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630
629
‘이 새끼… 진짜다.’
지크는 여태 상대했던 적들 중 가히 최악이라 할 만한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이건 단순히 무력(武力)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에리얼 백작은 지금 과 을 등에 업고 있었다.
강력한 적?
악당이라면, 뒤돌아볼 것 없이 싸워서 때려 부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단순한 악당이 아닌 대의명분을 내세워 민심을 등에 업은 적이라면, 섣불리 손대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왜?
게임 BNW는 나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니까.
BNW의 NPC들은 인간과 똑같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들.
그런 NPC들을 등지게 되면, 제아무리 강자라 할지라도 결국엔 파멸하기 마련이었다.
사부처럼 세계와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의 무력, 그러니까 무적의 힘을 손에 넣지 않는 이상에야 민심과 명분을 외면하면서 게임을 할 순 없는 것이다.
“전하.”
그때, 프로아 왕국군의 장교가 지크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병사, 본국의 군복을 입고 있지만 본국의 병사가 아닙니다. 제가 지휘하는 병사 중 저런 병사는 없습니다.”
“압니다.”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얼 백작이 미리 심어놓은 연기자일 뿐, 본국의 병사일 리가 없죠.”
프로아 왕국의 장병들은 투철한 충성심과 강도 높은 교육 훈련으로 무장한 일당백의 전사.
그런 프로아 왕국군이 지크나 장교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단언컨대 0퍼센트에 수렴했다.
그러나 군중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사, 살려내! 살려내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기껏 부활한 사람을 다시 죽이는 게 인간이 할 짓인가!”
“저주… 저주할 것이다! 평생을 저주할 것이야!”
유가족들이 되살아난 장병을 죽인 프로아 왕국의 병사-사실 아니었지만-를 향해 피 맺힌 절규를 토해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거 X발! 왕이면 다냐!”
“니가 뭔데 살리지 마라야! 니가 뭔 신이라도 돼? 되살아난 사람을 왜 죽여!”
“이런 개 같은! 왕이고 나발이고 X까라고 해! 죽여 놓고! 되살아난다니까 되살아나지 말라는 게 말이 돼? 이런 X같은!”
“무슨 권리로 신의 은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지?”
“니가 되살려내던가! 니가 되살려내 보시던가!”
성난 군중들, 정확히는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가족들이 지크를 향해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그런 군중들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흉흉해서, 당장에라도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몇몇 이들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를 주워들고 지크 일행을 향해 던질 듯 말 듯 기회를 엿보기까지 했다.
“…야.”
천우진이 곁에 있던 지크를 향해 말했다.
“이거 왠지 우리가 X된 거 같지 않냐?”
“보면 몰라?”
지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우리가 X된 거 맞아.”
“그, 그럼 어떡하냐?”
“방법은 두 가지쯤 되겠네.”
“뭔데?”
“첫 번째는….”
지크가 살짝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학살.”
“하, 학살?”
“민심이고 나발이고 저 가증스러운 새끼랑 같이 싹 다 쓸어버리는 거지. 우리가 쟤를 공격하면 백성들이 가만히 있을까? 민간인 피해는 못 막아. 저 새끼가 민간인들을 방패로 내세울 게 뻔하고. 그러니까 여기서 한바탕하면, 다 죽일 각오쯤은 해야겠지.”
을 입에 담은 지크의 표정은 무서웠다.
“가, 가능하겠냐?”
“못 할 건 또 뭐야.”
지크가 천우진의 물음에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뭔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난 철저히 내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이머지, 무슨 전설 속 영웅이나 지혜로운 성군 같은 게 아냐.”
“그, 그건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해야지.”
“으음.”
천우진은 지크가 독기를 내비치자 섬뜩해져서,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지크가 평소엔 털털하고, 뺀질거리고, 가끔은 멍청해 보였지만 이럴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냉혹하다는 게 새삼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천우진이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전하.”
에리얼 백작이 지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잔뜩 성이 나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던 군중들이 좌우로 갈라져 에리얼 백작을 향해 길을 터주었다.
마치 홍해의 기적처럼 말이다.
***
“전하.”
에리얼 백작이 지크로부터 약 5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말해.”
“신 에리얼 데 그레이는 전하의 신하이옵니다.”
“그래서.”
“소신을 적대하지 마소서.”
“적대하지 말라?”
“소신이 살리고자 하는 게 누구이옵니까?”
지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 새끼… 프로다.’
지크는 에리얼 백작이 이른바 를 시전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 질문에 대답하기가 싫었다.
그런 지크의 속을 꿰뚫어 보았던 것일까?
“전하.”
에리얼 백작이 그 답을 말하며 지크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소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전하의 백성들을 되살리려는 것이옵니다.”
“…….”
“부디 소신이 가진 이 권능으로 전하의 백성들을 되살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군중들이 일제히 에리얼 백작을 향해 엎드려 절하기 시작했다.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어찌 폭군의 박해에 고개를 조아리시옵니까?”
“저희들이 보호해드릴 것이옵니다!”
“신이시여! 신은 저희가 곧 신의 친위대이옵니다!”
이쯤 되면 민심은 이미 에리얼 백작에게 완전히 돌아갔다고 봐도 좋았다.
하기야, 유가족들의 입장에선 죽은 아버지, 아들, 오빠를 되살려내 주었으니 에리얼 백작이야말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일 터였다.
“큭….”
지크는 그 광경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야, 태성아. 이거 어쩌냐.”
천우진이 지크의 옆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어쩌긴.”
지크가 천우진의 물음에 딱 잘라 말했다.
“학살은 좀 그렇고.”
“으응”
“지금 저 새끼 대가리부터 깨야지!”
그와 동시에 지크가 번개처럼 에리얼 백작을 향해 튀어나갔다.
파직, 파지직!
그런 지크의 몸 주변으로는 엄청나게 강렬한 스파크와 충격파가 뿜어져 나와서, 영지민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정도였다.
즉, 지크는 스킬의 제3단계를 켜면서 에리얼 백작을 향해 덤벼든 것이다.
왜?
내버려 두어선 안 될 놈이었으니까.
사실 지크가 천우진에게 말했던 이란 일단 물러나서 대책을 수립하는 거였다.
하지만 지크는 민심이 동요하는 걸 보고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저 새끼… 내버려두면 나중에 더 골치 아프게 클 거다. 따르는 백성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겠지. 그때 조지려면 늦어. 지금이 기회야.’
지크는 그런 생각으로 일단 에리얼 백작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려 했던 것이다.
성난 민심의 후폭풍이야 나중에 어떻게든 수습하기로 하고, 일단은 악의 원흉(?)부터 제거하려는 것이다.
‘일단 가두고.’
지크는 일단 에리얼 백작이 도망 못 치게 만들 겸 백성들의 피해도 막을 겸 스킬을 냅다 때려 박았다.
콰아앙!
가 땅을 내리찍고.
쩌어억!
뒤이어 가 솟아올라 지크와 에리얼 백작을 집어삼켰다.
그건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에리얼 백작은 마법사.
그런 마법사를 좁은 안에 가둔다는 건 근접 폭딜러인 지크에게는 너무나도 유리한 환경에서 싸운다는 걸 의미했다.
게다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는 지크와 에리얼 백작이 어떤 싸움을 벌이든 백성들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가지 않게끔 막아줄 터였다.
즉, 지크는 현재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빠르게 실행한 셈이었다.
그런데.
“……?”
지크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기습적으로 스킬을 전개했건만 안에 아무도 없을 줄이야?
“딱 그 거리를 유지했던 이유가 있었나….”
지크는 에리얼 백작이 처음부터 거리를 쟀다고 생각하며 허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편, 천우진은 소속의 강화인간들과 함께 에리얼 백작과 대치하고 있었다.
“제법이야. 한태성을 다 속이고? 큭!”
그렇게 말하는 천우진은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자신의 힘을 드러낼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천우진은 로서 영웅들에게 세계 평화를 위한 임무를 부여하는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약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했다.
천우진의 역시 지크의 와 마찬가지로 를 부여 받은 가 아니던가?
우웅!
천우진은 그간 퀘스트를 주면서 모아왔던 힘을 한꺼번에 방출했다.
“직접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 순간.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이고.
“으응?”
천우진은 자신의 눈앞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휘이이-
수만 명의 군중이 모여 있던 의 연병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프로아 왕국군의 군복을 입은 자가 죽였던 자의 핏자국과 지크가 들어 있을 게 분명한 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을 뿐….
“메에에에-!”
주인 잃은 염소 한 마리가 지나가며 메에- 하고 울며 천우진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그, 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워프했다고? 사전에 준비도 없이?”
천우진은 경악했다.
이런 대규모 워프를 눈 깜짝할 사이에 해냈다?
그게 가능할까?
그랜드 마스터급의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와르르!
그때 가 무너지며 지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뭐야.”
지크가 휑한 연병장을 돌아보며 황당하다는 듯 천우진에게 물었다.
“어… 그게….”
천우진은 지크의 물음에 딱히 대답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놓쳤다?”
“어.”
“망할!”
지크가 으르렁거렸다.
닭 쫓던 개.
그게 지금 지크의 심정이었다.
***
에리얼 백작과 군중들이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였다.
“오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기적을 행하셨나이까!”
군중들은 수만 명의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워프시킨 에리얼 백작의 신적인 능력을 경배했다.
그러던 중.
“신이시여! 폭군이 쫓아올 것이옵니다! 어찌 하오리까!”
누군가 에리얼 백작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리얼 백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신.”
에리얼 백작이 비로소 스스로를 이라 칭하며 말했다.
“신의 능력은 전능한 것이니, 폭군은 감히 신을 위협하지 못하리라.”
에리얼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성벽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드륵, 드르륵!
에리얼 백작의 손짓 한 번에 성벽의 높이가 쑥쑥 자라나 무려 20미터나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높아진 성벽 위로 제국의 최신형 대공포가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기적.
이쯤 되면 돌을 빵으로 바꾸고, 흙탕물을 포도주로도 바꾸고도 남을 기세였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신이시여!”
군중들은 에리얼 백작이 행한 기적을 보고 넙죽 엎드려 그저 신을 부르짖었다.
“나의 백성들아.”
에리얼 백작이 그런 군중들을 향해 말했다.
“나를 보아라. 너희 곁에 있는 내가 곧 신이니라. 신의 얼굴을 보아라.”
“오오! 신이시여!”
“너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신의 은총이 너희를 되살릴 것이니라. 신인 내가 너희들의 왕이 될 것이며, 너희는 신인 내가 다스리는 국가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게 에리얼 백작은 기어코 자신이 다스리던 영지인 에서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하나의 왕국을 건설했다.
신이 다스리는 성국(聖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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