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14
13. 개 꼴
주말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한가득 쏟아졌다.
은채는 예슬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공원 산책로를 돌고 있었다. 실기 시험 준비로 열심히 뛰고 있는 예슬 옆에서 그녀는 그저 느린 걸음으로 걷기만 할 뿐이었다. 다른 때 같았음 예슬과 같이 신나게 뛰었을 테지만 오늘은 운동이고 뭐고, 그다지 땀 흘릴 기분이 아니었다.
“뭐?”
돌연 달리는 속력을 낮춘 예슬이 타박, 발을 멈췄다.
“미쳤어, 너!”
그간 천윤제와 있었던 일을 고백한 것에 대한 격렬한 반응이었다. 어쩐지 머쓱하고 민망해 괜스레 아이스크림을 한입 가득 밀어 넣고 고개를 숙였다.
탁탁,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발끝을 가만 내려다봤다. 평소 신고 다니던 스타일은 아니라 좀 어색했는데 막상 신어 보니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화이트 베이스의 색상에 민트색이 조금씩 섞인, 천윤제가 선물로 준 운동화.
받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검색을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이 운동화가 지금 웃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한정판 인기 상품이라는 걸.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다 보이는 걸 집어 들고 온 건 아니란 소리였다.
여자들한테 좋은 신발 하나씩 갖다 신기는 게 취미인 건가. 하여튼, 이상한 인간.
시선이 줄곧 발끝에만 머물러 있자 예슬이 추궁하듯 눈을 치켜떴다.
“내가 너 맨날 그놈 경기 영상 주구장창 볼 때부터 알아봤어.”
“그거야 한국 사람들 다 돌려 보는 건데, 뭘…. 그리고 나 원래도 수영 영상 엄청 보거든? 천윤제 경기 말고도….”
“경기 영상 나노 단위로 핥고도 모자라서 기술 분석 자료까지 꽉꽉 채워서 스크랩하는 게 정상의 범주는 아니야, 은채야.”
“그건 그냥 팬심.”
“덕질이겠지.”
“그래, 선수 천윤제에 대한 관심은…. 그래, 오케이. 인정.”
“그러니까. 그렇게 덕질하던 선수랑 막 자고 그러니까…!”
흥분해 큰 소리로 떠드는 예슬의 입을 얼른 막았다. 행여나 지나가던 누군가가 듣기라도 할까 두려워서였다. 입이 막힌 예슬이 알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은채가 그제야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냈다.
“하, 또라이라고, 미친 새끼라고, 그렇게 욕을 하더니만….”
쯧, 혀를 차는 예슬이 기가 막힌다는 듯 읊조렸다. 차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자기만 한다고?”
입을 다물고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사귀자거나, 연애를 하자거나, 진지하게 만나 보자거나 하진 않아?”
“그럴 리가….”
“하다못해 좋아한다는 고백 같은 것도 없고?”
“없지, 당연히. 그 인간이 날 왜 좋아해. 그런 거 기대한 적도 없어.”
“구라 치고 있네.”
후우, 거친 날숨을 몰아쉰 예슬이 은채를 이끌고 한구석의 벤치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울 보여 줄까? 얼굴에 억울하고 서운해 죽겠다고 써 붙여 놓고는.”
아이스크림을 쭙쭙 빨며 태연한 척을 했으나 정곡을 찌르는 예슬의 말에 기분이 더 푹 가라앉았다. 그렇게나 얼굴에 다 써 있는데 천윤제, 그 인간 하나만 못 읽고 있다는 소리처럼 들려서.
“여자랑 만나고 헤어지는 게 쉬운 사람이야. 진지한 거, 무거운 건 아주 질색을 하고. 천윤제 원래 그런 인간인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알면서, 왜 잤어?”
“…….”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왜 계속 자?”
답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처음은 그저 실수였고 충동이었다고 치더라도 그의 꼬임에 넘어가 이런 부적절하고 모호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심스러울 일이긴 했다.
“너 천윤제 좋아해?”
안타깝게도 마지막 희망 같았던 의심은 확신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가 봐.”
마지막 남은 한 입을 쭉 빨아 당기며 무심히 진심을 토로했다. 도리어 예슬의 동공이 동그랗게 확장됐다.
“야, 너. …어쩌려고?”
놀란 예슬이 물병을 집어 들다 말고 제 팔을 덥석 잡았다.
“뭘 어째. 그냥 그렇단 거지.”
“너 이제 얼굴에 안 넘어간다며? 안 홀린다며?”
“그게 내 마음대로 되겠냐?”
“이거 완전히 정신 나갔구만?”
미간을 잔뜩 모은 예슬의 표정이 퍽 심각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슬 또한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윤제와의 관계가 해피 엔딩으로 끝날 리 없다는, 지극히 이성적이고도 예측 가능한 판단 말이다.
“상관없어. 어차피 고백을 할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하겠단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더 문제지. 뭐? 좋아하는 남자랑 섹파? 얘가 큰일 날 애네, 진짜.”
섹파. 그렇지 않아도 그 적나라한 단어를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그보다 더 적확한 표현도 없겠다 싶었다. 누구 입에선 직접 ‘일도 하고 떡도 치는 사이’란 소리도 들었으니 딱히 민망할 것도 없다.
“그러다 괜히 마음이나 더 커지면? 고백도 못 할 마음 더 키워 놨다가 나중엔 어쩌려고?”
“알아서 정리되겠지. 어차피 아시안 게임 끝나면 이 일도 그만둘 거고, 나도 복학해서 정신없이 학교 다니다 보면… 다 자연스럽게 끝나 있을 거야.”
시한부 관계인 까닭에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던 면이 없진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마음을 밀어내고 관계를 끊어 내는 일은 어차피 똑같이 괴로울 테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이기도 했다.
“속 편한 소리 하고 앉았다. 그게 네 마음대로 되겠냐?”
예슬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바닥 난 아이스크림의 주둥이를 쭙쭙 빨았다. 초콜릿 향만 남은 공기가 허무하게 빨려들고 있었다.
“에휴. 불안하다, 불안해.”
“뭐가 불안해. 어차피 곧 끝난다니까. 끝내는 거 처음도 아닌데. 게다가, 이번엔 뭐. 쌍방도 아닌데….”
사실상 제 마음 하나만 추스르면 될 일이었다. 시작도 끝도 혼자서만.
“달라, 너.”
“…뭐가.”
“너 지금 고승준 만날 때랑은 완전 다르다고.”
혀를 차며 저를 직시하는 예슬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추궁이 가득했다.
“다르기야 하지. 그건 그래도 연애라고 말은 붙일 수 있었고, 이건….”
“솔직히 말해 봐. 너 고승준 그 새끼랑은 왜 안 잤어?”
“…….”
“그 새끼랑 꽤 오래 사귀었으면서 왜 한 번도 안 잤냐고.”
“…….”
“어?”
“…그거야 딱히, 하고 싶지도 않았고 처음이라, 무섭기도 했으니까….”
“아, 천윤제랑은 하고 싶었고, 하나도 안 무서웠단 소리네?”
“…….”
하고 싶었고, 무섭지 않았다. 아니, 요즘엔 도리어 저가 더 그를 원하는 것 같아 스스로가 두렵기까지 했다.
“그거 알아, 정은채?”
“…….”
“몸 정 무서워. 정신 바짝 차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전엔 딱히 원치도 않았고 두렵기만 했던 첫 성관계를 천윤제와는 거리낌 없이 하고 싶었던 이유. 그 욕망.
속마음을 간파한 예슬의 말 한마디에 모호하게 내재하던 두려움이 비로소 절감됐다. 머릿속, 생각의 타래들이 어지러이 엉켜 갔다. 목이 텁텁했다.
지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울었다. 무심히 꺼내어 액정을 두드렸다. 천윤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뭐 해? 안 바쁘면 이따 집으로 오든지.오전 10:55
불쑥, 옆에 앉은 예슬의 고개가 제 옆으로 바짝 붙었다. 천윤제의 메시지를 읽은 그녀의 잇새에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집에 와서 뭐. 또 자자고?”
“…….”
“아주 단단히 미쳐 돌았네.”
“…….”
“진짜 웃기는 새끼 아냐? 아무리 매니저라지만 쉬는 날까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드나들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봐. 저 하고 싶은 거만 생각하지, 너에 대한 배려가 하나도 없잖아.”
“그러게.”
“아주 대놓고 섹파 취급하는 이딴 놈이 넌 대체 뭐가 좋냐?”
“얼굴에 홀렸다니까.”
“자랑이다.”
“섹스도 잘해. 알잖아, 거기도 엄청 크고.”
“어휴, 변태야, 좋겠다. 좋겠어.”
예슬의 타박을 들으며 잘근잘근, 아이스크림 껍질만 초조하게 씹었다.
“원래 짝사랑이 이런 건가. 막 이렇게 내가 가치 없는 사람 같고, 초라하게 느껴지고. 이렇게 한없이 땅굴 파게 되고…. 그래?”
“응. 원래 그런 거긴 한데, 내가 볼 땐 천윤제 그놈이 유독 더 그런 기분 들게 하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잘난 놈이 지 잘난 거 알고 까부는데 오죽하겠어?”
“맞아. 그래서 더 재수 없지.”
씁쓸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답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 넣었다.
“쯧, 고생한다. 팔자에도 없는 짝사랑하느라.”
“…….”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마음 단단히 싸매. 안 그럼 너만 만신창이 호구 된다?”
예슬이 무섭게 경고했다.
가만히 빈 아이스크림 봉지를 만지작거리다 또다시 하얀 발등을 내려다봤다. 고작 이깟 운동화 하나에도 마음이 이렇게나 싱숭생숭한 걸 보면 예슬의 말대로 확인 미쳐 돌아 있는 건 저였다.
지이이잉.
주머니 속에선 연달아 소란한 진동이 울려 대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10분 정도 늦으신답니다.”
멀끔한 정장 차림의 원 실장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을 향해 말했다. 조희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에, 멋대로, 멋대로, 매사 당신 멋대로. 굳이 바쁜 애들 죄 불러다 놓고는….”
조희경은 퍽 언짢은 표정으로 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렇지 않아도 이혼한 전 남편의 호출에 어쩔 수 없이 불려 왔단 사실 자체가 짜증스러워 죽겠는데, 이런 인간의 밑에 제 자식 셋을 내맡길 수밖에 없단 게 화가 나는 거였다.
“금방 오시겠네요, 뭐. 오시면 얼른 식사하고 일어나세요. 우리 엄마 또 혈압 오르실라.”
혜진이 그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다소 감성적이고 표현이 과격한 어머니 조희경을 진정시키는 건 늘 그랬듯 둘째 혜진의 몫이었다.
마주 앉은 천성제는 슬쩍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왜, 바쁘니?”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기는 한데…. 바이어랑 화상 미팅이 있어서요.”
“그럼 넌 그냥 가. 아버지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아뇨. 10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천성제가 상관없다는 듯 무심히 답했다.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 놓고 보자면 퍽 부자연스러운 그림이긴 했다. 이혼한 부인과 자식 셋을 호출해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주말 오후에 오찬을 할 수 있는 패기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것도 자식 셋 중 하나는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었고.
천노민이라면 자다가도 치를 떠는 조희경이 그의 이런 뻔뻔하고도 파렴치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다 돈 때문이었다. 자신은 지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을 했다지만 어쨌든 생때같은 자식들이 아직 천 회장의 밑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고, 그 자식들이 천화 그룹의 후계를 잇고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챙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근데 넌 아까부터 왜 이렇게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해?”
돌연, 혜진이 옆자리에 앉은 윤제를 돌아보며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야 했을 놈이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핸드폰만 들었다 놨다 초조한 얼굴인 게 영 이상해서였다.
그러나 윤제의 귀에 그런 혜진의 말 따위가 들릴 리 없었다. 오전에 보낸 몇 개의 메시지를 정은채가 줄곧 읽고도 무시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도대체 메시지를 봤으면서 왜 답장을 안 하고 씹는 건데.”
혜진의 잇새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스스로에게 물어봐. 읽씹은 네 특기 아니야?”
“심지어 내가 질문을 했잖아. 근데 왜 답을 안 하냐고.”
“그러게. 사람이 질문을 했으면 재깍재깍 답을 하고 그래, 윤제야. 응?”
혜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줬다. 그러나 그 말조차 들리지 않는 건지 윤제의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에 가 붙박여 있었다.
“누가 우리 아들 메시지를 씹는데?”
두 사람의 대화에 조희경이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제 아들이 어디 누군가의 무시에 눈 하나 깜빡할 성정이던가. 그런 아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게 한 상대가 자못 궁금해서였다.
윤제는 여전히 별 대꾸가 없었고 혜진만 중간에서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인기척이 났다. 10분쯤 늦는다던 천 회장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듯싶었다. 백발이 성성한 천 회장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네 사람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대번 딱딱하게 굳었다.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조희경을 흘긋 확인하고, 겉옷을 벗어 비서에게 넘기며 자리를 잡았다.
“먹자.”
상석에 앉은 그가 수저를 드는 것으로 비로소 불편한 식사가 시작됐다.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조희경은 그 자체로 이미 항의를 시작한 듯싶었다.
“일일이 오라 가라 하지 않으면 얼굴 보기가 이렇게들 힘드냐. 특히 윤제. 넌 훈련 잘하고 있는 거냐?”
돌연 천 회장의 시선이 핸드폰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윤제에게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성제와 천혜진은 회사에서 늘 일 때문에라도 마주쳤지만, 막내인 천윤제는 도통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까닭이었다.
다른 두 아들딸처럼 부른다고 순순히 오는 놈도 아니었거니와 이미 처음부터 윤제는 유일하게도 당신 통제 밖의 자식이었다. 그래서 내심 더 신경이 쓰였다. 이런 가족 식사 핑계라도 대서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을 만큼.
“야.”
혜진이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건지 영 대답을 하지 않는 윤제의 팔을 툭툭 쳤다.
“여기저기서 중계 다 듣고 계시면서 뭘 또 물으시나.”
윤제는 마지못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말끝까지 서걱 잘린 불손한 어조에도 천 회장은 퍽 익숙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좀 얌전히 지내는 모양이지? 눈만 뜨면 여기저기에서 사고 치고 다니는 소식만 들리더니만.”
“제가 아주 훌륭한 매니저를 붙여서요.”
돌연 혜진이 끼어들어 말했다.
“매니저?”
천 회장이 의아한 듯 되물었으나 혜진은 구태여 더 부연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행동거지들 조심히 해. 그렇지 않아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놈들 천지인데, 괜히 빌미 줄 짓 하지 말고.”
요즈음 지주사 전환 절차를 앞두고 천 회장의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 됐든 지주사 전환을 무사히 끝마치고 계열사의 지배 구조를 완벽히 장악해야 제 입맛대로 그룹을 키우기에 수월할 터였으므로 그 어떤 사업보다도 우선순위가 높았다.
“이번 합병 끝나면, 성제 넌 바로 본격적으로 리노베이션 진행하고.”
“네. 알겠습니다.”
천성제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천 회장은 가장 멀리 앉은 윤제를 바라봤다.
지주사 전환을 마치고 나면 맏아들인 천성제를 후계로 내세울 거란 예측. 모두가 예상했던 수순이었다.
그러나 정작 천 회장은 홀로 후계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경영에 관심도 많고 성과도 많은 천성제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게 당연하다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은 자꾸 막내에게 마음이 쓰이는 까닭이었다.
천윤제는 천 회장에게 있어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한때 깊이 마음을 품었던 여자의 아들. 7년 넘게 그 존재도 모르고 버려뒀던 아들. 그런 윤제에게도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단 생각을 회장은 오래 해 왔다.
세상만사 무심한 척, 망나니처럼 굴어도 그 속에 잠재된 악바리 같은 근성과 승부욕이 젊은 시절의 자신을 꼭 닮아 있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그저 모범생 같기만 한 천성제와 똑소리가 나긴 해도 다소 근성 없이 구는 천혜진과는 확연히 또 다른 결이기도 했고. 그대로 썩히기엔 퍽 아깝고 안타까운 성정이었다.
“그리고 혜진이랑 윤제한테도 이참에 리테일 지분 일부 넘길 생각이니, 당분간 둘 다 최 비서 연락 재깍재깍 받아라.”
뜻밖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천 회장에게로 쏠렸다.
리테일의 최대 주주인 천 회장이 제 지분을 넘기겠단 건 본격적으로 후계 계승 수순을 밟겠단 소리였다. 그런데 그 증여의 대상이 후계자인 성제가 아니라 혜진과 윤제라니. 천 회장의 의중을 알 리 없는 이들의 상식으론 퍽 이해하기 힘든 소리였다.
“그딴 거 필요 없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윤제가 곧바로 반박하듯 대꾸를 했다.
“저 주실 거 형이나 누나한테 더 얹어 주시죠. 아니면, 어머니 드려도 좋고요.”
그러곤 대충 깨작거리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들이켰다.
“네 몫이야. 잔말 말고 받아.”
“싫다니까요. 제가 왜 회장님 돈을 받아요, 내 손으로 내 발에 족쇄 채우는 것도 아니고. 그거 안 받아도 저도 제 밥벌이는 해요.”
“그깟 막노동 같은 짓, 딴따라 짓 해서 푼돈 번 걸로 내 얼굴에 먹칠이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고집부리지 마.”
천 회장의 막말에 윤제는 익숙하다는 듯 입매를 비틀어 조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올 때마다 후회를 하면서도 매번 어머니 등쌀에 속아 넘어가선.”
“윤제야.”
심각해져 가는 분위기를 중재해 보려는 듯 천성제가 그를 불렀으나 별 소용은 없는 일이었다. 희경과 혜진은 이미 포기한 듯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전 먼저 일어날게요. 식사 천천히 하세요, 회장님.”
눈 하나 깜짝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대로 집을 성큼성큼 빠져나갔다.
늘 가족 식사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켜 본 적이 없었다. 신경 쇠약에 우울증을 겪고 있는 새어머니 조희경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매번 참석을 하긴 하지만 얼굴 맞대기도 역겨운 천노민과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려니 영 비위가 상해서 견딜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차 안 가져왔지? 데려다줄게.”
돌연 등 뒤에서 천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차 키를 손에 쥐고 타박타박 다가온 그녀가 어느새 저를 앞질러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왜 따라 나와. 회장님한테 한 푼이라도 더 받아 낼 거 있는 사람이?”
“소속 선수 관리. 불로 소득보단 내 사업에 더 관심이 많은지라.”
혜진의 말에 혀를 쯧, 차며 조수석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니까 노인네가 누나를 안 예뻐하는 거야. 근성 없이 군다고.”
“그러게. 넌 그거 많아서 회장님한테 예쁨받지. 좋겠네?”
“아…. 졸라 싫다.”
진저리를 치며 푹, 뒷머리를 기대는 윤제의 반응에 피식 웃은 혜진이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잠자코 회장님이 주시는 거 받아.”
“역겨워서 그 노인네 돈 땡전 한 푼 만지기도 싫거든?”
“역겨워도 회장님 돈으로 먹고 자고 입고 컸거든, 너.”
“그러니까. 이제라도 그 돈 갚고 아예 호적에서 파 달라고 해 볼까?”
“천윤제, 너 목숨이 두 개니?”
“아니,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잘난 아들딸 둘이나 있는 양반이 왜 자꾸 나한테 집적거리냐고. 꼴 보기도 싫다고 버릴 땐 언제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리는 윤제의 미간이 푹 일그러졌다.
혜진은 생각했다. 만일 자신이 천윤제였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단언컨대 저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임신한 친모를 버리고 그런 어머니까지 제게서 뺏어간 아버지를 어떻게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아무리 윤제가 철없는 짓을 일삼고 제멋대로 굴어도 얼마든지 이해해 줄 요량이었다. 그 시절, 아이에겐 우주나 다름없던 엄마를 잃고 끌려와 벌벌 떨며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던 어린 천윤제를 똑똑히 봤으니까. 모든 삶의 의지를 다 놔 버린 채, 죽기를 결심한 듯 메말라 가던 그의 처참함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목도했으므로.
그때 혜진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웬 낯선 일곱 살짜리 꼬마가 제 동생이라며 집에 들어와 있던 그날이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생생했다. 억지로 울분을 참느라 시뻘게진 눈망울엔 일곱 살 아이의 것이라 믿기 힘든 적의가 가득했다. 엄마와 함께였던, 평화롭던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 장본인이 바로 아버지 천 회장이었던 까닭이다.
아이의 트라우마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처음엔 윤제를 원망하고 미워하던 어머니 조희경도 그런 아이를 안쓰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상태였다.
이러다 정말이지 사람 하나 죽겠구나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어 가던 아이를 기적처럼 살려낸 건 다름 아닌 수영이었다. 우연히 취미로 시작했던 수영이 생기 없던 천윤제를 다시 빛나게 했고, 반짝이게 만들었다. 아무 의욕도, 욕구도 없는 그에게 삶의 의지를 갖게 했고, 깊숙이 내재된 욕구를 부추겨 인간답게 했다.
어린 천윤제는 이후에도 여전히 거칠게 반항했고, 제멋대로 오만하게 굴었으나 집안 식구 어느 누구도 그런 윤제를 미워하지 않았다.
천윤제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아이였다. 투박한 겉모습 속에 감춰진 여리고 순한 심성이 퍽 투명하게 내비쳤던 탓이다. 관심 없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어머니와 형, 누나를 누구보다 챙겼고, 자신이 받은 만큼 그들에게 갚아야 한다는 염치도 잊지 않았다. 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새어머니 조희경은 도리어 친자식인 성제와 혜진보다도 막내 윤제를 아낄 정도였다.
물론 밖의 사람들이 볼 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긴 했다. 남편이 밖에서 낳아 온 사생아와 본처, 그리고 그녀의 자식들이 화목하게 서로를 아끼는 상황이라니.
도리어 이 집안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천노민 회장이었다.
“받아. 받아서 차라리 날 주면 되잖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혜진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하여튼 단순한 놈.
“주말인데 은채 씨도 그냥 좀 쉬게 해 주지 그래?”
실상,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도 줄곧 핸드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뻔히 보여 슬쩍 떠본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순한 천윤제가 제 미끼를 덥석 물었다.
“아…. 이 싸가지, 진짜.”
“아직도 씹어?”
“메시지 봤으면 기다, 아니다 대답 몇 마디 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근무 시간 외 연락 금지는 기본인데. 너 그거 갑질이야.”
“업무로 연락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럼 왜. 데이트 신청이라도 했어?”
“어.”
하여튼 제 속 숨길 줄도 모르는 투명한 자식. 이런 놈한테 붙은 카사노바라는 수식어가 다 아까워 탄식이 절로 샜다.
그간 계속해 제 동생과 은채를 관찰하고 떠본 결과, 두 사람은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닌 게 확실했다. 아니, 심지어 감정을 자각조차 못 하고 있는 듯싶었다.
답답한 것들. 지들이 하고 있는 게 썸인지 뭔지도 모르는 이 똥멍청이들.
“뭐라고 했는데.”
“딱히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거 다 아니까 빨리 답장하라고.”
혜진은 쯧, 혀를 찼다.
“같은 말을 해도 어지간히 밥맛없게도 한다, 참.”
어린 애들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남녀가 알아서 잘하겠거니 싶어 그냥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의 관계가 썩 희망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한 명은 애새끼나 다름없는 철없는 망나니이고, 한 명은 철벽을 있는 대로 치고 있는 헛똑똑이이고. 갈 길이 멀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윤제의 빌라 앞에 도착한 차가 스르륵, 멈춰 섰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댄 윤제는 성의 없이 손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혜진의 잇새에서 픽, 웃음이 샜다.
“좋을 때다.”
그래도 하나 희망적인 사실은 천윤제가 수영 이외의 것에 이렇게나 관심을 보이고 집착을 하는 일도 드물다는 거였다. 그 근성이야,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만한 것이었고.
게다가 머릿속에서 상상한 두 사람의 그림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꽤 잘 어울렸다. 아무도 손 못 대는 천윤제를 무려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저렇게 순한 대형견으로 만들 수 있는 여자가 아니던가. 천윤제도 덩달아 정은채라면 반쯤 정신을 놓는 것 같고. 참으로 잘 어울리는 바보들 한 쌍이었다.
혜진은 부디 이 바보 같은 멍청이들 둘이 얼른 자신들의 마음을 자각하고 정상적인 연애를 시작해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녀를 태운 차 바퀴가 그대로 아스팔트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하으, 아, 읏!”
골반을 고정하듯 콱 틀어쥐곤 진퇴를 반복하며 허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선 채론 처음 하는 후배위 자세였다. 뽀얗고 탐스러운 엉덩이 사이로 드나드는 제 성기를 고스란히 감상할 수 있어 시각적으로도 자극이 있었고, 불안정한 자세에 구멍을 더 움츠리듯 조여 대는 느낌도 짜릿했다.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매끈하고 잘록한 허리를 따라 또르르, 이어져 흘러내렸다. 뒤에서 보는 몸의 선도 황홀하고 음란한 그녀였다. 우는 듯 신음하는 예쁜 얼굴을 볼 수 없어 조금 아쉽기는 했어도.
“이제, 그만, 하으으! 침대로 가서…! 아!”
파들파들, 샤워 부스 문고리를 겨우 잡은 그녀의 손이 떨렸다. 울먹임에 가까운 신음 소리가 욕실 전체에 공명되어 귓구멍에 더 자극적으로 꽂혔다. 자꾸만 앞으로 도망가려는 몸을 붙잡아 포박하듯 감쌌다.
“침대에서도 헐게 박을 거니까 걱정 마. 우선 한 발 먼저 빼고.”
“하읏, 왜, 욕실, 에서… 하아.”
“그러게 누가 돌게 하래?”
안쪽을 꾹꾹 누르며 파고드는 집요한 움직임에 그녀의 조임이 더 선명해졌다. 울퉁불퉁, 흉측하기 짝이 없는 제 성기 모양대로 벌어졌다 또 다물리기를 반복하는 구멍이 귀여워 엉덩이를 토닥이듯 찰싹였다.
“너 좀 맞자.”
“읏!”
자극에 움찔거리는 내벽이 성기를 쩍쩍 집어삼키는 감각이 퍽 야릇했다. 허리를 얕게 움직거리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하, 왜, 때려, 요! 흐읏!”
“벌이야.”
밀어내듯 비트는 골반을 잡아 다시 똑바로 세워 놓곤 한 번 더 찰싹, 엉덩이를 때렸다. 별로 세게 내리치는 것도 아닌, 장난 같은 찰싹임이었지만 욕실인 까닭에 소리가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귓바퀴로 음란한 감각이 흠뻑 고여 들었다.
“박아 주면 좋다고 받아먹으면서, 어지간히 사람을, 후, 들었다 놨다.”
“흐으, 내가… 뭘, 흐응!”
핑크빛으로 발개진 여린 엉덩이 살을 한가득 움켜쥐고 좌우로 바짝 벌려 젖혔다. 허옇게 변한 진득한 체액이 결합된 성기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제 정액이 아닌 오롯이 그녀가 흘린 것들이었다.
“나 종일 네 연락만 기다린 거 알아, 몰라. 왜 계속 씹어?”
벌어진 사이로 다시 체액을 밀어 넣듯 성기를 쿡 쑤셔 박았다. 그러곤, 그녀의 턱을 움켜쥔 채 거칠게 제 혀를 밀어 넣었다.
“후으, 음!”
젖은 엉덩이와 제 앞섶이 닿는, 맨 살갗이 철퍽거리고 부딪치는 질척한 마찰음이 부스 가득 울렸다. 신음은커녕 숨을 내뱉는 것조차 완전히 막혀 점점 더 발갛게 달아오르는 두 뺨이 미치도록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턱을 움켜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혀를 뽑을 듯 빨아 먹는 흡입력이 강해 단단한 두 뺨이 움푹 팼다.
허리 짓이 빨라졌다. 더는 참을 수도 없이 차오르는 흥분감에 폭주하듯 좆을 찔러 넣고 또 찔러 넣었다. 있는 대로 안쪽 깊이 찔러 박을 때마다 손바닥 전체로 감싸 쥔 그녀의 아랫배가 불룩하게 움찔거리며 제 것을 쪽쪽 빨아 먹는 조임이 더더욱 황홀해져 갔다. 제겐 작고 여리기만 한 여체가 제 품에서 하늘하늘, 단내를 풍기며 흔들거리는 게 참을 수 없이 요망스러웠다.
반복된 자극에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덮쳐 왔다. 끊을 수 없는 마약을 빨 때의 느낌이 이러할까. 아득했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고, 어느새 들이닥친 절정의 순간, 육중한 기둥을 뿌리까지 푹 찔러 넣으며 쫀쫀하게 부풀어 오른 안쪽 지점을 찾아 찧고 때렸다. 저와 같은 크기의 쾌락을 강제하듯, 난폭하게.
쾌감에 몸부림치듯 파르르 떨리는 엉덩이가 어느새 제 좆을 길게 따라붙고 있었다.
“흐, 으으! 으음!”
겹친 잇새로 줄줄 흘러들어 오는 달큼한 타액이 그녀의 오르가슴을 대변했다. 입으론 흐르는 침을 받아먹고, 빨고 핥으면서 아래론 양 많은 정액을 한껏 쏟아 냈다.
그렇게, 가장 깊숙한 곳에 긴 사정을 마친 뒤에도 그는 불끈거리는 제 성기를 그대로 묻고 있었다. 도리어 더 깊게 눌러 박았다. 흡사 개가 노팅이라도 하듯이.
“하아…. 하아…!”
선심이라도 쓰듯 입술을 살짝 열어 주자, 겨우 입을 열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턱선 아래로 질척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고도 저를 돌아보는 얼굴은 지금 제가 얼마나 음란한 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앙큼했다.
“으으, 흐.”
혓바닥을 내밀어 턱과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타액을 전부 갈무리하듯 감쳐 올렸다. 질척한 감각에 진저리를 치듯 바르작대는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곤 부스 밖, 물을 받아 놓은 욕조로 향했다.
여체를 안은 채로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탱탱한 엉덩이 골 사이에 박아 놓은 제 성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마른 몸을 허벅지 위에 올려 앉히고, 그녀의 등을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제 것과 뒤섞인 체향이 훅 끼쳐 들었다. 만족스러웠다. 정은채의 몸에 자신이 영역 표시를 해 놓은 것 같아서.
“이제 그만….”
빼라는 듯 들썩이는 엉덩이를 다시 꾹 눌러 붙였다.
“네 안에 있는 게 좋아, 정은채.”
희고 기다란 목선을 따라 입술을 짧게 움직여 가며 낮게 속삭였다.
성기 간 마찰이 주는 쾌락이 아니더라도, 그녀와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좋았다. 좁은 질구가 제 육중한 것을 뜨겁게 머금고 있단 사실만으로도 불완전했던 무언가가 비로소 온전해지는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꽂고 있으면 안 될까.”
“안 끊길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해요.”
무심한 대꾸에 큭, 웃음이 터졌다. 키득이는 숨소리가 간지러운지,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쑤걱, 빠져나온 자지 끝에선 정액받이를 가득 채우고도 넘친 희멀건 액체가 흥건했다. 사정 후에도 도무지 줄어들 줄을 모르는 탓에 정액이 기둥 전체를 거꾸로 흐르며 적시고 있는데도 그는 퍽 태연하기만 했다.
허벅지 위, 발개진 얼굴의 여자를 돌려 마주 앉혔다. 그녀의 달큼한 날숨이 턱 밑에서 살랑거릴 때마다 복부에 달라붙은 기둥이 쿨쩍대며 체액을 뿜는다.
“낮에 뭐 했어?”
뺨에 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친구랑 산책하고…. 집에 있었는데요.”
“어차피 주말에 하는 일도 없으면서 왜 매번 튕겨?”
“주말에라도 하는 일이 없어야 저도 좀 쉬죠.”
“나랑 쉬어.”
“…….”
“아니다. 너 그냥 여기 들어와서 살래?”
“끔찍한 소리를 하시네요.”
어이없다는 듯한 읊조림에 일순 풍만한 젖가슴을 습관처럼 조몰락거리던 손놀림이 멈췄다.
“끔찍?”
“여기서 살았다간 정말로 밤낮 갖고 노는 섹스 토이 취급이나 당할 게 뻔한데 그럼….”
“섹스 토이?”
어감조차 좆같은 그 단어를 되뇌며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어딘가 굳어 있고 딱딱한 표정이 퍽 냉랭했다. 조금 전 제게 박혀 앙앙, 달뜬 신음을 흘리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한기가 돌았다.
“넘치는 성욕 푸는 것도 좋은데요. 좀 과해요, 우리.”
“뭐가 과한데?”
억울했다. 지금도 이렇게 인내의 인내를 거듭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적정선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시안 게임도 이제 얼마 안 남았고, 다른 선수들은 없는 체력까지 비축하면서 애쓰는 마당에….”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까.”
“왜 아니에요? 내 일이기도 해요. 이왕 시작한 일 마무리까지 잘해서 끝내고 싶어요. 온 국민이 다 천윤제 선수 메달, 기록 기대하는 거 잘 알잖아요.”
“체력? 문제없이 넘치고. 기록, 매일 경신되고 있고. 컨디션도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데. 대체 뭐가 문제란 거야?”
마무리다 뭐다, 벌써부터 선 긋고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괘씸하고 이해가 안 갔다. 달싹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고요. 천윤제 선수랑 같이 있었더니 자꾸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요.”
“웃기고 있다. 너 원래 이상했거든?”
슬금슬금, 뒤로 물리고 있던 엉덩이를 바짝 끌어와 제 앞으로 당기자 허리 아래서 찰박, 물소리가 났다. 연갈색 동공이 또르르 아래로 굴렀다.
“왜. 무서워?”
행여 수영장에서의 트라우마가 또 돋았나 싶어 물었다. 그것도 그랬다. 저는 제 지난 트라우마를 죄다 털어놓고 보여 줬는데, 이 여잔 왜 물을 무서워하는 건지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다. 대놓고 묻고 싶은데, 눈치를 보느라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자신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그 정도는 아니에요.”
“무서우면 안아.”
상체를 슬쩍 기울여 제 목을 길게 드러내며 말했다.
“안 무섭다니까….”
“안 무서워도 안아.”
가느다란 양팔이 그제야 목에 감겨 왔다. 물컹한 젖가슴이 그대로 탄탄한 근육에 닿아 뭉그러졌다. 한 줌도 안 될 허리를 한 팔에 감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받치듯이 그러쥐었다.
쿵, 쿵, 쿵. 꼭 생긴 것만큼이나 귀여운 심장 소리가 살갗에 고스란히 닿아 맥동하는 느낌에 가슴께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갖고 노는 거 아니야.”
고개를 더 숙여 그녀에게 푹 안기듯 파고들며 속삭였다.
“섹스 토이는, 무슨.”
“…….”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솔직히 네가 날 갖고 노는 거 아니냐?”
제 품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그녀의 잇새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런 게 갖고 노는 거거든요?”
목을 감고 있던 손이 내려가 어깨를 짚은 그녀가 제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둥글게 마주한 눈동자엔 여전히 온기가 없다.
“섹스하고 나서 이렇게 안는 거.”
그저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찌르르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갖고 노는 것 같아.”
섹스의 연장이나 다름없는 포옹이 왜 장난 같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키스하는 것도, 별로예요.”
키스를 못 한단 뜻인 건가? 점점 더 수수께끼 같은 소리에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말을 알아듣게 해. 섹스하면서 안고 키스하는 게 뭐가 널 갖고 노는 것 같다는 건데?”
“할 거면 딱 섹스만 해요.”
“뭐?”
“나한테 그렇게 구걸했잖아요, 넣게만 해 달라고.”
“야.”
어이가 없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상박을 뒤로 젖히자, 찰랑, 물소리가 일었다.
“이게, 진짜 날 섹스 토이 취급하네?”
“짐승 취급보단 낫잖아요.”
퉁명스럽게 받아친 여자가 차갑게 시선을 돌리고 몸을 일으켰다. 붙잡을 새도 없이 욕조 밖으로 걸어 나가 다시 부스에 들어서는 그 요요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마를 짚고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제 품에 안겨 바르작대던 체온이 빠져나가자 단숨에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원하던 몸을 실컷 안고 살을 섞는데도 왜 이렇게 갈수록 안달이 나고 공허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도통 감도 안 왔다. 여전히 공처럼 튕겨대기만 하는 정은채를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그간의 모든 인간관계를 다 부질없고 귀찮게만 생각했던 제게 이런 판단 능력과 감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기본적 상식도 전무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천윤제는, 정은채 앞의 저는 그저 바보 천치일 따름이었다.
지금, 갖고 놀기는 누가 갖고 노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쏴아.
닫힌 부스 너머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뿌옇게 흐려진 유리 벽 너머에서 움직이는 정은채의 인영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흡사 주인이 돌아오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개 꼴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건가.
습기로 가득한 욕실에 긴 한숨 소리가 낮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