 직접 처자식을 구하도록 해라.”
“물론입니다!”
그러자 사부가 지크에게 브륜힐트와 하이 엘프로 추정되는 뱃속 아기를 구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제자야.”
“예, 사부님.”
“남부의 대정글로 가라.”
그런 사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띠링!
지크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악마의 열매를 찾아서]남부의 대정글에서 악마의 열매라 불리는 을 구해올 것.
•타입 : 타임 어택 퀘스트
•주의 사항 : 일주일 안에 를 브륜힐트에게 먹이지 못하면 그녀와 아이가 모두 굶어 죽을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드래고니안 망고는 대자연의 생명력이 압축되어 있는 과일이지. 그 과일을 섭취한다면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게 출산까지 버틸 수 있을 게다.”
“예! 구해 오겠습니다!”
“늦지 않도록 해라.”
사부가 지크에게 주의를 주었다.
“본좌가 일주일 동안은 깨진 생명의 그릇을 어떻게든 잡아 놓겠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빨리 와야 한다. 알겠느냐?”
“감사합니다! 사부님! 빨리 구해 오겠습니다!”
지크는 사부에게 넙죽 절을 해보인 뒤 마치 죽은 듯 곤히 잠들어 있는 브륜힐트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처자식 굶겨 죽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어느새 지크의 가슴 속에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책임감이 싹튼 뒤였다.
***
“다녀오겠습니다.”
“얼른 다녀오너라.”
“예, 사부님.”
지크는 곧장 를 찾아 길을 나섰다.
“대왕 전하. 부디 조심히 다녀오소서.”
복도를 지나는 지크에게 웬 시종 하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 예~ 고생하십니다~”
지크는 그런 시종에게 짧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빠르게 비행장으로 향했다.
워프 게이트가 아닌 비행장을 통해 길을 떠나는 이유는, 내부에는 공용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크는 이번 여정에 드래곤 로드로부터 선물(?)로 받은 슈퍼 비행선 을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지크는 내심 자신에게 인사를 한 시종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 들어온 사람인가….’
자상한 왕(?)인 지크는 왕국 내 시종과 시녀들의 얼굴과 이름을 거의 전부 외우고 있었다.
사실 워낙 코딱지만 한 나라인지라 왕궁 내 시종과 시녀들의 숫자가 50명도 채 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 지크에게 인사한 시종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에이. 지금 시종 하나 새로 들어온 게 무슨 대수라고. 빨리 가자.’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었으므로, 지크는 시종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는 빠르게 워프 게이트로 나아갔다.
그런 지크가 사라진 직후.
“큭!”
시종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처자식 새끼 살려 보겠답시고 발바닥에 불이 나게 움직이는군. 큭큭큭!”
시종.
정확히는 시종으로 위장한 은 지크를 비웃었다.
칼라일은 과거 레노마 왕국 근위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서, 지난 차원의 균열 사건 당시 지크와 깊은 원한을 맺은 자였다.
사실은 지크를 조국의 원수라고 생각하는 칼라일 쪽에서 일방적으로 증오하는 거였지만 말이다.
[조국의 원수! 내 반드시 네놈에게 원수를 갚아 내 조국의 치욕을 씻어내고야 말겠다!]칼라일은 자신의 조국인 레노마 왕국을 한낱 괴뢰 정부로 만들어 버린 지크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로아 왕국에 숨어든 뒤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지크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지크는 강했고, 또 그의 주변에는 더더욱 강한 괴물들이 득실거렸다.
심지어 왕국의 이란 존재는 드래곤을 맨주먹으로 때려죽이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사실 칼라일은 노동자로 위장해 지크와 브륜힐트의 결혼식장에 폭약을 설치해 놓았었다.
그런데.
[이 버튼만 누른다면… 헉?!]하늘에서 코카트리스 수십 마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전설적인 존재인 치천존과 또 다른 그레이트 위저드가 등장해 사태를 순식간에 정리해 버리자, 칼라일은 의욕을 잃었다.
[맙소사. 이 나라는 결코 약소국이 아니다. 이런 괴물들이 득실대는 나라가 어떻게 약소국이 될 수 있단 말인가?]칼라일은 프로아 왕국의 상상을 초월하는 국력에 경악했고, 또 절망했다.
[정녕 내 복수는… 내 복수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조국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단 말인가!]그러던 중.
왕비인 브륜힐트가 공주를 임신했단 소식이 전해졌고, 그에 따라 왕궁에서 시종과 시녀를 추가로 모집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그 소식을 들은 칼라일은 곧바로 흑마법사를 찾아가 전 재산을 털어 성형 수술을 의뢰해 얼굴을 바꾸었다.
그리고 프로아 왕국의 면접관에게 뒷돈을 찔러준 뒤 시종이 되는 데 성공했다.
[위험은 언제나 근처에서 도사리는 법이지. 큭큭. 기대해도 좋다.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내 반드시 네놈을 몰락시킬 것이다.]칼라일은 외부적인 공격으로는 도저히 답이 없다는 깨닫고, 프로아 왕궁 내부에서 지크에게 복수하기로 했던 것이다.
“두고 보아라.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네놈이 네 아내와 새끼를 살리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곧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테니. 크크큭! 큭큭큭큭!”
칼라일은 복수를 꿈꾸며 즐거워했다.
프로아 왕국의 시종이 되는 데 성공한 이상 이미 복수의 반은 이룬 셈이었다.
왜?
“갓 태어난 새끼를 잃은 짐승의 기분이 어떨까?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큭큭! 큭큭큭!”
칼라일이 노리는 건 지크가 아닌 브륜힐트의 배 속에 있는 아기였으니까.
***
이란 뉘르부르크 대륙 남부에 자리한 거대한 열대 우림으로써, 온갖 야만 부족과 독충과 야수들이 득실댄다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또한, 엄청나게 넓어서 어지간한 게이머들은 발을 붙이려고 하지도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래서일까?
슈퍼 비행선 에 탑승한 지크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드래고니안 망고를 어떻게 구하지? 작은 정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때였다.
“일단 대정글에 도착하시면 야만 부족들에게 수소문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불쑥 지크에게 말을 건넸다.
“아오! 깜짝이야!”
“뀨우우!”
지크와 햄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랭구아르가 여전히 잘생긴 얼굴을 한 채 지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인간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난 거지? 최근에는 안 보였는데?’
지크는 최근 여정에 그랭구아르가 없었다는 걸 깨닫고는 질문을 던졌다.
“뭡니까? 어디 가셨던 거죠? 한동안 안 보이시던데? 죽은 줄 알고 좋아했잖아요.”
“너, 너무하십니다.”
“그냥 죽어 버리지 그러셨습니까.”
“흑….”
지크의 냉랭한 반응에 그랭구아르가 눈물을 훔치며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저 일국의 사관이자 프로 외화벌이꾼으로서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이렇듯 미움을 받을 줄이야….
그러나 지크로서는 자신의 흑역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박제하는 그랭구아르가 언제나 얄미울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전 대륙 투어 다녀왔습니다.”
“전 대륙 투어요? 그런 것도 해요?”
“제, 제가 인기가 좀 많아서… 하하하.”
“…….”
“그래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소신의 소속사는 프로아 왕국입니다. 소신이 열심히 공연할수록 국고에 보탬이 되지요.”
프로아 왕국-사실은 미켈레-은 인기 연예인인 그랭구아르와 수익 배분율 50대 50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있었다.
즉, 그랭구아르가 공연을 많이 할수록 프로아 왕국의 수익도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도 고생하셨네요. 수고하셨어요, 그랭구아르 경. 저는 돈 벌어오는 사람이 좋더라고요.”
“하하하!”
“혹시 드래고니안 망고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
지크가 그랭구아르에게 에 관한 걸 물어보려던 때였다.
– 안내 말씀드립니다. 대정글에 도착했습니다.
– 하강 비행을 시작합니다!
– 스텔스 모드를 해제합니다!
하강 비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던 순간.
콰앙!
뭔가 거대한 충격이 슈퍼 비행선 의 동체를 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