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896
895
“엥? 이게 무슨 소리죠?”
지크가 곁에 있던 장교에게 물었다.
“지역 봉쇄?”
“예, 전하.”
그러자 장교가 대답했다.
“열두 시간 후에 반경 200킬로미터에 결계가 쳐질 예정이옵니다.”
“…잠시만요.”
지크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반경 200킬로미터에 결계를 쳐서 일대를 봉쇄한다고요?”
“예, 전하.”
“200킬로미터를요?”
“예.”
“어우야.”
지크는 장교가 그 얼토당토않은 말을 너무나도 손쉽게 대답하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말이 좋아 반경 200킬로미터지, 현실로 따지자면 대한민국의 영토 절반에 해당하는 범위에 결계를 친다는 이야기였다.
제아무리 마법이 판치는 게임 속 세상이라 할지라도 황당무계한 규모인 것이다.
하지만 장교의 표정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게 바로 마우레키온 제국인의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반경 200킬로미터를 봉쇄한다고? 미쳤네. 이건 가둬놓고 다 죽이겠단 거잖아.’
지크는 마우레키온 제국군이 어째서 결계를 치려는지 간파했다.
어차피 전투에서 이길 테니, 패잔병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결계를 치겠단 의도였다.
단 한 명의 적군도 도망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몰살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하긴. 역적은 연좌제를 적용해서 일가친척까지 싹 다 죽이는 세상이니까.’
지크는 마우레키온 제국의 소름 돋는 계획에 몸서리치며, 장교를 돌아보았다.
“그럼 전 뭘 하면 됩니까?”
“예, 전하.”
장교가 대답했다.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부대는 원칙적으로 전략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사옵니다.”
“왜죠?”
“아무래도 보안이 유지되기 힘들어서가 아닌가 싶사옵니다.”
“그건 그렇죠.”
“허나 전하는 예외이십니다. 그러니 곧 있을 전략 회의에 참석하시면 되옵니다.”
“그렇군요.”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안이 중요하긴 하죠.”
“예, 전하.”
“일단 알겠습니다. 이따 전략 회의가 열리면 알려주세요.”
“명령 받들겠나이다.”
그렇게 기사가 사라지고 난 후.
‘부관이 필요하겠는데?’
지크는 나름 사단장이자 4성 장군인 자신을 보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프로아 왕국에 통신을 걸어 카렐을 불러들였다.
그러는 사이.
“형님!”
역시나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승구였다.
“부르셨습니까!”
“응.”
지크가 승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바로 왔네? 정신없었을 텐데.”
“형님이 부르셨는데 바로 와야죠. 헤헤헤.”
“댐은 어때?”
“잘 건설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쇼.”
“수고가 많아.”
“헤헤. 별말씀을.”
그때였다.
“오빠!”
용설화가 지크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시작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게이머들이 속속들이 제국군 진영에 도착했다.
‘역시.’
지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와 준 동료들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대외적으로 제국군이 패배할 것이라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렇듯 빨리 달려와 주었다는 건, 지크에 대한 동료들의 믿음이 절대적이란 말밖엔 되질 않았다.
지크는 누군가가 자신을 철석같이 믿어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좋은 소식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오? 다들 성기사잖아?’
지크와 친한 게이머들은 대부분 에 가입해 서브 클래스로 를 취득한 상태였다.
개중에는 지크를 대신해 NPC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민원을 해결해 주었는지, 신성력을 가진 게이머들도 몇몇 있었다.
‘나한테도 세력다운 세력이 생기고 있구나.’
지크는 어느덧 자신을 따르는 게이머들이 꽤 많아졌단 사실을 자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와주셔서 감사해요. 자세한 건 보안상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후회하진 않으실 겁니다.”
그러자 게이머들이 대답했다.
“뭘요!”
“언제든 불러만 주시죠!”
“재미있는 거 있으면 같이 좀 합시다!”
게이머들은 지크가 제국군 진영으로 불러들인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의치 않았다.
‘좋아.’
지크는 자신이 거느린 세력이 점점 더 커지고, 또 유대가 끈끈해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전략 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마우레키온 제국의 전략 회의가 열리는 막사 안.
‘…나 왜 부른 거지.’
지크는 하품이 나오는 걸 억지로 틀어막고, 졸지 않으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군이 구상한 전략에는 지크가 끼어들 틈이란 게 없었다.
완벽 그 자체.
지휘관들이 내놓는 의견들은 지크가 100퍼센트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었고, 또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지크가 딱히 보탤 게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단점은 있었다.
‘알맹이는 쏙 빠져 있네.’
지금 오가는 대화들은 제국군이 불리하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중이었다.
‘반경 200킬로미터를 봉쇄하고 하는 군사 작전이 고작 이런 거라고? 이것도 충분히 대단하긴 하지만….’
지크는 지금 이 자리가 반란군을 쳐부술 결정적인 전략을 짜는 자리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에, 그저 입을 꽉 다문 채 노트에 낙서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던 중.
“전하.”
마우레키온 제국의 총사령관을 맡은 란돌 공작이 지크에게 말을 건넸다.
“예?”
“전하께서는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사단을 이끄시고 이 지점에서 대기해주시면 되겠사옵니다.”
“이건 후방도 아니고 전혀 엉뚱한 장소인데요?”
“예, 전하.”
란돌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군 특작부대의 후방 교란을 저지하는 것이 이번 전투에서 모험가 사단이 맡은 임무이옵니다.”
“어?”
“혹시나 모를 적들의 우회 병력을 차단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란돌 공작이 지크에게 맡긴 지역은 딱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중요하지 않다 못해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을 지역이었다.
즉, 이번 전투에서 지크와 모험가 사단은 아무런 임무도 부여받지 않은 것이라고 봐도 좋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게 사령부의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지크는 군말 없이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니 시키는 대로 해야지. 헤헤헤.’
꿀을 빨라는데 안 빨아주면 섭섭하지 않겠는가?
지크는 굴러들어 온 땡보직을 마다할 정도로 사서 고생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애초에 마우레키온 제국에 온 것도 슈트카르트 황제에게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점수를 따기 위해서일 뿐, 지크는 딱히 전공을 세우지는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
그렇게 지크가 이끄는 모험가 사단은 전방의 어느 엉뚱한 지역으로 가 진지를 구축하고, 무기한 대기에 들어갔다.
지크는 휘하 게이머들에게 군기를 적당히 유지하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현재 모험가 사단이 주둔한 지역 자체가 워낙에 전투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라서,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진지 구축을 끝내고 삼삼오오 모여 게임을 즐기기 시작할 무렵.
번쩍! 번쩍! 번쩍! 번쩍!
저 멀리 수없이 많은 빛의 기둥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시작이네.’
지크는 저 빛의 기둥들이 반경 200킬로미터를 완벽하게 봉쇄할 결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제 저 결계가 풀리기 전까지는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밖에 별일은 없겠지?’
지크는 바깥세상(?)을 걱정하게 되자 진짜 군부대 안에 갇힌 군인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일주일 내에 끝날 예정이었기에, 아직은 엄청 답답하진 않았다.
조금 긴 동원 예비군 훈련에 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햄찌라도 같이 있었으면 덜 심심할 텐데.’
지크는 변신의 후유증으로 몸져누운 햄찌가 그리웠다.
이렇게 할 일 없이 대기할 때 햄찌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곤 했다.
‘이번 건 해결하면 테라를 찾아봐야겠어.’
지크는 를 상대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명의 화신 테라를 찾아볼 것을 기약하며, 밤하늘의 별을 감상했다.
그러던 중.
“오빠.”
용설화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저 여기 앉아도 돼요?”
“앉아.”
“고마워요, 오빠.”
“근데 왜?”
“꼭 용건이 있어야 돼요?”
“아?”
지크는 용설화가 되묻자 살짝 당황했다.
“그건 아니지. 하하.”
“오빠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나 그냥 게임하지?”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으응?”
“현실에서 뭐 하시냐고 물어본 건데….”
용설화는 지크의 게임 속 일상이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궁금할 것도 없었다.
그냥 열심히 이런저런 퀘스트를 깨는 게 지크의 일상이었으므로, 물어봐야 입만 아팠다.
“나 그냥 운동하고. 자고. 가끔 가족들 만나서 밥 먹고. 그러지.”
“그게 다예요?”
“응.”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는 하는 거 없는데? 가끔 우진이랑 승구랑 셋이서 밥 먹거나 커피 마시는 정도?”
“단조롭네요.”
“사는 게 그렇지, 뭐.”
“그래서 좋아요.”
“왜?”
“그런 게 있어요.”
용설화는 굳이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딴짓 안 하셔서 좋아.’
몇몇 유명 게이머들은 클럽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거나, 수없이 많은 이성에게 둘러싸여 어장 관리를 하는 등 난잡한 사생활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지크는 달랐다.
늘 게임, 게임, 또 게임.
지크는 언제나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현실에서의 사생활 역시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용설화는 그런 지크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지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하루하루 전전긍긍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요 오빠.”
“응?”
“오빠는 놀러 가고 싶지 않으세요?”
“딱히?”
“그, 그래요?”
“응.”
지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다른 데 눈 돌리고 싶지 않아. 이 게임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아….”
“지금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게 이거잖아? 할 수 있을 때 후회 없이 열심히 하고 싶어. 알잖아? 프로게이머 수명 짧은 거.”
“이해해요.”
용설화는 지크의 말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는 법.
게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게임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한 종목이 수십 년 이상 꾸준히 흥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평균 10년.
오래 버텨야 20년이 고작이었다.
용설화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빠인 용태풍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제가 응원할게요, 오빠. 귀찮게도 안 할게요. 오빠가 게임에 집중하실 수 있게.’
용설화는 굳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지크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지크가 마음 편하게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고, 곁을 지키며 동료가 되어주는 것.
용설화는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
이틀이 지났다.
지크는 오늘도 하는 일 없이 대기하며 게이머들과 함께 을 즐기며 시간을 때웠다.
쿵! 쿠웅!
그러는 동안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폭음과 섬광이 끊임없이 들려와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아. 구경하고 싶은데.’
지크는 마우레키온 제국이 진정한 힘을 드러내 반란군을 박살내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지난번 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해서, 진정한 마우레키온 제국의 힘이 어떨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를 이용해 날아올라도 잘 보이지 않았다.
200킬로미터라는 거리를 한눈에 내려다보려면, 어지간한 높이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쩝. 심심해 죽겠네.’
지크는 싸움 구경도 못하고 할 일 없이 시간이나 때우게 되자 슬슬 좀이 쑤셨다.
그러던 중.
“전하!”
카렐이 황급히 지크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사령부에서 긴급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갑자기?”
“예!”
“뭔데?”
“여기 이 지점으로 이동하랍니다.”
카렐이 지도를 펼쳐 지크에게 보여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