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883
882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니까 죽음의 청기사가 등장한 거야.”
“거기까진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싸우려고 했지. 근데 싸움이 아예 안 되더라고.”
천우진이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아예 피통 자체가 없어.”
“뭐?!”
태성이 천우진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피통이 없다고?”
모든 몬스터들은 피통, 그러니까 생명력 게이지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다못해 대천사장 루시퍼조차 생명력 게이지가 있었다.
그런데 의 경우엔 아닌 모양이었다.
“피통도 없고. 군중 제어 기술도 안 걸려. 방어력이나 항마력도 없어. 때리면 때려지긴 하는데, 넉백도 안 돼. 당연히 쓰러지지도 않고.”
“헐?”
“그리고 더 웃긴 건.”
천우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죽음의 오라라고. 청기사를 중심으로 뿜어진 검은 오라가 있거든? 거기 닿으면 죽어.”
“엥?”
“그냥 닿으면 죽는다니까?”
“그게 말이 되냐?”
“왜 안 돼? 우리 파티원들 중에서 오라에 닿아서 즉사한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슬쩍 스쳐도 그냥 죽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꽥! 하고 죽어 버리더라고.”
“미친….”
“그리고 죽으면 영혼 같은 게 떨어지는데, 낫 같은 걸로 그 영혼을 수확하더라? 무슨 농부인 줄 알았잖아.”
천우진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개사기네.”
태성도 천우진의 이야기를 듣고 가 얼마나 상대하기 힘든 괴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쯤 되면 아예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냐?”
태성이 물었다.
“그래도 살아남긴 했잖아?”
“우리 파티원들 중에.”
천우진이 대답했다.
“클래스가 실버문이라고. 암살자 계열 레전더리 클래스가 하나 있었거든?”
“응.”
“미지의 안개란 스킬이 있어. 자신을 포함한 파티원들을 은신시켜 줘. 완벽하게.”
“아?”
“그 스킬은 통하더라고.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우릴 아예 발견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던데? 난 무슨 공포 영화인 줄 알았다. 바로 옆을 슥 하고 스치는데, 어우야. 심장 떨려서.”
“으윽.”
“아무튼 우리가 계속 숨어 있으니까 한참 동안 찾더니, 사라져 버리더라고.”
“사라져?”
“응.”
천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릴 다 죽여야 강제로 차원의 대균열을 나갈 수 있는 것 같던데? 못 찾으니까 포기하고 그냥 돌아간 거고.”
“왜 포기했을까? 기다리면 됐을 텐데.”
태성이 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마나 떨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지 않나?”
“여유.”
천우진이 태성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사라질 때 그런 말을 남기더라고. 죽음은 늘 곁을 도사리고 있으니, 영원히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죽음의 화신이니, 나를 피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뭐 이런 말?”
“결국은 자길 아무도 못 막을 테니까, 이번엔 그냥 보내준다. 그런 건가?”
“아마도.”
“으.”
태성은 골머리를 앓았다.
“다음 폭주 때에는 진짜 못 막을 것 같은데?”
“동감이다.”
천우진 역시 태성의 의견에 동의했다.
“운이 좋아서 한 번 피한 거지, 사실 답 없어. 다음 번에 폭주하면 아무도 못 막을 거다.”
“으으.”
태성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머리칼을 쥐어뜯다가, 이번에는 용설화에게 물었다.
“그럼 남쪽은?”
태성이 을 공략하는 파티의 리더를 맡았던 용설화에게 물었다.
“저희도 똑같아요.”
용설화가 대답했다.
“문제는 적기사를 만나자마자 서로 싸웠단 거겠죠.”
“으응?”
“캐릭터가 저절로 움직이더니 우리들끼리 싸우게 되더라고요.”
“아?”
“어떻게 풀 방법도 없고. 그냥 저희끼리 싸우다가 반은 죽고, 반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적기사한테 당한 거죠.”
“흐음.”
태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기사의 고유 능력이라는 게 아군끼리도 서로 싸우게 만들었단 건가?”
“맞아요.”
용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디스펠로도 안 풀리고. 어떻게 방법이 없더라고요. 손 놓고 화면 보기만 했어요.”
“그랬구나.”
정보국 요원의 보고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던전 안에서도.
그리고 밖에서도.
는 자신의 적들이 서로 싸우게 만든 뒤 죽여 버리는 어부지리를 선호하는 듯했다.
“아. 모르겠다.”
태성은 머리가 다 지끈거려서, 물을 한 컵 들이켰다.
를 막을 방법을 찾고, 또 어디론가 가버린 를 찾아내 빠르게 처치해야 했다.
할 일이 아주 태산이었던 것이다.
***
식사를 마친 후.
“일단 북쪽은 나랑 베오울프가 24시간 대기할게.”
천우진이 말했다.
“니가 다 커버할 순 없으니까. 넌 전쟁의 적기사를 맡아 줘.”
“오케이.”
태성은 천우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국이었으니, 이럴 땐 역할을 분담하는 게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청기사를 상대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너도 시간 나면 방법 좀 찾아 봐.”
천우진이 태성에게 말했다.
“어쩌면 오즈릭 교단 때보다도 위험할 수 있어. 알지?”
“당연하지.”
태성이 천우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피통이 없는 적.
심지어, 닿기만 해도 상대를 즉사시키는 적이라면?
오싹!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가 강림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던 미카엘의 경고는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성은 식사를 마친 뒤 집으로 가서 게임에 접속했다.
그러고는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치천존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던 베르단디에게로 달려갔다.
“옳지! 그렇지!”
치천존은 최근 베르단디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데 맛이 들려 있었다.
베르단디의 학습 능력은 정말 엄청났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이해하고, 둘을 가르려주면 스물, 아니 스물다섯 이상을 이해했다.
“허허.”
치천존은 그런 베르단디의 학습 능력이 놀라워서,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베르단디는 마치 지식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와도 같아서, 가르치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베르단디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 터이니, 공부하고 있으렴.”
“네!”
치천존은 베르단디를 남겨두고 잠시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화장실로 향하던 중.
“지크 녀석의 딸이 맞긴 한 것인가? 허허허.”
치천존은 예전의 지크를 떠올리며 황당해 했다.
과거 치천존은 마법사 계열 클래스인 시절의 지크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마법사로 전직을 시켜준 장본인도 치천존이 아니던가?
“아빠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그 하나도 제대로 이해를 못했거늘. 어찌 그런 돌머리에게서 이런 영민한 아이가 태어났단 말인가. 허허허. 거참 이해를 할 수가….”
“거 적당히 하시죠.”
지크가 불쑥 나타나 치천존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헉?!”
치천존은 지크가 나타나자 입을 가렸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돌머리라 죄송했습니다.”
“다 들었느냐?”
“아주 잘 들리던데요? 킁!”
지크가 콧김을 팍! 뿜으며 입을 삐죽였다.
“허허허….”
“제가 마법에 재능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실망입니다, 어르신.”
“거 왜 삐지고 그러느냐? 그리고 네 녀석이 돌머리였던 건 팩트 아니냐?”
“그건 그렇죠.”
지크는 과거의 자신이 깡통이었단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네 딸아이만큼은 천재 중의 천재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기분이 묘하긴 한데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지크는 심술궂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치천존을 스쳐 마법 공부를 하고 있던 베르단디에게로 향했다.
‘아.’
지크는 마법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베르단디를 보자마자 뭔가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크게 안심이 되었다.
에서 타락한 베르단디를 보았다가, 아직 작고 어린 소녀를 보자 놀랐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던 것이다.
“아바마마!”
“끠이잉!”
베르단디는 오래간만에 아빠를 보자 페어리 드래곤과 함께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보고 싶었사옵니다! 아바마마!”
“사랑스러운 우리 딸.”
지크는 그런 베르단디를 꼭 안아주었다.
“아빠도 많이 보고 싶었단다.”
“정말이옵니까?”
“그러엄~.”
“사랑하옵니다~ 아바마마~.”
“나도~.”
“헤에~.”
“그럼 오늘은 아빠랑 놀까?”
지크가 물었다.
“네에!!!”
베르단디는 지크가 오랜만에 놀아준단 말을 하자 너무나도 신이 난 모양이었다.
“네! 네! 네네네네!”
“우리 딸. 귀엽기도 하지.”
지크는 그런 베르단디를 훌쩍 안아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버려졌다 생각하고 그만 흑화해버린 던전 속 베르단디를 만났기 때문인지, 가슴이 철렁해진 지크였다.
그래서 지크는 앞으로라도 베르단디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
지크가 베르단디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프로아 정보국은 엄청나게 바쁘게 돌아갔다.
국왕인 지크가 직접 의 행방을 파악하란 명령을 내렸으므로, 정보국에 소속된 요원 전체가 움직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원 전체가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로부터 3일 후.
“…으응?”
나인테일은 을 지휘하던 도중 뜻밖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이게 뭐야?”
나인테일이 보고서를 들여다보더니 부하에게 물었다.
“지금 이걸 나더러 믿으라고 보고를 올린 거야?”
“아, 아닙니다!”
부하가 나인테일의 갈굼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사실 그대로 올린 보고입니다!”
“이게?”
“예! 국장님!”
“너 아니면 어쩔래?”
나인테일이 미심쩍다는 듯 보고서와 부하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고서의 내용이 너무나도 허무맹랑했기 때문이다.
“대륙 남부에 있는 16개국이 갑자기 전쟁을 일으켰다고? 그것도 편을 갈라서 싸우는 게 아니라, 다 각자?”
“그, 그렇습니다!”
“너 허위 보고는 사형인 거 알아, 몰라.”
나인테일이 부하에게 으르렁거렸다.
“진짜입니다! 현지 요원들이 올린 정보들을 총합해서 전해드린 것입니다!”
“진짜?”
“예! 국장님.”
“흠.”
나인테일은 솔직히 좀 믿기지 않았지만, 일단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허위 보고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전쟁의 적기사가 활동을 시작한 건가? 그렇다면 말이 돼.’
나인테일은 이 기묘한 보고의 원인이 란 생각에 지크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이 사실에 대해 보고했다.
지크는 베르단디와 놀아주던 중 나인테일의 보고를 접하고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대재앙이 벌어질 줄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빠르게 난리가 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게다가….
“람다 왕국까지?”
지크는 무왕 레오니드가 다스리는 람다 왕국까지 전쟁에 휘말렸단 소식에 더더욱 놀랐다.
레오니드는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강자라서, 쉽사리 휘둘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오. 골치 아퍼.’
지크는 머리가 다 지끈거려서 잠시 이마를 지그시 누른 후 말했다.
“잠깐만. 나 통신실에 다녀올게. 베르단디 좀 보고 있어.”
“네, 전하.”
“우리 딸 착하지? 이모랑 놀고 있어?”
지크가 베르단디에게 말했다.
“네! 아바마마!”
베르단디는 지크가 요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온종일 놀아준 덕분에 여느 때보다 행복했다.
그렇게 지크는 나인테일에게 베르단디를 맡긴 후 람다 왕국에 통신을 걸었다.
일단 무왕 레오니드와 얘기를 좀 나눠보려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