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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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놈… 가만 보면 정말 머리 좋다. 뀨우.’
햄찌는 지크가 로베르토 자작을 상대로 설전 아닌 설전을 벌여 승리를 거머쥐는 걸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지크가 국책 사업이 만백성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를 들고 나온 이상, 로베르토 자작으로서는 협조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왕이 백성들을 위해 큰돈을 투자해 도시를 짓고, 댐을 짓고, 성을 쌓고, 군사 시설을 만들겠다는데 무슨 수로 거절할까.
게다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프로아 왕국이 무시무시한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딱히 반대할 만한 근거도 찾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로베르토 자작이 지크의 대의를 무시하고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끝이었다.
그 어떤 대의명분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크에게 반항한다면, 백성들의 눈에 탐욕에 눈이 먼 기득권층의 추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결말이 좋지 못하리라는 것 역시도 뻔했다.
예로부터 민심(民心)을 잃은 자에게는 파멸뿐이라는 건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던가?
게다가 왕인 지크가 신하-좋든 싫든-인 로베르토 자작에게 도와달라며,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이며 저자세로 나오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지크의 행동은 역사서에서나 등장할 법한 성군(聖君)의 태도였으므로, 로베르토 자작으로서는 어떠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여간 보통내기는 아니다. 뀨우.’
햄찌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
“어, 어찌 이러시옵니까!”
로베르토 자작이 황급히 지크에게 다가가 부축을 해주었다.
“전하께선 군주이시옵니다. 어찌 신하에게 고개를 숙이시옵니까?”
그 순간.
‘됐어.’
지크는 속으로 히죽 웃었지만, 그걸 겉으로 티내지 않고 짐짓 애절한 표정을 지으며 로베르토 자작에게 말했다.
“군주로써 만백성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데, 상대가 누군들 고개를 숙이지 못하겠습니까?”
“저, 전하….”
“로베르토 자작님.”
지크가 로베르토 자작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로베르토 자작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아, 아니! 왜 그러시옵니까?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백성들을 보살필 수 있다면 뭐든 못 하겠습니까?”
“전하….”
로베르토 자작은 지크가 연신 저자세를 유지하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크의 애원은 더욱 간절해졌고, 나중에 가서는 아예 엎드려 절까지 할 기세였다.
그렇게 지크와 로베르토 자작의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전하.”
로베르토 자작이 지크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신 로베르토, 국왕 전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아앗… 로베르토 자작님….”
“전하께서 대의와 명분을 지니셨는데, 한 영지를 다스리는 자로서 어찌 그 간절한 청을 거절하겠사옵니까? 이 로베르토, 늦게나마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나이다.”
바로 그 순간.
띠링!
지크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 축하드립니다!] [알림 : 당신에 대한 의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알림 : 당신은 을 감동시켰습니다!] [알림 : 당신에 대한 의 호감도 등급은 입니다!]지크는 설득 끝에 기어코 로베르토 자작을 교화시키기고, 충성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로베르토 자작님. 일어나시지요.”
“전하….”
“이렇게 제 마음을 알아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아니옵니다.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전하의 마음에 한때나마 못된 마음을 먹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옵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할 겁니다. 자책하지 마시고, 오늘은 저와 함께 식사라도 하시죠.”
“예, 전하. 소신이 저희 영지의 특산물로 한 상 잘 차려서 올리겠사옵니다.”
그렇게 지크는 로베르토 자작에게 진수성찬을 접대 받으며 훈훈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
지크는 로베르토 자작과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곳 에스파드리유 지방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예컨대, 최근에 에스파드리유 지방에 상식을 벗어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물어본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흠. 그러한 기현상은 없었사옵니다.”
“그렇군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크는 은근슬쩍 로베르토 자작에게 에스파드리유 지방의 지배층에 대한 정보들 역시 수집했다.
“영주들에 대한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으음.”
“저는 이곳 에스파드리유 지방의 영주들 모두를 다 만나볼 생각입니다. 만나서, 설득할 겁니다. 로베르토 자작님을 설득했던 것처럼, 필요하다면 엎드려 절이라도 할 겁니다.”
“전하….”
로베르토 자작이 감동했다는 듯 지크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선 비록 약소국의 군주이시나, 정말이지 참된 성군의 자질이 엿보이시옵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단지 제 일을 할 뿐이죠.”
“하오나 전하.”
로베르토 자작이 다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몇몇 영주들은 전하께서 홀로 만나신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인물도 있사옵니다. 옥체를 보중하시기 위해서는 각별히 주의하셔야 하옵니다.”
“그렇겠죠.”
“모두를 만나 보신다는 건 다소 위험이….”
“아뇨.”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제게 적대적이든, 단순한 반발심이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공평하게 만나 이야기를 나눠볼 겁니다.”
“허허….”
로베르토 자작은 지크의 대답에 완전히 할 말을 잃고 그저 감탄 어린 눈빛만을 보낼 뿐이었다.
“정 그러시다면, 소신이 이곳 에스파드리유 지방의 영주들과 주요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겠사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큰 영지의 영주이자 작위가 가장 높은 군터 백작부터 설명드리겠사옵니다.”
로베르토의 입에서 에스파드리유 지방의 지배층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렵지 않겠는데?’
지크는 로베르토 에스파드리유 지방을 장악하는 게 생각했던 것만큼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일단 에스파드리유 지방의 지배층은 제국의 중앙 정치에 진출하지 못한, 변방의 시골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시골 귀족들은 대체로 지크에게 그리 큰 악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왜?
지크를 모시나 슈트카르트 황제를 모시나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마우레키온 제국의 통치를 받을 때에는 출셋길이 막혀 있다시피 해서, 중앙 정치로의 진출을 아예 체념해버린 귀족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어쩌면 프로아 왕국을 기회의 땅 삼아 꿈을 펼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잘만 구슬린다면 충분히 프로아 왕국의 귀족으로 만드는 게 가능해 보였다.
로베르토 자작처럼 말이다.
반대로, 군터 백작처럼 가문이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반쯤 유배를 오다시피 해서 에스파드리유 지방에 뿌리를 내리게 된 귀족들의 경우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뼛속까지 마우레키온 제국의 귀족들이었으며, 그에 따른 자부심과 오만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호시탐탐 중앙 정치로의 복귀와 진출을 노리고 있던 터라, 에스파드리유 지방의 프로아 왕국 편입에 대해 반발하다 못해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반은 설득하면 되고. 나머지 반이 문제라는 거네.’
지크는 로베르토 자작의 말을 듣고 어떻게 이번 사건을 풀어 가야 할지 머릿속으로 대강 큰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럼 그레이 가문은요?”
“그레이 가문은….”
로베르토 자작이 대답했다.
“400년 전쯤 마우레키온 제국이 아직 왕국이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쭉 이곳 에스파드리유 지방을 터전으로 삼았던 유서 깊은 가문이옵니다. 일종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겠사옵니다.”
“그럼 영향력도 크고, 세력도 크겠네요?”
“아니옵니다.”
“예?”
“그레이 가문은 예로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아왔을 뿐, 특별히 목소리를 낸다거나 한 적이 없었사옵니다.”
“흠….”
“최근 영주인 에리얼 백작 역시 마법 수련을 위한 폐관 수련에 든 터라 이번 사건에 대해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고 있지 않기도 하옵니다.”
“그렇군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그나저나 이곳 마몽 영지에….”
지크는 그 후로도 로베르토 자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
다음 날.
지크는 아침 일찍 를 나섰다.
“부디 옥체 보중하시기를 바라겠사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뵐게요.”
지크는 로베르토 자작과 훈훈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른 영주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허허.”
로베르토 자작은 멀어져 가는 지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애송이 모험가라기에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줄 알았건만, 저분이 바로 진정한 제왕의 자질을 가진 분이로구나.”
로베르토 자작은 이미 지크의 현란한 사탕발림과 대의명분에 홀딱 넘어가서, 사실상 제정신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콩깍지가 씌어도 제대로 씌었다고나 할까?
만약 지크가 어전 회의 중 십중팔구는 졸기 일쑤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로베르토 자작이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로베르토 자작은 군터 백작에게 통신이 걸려왔단 보고를 듣고 통신실로 향했다.
– 그래, 그 애송이가 거길 방문했다던데?
“아, 아시는군요.”
– 내가 모르는 게 있겠소? 껄껄껄! 그나저나 어떻게 되었소이까? 그 애송이는 잘 만나 보시었소?
“아, 예.”
– 어땠소이까?
“협조해 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더군요.”
– 그래서 뭐라고 했소?
“생각해 보겠다고만 말했습니다.”
– 껄껄! 그랬더니 뭐라고 하더이까?
군터 백작은 를 결국엔 거절한단 뜻으로 이해하고는 웃으며 물었다.
보통은 그런 의미로 통하는 말이기도 했고.
“고맙다고 하더니 대접해준 만찬을 잘 먹고 돌아갔습니다.”
– 어디로 간다고 했소?
“다른 영주를 만나 보겠다고만 하고 떠나서 잘은 모릅니다.”
– 흠. 아쉽구려.
“예?”
– 아니올시다.
군터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통신을 마무리했다.
– 일단 알겠소이다. 혹시나 그 애송이에게 협조할 생각은 아니시오?
“당연히 아닙니다.”
로베르토 자작은 군터 백작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베르토 자작은 이미 지크를 깊이 흠모하게 되어 충성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런 로베르토 자작이 지크를 혐오하다 못해 죽여 버리고 싶어 하는 군터 백작에게 사실을 얘기할 리 없었다.
– 좋소. 그럼, 볼일 보시오.
“살펴 들어가시지요.”
통신을 마친 후.
“흠.”
군터 백작은 로베르토 자작이 지크의 행방을 모른단 사실에 살짝 실망했지만, 이내 곧 미소를 지었다.
“천한 모험가 출신의 애송이가 겁도 없이 이곳 에스파드리유를 나 홀로 돌아다닌다? 크흐흐. 늑대 밥이 되기에 딱 좋은 조건이로군.”
군터 백작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기사 부르노에게 속삭였다.
“용병 길드에 그 애송이를 죽이란 의뢰를 넣도록.”
“하지만 영주님. 만약 왕국에서 그 책임을 묻는다면….”
“이런 멍청한!”
군터 백작이 언성을 높였다.
“명색이 왕이란 놈이 수행 기사 하나 없이 웬 쥐새끼 하나만 달고 돌아다니는데! 그 책임을 누구한테 물어? 어? 영지 한복판에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아, 예!”
“이건 기밀 중의 기밀이니, 돈이 좀 들더라도 비밀이 확실하게 유지되는 자에게 의뢰를 넣을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부르노는 군터 백작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