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15
14. 먼 사람
행사장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모인 팬들과 관중들로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올해는 하필이면 대한민국 체육상 수여식이 올림픽 유치 행사와 맞물려 크게 오픈된 형식으로 진행되는 까닭이었다. 해서, 천화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연예인들도 대거 참석해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꼭 연말 시상식이나 방송국 행사를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이거 콘서트장이야, 뭐야….”
운전대를 쥔 홍정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밖의 풍경을 훑었다.
펜스로 둘러싸인 행사장의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천윤제를 기다리는 팬들과 카메라가 잔뜩 진을 치고 있었다. 수상자들만 드나드는 입구이니 다른 연예인들을 기다리는 인파라고 볼 수는 없었다. 차창 밖, 사람들의 이목은 오로지 천윤제가 탄 차에 집중되어 있었다.
많은 스포츠 스타 중에서도 천윤제는 극성팬들이 많고 유난스럽기로 유명했다. 에이전시 대표인 천혜진의 엔터 마케팅 전략이 먹힌 것도 유효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 전에 이미, 재능의 싹을 보이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에도 천윤제의 인기는 퍽 대단했다.
어지간한 연예인 뒤통수 후려갈기는 얼굴과 유전자 자체가 다르다는 북미, 북유럽계의 외국 선수조차도 압도하는 훌륭한 체격. 게다가 그 비현실적인 비주얼을 무색하게 하고도 남을 재능까지.
소설이나 만화 속 주인공이라고 해도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이나 들을 설정값을 가진 남자이니, 도리어 주목을 받지 않는 게 불가능했다.
어렵사리 진을 친 인파를 뚫고 주차장 입구에 차를 댔다. 차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도 헤드셋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천윤제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한동안 잠잠했던 그의 심술이 요 며칠 다시금 발동을 거는 것 같았다. 한참 다정하고 친절하다 착각했던 말들도, 행동도 더는 하지 않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섹스를 할 때도 그랬다. 더 이상 저를 안지도, 키스를 하지도 않는, 오로지 삽입과 쾌락에 목적을 둔 성교만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갖고 노는 것 같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 말했던 그날 이후부터였다.
은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뒷좌석의 윤제를 향해 팔을 뻗었다.
“도착했어요.”
그제야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가 대꾸도 없이 그대로 차 문을 열고 나갔다. 행사에 오기 전 협찬받은 명품 슈트를 걸친 그의 뒷모습이 꼭 마네킹이 걸어가는 것 같아 은채는 잠시 넋을 놓고 바라봤다.
하는 짓은 아주 덩치만 커다란 어린애인데,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저 같은 건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이 멀고 아득한 사람이었다. 살며 처음 느낀 감정을 제대로 말 한 번 못 해 보고 접을 생각부터 들게 하는 남자.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세계에 있는 그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안 오고 뭐 해?”
홍정호가 흘긋 뒤를 돌아보고 재촉을 했다. 은채는 멈췄던 발걸음을 또각또각 움직여 걸었다. 그래도 행사 자리인지라 평소와 다르게 챙겨 입고 온 정장 원피스와 구두가 어색했다. 그냥 있는 것도 어색하고 불편한데, 이 옷을 입고 종일 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갑갑해졌다.
앞서 걷는 홍정호를 따라 천화 엔터와 에이전시 소속 연예인과 선수들이 함께 대기하는 홀로 들어섰다. 커다란 홀의 한가운데엔 대기를 하면서 즐길 수 있는 핑거푸드들이 먹음직스럽게 마련되어 있었다.
역시나 천윤제는 어느 곳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장 구석 자리의 소파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변의 연예인들과 선수들도 그런 천윤제가 신기한지 그를 연방 흘긋거렸으나 그는 여전히도 혼자만의 세계에 있는 듯했다. 도리어 주변과 소통을 단절하겠단 듯 헤드셋을 빼지 않고 그저 핸드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저, 저, 사회 부적응자.”
옆에 서 있던 홍정호가 저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헤어샵과 피팅샵을 들러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말 한마디 없이 고압적으로 구는 천윤제의 비위를 맞추느라 진땀을 흘렸던 홍정호였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만. 저 자식 왜 또 저러냐.”
은채는 그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정말로 왜 저러는 건지, 저로서도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보고 있어 봤자 심란하기만 한 광경에서 슬쩍 시선을 떼어 냈을 때였다. 제 앞에 익숙하고도 끔찍한 얼굴의 남자가 다가와 섰다.
짧은 탄식이 샜다. 잠시 잊고 있었다. 고승준이 천화 엔터테인먼트의 직원이라는 걸. 스태프용 목걸이를 걸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놈을 피하기엔 이미 늦은 듯했지만.
“오랜만이네.”
뻔뻔한 미소를 짓는 낯짝에 기가 다 막혔다. 하필이면 제 역성을 들어줄 홍정호도 잠시 자리를 비운 터라 하릴없이 못 본 척, 못 들은 척, 그를 무시하고 스쳐 지나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저 멀리서 삼각관계의 당사자인 여자 직원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라도 보니까 좋다. 보고 싶었는데.”
기막혀 잠시 멈춘 발걸음이, 제게 미련이 있는 까닭이라 제멋대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고승준은 주절주절 개소리를 이어 갔다.
“너 아직도 나한테 화나 있어?”
아직도라니. 애당초 고승준에게 화가 난 적도 없었다. 그저 개자식만도 못한 놈에게 시간과 공을 들였던 제 지난 시간이 아깝고 억울했을 뿐이지.
“닥치고 일이나 하세요.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당하기 싫으면.”
대꾸할 가치도 없어 그대로 쏘아붙이고 홀을 타박타박 걸어 나갔다. 고승준 때문인 건지 뭔지,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구태여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대로 긴 복도 끝의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을 틀고 세면대에 손을 밀어 넣으며 엉망진창인 기분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겨우 스토커 같은 놈의 연락을 피하는가 싶었는데, 이렇게 불시에 떡하니 마주쳐 버릴 줄이야. 이제는 고승준이라면 정말 이가 갈릴 만큼 지긋지긋했다.
핸드 타월에 젖은 손을 닦고 머리칼을 길게 쓸어 올려 단정히 정돈했다. 거울 속에 비친 두 뺨이 시뻘겠다. 차림새도, 상황도 갑갑하고 짜증스러워 열이 오른 듯싶었다. 손등으로 뺨을 식히듯 감싸 쥐고 화장실을 나섰다.
문득, 문 앞에서 익숙한 스킨 향이 제 앞을 가로막았다.
천윤제였다.
“왜…. 따라왔어요?”
고개를 한참 꺾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한 그는 삐딱하게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선 불량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왜. 또 뭐가 불만인 건지.
“아까 그 새끼지?”
앞, 뒷말 다 잘라먹고 대뜸 그 새끼냐 묻는 질문에서 그 새끼가 대체 누굴 말하는 거냐고 되물으려는데, 곧바로 뒷말이 이어졌다.
“스토커 새끼.”
하여간에 눈치는 쓸데없이 빨라선.
“누가요?”
그렇다고 답했다가는 괜스레 무슨 일이 날 것 같다는 예감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아니야?”
“뭐가요.”
“아까 너랑 말 섞은 새끼. 스토커, 그 새끼 아니냐고.”
여기선 무슨 말을 해도 천윤제에게 말리겠다 싶어, 답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들어가세요.”
그가 돌아서는 제 손목을 덥석 그러쥐었다. 크고 뜨거운 그 손길에 흠칫해 숨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행여나 누군가 보지는 않을까 걱정부터 돼서.
“사람이 물으면 좀 답을 해. 그 새끼 맞냐니까?”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낮게 뇌까려 묻는 그의 손이 꼭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답을 하기 전까진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단 듯이.
아무리 인적 드문 복도 끝이라 해도 누군가 충분히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선수와 매니저 사이라지만, 모르는 사람들 눈엔 그저 천윤제와 웬 낯선 여자가 마주 선 광경일 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제 손목을 쥔 천윤제를 누군가가 보기라도 한다면 무슨 오해와 말들이 퍼져 나갈지 걱정스러웠다.
은채는 밀려드는 조급함과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다급히 입술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정말 아니냐는 듯, 재차 추궁하는 그의 눈빛이 사나웠다.
“아니라고요…!”
그 위압감을 이기지 못해 되레 목소리를 높이며 손목을 뿌리쳤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 홀에 들어서자, 저 멀리에서부터 저를 응시하는 고승준의 질척한 눈빛이 고스란했다. 어느새 바짝 옆에 다가선 천윤제의 시선도 너머의 고승준을 향하고 있었다. 행여나 제 거짓말이 들킬까 싶어 고승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걸었다. 오늘따라 더 싸늘하게 구는 천윤제의 행동거지들이 퍽 불안했다.
“눈깔을 확 뽑아 버릴까.”
그가 문득 저에게만 들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뭐, 뭐를, 뽑아요?”
“저 새끼 눈깔. 발정 난 개새끼 눈깔로 계속 쳐다보는데.”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요.”
누가 들을까 무섭게 상스러운 말에 그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냥 놔뒀다간 정말로 고승준에게 달려가 물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제야 고승준을 죽일 듯 노려보던 그의 눈이 천천히 제 이마 위로 떨어졌다. 아차, 싶어 저도 모르게 잡았던 손을 놓았다. 커다란 손등에 짧게 맞닿았다 떨어진 손끝이 홧홧했다. 습관이 무섭다고, 이렇게나 보는 눈 많은 데서 경솔하게 굴다니.
그런데 어쩐 일인가. 내내 얼음장 같던 그의 얼굴에 피식, 소리와 함께 웃음기가 번졌다. 그게 이상해 되레 제 미간엔 주름이 졌지만.
“천윤제 선수, 준비해 주세요!”
다행이라 해야 할지. 때맞춰 들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어색한 공기를 갈랐다.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바쁘게 움직이느라 딱히 천윤제와 자신을 주목하는 이도 없는 것 같았다.
“이제야 봐주네.”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쭈욱, 눈도 떼지 않고 저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가서 헤어랑 메이크업 한 번 더 봐달라고 할게요.”
“네가 봐줘.”
돌아서려는 손목이 또다시 붙잡혔다. 머리칼을 깔끔히 쓸어 넘긴 이마 아래, 매끈히 뻗은 눈매가 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매번 헐벗은 모습만 보다가 반대로 완벽히 갖춰 입은 걸 보자니 도리어 묘하게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슬림한 핏의 슈트는 세련되게 어울렸고, 블랙 타이와 핏대 선 손목에 감긴 시계며, 커프스까지 심플한 장신구들조차 찰떡같이 소화해 내는 남자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괜찮아요.”
저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올 것 같은 마음을 숨기고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도.”
말뜻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자 그가 바닥을 향해 비스듬히, 짧게 턱짓을 했다. 조금 전보다 눈가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너도 구두랑 이런 거. 꽤, 괜찮다고.”
차려입은 제 차림새를 말하는 거였다. 별것 아닌 한마디에 어딘가가 찌르르, 간지러웠다.
“가요.”
만족스럽게 고개를 까딱인 그가 돌아서려다 다시 한번 더 저 멀리 있는 고승준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경고라도 하는 듯한 매서운 눈빛에, 고승준이 먼저 눈을 피하고 나서야 그는 스태프가 사라진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가슴께에서 쿵쿵거리는 감각이 터질 것처럼 빨라지고 있었다.
설렜고, 불안했다. 천윤제와 함께 있으면 늘 그랬다. 그의 모든 것, 숨소리 하나에도 터질 듯 가슴이 설레 콩닥거렸고, 더불어 딱 그 크기만큼의 불안을 함께 느꼈다. 부질없는 설렘과 덧없는 감정의 결말에 대한 예감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까닭이었다.
이래서 짝사랑이 을이란 거겠지.
혀를 차며 읊조리던 예슬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홀을 벗어나 행사장의 무대가 빗겨 보이는 좌석으로 들어서자 환한 LED 조명에 눈이 부셨다. 한쪽 구석에 서서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 위에 올라 ‘올해의 대한민국 체육상’을 수상하는 그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흡사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함성과 번쩍번쩍,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가 무대 위의 천윤제를 휘감고 있었다.
문득 실감이 났다. 천윤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한국을 대표하는 체육상을 벌써 3년 연속 수상하고 있다는 게, 저와는 고작 한 살 차이지만 이 어린 나이에 세계를 놀라게 하는 기록을 턱턱 경신하는 천재 선수라는 게, 얼마나 꿈 같은 일인 건지.
저 멀리에서 반짝거리는 그는 제게 참 먼 사람이었다.
천윤제의 말이 맞았다. 고승준은 정말이지 답도 없는 스토커 새끼였다. 행사장에서 마주친 그날 이후, 어떻게 알았는지 고승준은 바뀐 번호로도 자꾸 연락을 해 왔다.
기회를 좀 주라. 나 너한테 할 말 많아, 은채야. 부탁할게.오전 12:20나 진짜 이대로는 너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그런다.오전 12:27그 일 있기 전까진 우리 꽤 잘 맞았잖아.오전 1:08이렇게 피하지만 말고 대화로 풀자. 얼굴 보고 미안하단 말 하고 싶어.오전 1:10
번호를 차단하면 찾아오기라도 하겠다는 협박처럼 들려 겁이 났다. 그대로 핸드폰을 들고 경찰서로 가야 하나 며칠을 고민했다.
답도 없는 새끼.
기다란 햇살이 밀려들어 오는 오후. 휴게실에서 마주친 홍정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후…. 이 새낄 어쩌면 좋냐.”
자신이 보여 준 핸드폰 메시지를 하나씩 넘겨 읽던 홍정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 며칠 고승준이 괴롭힌 게 저뿐만은 아닌 듯싶었다. 홍정호에게도 쉴 새 없이 전화해 저를 바꿔달라, 만나게 해 달라 사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이 새끼 이러는 게, 아무래도 이송이 씨랑 깨져서인 거 같아.”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 눈을 들었다. 이송이가 바로 그 여자였다. 저와 양다리를 걸쳐 가며 만났던 이 에이전시의 재무팀 직원.
“그게, 나도 아예 연락을 안 해서 모르고 있었는데. 간만에 SNS 들어가 보니까 뭐 이별의 슬픔에 취했다는 둥, 외로움이 자길 덮친다, 어쩐다 하는 게, 헤어진 지 좀 된 것 같더라고? 혼자 아주 세기의 사랑을 하셨어.”
홍정호가 제 핸드폰을 꺼내 고승준의 SNS를 보여 줬다. 홍정호의 말대로 그의 SNS만 보면 아주 세기의 사랑을 끝낸 실연남이 따로 없었다.
“알잖아. 고승준, 여자 없이 하루도 못 사는 새끼인 거.”
“미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고승준의 구질구질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솔직히 너랑 연애하면서 그 새끼, 자기가 되게 잘난 줄 알고 우쭐대고 다녔잖냐. 예쁜 여자 친구 사귄다고 주변에서 대단하다, 어쩐다. 막 띄워 주니까….”
그랬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고향 친구들을 만날 때나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려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불러내 트로피 취급하곤 했던 놈이었다.
쉬웠겠지. 그 속 뻔한 짓거리에도 다 만만하게 굴어 줬으니까.
“오늘 밤에도 연락 오면 내일 바로 경찰서 가려고요.”
인내도 더는 한계였다. 더 위협이 되는 일이 생기기 전에 깨끗하게 끝낼 필요가 있었다.
“혹시 선배한테도 또 연락해서 제 얘기하면 전해 주세요. 경찰서 가기 싫으면 작작 하라고.”
“그래. 나도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줄게.”
보고 있던 홍정호의 핸드폰을 다시 건네주려는 찰나였다.
그때, 어디선가 갑작스레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가 그 핸드폰을 휙 채 갔다. 아니나 다를까, 또 남의 핸드폰 채 가는 상습범의 짓이었다.
“저기요.”
내놓으라고 손을 뻗었으나, 어마어마한 키의 그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힘껏 손을 뻗어도 영 닿지 않는 높이가 되어 버렸다. 핸드폰 액정을 쏘아보는 그의 눈동자가 먹잇감을 발견하고 흥미로워하는 짐승의 빛을 띠었다.
“아. 이 스토커 새끼 맞잖아, 뭐가 아니래.”
입꼬리를 비트는 표정을 보아하니, 행사장에서 마주쳤던 고승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 듯싶었다.
도무지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홍정호에게 네 핸드폰이니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신호로 그 옷자락을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그 사이로 들어와 홍정호와 제 사이를 탁, 소리 나게 가로막았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거겠지. 내가 네게 준 상처에 비하면 내가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것도 다 우습겠지. 그런데 어떡해. 이제야 난 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이, 미친.
감정이라곤 한 톨도 안 섞인 AI 같은 톤으로 고승준의 SNS 글을 크게 읽어 내려가는 천윤제의 만행에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 행여나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나 빠르게 사방을 두리번거리곤 입술을 잘근 물었다.
“손버릇이 너무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 왜 자꾸 남의 핸드폰을 허락도 없이 가져가요?”
치미는 짜증을 겨우 억누르며 코앞까지 다가와 선 그를 올려다보며 항의했다.
“또 내 사진 보고 있나 해서 그랬지.”
능글맞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에 비웃음이 잔뜩 서렸다.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억누르며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아니니까 주세요, 얼른.”
그제야 쯧, 혀를 찬 그가 보고 있던 핸드폰을 홍정호에게 툭 던져 돌려주었다. 홍정호는 이젠 뭐 이런 갑질쯤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헤어진 새끼 SNS까지 염탐하는 거 보면 너도 미련이 남았나 봐? 것도 모르고 난 눈치도 없이 굴었고.”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표정이 차갑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느새 웃음기는 찾아볼 수도 없이 싹 지워졌다.
“왜. 이 새끼랑 다시 잘해 보려고?”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에 입술을 꾹 깨문 채 침묵을 지켰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에 적막함마저 느껴졌다. 주변의 소음도, 새하얗게 밀려드는 긴 햇살도 서슬 퍼런 그의 눈빛 속으로 모두 다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게 왜 궁금하세요?”
기 싸움을 하듯 그를 노려보다 어렵게 입술을 뗐다.
“제 사생활이니까 신경 꺼 주세요.”
허, 하며 조롱하듯 내뱉는 헛숨이 사나웠다.
“매니저님께서 구남친 때문에 통 일에 집중을 못 하는데 어떻게 신경을 꺼. 선수는 지겨운 회의 다 끝내고 나왔는데 매니저는 여기서 농땡이나 까고 있고.”
예정 시간보다 회의가 빨리 끝난 걸 가지고. 은채는 그저 입 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며 화를 눌렀다. 트집을 잡을 걸 잡아야 반박이라도 할 텐데, 상대할 가치조차 안 느껴졌다.
“어제 시킨 일은. 다 했어?”
“다 해서 홍보팀에 가져다드렸습니다.”
“강 박사님 병원 스케줄 조정은?”
“네. 했어요.”
“마사지는?”
“네? 오늘은 물리 치료만….”
“마사지 잡아.”
“아니, 원래 정해진 스케줄이….”
“아. 넌 늘 언제나 정해진 계획대로만 움직이나 봐?”
“후…. 회의하다 뭐 화나는 일 있으셨어요?”
회의 중에 또 뭐가 마음에 안 든 게 있었나. 왜 또 심통이 나서 이럴까, 싶었다.
답답해지는 분위기를 회피하려 홍정호가 슬쩍 조용히 발걸음을 떼려 하는 게 보였다.
“선배, 이따가….”
다시 손을 뻗어 홍정호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는데 또다시 커다란 손이 탁, 제 손을 쳐내듯 막는 게 아닌가.
“아, 씨.”
도대체 이 자식이 왜 이러나, 싶어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봤다.
“씨?”
그는 짙은 눈썹이 들썩거리며 제 말끝을 따라 내뱉었다.
어느새 살벌한 기류를 느낀 홍정호는 재빨리 도망치듯 뒷걸음질을 치며 사라지고 있었다. 나른한 볕이 쏟아지는 휴게 공간에 어쩌다 또 천윤제와 단둘이 남게 된 거였다.
어쩌겠는가 싶었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갑은 천윤제이고 을은 저라는 게 이렇게나 명확한데. 짜증스러운 감정을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사지 말씀드려 놓을….”
“왜 신고 안 해?”
“네?”
“진짜 미련이라도 남아서 이래?”
“…….”
“스토킹당하면서 왜 신고 안 하냐고. 진짜 그 새끼랑 다시 잘해 보려는 거 아니고서야.”
“제 사생활….”
“사생활 복잡한 매니저 안 반가우니까, 난.”
“네. 제 사생활 문제로 천윤제 선수한테 피해 가는 일 없게 할 테니까 그만하세요.”
“그게 네 마음대로 돼?”
하…. 말이 통하는 인간이 아니었지.
이젠 기가 다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또라이, 또라이 말버릇처럼 천윤제를 욕하긴 했어도 이렇게나 또라이 같을 줄은 또 몰랐다. 이제는 제 약점으로, 아픈 상처를 건드려 괴롭히려는 계획인 건가 싶었다.
자리를 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더 마주하고 있다간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큰일이 날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였다.
“먼저 차에 가 있겠습니다. 일, 마저 보시고 오세요.”
얄미운 낯짝을 쏘아보며 홱 고개를 돌려 휴게실을 걸어 나왔다. 그대로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그런데.
“은채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은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대로 못 들은 척 열심히 발을 움직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다가온 고승준이 제 앞을 가로막았다.
아, 이 새끼는 왜 또 하필 이런 때 나타나는 건가.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짜증스러워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누구세요?”
제발 꺼지라는 간절함을 담아,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고승준이 잽싸게 다시 앞을 막아서며 제 팔을 붙잡았다.
“놔요. 소리 지르기 전에.”
“은채야.”
역겨운 손을 탁, 뿌리치고 돌아서려는데 고승준이 다급히 다시 제 팔을 붙잡아 왔다.
“나 진짜 소리 질러?”
“질러. 난 너랑 이렇게라도 얘기를 해야겠으니까.”
아주 작정을 한 듯 번뜩이는 눈빛으로 말하는 고승준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나는 그쪽이랑 할 말이 없거든요?”
“30분만. 아니, 10분만. 어? 야, 은채야. 너, 나한테도 해명할 시간을 줘야지.”
기가 막혔다.
“무슨 해명. 무슨 시간. 내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내가 보고 들은 것들, 다 사실이냐고 묻고 추궁할 때 회피했던 거 선배 너야. 기억 안 나? 근데 이제 와서 무슨 해명할 시간을 달라는 거야.”
그때의 배신감과 모욕감, 치 떨리는 상실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갑자기 쓰러진 엄마 때문에 병원에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제 모든 연락과 접촉을 피해 도망만 쳤던 주제에.
“놔!”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은채야. 오빠가 잘못했다. 다 오빠가 잘못했고….”
“이거! 놓으라고요!”
있는 힘껏 손을 뿌리쳤지만 남자의 완력을 이길 순 없었다.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집요하게 잡아 대는 고승준의 손길이 역겨워 소름이 다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오빠가, 많이 반성했어. 그동안 너 그리워하면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뼈저리게… 아악!”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제 팔을 잡고 있던 고승준의 손이 덥석 떨어져 나가며 위로 치켜들리듯 꺾였다. 고승준이 고통에 찬 신음을 쏟아 내며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아니, 이목을 끈 건 고승준이 아니라 그, 천윤제인지도 몰랐다.
“뭐 하는 새끼지, 이건?”
한 손으로 가볍게 고승준을 제압한 천윤제가 느긋한 목소리로 뇌까리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아악! 아! 이, 이거! 놔! 이, 이거!”
놓기는커녕 점점 더 각도를 꺾어 재끼는 천윤제의 손짓에 놀란 고승준이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러 댔다.
“뭐 하는 새끼냐니까?”
“놔! 아악!”
“못 놔.”
“놔, 놔! 놓으…!”
“형이 말하잖아. 싫어도 좀 얌전히 들어, 새끼야.”
“아…! 윽…!”
더 이상 비명도 나오질 않는지, 고승준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입만 볼썽사납게 크게 벌렸다. 그대로 뒀다간 완전히 꺾어 버리고도 남을 또라이인지라, 결국 그만하라는 뜻으로 고승준을 붙잡은 천윤제의 팔을 잡았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의 질감이 선명하게 만져졌다.
“그만해요.”
마른침을 삼키며 간절함을 담아 그를 올려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천윤제 인생에 저까지 구설을 보태고 싶진 않은 탓이었다.
“보는 눈 많아요. 그만하세요. 네?”
그제야 핏줄이 불거지도록 고승준을 콱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손에 스륵, 힘이 풀렸다. 재빨리 팔을 빼낸 고승준이 다른 쪽 손으로 잡혔던 제 팔을 감싸 쥐며 파들파들 날뛰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아주 시끄러웠다.
“뭐랬어, 내가. 진작에 경찰에 신고하랬지?”
“그쪽이 상관할 일 아니거든요?”
그에게만 들릴 만큼 낮고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뭐? 그쪽?”
그런데 뭐가 짜증이 났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목소리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너, 너 뭐야. 하! 천윤, 천윤제! 너…!”
때마침 눈치도 없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고승준이 비틀비틀 끼어들며 천윤제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러더니 누가 봐도 압도적인 체격의 차이에 주춤,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가세요.”
한 발짝 움직여, 고승준과 그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확, 구겼다.
“아. 혹시 두 사람의 애틋한 재회를 내가 눈치 없이 방해한 건가?”
“제 일에 관심 끄시라고요!”
“그러니까.”
천윤제는 사납게 제 말끝을 댕강 잘라냈다.
“그러니까 나도 너 같은 거한테 관심 끄고 싶은데. 네가 먼저 자꾸 눈앞에서 알짱대고 거슬리게 굴었잖아, 짜증 나게.”
이젠 이유 없는 적개심과 짜증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며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건가. 은채는 속이 뒤집히고 부아가 치밀어 발끈, 되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짜증 나는데요? 내가 뭘 했다고?”
“너.”
“…….”
“너 다 존나 거슬리고 짜증 나.”
“…….”
“너 생긴 거. 너 하는 짓. 숨 쉬는 것까지. 머리부터 발끝,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짜증 나.”
“……하.”
어이가 없어 한 박자 뒤늦게 터진 헛숨에 깊은 탄식이 섞여 나왔다. 더불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그대로 시선을 피했다.
역시나 제멋대로, 제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천윤제다웠다. 도대체 또 뭐 때문에 기분이 상해 심술을 부리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다른 때보다도 더 억울하고 서러운 기분이었다. 하필이면 고승준 앞에서 이런 거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도, 제 마음을 아주 대놓고 짓뭉개는 발언을 직설적으로 듣는 것도, 다 참담했다.
이렇게나 저를 짜증 나 하면서 대체 그동안은 어떻게 참았나 싶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천윤제에게 제 진심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길 참 잘했다고.
먹먹해진 시선을 홱 돌려 제 옆에 멍하니 선 고승준을 바라봤다.
“나가요, 선배.”
아무래도 통제 안 되는 또라이 천윤제를 말리느니, 그나마 상대적으로 예측이 가능한 쓰레기 고승준을 데리고 나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우리는, 나가서 얘기해요.”
천윤제와의 갑작스러운 마찰로 어안이 벙벙해진 고승준이 저와 천윤제를 번갈아 보며 눈알을 굴렸다. 은채는 못 본 체, 고승준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걸 고스란히 지켜보고 선 천윤제의 표정이 더 깊게 구겨지는 것 같았다. 아주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푹 우그러진 표정으로, 뜨겁다 못해 불타 재가 될 것 같은 열화 가득한 시선으로 저를 노려보는 거였다.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고승준을 데리고 서둘러 로비를 나섰다. 뒤통수가 아릿할 만큼 얼얼하고 뜨거웠으나 멈추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완전히 이 불편하고 갑갑한 공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치미는 울음을 억누른 목구멍이 얼얼하리만큼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대로 로비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목, 아무도 없는 곳에 다다르자마자 휙 몸을 돌려 섰다. 아직도 뭐가 그렇게 아픈지 한쪽 팔을 감싸 쥔 채 허옇게 질려 있는 고승준이 불쾌한 기색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은채 너, 저 또라이 새끼 수발드는 아르바이트하는 거야? 홍정호 그 자식이 소개해서 하는 거라며? 하…. 내가 이 자식을 진짜…!”
“쪽팔려.”
한때나마 마음에 품었던 그 뻔뻔한 낯짝이 못 견디게 끔찍스러워 입술을 짓씹었다.
“그 여자도 이러는 거 알아요?”
벌써 몇 번이나 마주쳤던 이송이라는 여자의 얼굴이 문득 눈앞에 떠올랐다. 그녀 역시 이별의 당사자일 텐데, 자신이 사귀었던 남자가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싶어서.
“하…. 은채야. 송이는, 걔는 그냥 잠깐. 걔가 날 너무 좋다고 쫓아다니니까 나도 모르게 잠깐 정신이 나가서….”
“미친놈.”
주체하지 못한 욕지거리가 불쑥 튀어 나갔다. 고승준의 눈동자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움칠거렸다.
“이거 봐요, 고승준 씨.”
“은채야, 일단 내 말 좀….”
“닥치고 내 말부터 들어요.”
이를 아득 물고 있는 힘껏 위협적인 목소리를 냈다.
“경고하는데, 진짜 내가 진심으로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나한테 연락하고, 찾아오기만 해요, 어디. 나 진짜 그땐 스토킹당한다고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하, 은채야. 너 화난 마음 이해하는데, 내가 진짜 진심으로….”
“진심은 나도 진심이라니까? 신고한다고, 나도. 참는 거 여기까지야!”
짜증스럽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조금 놀랐는지, 고승준이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제가 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겠다는 듯이.
“그래. 알았다. 나도 한 번에 용서받을 생각 안 했어. 네 마음 풀릴 때까지 오빠가 조용히 기다릴게. 이 말 하려고 왔어. 계속 기다린다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마치 자기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버림받은 비련의 남자 주인공인 양, 가련하고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 놈의 뒤통수를 확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머리를 길게 쓸어 올렸다. 울음을 억누르던 목 끝이 왈칵거리고, 가슴 어딘가가 텅 빈 것 같이 아릿했다.
가까스로 들끓는 감정을 추스르는데.
끼이익-
눈앞에서 낯익은 스포츠카가 요란한 배기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휙 사라져 갔다. 천윤제였다.
보란 듯 저를 버리고 사라지는 차의 뒤통수를 멍하니 응시하며, 결국 참고 참았던 설운 눈물이 터져 흘렀다. 억울했다. 고백도 하기 전에 거절을 당한 마음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이렇게까지 저를 초라한 궁지로 몰아붙이는 그의 매정함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도 끊어 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없이 처량했다.
“나더러…. 어쩌라고.”
울음기 섞인 혼잣말이 잇새에서 짓이겨져 나왔다.
은채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 올리며 새하얀 이마를 천천히 짚었다.
“기분 씨발, 엿 같이 만드네.”
가속 페달을 깊게 눌러 밟으면서도 흘긋, 백미러를 응시하는 윤제의 잇새에서 낮은 욕지거리가 샜다. 거울 속, 새빨개진 눈자위로 멍하니 선 정은채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뭐? 그쪽? 별 볼 일 없는 홍정호한테도, 그딴 개 쓰레기 스토커 새끼한테도 꼬박꼬박 선배, 선배 잘만 불러 주면서 제게는 성까지 딱 붙여 ‘천윤제 선수’라 호칭하더니만. 이젠 아예 정나미 떨어지게 ‘그쪽’이라니.
허구한 날 몸을 비비고 살을 섞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아직도 비싼 건지, 제게는 여전히도 마음 한 조각 내줄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이제 와 판단하건대 정은채는 싸가지가 없을 뿐 아니라 잔인하고 냉정한 여자였다.
나쁜 년.
그저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여자를 제 영역 안에 들였던 게 후회스러웠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간지럽고 시끄러워질 줄 몰랐던 까닭이었다. 아니, 이젠 숫제 골이 댕댕 울리기까지 했다. 자꾸 제게 선을 긋고 벽을 쳐 대는 정은채 때문에 시끄러운 머릿속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처음엔 그저 몸이 끌린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돌이켜 보면 끌리는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몸이 주는 쾌감에 길들어서 그녀를 보고, 안고 싶은 게 아니었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매일 몸을 섞어도, 그렇게나 원했던 삽입 섹스를 실컷 해도 도리어 갈증만 깊어질 따름이었다. 마음 한 조각 없는 행위는 제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뻥, 커다랗게 뚫린 그 구멍 안으로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손쓸 새도 없이, 단번에.
모르겠다. 어떻게야 그 무너지는 것들을 잡아 올릴 수 있는지, 뚫린 구멍을 메울 수 있는지, 지글지글 끓는 이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
“하…….”
아니, 아니었다.
아니다. 안다. 어쩌면 이미 답은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씨발.
끼이익.
떠올라선 안 될 단어 하나가 눈앞에 둥실, 떠오른 순간 차를 급하게 갓길에 멈춰 세우고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금 뽀얗고 말간 그 얼굴을 떠올린 순간, 전신에 과도하게 열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