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18
17. ‘Yes’ or ‘Yes’
소리 없이 틀어놓은 TV 화면에서는 이 주 전 끝난 아시안 게임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여지없이 천윤제의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 은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지난 이 주 간 보고 또 봤던 장면이었다. TV만 틀면, 핸드폰만 켜면 나오는 경기였으나 볼 때마다 정신을 놓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리운 얼굴을 언제든 볼 수 있어 다행인 한편 괴로웠다. 잊을 만하면 보게 되고, 지울 만하면 상기되는 그 얼굴을 다시는 실제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서러운 마음이 치받는 거였다. 어차피 결국은 다 끝나 버렸는데.
애써 고개를 떨구고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테이블을 닦았다. 어느새 붉고 노랗게 변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진 창문 밖 풍경에 눈이 부셨다.
때맞춰 예슬의 이모가 다시 아이스크림 가게 문을 열었다. 잠시 식당으로 업종을 바꾸어 운영을 하다가 결국 운영이 좀 힘들었는지 내부 인테리어까지 싹 바꾸고 다시 새롭게 아이스크림 가게로 오픈을 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로선 어쨌든 퍽 다행인 일이었다. 일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닦아 댔는지 뽀득거리는 테이블의 물기를 걷어 내려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뜬 이름은 뜻밖에도 홍정호였다.
“네, 선배.”
– 바빠?
“아니요, 아르바이트 중이긴 한데, 지금은 손님 없어요. 왜요?”
– 아니 그…. 별일 없지?
“네?”
– 어, 그게, 음, 잘 지내나 걱정돼서.
“잘 지내죠, 당연히.”
별안간 안부를 묻는 게 퍽 생뚱맞았다. 별일이 없으면 연락은커녕 평소 서로의 안부를 물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행여 일을 그만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러는 건가.
– 그래, 별일 없으면 다행이네.
“설마 고승준한테 무슨 소리 들었어요?”
– 아니, 왜? 그놈 또 너 괴롭혀?
일주일 전쯤, 갑작스레 또 가게 앞에 나타나 저를 붙잡는 고승준을 견디다 못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간 스토킹을 했던 증거는 충분했고, 경고도 충분히 했으니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합의는 절대 없다고 며칠 으름장을 놓았더니 절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꼴이 하찮아 각서를 받아 둔 일이 있었다. 혹여 그 일로 전화를 걸었나 싶었는데,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 합의해 주지 말지 그랬냐, 미친 새끼.
“인생 조지고 싶으면 또 나타나겠죠.”
– 어휴, 넌 무슨 마가 끼었냐. 왜 다들 너한테 집착을 이렇게….
“다들?”
누가 또 그런다는 건지 건지 이해하지 못해 말끝을 잡고 되물었으나 홍정호는 별반 답이 없었다.
– 암튼 잘 지내면 됐다. 바쁠 텐데 이만 끊을게.
“저기, 선배.”
황급히 통화를 매조지려는 그를 불렀다. 망설이듯, 붉은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잘 지내죠?”
– 어? 나도 뭐 잘 지내….
“아니…. 천윤제 선수요.”
그의 안부가 궁금했다. 어떻게 지내는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 아… 뭐….
홍정호가 제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며칠 전이었던가. 최대 스포츠 일간지에 천윤제의 단독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아시안 게임에서의 활약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역시나 눈을 끌었던 건 금하나와의 열애설을 직접 부인한 부분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저 기자들의 오해와 추측일 뿐이었다는 게 주된 해명의 내용이었으나 제 눈으로 직접 본 게 있다 보니 쉬이 믿기는 어려웠다.
하기야, 이제 와 제가 믿고 안 믿고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잘 지내겠죠, 뭐.”
답이 들려오기도 전, 먼저 작게 읊조렸다. 어차피 제가 궁금해하지 않아도 천윤제는 잘 살고, 잘 지내고 있을 게 뻔했다.
전화를 끊자, 더 심란해진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저도 모르게 또 천윤제를 떠올린 탓일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구질구질, 혼자서 청승만 떨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혼란함을 다잡듯 TV 채널을 돌리고 주머니 속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끝. 이젠 정말 다 끝이다.
다 끝난 줄 알았다.
“영업 끝났는데요.”
그러나 그게 온전히 저만의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바 주제에 가게 문을 마음대로 닫아.”
낮은 목소리로 뇌까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목 끝이 꽉 막히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치솟은 커다란 키와 딱 벌어진 어깨.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윤제였다.
제주도에서 그렇게 도망쳐 헤어진 지 딱 2주 하고도 이틀이 더 지난 날이었다. 그날 밤새도록 울리던 핸드폰은 다음 날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고, 행여나 또 집으로 찾아오진 않을까 싶었던 일도 기우였단 듯 일어나지 않았다. 반가웠고, 씁쓸했다. 역시나, 그 또한 내심 끝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서.
그런데 왜.
이제 조금은 마음을 추스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예고 없이 나타나 버린 건가.
“뭐 해. 주문 안 받냐?”
시큰거리는 눈동자를 연방 깜빡이며 입술을 짓이기는데 그가 카드를 내밀었다.
“민트 초콜릿 하나, 딸기 요거트 하나.”
그럴 리도 없었으나 그저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다고 생각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태연했다.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들어온 사람처럼 더없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가 내민 카드를 받아 쥐는 찰나 스친 손끝이 찌르르 울렸다. 제게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는 그를 외면하며 포스기 화면으로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8천 원이요.”
들끓는 감정을 숨기며 영수증을 내밀고 아이스크림이 진열된 부스 앞으로 갔다.
문을 닫기 전인 늦은 시각, 비좁은 아이스크림 매장에는 오로지 천윤제와 저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주문한 두 가지 아이스크림을 각각 컵에 퍼 담고, 픽업대 앞에 버티고 선 그와 마주 섰다.
“여기, 나왔어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올려놓은 아이스크림을 쓱 밀어 내미는데, 딸기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제 앞으로 되돌아왔다.
“이건 네 거.”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뻔뻔하게 깜빡거렸다.
“딸기 잘 먹잖아, 매니저님. 우유도 딸기 맛으로만 드시고.”
그러고는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담긴 컵만 쥐어 들고선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거였다. 이제야 긴가민가했던 그의 의도가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뭐 해요, 지금?”
“아이스크림 먹는데.”
커다란 손에 쥐니 꼭 미니어처처럼 작아져 버린 스푼을 든 그가 보란 듯 아이스크림 한 입을 크게 삼켰다. 불그스름한 잇새 사이로 사라져 버린 민트빛 덩어리가 아스라했다.
“왜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녹는다. 얼른 먹어.”
“저 먹겠다고 한 적 없거든요?”
“먹기 싫으면 버려. 나 혼자 먹으면 먹고 싶을까 봐 준 건데.”
퍽 침착한 그 대꾸에 제가 더 황당한 기분이었다. 머리를 길게 쓸어 올리며 그를 노려봤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또 내 뒤….”
“그딴 스토킹 안 해도 입 가벼운 인간 하나면 이 정도는 10초 만에 알아낼 수 있어. 다 좋은데, 스토커 취급은 하지 마. 그동안 죽어라 참았던 거 존나 억울한 기분이니까.”
아무래도 범인은 홍정호인 듯싶었다. 며칠 전 괜히 전화를 걸어와 수상쩍게 굴 때부터 불길하긴 했다.
“왜 왔어요?”
“보고 싶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는 그의 말에 가슴이 덜커덕거렸다. 태연한 그가 밉살스러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대체 보고 싶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걸까.
“연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불쑥….”
“너도 그랬잖아.”
“…….”
“연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불쑥. 사라졌잖아, 인사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두 입 만에 다 삼킨 그가 빈 컵을 톡, 테이블 위에 올리며 다리를 꼬아 앉았다. 의자에 깊게 기대어 앉고도 긴 다리가 많이도 남아 무릎이 한참이나 위로 솟았다.
“누구 맘대로 도망을 가?”
“하… 도망은 무슨…. 알잖아요. 원래 계약 기간이 경기 끝날 때까지였어요. 끝났잖아요, 다.”
“그래서 끝나자마자 내뺐어?”
“내뺀 게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도망친 게 아닌데 왜 인사도 없이 꺼져서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데?”
“…….”
“네가 바라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선 지키고 예의 차렸잖아, 얌전히.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했어. 하지 말라는 거 안 했고. 근데 그 결과가 도망이야? 이렇게 말도 없이 내뺀다고? 정은채, 너 양아치야?”
“…하.”
조금은 추슬렀다고 생각한 마음이 다시 울컥거렸다. 별안간 나타나 저를 들쑤시고 헤집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래요. 그럼 지금 해요, 인사.”
고작 인사 없이 사라진 거로 제게 심술을 부리고 괴롭힐 목적으로 온 거라면 이 소모적인 시간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잘 가요. 됐죠.”
쏘아붙이듯 입술을 뭉개며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저를 보는 그 눈빛이 원망스러운 까닭이었다.
“가세요. 뒷정리하고 가게 문 닫아야 돼요.”
“그러네. 닫을 시간이네.”
그는 손목시계를 흘긋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가자. 데려다줄게.”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갈수록 뻔뻔해지는 그의 태도에 처음 울컥했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어이없고 황당한 기분만 커져 갔다.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앙다물었다.
“왜 날 데려다줘요, 가라니까요?”
“싫어.”
“하. 왜요?”
“가기 싫으니까. 너랑 있고 싶으니까.”
더 말을 섞으면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가게 안에 흩어진 쓰레기들을 한군데 모아 담고, 쓰레기통을 비우려 봉지를 잡아 드는데, 뒤에서 커다란 손이 훅 빼앗듯 봉지를 채어 갔다.
“이런 더럽고 무거운 거 들면서 시급 얼마 받냐. 그냥 나랑 일하는 게 편하고 일도 쉽고, 더 낫지 않아?”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돌려 이번엔 아이스크림 통을 교체하려는데 또 성큼,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섰다.
“나랑 있으면 편하게 운전도 해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는데. 왜 싫어?”
“…하.”
일을 도와주겠다는 건지, 방해를 하겠다는 건지. 가는 곳마다 길을 가로막는 인간이 퍽 밉살맞았다. 아무래도 내일 일찍 나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앞치마를 벗어 놓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가게 문을 열어젖힌 채 서 있었다. 부러 눈길도 주지 않고 타박타박 열린 문 사이로 걸어 나가자 등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신었네.”
아차 싶어 발끝을 내려다봤다. 하필이면 그가 선물해 준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숨기고픈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초조해졌다.
“도망가라고 준 거 아니었는데.”
그가 도망치려는 제 손목을 부드럽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모자 아래로 마주친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반짝였다.
“아무 짓 안 해. 데려다만 줄게. 타.”
그가 제 뒤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손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은 강제하는 힘도, 위협도 전혀 느껴지지 않고 부드럽기만 했으나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자 그가 슬쩍 손에 힘을 주어 끌었다. 맞닿은 살갗에 주체할 수 없는 열이 끓어올랐다.
기어이 조수석 앞으로 끌려가 그가 열어 준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가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걸어오는 그 짧은 찰나에도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보고 싶었던, 꿈에서도 그리웠던 그가 다시 저를 찾아왔다는 게 눈물 나게 설레고 좋아서였다. 이런 저를 예슬이 본다면 분명 미친년이라고 욕을 할 터였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던가. 차에 태우는 그를 단호히 뿌리치지 못한 건 순전히 제 어리석은 감정 탓이었다.
그가 차에 오르자 그리웠던 향이 더 짙어졌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지 않으러 부러 고개를 더 창밖으로 꺾고 운전석을 외면했다. 운전을 하면서도 흘긋흘긋,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왼쪽 뺨에 고스란히 느껴졌으나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도저히 담담할 자신이 없었다.
“한 번을 안 쳐다봐 주냐.”
멀지 않은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선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얼굴 좀 보여 주라.”
“…….”
“응?”
마른 입술을 꾹, 감쳐무는데 따뜻한 체온이 제 작은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돌려 당겼다. 내내 피하려고 했던 눈이 저를 직시하며 가늘어지고 있었다. 또,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댔다.
“그래도 보니까 좀 살 것 같다.”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에 입술이 절로 달싹였다.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시선이 느긋이 떨어져 나갔다. 골목길 안으로 들어선 그의 차가 부드럽게 돌며 천천히 멈춰 섰다.
“갈게요. 다신 볼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행여나 또 그에게 손목을 잡힐까 싶어 통보하듯 내뱉고 급히 차에서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뒤쫓아 내린 그가 어느새 제 앞을 가로막았다.
“왜 보지 말자는 건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천연덕스럽게 저를 내려다보며 묻는 그에게 인상을 썼다.
“우리가 더 봐야 할 이유 있어요?”
“말했잖아. 보고 싶었다고. 그거면 이유가 되는 거 아니야?”
“아직도 나랑 뒹구는 데 미련이 남았어요? 할 만큼 해서 이제 나한테 흥미 떨어진 거 아니었어요?”
“흥미가 떨어져?”
픽, 입매를 비트는 그의 얼굴에 자조가 어렸다.
“나 그날 시상식도 불참하고 공항에 너 쫓아갔어. 너 붙잡으러. 알잖아.”
그날, 천윤제의 6번째 금메달 시상식에는 손성욱이 대신 올라갔다. 시상식 불참의 이유는 부상 부위의 갑작스러운 통증 탓으로 보도가 됐다. 다른 때 같았으면 뭐든 구설이 될 추측과 소문부터 퍼졌을 터였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워낙에 경이로운 기록을 기록한지라 되레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시상식에 나오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임에도 기어코 기록을 경신한 천윤제를 찬양하면서.
그러나 실상, 그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쉬이 믿기는 힘들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자신의 바람과 같은 이유일 거라 생각지도 않았고.
“또 나 때문이네요. 다 내 탓이고.”
“…….”
“말이 돼요? 나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고요?”
여유로운 척 코웃음을 치면서도 방망이질해 대는 내심을 숨기기가 어려워 저릿한 손끝을 꾹 말아 쥐었다.
“혹시 나 좋아해요?”
내 하지 못했던 고백을 이런 식으로 에둘러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질문을 가장한 고백. 이미 이전에도 한 번 했던 적이 있다. 첫 섹스 이후 한 번 더 자 달라며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그를 조롱하듯 던졌던 그때 그 질문 말이다.
무거운 마음을 감추려 외려 더 가벼운 마음을 가장하며 피식, 헛숨을 쉬며 그를 비꼬듯 올려봤다.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쓸데없는 말로 자꾸 사람을 이렇게 들쑤셔….”
“맞아. 좋아해.”
푹 가라앉은 목소리가 공명처럼 깊게 울렸다. 그 소리에 위태롭던 심장이 덜커덕, 발끝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또 장난질이라 치부하기엔 그때의 눈빛과 전연 다른 그의 무거운 동공이 올곧게 저를 직시해 왔다.
“장난 좀….”
“장난 아니야. 단순히 너 안고 싶어서 대충 지껄이는 말도 아니고.”
제 속을 읽은 그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내가 정은채, 너 좋아해. 그래서 이래. 네가 이렇게 나한테 선 긋고 벽 칠 때마다 미칠 것 같고 돌아 버릴 것 같아.”
“…….”
“널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지는 꽤 됐는데, 무턱대고 고백하면 네가 이럴까 봐 말 못 했어. 장난이라고 하고, 안 믿어 주고, 도망칠까 봐. 근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넌 안 믿을 거고 도망칠 거 같아서 솔직히 다 말하는 거야.”
“…….”
“진심이야. 좋아해. 좋아서 죽겠어, 네가.”
단호한 목소리가 단단하게 들려왔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까. 남자의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고장 난 이성에 모든 사고가 단번에 정지했다. 울컥대는 감정이 목구멍을 치받고 밀려 올라왔다. 설마 이 남자의 좋아한다는 의미가 제가 아는 것과 다른 의미인 건가. 대번 의심부터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천윤제가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게 쉽사리 믿을 수 있는 말은 아니므로.
“넌 아니야? 넌 내가 그렇게 싫어? 그냥 떡 칠 때나 내가 필요해? 내가 너한텐 따먹고 버리면 그뿐인 존재야?”
연쇄적으로 들려오는 어이없는 질문에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하, 나더러 싫다고, 짜증 난다고 소리 질렀던 사람, 천윤제 선수예요. 기억 안 나요?”
“전혀 진심 아니었어. 혼란스러워서, 나도 내 감정이 뭔지 몰라서 지껄인 개소리였을 뿐이야.”
과거의 실언을 순순히 인정하는 그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전혀 천윤제답지 않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천윤제의 진심이 무엇인가.
“모르겠어요. 뭐가 진짠지.”
무려 천윤제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는데도 어째 마음은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아닌 건지 쉬이 판단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이렇게나 진심인 것처럼,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천윤제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분이 급변하고 쉬이 싫증을 느끼며 금세 변덕을 부리는 인간.
당장은 그저, 몇 달을 옆에 붙어 있던 저라는 존재가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한 허전함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과하게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간 그와 만나고 헤어졌을 수많은 여자를 떠올려 보면 도리어 답은 선명했다. 그저 잠깐 지나가는 바람. 그 바람에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걸 견디지 못할 만큼 그는 연약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 마음이, 이 착각이 과연 얼마나 갈까. 오히려 되묻고 싶어졌다.
“네가 보고 있는 사람. 네 앞에서 이러고 열심히 애원하고 있는 내가 진짜야.”
“왜요?”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왜 갑자기 나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육체적으로, 몸이 끌렸던 거는, 그래요. 차라리 그건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요.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날 그렇게 대놓고 싫어해 놓곤 섹스 몇 번 했다고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됐다는 게 말이 돼요?”
“지금 내 말을, 내 진심을 못 믿겠다는 거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천윤제 선수 같으면 쉽게 믿겠어요? 날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잘난 여자들 다 놔두고 하필 나를, 왜….”
“정은채 너 존나 예뻐. 매력 있고.”
“…….”
“그래서 첫눈에 반했나 봐. 말했잖아. 처음 만났을 때 너 우는 거 보고 훅 갔다고.”
그게 그 말이었던가. 제 기억 속 해석과 다른 그의 이야기에 혼란스러웠다. 예쁘단 말이, 매력 있다는 말이, 첫눈에 반했단 말이 이렇게나 설레고 떨리는 말인 줄 전혀 몰랐다.
“어떻게 할까. 내가 어떻게, 뭘 해야 믿어 줄래?”
말없이 입술만 꾹 짓깨물고 있는 저를 내려다보던 그가 답답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떨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선 건데, 넋이 나가고 머리가 어지러워 숨만 겨우 내쉬고 선 건데….
“후……. 정은채, 나는.”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가 초조함에 삐끗, 갈라져 나왔다.
“나는 지금 너한테 너무 안달이 나 있다고. 너 도망친 그 날도 당장 쫓아가서 네 집 문 부수고 네 얼굴 보고 싶었던 것도 참았고, 폐막식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것도 참았고. 지난 2주 동안 너 보고 싶어서 시름시름 앓았는데…. 이대로 정말 딱 죽겠구나, 싶을 만큼 네가 보고 싶었는데도 참았어. 너한테도 시간을 주려고. 아니면 영영 놓칠까 봐. 지금 내가 제일 무서운 게 그거라서.”
“…….”
“그래서, 지금도 존나 점잖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씨발, 미칠 것 같다고.”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는, 진지하고 뜨거운 눈동자가 저를 향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좀 좋아해 주라. 아니, 나 좀 봐주면 안 돼? 아니, 아니…. 그냥 내가 너 계속 보게만 해 줘. 그만 보자는 말 하지 말고,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줘.”
천윤제답지 않은 표정과 말투였다. 퍼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정말로 안달이 나선,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 새카만 눈동자 속에 비친 제 얼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얼굴에서 본 건 바로 제 모습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아직은 믿을 수 없고 당황스러운 고백이었지만, 그럼에도 믿고 싶었던 건 오롯이 그 때문이었다.
“사귀자.”
대뜸, 그의 잇새에서 예기치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뭘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황당한 이야기였다.
“나랑 연애해.”
“그냥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해 놓곤 금세….”
“그러니까. 네 옆에 있어야 하니까 연애를 해야지. 아니면 그거 스토커라며.”
“…아뇨, 하.”
“사귀자. 내가 최선을 다할게. 나랑 사귀어. 어?”
보통의 사람과는 전혀 사고의 흐름이 다른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잠시 머릿속이 막막해졌다.
“늦었어요. 그만하고 가요.”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더는 천윤제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대화를 억지로 매조지고는 시선을 피해 그를 보란 듯 스쳐 지났다.
“내일 또 올게.”
뒤통수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좋아한단 말에 대한 대답, 사귀잔 말에 대한 대답. 네 대답 들으러 오겠다고. 어?”
결국 오지 말라고 쏘아붙이지 못하고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타박타박, 계단을 올라 3층, 집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조금 열린 커튼 너머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커다란 인영이 눈에 띄었다. 먼발치에서의 그림자만으로도 존재감이 확연한 그였다.
보름 만에야 다시 본 천윤제의 얼굴은 여전히 설렜고, 가슴 뛰었다. 그런 남자에게서 좋아한다,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단 게 꿈 같았다. 그런데도 심장은 도리어 더 깊이 침잠해 들었다. 겨우 다잡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또 한도 끝도 없이 흔들리기 시작해서였다. 기실, 연약한 사람은 천윤제가 아니라 저였다.
탁, 어두운 방에 불을 켜자 그제야 돌아서 차에 올라타는 그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지금 너한테 너무 안달이 나 있다고.’
‘그러니까 나 좀 좋아해 주라. 아니, 나 좀 봐주면 안 돼?’
그동안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보고 나니 더 후회스럽다. 진짜로 어디 멀리 도망이라도 가 버릴 것을.
하여튼, 천윤제. 어쩌다 이 엉망진창인 인간을 좋아하게 됐나, 싶었다.
은채는 슬쩍, 저도 모르게 포스기 액정의 시간을 확인했다. 마감 시간까지 아직도 2시간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퇴근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마감 시간에 맞춰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천윤제를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천윤제는 마감 시간 30분 전에 나타나 마감 청소를 같이하고는 집까지 바래다주는 짓을 벌써 일주일 넘게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핑계를 대는 대답은 이미 해 줬다. 좋아한다는 말에 대한 대답, 사귀잔 말에 대한 대답. 모두 다 NO라고.
그런데도 포기를 모르는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그는 계속해 대답을 요구했다. 결국 자신이 정해 놓은 답을 들을 때까지 버티겠단 소리나 다름없었다.
딸랑.
유리문에 달아 놓은 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예슬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더 빡빡해진 수업 일정에 그녀는 요즈음 들어 허덕이고 버거워하는 중이었다.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수업 지금 끝났어?”
“어, 죽겠다.”
“윤 교수님 여전하시네.”
“나 초콜릿 왕창 들어간 걸로 하나 주라. 당 떨어졌어.”
지친 얼굴로 내미는 그녀의 카드를 받아 들고 결제를 했다.
아직 예슬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천윤제가 찾아왔고, 다시 그의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는 걸. 제 고민을 털어놓기엔 본인 사정만으로도 퍽 지치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나중에 말하면 또 소리를 버럭, 지를 일이긴 했다.
“나도 다음 학기엔 휴학할까 봐. 너무 힘들어.”
초콜릿 알갱이가 잔뜩 박힌 아이스크림을 받아 든 예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다음 학기에 복학할 건데, 넌 휴학한다고?”
“복학하게?”
“해야지.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까.”
“치료는? 너 그 매니저인지 나발인지 그 일 하느라 치료랑 상담도 제대로 못 받았잖아. 근데 복학할 수 있겠어?”
“수영장 들어가는 과목만 일단 좀 미루게. 전공 실기 하나는 그래도 다행히 첫 학기에 들었으니까….”
“너 당장 치료 상담부터 해. 종일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지 말고.”
“그래야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예슬의 긴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괜히 내가 그 일을 하라고 부추겨서는. 시간만 빼앗기고 마음만 더 심란하게 만들어 놨네.”
예슬은 자신이 일을 권했던 걸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돈 많이 벌어서 고마운데, 뭐.”
“맛있는 거나 좀 사 주면서 고맙단 소리를 하든지.”
“난 아직 저녁도 못 먹었거든?”
옆에 놓인 보름달 빵과 딸기 우유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문득 허기가 지자, 옥돔 스테이크와 전복 리조또가 먹고 싶어졌다. 그랬다. 제주도에서 천윤제가 데리고 갔던 그 레스토랑의 음식 말이다.
사람의 입이란 참으로 간사했다. 빵 쪼가리나 뜯어 먹던 싸구려 입맛이 그새 고급이 되어 주제도 모르고 욕망을 드러내는 걸 보면, 참….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천윤제 때문이 아니던가. 먹을 걸로 사람 유혹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 알고도 넘어간 제 탓이 더 컸지만.
아. 그럼 마음이 간사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잠깐만 가게 좀 봐줘.”
이왕 예슬이 왔으니 잠깐 뒤에 가서 빵이라도 먹고 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손님도 없는데 그냥 여기서 먹지, 청승은.”
쯧쯧, 혀를 차면서도 어느새 제 앞치마를 주워 입고 있는 예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가게 뒤편으로 걸어 나왔다. 공원과 연결되는 골목길 가로등 밑에는 작은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자연스레 벤치에 앉아 빵을 베어 물고 우유를 쭉 빨아 마셨다.
밥 먹기 귀찮을 때면 가끔 하는 짓인데, 예슬의 말대로 어쩐지 오늘따라 청승맞은 것 같기도 했다. 분명 기분 문제일 거였다. 따지고 보면 실연은 제가 당했는데 도리어 자기가 피해자처럼 굴고 있는 천윤제 때문이었다.
지난 일주일 넘게 그는 앵무새처럼 사귀자, 연애하자는 말을 반복해 댔다. 꼭 처음 섹스를 하고 났을 때 같았다. 다시 하게 해 달라며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를 몰아붙이면 도망갈까 봐 무서워 죽겠다는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다.
여전히 제멋대로. 막무가내.
“나쁜 놈.”
떠올리면 욕밖에 나오지를 않는 천윤제 생각에 주머니 속 담배를 꺼내 들었다. 니코틴이 당기는 걸 보면 확실히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단 증거였다.
“하….”
돛대였다. 며칠 전부터 한 개비, 한 개비씩 피우던 게 기어코 끝을 본 모양이었다. 입술에 물고 불을 붙이자 치이익, 불꽃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폐부 가득 뿌연 연기가 스며드는 느낌이 고스란해 숨을 더 크게 들이쉬었을 때였다. 원래 생겨 먹은 기도가 작은 건지 물을 마시다가도 쉽게 사레가 들리곤 하는데, 훅 들이닥치는 매운 연기에 저도 모르게 기침이 터졌다.
“콜록…!”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연달아 기침을 해 대는데 문득,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익숙한 체향. 콜록거리면서도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잘 빨지도 못하면서, 담배는.”
손가락 새에 끼워진 담배를 훅 빼앗겼다. 천윤제였다.
“콜록, 줘요, 콜록!”
다시 달란 듯 손을 내밀었으나, 이미 피우던 담배를 제 입가로 가져간 그가 후, 하고 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물기가 어려 새빨개진 눈앞이 어른거렸다.
“우리 간접 키스했다.”
보란 듯 필터를 머금은 입술이 붉게 달싹이고 있었다. 깊이 빠느라 움푹 팬 두 뺨이 퍽 뇌쇄적이다.
“너도 다시 빨아 볼래?”
“미친.”
겨우 기침이 잦아들었다. 어이가 없어 발개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잘 뻗은 입매가 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검은색 티셔츠의 후드를 깊이 눌러써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의 얼굴에 음영이 깊었다. 그 음영에 도리어 이목구비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았다.
예기치 않은 그의 등장에 시간을 확인했다. 행여 제가 시계를 잘못 봤나 해서. 그러나 아니었다. 아직 마감까진 2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고, 여느 때 그가 오던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아직 사람 많은 시간인데.”
사람이 꽤 많이 다니는 저녁 9시, 학교 앞이었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만큼 존재감 확연한 덩치와 또렷한 이목구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천윤제가 아니던가. 행여나 누구 한 명이라도 그를 알아보는 날엔 당장 SNS에 사진이 올라오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번 그게 제일 불안했는데, 오늘따라 사람도 많은 시간에 불쑥 나타난 그가 영 못 미더웠다.
“일찍 오면 더 오래 볼 수 있잖아.”
“가게 마감하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았는데, 지금 계속 기다리겠다는 거예요?”
“얌전히 구석에 앉아서 보기만 할게.”
“아니, 그러다 누가 알아보면….”
“바라는 바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자신을 응시했다. 또 이렇게 사람을 빤히 바라봐선 괜히 열이 오르게 한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알아보고 소문 좀 내줬으면 좋겠다. 천윤제 지금 정은채한테 반쯤 미쳐 있다고.”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럼 나 뼈도 못 추려요, 팬들한테.”
“이참에 사귄다고 발표하면 되지, 뭐. 공개 연애. 그런 거 할래?”
“미쳤어.”
어째 점점 더 미친 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았다.
“난 다 준비됐는데, 넌 언제 넘어올 거야?”
“넘어가긴 뭘 넘어가요.”
“이제 그만 넘어와. 나 너무 힘들어, 정은채.”
“힘들면 그만….”
“그만하는 게 안 된다니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싶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경주마처럼 그것밖에 볼 줄 모르는 남자임을 잘 아는데. 도대체 무슨 고집인지 몰랐다. 차라리 예전처럼 그저 하룻밤 잠이나 자자고 하면 그게 더 속은 편할 성싶었다. 사귀자느니. 연애를 하자느니…. 하는 말마다 죄 헛소리처럼 들렸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마음들을 조각조각, 누더기처럼 깁는 기분이었다. 어렵사리 겨우 잘라낸 마음을 말이었다.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면 안 돼? 보니까 맨날 손님도 없던데.”
“알바 주제에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거든요, 그게.”
“그래서 내가 이 가게를 그냥 사 버릴까 싶어. 내가 사장이면 너랑 종일 놀 수 있을 거 아냐.”
연기를 내뿜으며 제법 진지한 얼굴로 건물을 돌아보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게까지 더 얽히지는 말죠.”
“난 더 더럽게 얽히고 싶은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말을 섞을수록 더 휩쓸리기만 할 뿐이라.
“기다릴 거면 차에 가서 얌전히 기다려요. 가게 들어올 생각 하지 말고.”
그대로 다시 가게로 향했다. 분명 그가 제 말을 들을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방심한 게 문제였다. 가게 안에 예슬이 있음을 잠깐 잊었던 탓도 있었고.
딸랑.
울리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예슬의 눈동자가 제 뒤의 천윤제에게로 가 천천히 붙박였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더니 돌연 뒤에 천윤제를 달고 나타난 제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싶어서.
“뭐…야?”
“…그게, 그렇게 됐어.”
이어질 예슬의 질타를 감수하겠단 듯 말꼬리를 흐리며 이마를 짚었다.
“안녕하세요, 천윤제 선수. 저 기억하세요? 그때, 아침에, 그, 은채 집 앞에서 마주쳤는데.”
그런데 웬일인지 웃는 낯의 목소리가 잔뜩 상기되어 흘러나왔다.
“아, 저는 은채 친구예요. 문예슬입니다.”
예슬은 앞으로 성큼 나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저와 함께 개새끼, 소새끼, 해 가며 천윤제를 욕할 때는 언제고 완전히 얼굴을 바꾼 그녀의 친절이 가증스러웠다. 저더러는 단호하게 끊지 못한다며 그렇게나 혹독한 질타를 해 놓곤. 가만 보면 얼굴에 약한 건 저보다는 예슬이었다.
“네, 기억하죠.”
천윤제도 제법 멀쩡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중간에서 어이가 없는 건 혼자뿐인 듯싶었다.
“근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예슬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은채 보러요.”
필터라곤 요만큼도 없는 직설적인 그의 대답에 제가 더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하하, 뭐야. 두 사람 되게 친해 보인다. 언제 나 모르게 사귀기로 하고, 막 그런 건 아니죠?”
“야, 너는…!”
어색하게 웃으며 떠보듯 묻는 예슬이 원망스러웠다. 딴에는 농담처럼 천윤제의 정곡을 찔러 보겠다고 시도를 하는 것 같은데, 제발 그냥 오지랖은 넣어 뒀으면, 싶었다.
천윤제가 돌연 성큼 거리를 좁혀 제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곤 고개를 푹 기울여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목덜미에 뜨겁게 내려앉았다.
“남들이 보면 우리 되게 사귀는 사이 같아 보이고 그러나 봐.”
소름 돋는 감각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자 이번엔 그의 손이 부드럽게 뺨을 매만졌다. 은채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내려다보는 나긋한 눈동자가 퍽 뻔뻔했다.
“일해. 기다릴게.”
그러고는 잔뜩 아쉬운 표정으로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가 다리를 꼬고 앉는 거였다. 포스기로 다가서자 예슬이 제 손목을 쭉 잡아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나중에 말해 줄게.”
테이블에 앉아서도 제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돌렸다. 그러나 예상했듯, 예슬이 그걸 그냥 넘길 리 없었다.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천윤제 앞에 마주 앉는 그녀의 뒤통수가 밉살맞았다. 제발 그냥 모르는 척 가 줄 것이지.
“혹시 우리 은채 좋아하세요?”
“네.”
“네?”
그래 놓곤 저가 더 놀란 얼굴일 건 또 뭔지 모를 일이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샜다.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했는데 통 대답을 안 해 줘서 기다리고 있어요.”
“…웬일이야. 진짜요?”
예슬의 얼굴이 휙 제게로 돌아왔다.
“너는 왜 빨리빨리 대답을 안 해서 선수님 기다리시게 해?”
“하…. 너 이제 그만 가 줬으면 좋겠는데, 문예슬.”
“빨리 대답을 해 드리라니까? 사귈 거야, 말 거야.”
빛보다 빠른 예슬의 태세 전환에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충분히 대답해 드렸거든. 싫다고?”
“싫다고?”
“어, 싫다고.”
“왜?”
“왜겠어?”
예슬이 다시 천윤제 쪽을 돌아봤다.
“설마, 지금 만나는 여자들 다 정리 안 하고 온 건 아니시죠?”
“여자?”
이번엔 천윤제의 눈썹이 크게 들썩거렸다.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일그러진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예슬의 말이 태연하게 이어졌다.
“천 선수님, 얼마 전에도 태성 그룹 막내딸이랑 열애설 나고 그러지 않았어요? 막 둘이 결혼한단 얘기도 있었고. 그럼 우리 은채는요? 얘는 그냥 엔조이예요?”
아… 제발.
아무렇게나 나불거리는 예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윤제가 어이없다는 듯 픽, 헛숨을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휙, 저를 향해 왔다. 아무래도 예슬을 그만 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다가가 그녀를 직접 일으켜 세웠다.
“가, 너.”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려는 듯 몇 번이고 돌아보는 예슬을 힘으로 밀어붙이다시피 해 가게 문밖으로 내쫓았다.
이제 남은 건 천윤제였다. 저 기골 장대한 덩치의 인간을 억지로 끌어낼 수도 없고. 어쩌나 싶어 눈을 흘기는데 그가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설마 이거였어?”
“뭐가요?”
“너 설마 아직도 날 오해해? 몇 달을 옆에서 버젓이 다 지켜봐 놓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간 꾹꾹 눌러 참고 참아 왔던 이야기였다. 꺼내어 들쑤셔 봤자 도리어 제 처지만 더 처량해질 것 같아서였다. 천윤제의 이 여자 저 여자 중 한 명이라는 저라는 걸 구태여 자각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금하나. 그 여자랑 나, 오해하는 거야? 그 개소리를 진심으로 믿는다고?”
“찍힌 사진은 진짜잖아요. 같은 차 타고 있던 것도 팩트고.”
“…와. 졸라 억울해 죽겠네, 진짜.”
“제주도에서도, 호텔에서도, 제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있는데….”
“아니라니까?”
어느새 벌떡 일어나 제 앞으로 다가온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말로 억울해 죽겠다는 듯 안달이 난 표정으로. 갑갑함을 애써 억누르느라 구겨진 미간에 파드득, 실금이 갔다.
“그 여자가 나랑 같은 병원 다녔던 거는 너도 알겠고. 어릴 때부터 태성 금 회장님이랑 우리 천 회장님이랑 만나면 금하나 얼굴도 가끔 스치듯 봤던 것도 사실이야. 근데 나 그 여자랑 하나도 안 친해. 말 섞은 적도 몇 번 안 되는데 무슨 연애를 하냐? 그날도 그냥 갑자기 주차장에서 마주쳤는데, 금하나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하면서 자기 차 고장 났다고 대뜸 자기 갤러리까지 데려다달라잖아. 나 그냥 피해자라니까? 하, 씨발….”
“…그럼 호텔에서는요…?”
“금 회장님이 나한테 선물 보낸 거 전해 주러 왔었어. 태성이 아시안 게임 후원 기업이었던 건 너도 알잖아. 나 태성 증권 전속 모델이었던 것도 알고.”
안다. 태성이 어떻게든 천윤제를 앞세우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그러니 더 금하나와의 관계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봐도 천윤제와 금하나는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니까.
“나 진짜 내 손모가지 걸고 맹세하는데, 금하나랑 아무 관계 아니거든? 그리고 금하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나랑 열애설 났던 여자 중에 한 명도 진짜 만났던 사람 없어. 심지어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여자도 존나 많다고.”
그걸 누가 믿겠냐, 하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허…. 안 믿어?”
“믿겠어요? 그 많은 여자 중에 한 명도 없었다고요?”
“없었다니까?”
“거짓말.”
“하, 답답해, 씨발. 환장하겠네. 너 우리 누나랑 통화해 볼래? 누나가 내 열애설 뒤처리 다 했는데, 그중에 진짜였던 거 하나라도 있으면 내가 천윤제가 아니라 개윤제 한다.”
“뭘 또 그렇게까지….”
“기다려, 통화하게 해 줄 테니까.”
그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며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듯 액정을 두드렸다.
“됐어요.”
“확인시켜 준다고, 내가!”
“됐다니까?”
됐다고 말은 하면서도 내심 안도가 됐다. 이렇게까지 억울해하는 정도면 그래도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바람둥이는 아니라는 소리 같아서였다.
“23년 살면서 나한텐 여자라고는 정은채 너 하나야. 난 네가 다 처음인데, 너 이렇게 사람 억울하게 할 거야? 이렇게 뒤꽁무니 쫓아다닌 것도 네가 처음이고, 환장하게 좋은 것도 네가 처음이야. 하물며 내 아다도 네가 땄잖아!”
“아니, 진짜 처음이었다고요? 나랑 한 게?”
부지불식간, 섹스가 처음이었다며 장난처럼 지껄였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가 싶었는데, 그게 정말 사실이었단 건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자 그가 더 눈을 크게 떴다.
“와…. 넌 진짜 내 말을 하나도 안 믿었어.”
“아니, 처음인데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처음이니까 미친 새끼처럼 조절도 못 하고 쭉쭉 싸질렀겠지!”
“근데 왜 그렇게 능숙한 척을 했어요??”
“능숙… 허, 어디가 능숙했단 건데? 좁아터진 구멍에 대체 어떻게 넣어야 할지 몰라서 등신처럼 헤매고 버벅거렸던 거 기억 안 나? 심지어 처음 할 때 너도 별로였다며. 첫 섹스 구려서 다시는 하기 싫다고 그렇게 내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콘돔을 그렇게 사방팔방에 비치했다고요?”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꼴릴지 감이 안 잡히니까 사방팔방 비치한 거 아니냐고. 그리고 콘돔은 어릴 때부터 늘 갖고 다녔어. 우리 대표님께서 사고 치지 말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서. 게다가 난 원래 내 좆물 손에 묻고 어디로 튀는 거 졸라 질색이라서 혼자 뺄 때도 콘돔 끼우고 빼거든?”
흥분해 커진 그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다. 행여 누가 들을까 무섭게 상스러운 말들이 다다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미쳤나 봐, 소리 좀 낮춰요!”
“내가 지금 소리 낮추게 생겼어? 정은채, 네가 날 천하의 걸레 새끼로 생각했다는데!”
흥분으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로 화가 났다는 증거다. 그게 걱정되고 미안하면서도 내심 안도가 드는, 묘한 양가적 감정을 느끼며 그의 팔을 쓰다듬었다. 일단은 흥분한 남자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는 듯이.
“알았어요. 오해해서 미안해요. 내가 미안하니까, 일단 진정하고 앉아 봐요.”
소맷자락을 잡아 그를 다시 테이블 앞에 끌어다 앉혔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 통 앞으로 가 민트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컵을 가득 퍼 그 앞에 내밀었다.
“이거 먹으면서 기다려요. 제발 진정하고.”
여전히 시뻘건 눈자위로 씩씩거리는 그의 손에 아이스크림 컵을 쥐여 주었다. 말 안 듣는 짐승을 달래듯 그와 눈을 맞췄다. 그제야 점차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간의 오해가 완전히 불식되어 버려서일까. 이 대책 없는 인간이 왜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친 건가. 아무래도 미쳤나 보다. 마주친 눈동자에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었다. 제게로만 향해 있는 그 사납고도 집요한 시선이 싫지 않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모든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려 버린 듯싶어서.
딸랑.
때마침 손님들이 들어왔다. 다행히 그는 얌전히 제가 쥐여 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침묵을 지켰다. 심지어 뒷정리를 다 하고 마감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도 말 잘 듣는 착하고 순한 양처럼 저를 응시한 채였다.
앞치마를 벗고 가방을 챙겨 들고 나가자 그가 말없이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여전히 억울하고 화가 나 이러는 건가. 집으로 가는 내내, 차 안에서 그는 계속 말이 없었다. 흘긋 바라본 그의 옆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집 앞에 멈춰 선 차 안. 이번엔 제가 먼저 적막을 깼다.
“미안해요. 멋대로 오해한 거.”
“…….”
“기분 나빴죠. 사과할게요.”
그제야 그가 핸들을 쥐었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 저를 정면으로 응시해 왔다.
“너한테 사과받자고 변명한 거 아니야.”
“…어쨌든요.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넌 진짜, 사람을 존나….”
“…….”
“미치게 해.”
후, 하고 내뱉은 깊은 한숨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한테 미안해?”
“…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만 안게 해 주면 안 돼?”
제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그의 간절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시작된 개수작이 어쩐지 싫지 않았다.
잠시 눈알을 굴리다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긴 팔을 뻗은 그가 제 몸을 단번에 당겨 안았다. 널따란 가슴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짙은 천윤제의 체향에 심박의 가속이 빨라지고 있었다. 몸을 타고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감미롭게 들려왔다.
“아. 너무 좋다.”
조금 더 꽉, 저를 당겨 안는 그의 팔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정말로 너밖에 없어, 정은채.”
한숨처럼 토로하는 낮은 고백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천윤제의 마음이 제 마음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그가 말한 대로, 표현한 대로, 보여 준 대로가 그의 진심이라는 걸.
“아직도 넌 내가 싫어?”
슬쩍 몸을 떼어 내고 가까이 저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꼭 아이 같았다. 행여나 그렇다는 답을 들을까 불안하고 초조하게 흔들리는 것마저 그다웠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깜빡이며 눈앞에서 움직거렸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맞춘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느릿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싫지 않다고. 아니, 너무 좋아 죽겠다고.
“…좋아해요, 나도.”
아마도 평생 하지 못할 고백이라 생각했다. 제게는 너무 커다란 사람이라,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할 만큼 대단한 남자라, 그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는 일 따윈 꿈에서도 없을 거라 다짐했다. 그래야 딱히 움켜쥘 것 없는 제 인생에서도 자존감 하나쯤은 온전히 지킬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지금 제 눈앞의 천윤제를 마주한 순간 그런 마음들이 무참히 깨져 버렸다. 그 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후에 받을 상처와 그를 사랑함으로써 제가 감당해야 할 무게의 짐들이 어떻든 그냥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의 이 마음이 진심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른 건 다 상관없었다.
“뭐라고 했어…?”
제 말을 듣고도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낮게 물었다.
“나도요. 좋아한다고요.”
“너…. 나 좋아했어?”
매끈한 미간이 혼란으로 구겨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오래전부터요. 팬이었어요. 많이 좋아했고.”
“…….”
“처음엔 그냥 선수로서 좋아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대한민국에 천윤제 응원 안 하는 사람 없으니까.”
“…….”
“근데 아니었더라고요.”
“…….”
“처음부터 난 그냥 천윤제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선수로서든, 남자로서든.”
사실 그대로의 답을 털어놓자 말문이 막혔는지 그의 목울대가 꿀렁이며 위아래로 깊게 움직거렸다.
“너…. 하, 사람을… 그렇게 애태우고선….”
눈을 질끈, 눌러 감았다 뜬 그가 두 손으로 제 뺨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입술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정은채, 넌 진짜 나쁜 년이야. 알아?”
아무렇게나 갈라진 목소리가 퍼석하게 새어 나왔다.
“난 그런 너한테 목매고 헐떡거리는 개새끼고.”
그 울먹하는 동공에 제 마음이 더 울컥울컥 일렁거렸다.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금세라도 울음이 새어 나올 것처럼 눈가가 시큰거렸다. 미안해서였다. 안하무인에 제멋대로 굴던 천윤제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한 게 너무 미안해서.
“아닌 척 사람 미치게 해 놓곤 이제야 이런 말 하는 거 얄미워 죽겠는데. 그런데도 너무 좋아서 죽겠어.”
“…….”
“네가 날 좋아한다니까 좋아. 미치게 좋아. 존나, 존나 좋아. 이대로 뒤져도 여한이 없을 만큼.”
“무슨 말을 이렇게 살벌하게…. 읍…!”
부지불식간,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삼켜졌다. 기어코 새어 나온 물줄기가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맞물린 입술로 그의 호흡이, 달큼한 타액이 버겁게 밀려든다.
제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는 그의 손길에 오롯이 저를 내맡긴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뜨거운 체온과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에 머릿속이 혼미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