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872
871
‘어차피 진 거 레벨이랑 아이템이라도 지키는 거다.’
알렉세이는 그런 생각으로 뛰고, 뛰고, 또 뛰었다.
야속하게도, 옵저버는 그런 알렉세이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추어 주었다.
– 아! 도망갑니다!
– 자기 목숨만이라도 건지겠다는 겁니까?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도망치네요!
–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프로게이머가 투지를 잃은 모습을 보여주네요!
해설자들은 그런 알렉세이를 강하게 질타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알렉세이를 응원하던 블루팀 팬들조차 야유를 퍼붓고, 먹던 음료를 던지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푸하하!”
“쥐새끼 잡아라!”
반대로 레드팀을 응원하던 팬들은 알렉세이를 실컷 조롱하며 아주 즐거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다닥!
알렉세이는 어떻게든 전장에서 도망치기 위해 블루팀 진영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워프 게이트를 향해 뛰었다.
그러나….
촤라락!
하늘에서 빛의 검(劍)들이 떨어져 내려 알렉세이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푹!
오러로 이루어진 수천 개의 검들이 땅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
알렉세이는 자신이 오러 블레이드 검으로 이루어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단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와아아아아아아!”
“미, 미쳤다!”
“뭐야! 저 스킬은!”
관객들은 오러 블레이드 검들이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감탄하기엔 아직 일렀다.
우웅!
마치 쇠창살처럼 내리꽂혀 알렉세이를 가두었던 검들이 일제히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셋, 둘, 하나.
퍼엉!
빛의 검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켜 알렉세이를 집어삼켰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관객들은 지크가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 스킬을 보고 거센 함성을 내질렀다.
파괴력도 파괴력이었지만, 스킬 자체가 너무나도 멋있었기 때문이다.
“지크프리트.”
샤키로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마치 아버지나 지을 법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구나. 너를 가르친 보람이 있어.”
샤키로는 지크가 를 훌륭하게 응용하여 새로운 형태의 스킬을 탄생시키자 매우 뿌듯해했다.
오러 블레이드 검으로 적을 가둔 후 폭발시켜 데미지를 준다?
샤키로는 가르쳐준 적 없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지크 혼자서 그런 기술을 만들어냈으니, 가르쳐준 입장에서는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청출어람청어람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폭발이 멎어든 후.
“크, 크윽…!”
알렉세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알렉세이는 그 대폭발에서 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죽지 않은 것뿐이지, 멀쩡하단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알렉세이]•생명력 : □□□□□□□□□□
현재 알렉세이의 생명력은 딱 1로써,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상황이었다.
‘딱밤은 전에 써먹었고. 차라리 침을 뱉을… 아, 맞다. 그런 모습은 보여주면 곤란해.’
지크는 그런 알렉세이에게 침을 뱉어 죽이려다가, 이 자리가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송출되고 있다는 걸 떠올리고 그만두었다.
그렇다면?
처억!
지크는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알렉세이에게 를 겨누었다.
비겁하게 도망쳤던 적이지만, 모욕을 주는 대신 나름 예우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한태성.”
알렉세이는 그런 지크를 보고 으르렁거렸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끝이다.”
지크는 그 말과 동시에 알렉세이를 향해 도(刀) 형태의 를 휘둘렀다.
털썩!
뒤이어 알렉세이가 쓰러지고, 그와 동시에 레드팀 게이머들이 우르르! 몰려와 블루팀 진영을 점령해 버렸다.
– 지지~
– 지지이이~
그렇게 방송 경기는 지크가 이끄는 레드팀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
경기는 끝났지만, 게이머 한태성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태성은 경기에서 승리하고, 캡슐에서 나와 열정적인 환호를 보내준 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팬들은 그런 태성을 향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보답해 주었다.
찌릿!
태성은 무려 15만 명이 쏟아내는 함성에 전율했다.
‘이 맛에 프로게이머 하는 건가?’
태성은 어째서 게이머들이 프로가 되어 관객들 앞에 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한편,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은 비단 태성뿐만이 아니었다.
“크흑!”
“흑흑… 흑흑흑….”
“흐으윽!”
“크윽!”
“읍! 읍읍!”
레전드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해대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레전드들로서는 두 번 다시 이렇게 큰 무대에 설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의 시대는 이미 가버렸고, 왕년의 영광은 아득한 추억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오늘.
레전드들은 꿈에도 그리던 큰 무대에 다시 서서 승리의 영광을 안았다.
비록 예전처럼 자신들이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전설의 귀환이라 할 만했기 때문이다.
“한태성 선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 예.”
태성이 입을 열었다.
“오늘 경기장을 찾아주신 팬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한국에서 응원해주신 팬 분들께도 감사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요. 저를 응원해주신 러시아의 팬 여러분들, 저는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태성은 수상 소감을 밝힌 후 동료들과 함께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등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반대로, 알렉세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인터뷰마저도 거절한 채 호다닥 무대를 떠났다.
“우우우우우우우우!”
그런 알렉세이의 등 뒤로 관객들의 야유, 욕설, 비난 등이 쏟아졌다.
‘어차피 죽을 거, 그냥 깔끔하게 죽지. 쯧쯧.’
태성은 불명예를 안게 된 알렉세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끝마치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대기실로 향하던 중.
태성은 게임 BNW의 개발사이자 유통사인 의 직원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단 얘기를 들었다.
“예? 벌집 직원들이요?”
“예, 도련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냐고 합니다.”
“그야, 안 될 거 없죠?”
태성은 흔쾌히 측의 요청을 수락하면서도 굉장히 의아해했다.
은 지난 2년 동안 철저하게 침묵해 왔다.
태성이 히든 클래스를 얻었을 때 하이퍼 캡슐 를 한 대 선물했을 뿐, 그 후로는 어떠한 연락이나 액션도 없었던 것이다.
‘뭐지? 갑자기?’
태성은 의아해하면서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대기실로 향했다.
***
태성을 만나기 위해 온 직원은 예전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차혜미 씨였다.
태성을 데리고 매장에 가서 캡슐을 사주었던 바로 그 직원 말이다.
“어? 차혜미 씨?”
태성은 2년 만에 만났지만, 차혜미 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오랜만이에요, 한태성 선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차혜미 씨가 밝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영광이라뇨.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태성은 차혜미 씨가 내민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근데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아, 사업 제안 때문입니다. 한태성 선수.”
“예? 사업이요?”
“네.”
“어떤 사업이죠?”
태성은 글로벌 대기업인 이 자신에게 무슨 사업을 제안한다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기로 했다.
“NPC들을 캐릭터화하는 사업이에요.”
“예?”
“일단 제안서를 가져오긴 했는데, 읽어보세요.”
차혜미가 태성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잠시만요.”
태성은 그 서류를 잠깐 동안 검토해보았다.
사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사업은 게임 속에 등장하는 NPC들을 캐릭터화해서 다양한 굿즈를 만든다거나, 뉘르부르크 대륙을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한다거나 하는 거였다.
“이걸 왜 저랑 하죠?”
태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작권은 벌집이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저작권은 저희가 가지고 있지만, NPC들의 초상권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차혜미가 대답했다.
“예?!”
태성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집에 NPC들의 초상권이 없으면 누구한테 있는데요?”
“NPC들에게 있습니다.”
“뭐, 뭐라고요?!”
“저희 벌집은 NPC들의 초상권을 NPC들이 가지고 있게끔 법적 절차를 밟아놓은 상태에요, 한태성 선수.”
“……?”
“그러니까… NPC들의 허락 없이는 저희조차 어떠한 사업도 할 수 없어요.”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하신 거죠? 회사 스스로 발목 잡은 격밖에 더 되나요?”
“본사는….”
차혜미 씨가 대답했다.
“NPC들을 데이터 덩어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
“이에 불만을 가진 주주들도 많았지만요.”
“크으.”
태성은 의 철학에 그저 혀를 내둘렀다.
기업이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
그런데 스스로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경영 철학을 지킨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수없이 많은 주주로 이루어진 글로벌 대기업이라면 더더욱.
“제안서를 보시면….”
차혜미 씨가 말을 이었다.
“법적으로 NPC들의 초상권은 해당 NPC의 동의를 얻은 게이머에게 귀속됩니다.”
“아?”
“그러니까 태성 선수는… 예를 들면….”
차혜미 씨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랭구아르의 동의를 얻으면, 그의 초상권을 가질 수 있게 되시는 거죠.”
“예?”
순간 태성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랭구아르요?”
“네, 태성 선수.”
“그 인간을 왜요?”
“그랭구아르는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니까요.”
“……?”
“아시잖아요? 전 세계를 샅샅이 뒤져도 그랭구아르만한 미남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걸.”
차혜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랭구아르의 잘생김이란 BNW의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최고의 예술 작품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예술적인 재능 역시도 현실의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으니까.
“태성 선수.”
“네?”
“그랭구아르를 이용해 음반을 제작하고, 단편영화를 만들고, 화보집을 찍는다면 어떨까요?”
“그야….”
태성이 대답했다.
“엄청 잘 팔리겠죠?”
“바로 그거에요.”
차혜미 씨가 웃었다.
“제작 유통은 저희 회사가 담당하고, 태성 씨는 앉아서 초상권에 따른 로열티만 챙기시면 돼요.”
“헉?!”
“그랭구아르의 동의만 얻는다면, 순익의 50퍼센트는 태성 씨의 것이 되겠죠.”
“하겠습니다.”
태성은 냉큼 그 제안을 수락했다.
물론 정식으로 계약해서 일을 진행하기 전까지 변호사들 간의 치열한 설전, 두뇌 대결, 기싸움이 있을 테지만 말이다.
“좋아요, 태성 선수. 한번 일해 봐요, 우리.”
“저야 영광이죠.”
그렇게 태성은 과 파트너십을 맺고 NPC들을 이용한 캐릭터 사업도 시작하게 되었다.
***
다음 날.
방송 경기를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태성은 하루 정도 휴식을 취했다.
한편, 프로아 왕국으로 보내진 카곤 공작은 자신의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네놈이 본좌의 새로운 종놈이냐?”
“예?”
카곤 공작은 웬 노인이 자신을 종놈이라고 칭하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곧 얼굴을 굳혔다.
‘감히 날 한낱 늙은이의 종놈으로 만들다니! 이런 빌어먹을!’
그런 속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일까?
카곤 공작의 표정은 매우 좋지 못했다.
“귀 먹었느냐?”
사부가 카곤 공작에게 다시 물었다.
“네놈이 본좌의 새로운 종놈이냐 물었을 텐데?”
“나는 종놈 같은 게 아니오.”
카곤 공작이 성난 말투로 대꾸했다.
“난 내 조국의 장병들을 대신해 인질로 잡혀온 무인이지, 노예가 아니란 말이오.”
“뭬야?”
“이보시오, 노인장.”
카곤 공작이 타이르듯 사부에게 말했다.
“내 비록 인질로 잡힌 신세에 불과하나, 노인장께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오. 그러니 큰일 치르기 전에 그쯤 하시오. 노인의 신분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내 한 번 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으시다면….”
그 순간.
‘허억?!’
카곤 공작은 불현듯 아랫도리가 따스해지면서 축축하게 젖어가는 걸 느끼고 당황했다.
후들후들!
심지어, 두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까지 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카곤 공작이 그 생각을 할 무렵.
슥, 스윽!
사부가 말없이 양 소매를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