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885
884
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은 얼마 전 지크와 마찰을 빚었던 팔롬 왕국의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크는 스스로를 위장하지도 않은 채 팔롬 왕국의 영토를 대놓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크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팔롬 왕국은 지크와 마찰을 빚은 후 다른 국가들의 침공을 받으면서 나라 전체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도 지크의 명령을 따르는 의 함대가 팔롬 왕국의 해안 도시들과 해군 기지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즉, 지크가 영토 안을 돌아다니는 것조차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유명한 거야?”
지크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 팔롬 왕국 내에서도 꽤 유명한, 일종의 명물이었다.
들어갔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나온 사람은 많은데, 정작 죽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맞고 싶으면 으로 가란 우스갯소리마저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뭔 소리지?’
지크는 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곳에 사는 대정령이 를 퇴치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니, 지크로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숲에 들어가야 했다.
‘조용한데.’
지크는 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매우 고요하고, 또 풍경 또한 아름다워서 좀 당황했다.
뭔가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강력한 몬스터들이 등장할 것만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조, 좋은데?”
지크는 신선한 공기와 나무들 사이를 파고드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에 눈을 감았다.
마치 산림욕장에 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위험한 던전에 들어왔다기보다는 오래간만에 힐링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지크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편안한 발걸음으로 을 거닐었다.
그러던 중.
“네놈은 뭐냐.”
근육질의 거대한 생명체가 튀어 나와 지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엥?”
지크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생명체가 무려 직립 보행을 하는 호랑이란 걸 깨닫고 황당해 했다.
차라리 수인족이 등장했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이건 진짜 직립 보행을 하는 호랑이였던 것이다.
“후후후. 겁도 없는 놈이 우리 숲에 들어오다니.”
호랑이가 뚝! 뚝!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지크를 위협했다.
‘아. 정령이구나.’
지크는 직립 보행 호랑이가 평범한 맹수가 아닌 정령이 형상화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햄찌 역시 마찬가지였다.
햄찌도 본체는 정령왕의 바로 아래 등급인 대정령으로, 꽤 높은 지위에 있었다.
마족으로 따지자면 마왕의 바로 아래인 메타트론이나 바로크와 같은 급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지크는 직립 보행 호랑이에게 선뜻 인사를 건넸다.
싸워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주먹보다는 대화를 통한 소통이 우선이었다.
“저는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숲의 주인 분을 뵙고 싶었는데요.”
“뭐라?”
호랑이가 눈썹을 치켜떴다.
“감히 여왕님을 만나고 싶다고? 네놈 따위가? 크핫핫핫핫!”
“어떻게 안 될까요?”
“감히 인간 주제에 여왕님을….”
그때였다.
빠악!
누군가 호랑이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이게 어디서 언성을 높이고 있어.”
그런 호랑이의 뒤통수를 후려진 건 다름 아닌….
‘토, 토끼잖아?’
역시나 직립 보행을 하는 토끼였다.
“도토리 좀 주워오라고 시켰더니 여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어?”
“죄, 죄송….”
“이게 진짜!”
“컥!”
토끼가 호랑이를 쥐어박으며 구박했다.
“…….”
지크는 그 광경이 다소 낯설어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토끼가 호랑이를 쥐 잡듯이 패고 갈구는 모습이 굉장히 기이하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저….”
지크가 토끼 형상을 한 정령에게 말했다.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음?”
“이 숲의 여왕님이란 분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뭐?”
토끼가 눈을 부라렸다.
“감히 네놈이 여왕님을 뵙고 싶다고?”
“긴히 드릴 말씀이….”
“닥쳐라!”
토끼가 버럭 소리쳤다.
“여왕님께서는 하찮은 인간 따위와는 만나지도, 말을 섞으시지도 않는다!”
“진짜 중요한 일이거든요. 꼭 만나 뵙고….”
“이 자식이!”
그 순간.
쒜엑!
토끼가 지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
토끼는 의외로 강했다.
불끈불끈!
호랑이도 그랬지만, 토끼 역시 엄청난 근육질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권투를 전문적으로 수련했는지 펀치의 매서움과 각도가 꽤나 훌륭했다.
하지만 무왕 레오니드로부터 격투술을 배운 지크의 눈에 토끼의 공격은 아마추어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휙, 휘익!
지크는 굳이 스킬을 사용할 것 없이, 토끼의 공격을 숄더롤을 사용해 흘리며 로우킥을 때려 넣었다.
빠악!
그러자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억?”
토끼는 순간 멈칫하더니, 절뚝절뚝 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지크의 로우킥에 맞아 그만 다리가 부러져 버리고 만 것이다.
“혀, 형님!”
토끼가 지크에게 당하자 호랑이가 황급히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이익!”
토끼가 절뚝거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저 인간! 보통이 아니다! 크윽!”
“혀, 형님!”
“감히 우리 숲을 침공해 오다니!”
그 순간.
“치, 침공? 내가 언제?”
지크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나가 싶어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토끼는 이미 지크를 외부의 침략자로 인식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되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여왕님을 노리는 인간이 숲에 쳐들어왔다! 정령들이여! 숲을 지켜라!”
“아니, 내가 뭔 침략자….”
“정령들이여! 비상사태다!”
토끼는 지크가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침입자다!”
“숲에 침략자가 나타났다!”
“비상! 비사아아앙!”
숲속에서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나타나 지크를 둘러쌌다.
거북이, 곰, 여우, 늑대, 다람쥐 등의 형상을 한 정령들이 지크를 포위한 것이다.
“침략자다! 잡아라! 놈을 포획해서 여왕님께 데려가야 한다! 여왕님께서 직접 혼쭐을 내주실 것이다!”
“예!”
뒤이어 토끼의 명령을 받은 정령들이 지크를 집단으로 다구리(?) 놓기 위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크는 굳이 정령들과 싸우려 들지 않았다.
‘조, 좋은데?’
이곳 의 지배자로 추측되는 여왕에게 잡아간다는데, 지크로서는 얼씨구 좋았다.
그리고 그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정령들은 대체로 이 세상에 이로운 존재이지, 딱히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다.
또한, 다른 생명체들을 죽이는 걸 극도로 꺼렸다.
즉,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적당히 장단만 맞춰주면 알아서 여왕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 것 같았던 것이다.
“하, 항복!”
지크는 즉시 항복을 외치고 두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었다.
“항보오옥!”
그러자 정령들은 지크를 기다란 나무에 손발을 묶었다.
대롱대롱~!
그렇게 지크는 마치 바비큐 통구이와 같은 모양새로 포획 당했고, 그 길로 여왕이 있는 곳으로 연행되었다.
“여왕님께서 이 자식을 응징하실 것이다! 가자!”
“예!”
토끼는 절뚝거리면서도 호기롭게 소리치며 지크를 여왕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뒤.
지크는 깊은 곳으로 배송(?)되었고, 마침내 여왕을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저, 저거 여자 햄찌잖아!”
지크는 여왕의 모습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을 지배하는 여왕의 모습이 햄찌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햄찌가 흰색에 하늘색 털을 가졌다면, 여왕은 흰색에 분홍색 털을 가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즉, 털색이 좀 다르다는 것 빼고는 완전히 똑같이 생긴 것이다.
“뀨.”
여왕이 지크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 자식이 내 영토를 침범해온 인간이란 거냐? 뀨우?”
심지어, 여왕은 햄찌와 말투마저도 똑같았다.
“그렇습니다! 여왕님!”
“그렇습니다! 여왕님!”
“그렇습니다! 여왕님!”
정령들은 그런 여자 햄찌(?)에 대한 충성이 엄청난지, 아주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쳐 대답했다.
“뀨. 네놈은 뭐냐.”
황금으로 이루어진 옥좌에 앉은 여자 햄찌가 지크에게 물었다.
“아, 예.”
지크는 여전히 나무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로 여왕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프로아 왕국의 국왕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라고 합니다.”
“뀨.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
“그게….”
지크가 여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싫다.”
여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일이다. 뀨.”
“하지만 도와주시지 않으면 억 단위의 인간들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뀨우.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원하는 건 뭐든 드리겠습니다.”
지크는 여왕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한두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니만큼, 자존심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신다면 여왕님께서 원하시는 건 뭐든….”
“뭐든? 그게 정말이냐? 뀨우?”
여왕의 입가가 씰룩 움직였다.
‘뭘 시키려고 저러지?’
지크는 좀 불안했지만, 아쉬운 입장인지라 여왕에게 뭐든 하겠다고 말했다.
“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여왕님의 요구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뀨. 좋다.”
여왕이 히죽 웃더니 말했다.
“내 요구는 간단하다. 뀨.”
“말씀하시죠.”
“내 약혼자를 찾아와라. 뀨우.”
“야, 약혼자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뀨우.”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년 전에 날 피해서 도망친 약혼자가 있다. 뀨우. 그 자식을 나한테 잡아오면, 네 요구를 들어주도록 하겠다. 뀨.”
“여왕님의 약혼자가 설마….”
지크는 순간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어 햄찌의 초상화를 꺼내 여왕에게 보여주었다.
‘설마 그런 건가?’
지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모른단 생각이었다.
“혹시 얘인가요?”
그 순간.
“뀨우?”
여왕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내 약혼자 초상화를 왜 가지고 있는 거냐! 뀨우!”
“하하. 하하하.”
지크는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깨달았다.
햄찌는 미카엘이 말한 대정령이 자신의 약혼녀라는 걸 알아채고 도망쳤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멀리 도망쳐버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얘 저랑 계약한 대정령인데. 저랑 친해요.”
지크가 말했다.
“뀨! 그게 정말이냐!”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좋다! 뀨우!”
여왕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날 당장 그 자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뀨우! 그럼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뀨!”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뀨우! 당장 안내해라! 뀨우우우!”
“예! 여왕님!”
지크는 여왕이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자 즉시 밧줄을 풀어버렸다.
사실 묶여 있어준 거였지, 정령들의 어설픈 포박술 따위가 지크를 속박하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쪽으로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지크가 손바닥을 슥삭슥삭 비비며 여왕을 안내했다.
“뀨! 앞장서라!”
“예!”
그렇게 지크는 햄찌의 약혼녀라는 여왕을 데리고 프로아 왕국으로 향했다.
그런 지크의 발걸음은 매우 경쾌했다.
‘흐흐흐!’
지크는 왕궁에 있을 햄찌를 떠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너 이 자식 이제 큰일 났다. 약혼녀를 버리고 튀었다 이거지? 흐흐흐. 너도 이제 끝났어, 이 자식아. 유부남의 고충을 느껴봐라. 흐흐흐.’
지크는 햄찌가 곤란해질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엔돌핀 분비량이 몇 배는 늘어난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