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2
1. 시발점
6개월 전.
위이이잉-
아이스크림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홀 전체에 요란하게 울렸다. 손님 없는 이른 아침 시간.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은채의 시선이 무심코 매장 밖 풍경을 응시했다.
유리 밖 세상엔 봄이 맺히고 있었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하얀 벚꽃이 팝콘처럼 하늘을 수놓았고,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옷차림엔 설렘의 채도가 높아졌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창밖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가는 커플들만 잔뜩인, 봄.
어쩐지 기분이 더러워졌다. 어김없이 찾아온 이 계절과 곧 헤어질 인연에 바짝 매달려 키득거리는 한심한 인간들의 딱한 정경에 괜스레 속이 뒤틀리는 거였다.
“그냥 하지 그래? 어차피 너 여기 그만두면 당장 다음 주부터 할 일도 없잖아.”
예슬이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며 무신경하게 말했다. 은채는 여전히 창밖을 응시한 채로, 세척된 기계의 물기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 고승준 때문에?”
“어.”
“그 자식 때문에 포기하기엔 조건이 아깝던데. 페이도 세고.”
“넌 언제 또 그런 거까지 물어봤어? 조건이 그렇게 좋아?”
“학교만 아니면 내가 하고 싶더라.”
“얼마 준다는데?”
은채는 그제야 슬쩍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무조건 거절부터 하고 보느라 차마 자세한 근무 조건과 페이를 묻지 못했던 게 내심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 마음을 눈치챈 예슬이 보고 있던 핸드폰을 쓱, 내려놓으며 그녀를 마주했다.
“시급 아니고, 무려 월급. 4대 보험 가입에 월 250.”
생각했던 것보다 꽤 높은 페이에 연갈색 동공이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뭣보다, 들어 보니 일이 안 힘들 것 같더라. 그냥 사무실에서 사무 보조만 하면 된대. 복사하고, 전화 받고, 잔심부름하고. 뭐 그 정도?”
“그런 일 하는데 왜 꼭 우리 과 출신이 필요하대?”
“회사 방침인가 보지, 뭐. 명색이 스포츠 에이전시잖아?”
“아무리 그래도 알바 하나 뽑는데 무슨 전공까지 따지냐, 웃겨.”
자조적으로 코웃음을 치는 은채를 보며 예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몰라? 정호 선배도 처음에 거기 알바 들어갔다 눌러앉은 건데?”
“…진짜?”
일순 멍해 있던 은채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인턴 같은 개념인 건가. 인턴처럼 아르바이트로 일을 시켜 보고 괜찮으면 정식으로 채용할 때 가점이라도 준다는 건가, 뭔가.
자그마한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타닥타닥 돌아갔다. 잠깐 버퍼링에 걸린 듯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가 얼른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른 사람 벌써 구했을까?”
예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원수 같은 구남친이 대수인가. 청년 실업률이 하늘을 찌르는데, 기회가 왔을 때 얼른 낚아채야지.
은채는 액정에 뜬 ‘홍정호 선배’란 이름을 꾹 누르고 그대로 귓가에 가져갔다.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는 홍정호의 목소리에 퍽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래?”
전화를 끊는 은채를 보며 예슬이 무심히 물었다.
“면접 보러 오래.”
“잘됐네. 잘 생각했어. 그 자식 때문에 괜히 좋은 기회 놓치면 아깝잖아.”
맞는 말이긴 했다. 홍정호가 고승준과 한때 둘도 없는 불알친구였다는 것. 그래서 고승준이 버젓이 자신과 연애를 하는 와중에도 회사에서 만난 또 다른 여자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단 걸 알면서도 제게 아무 언질 한 번 주지 않았다는 것. 홍정호의 죄를 따져 묻자면 딱 그 정도에 불과하긴 했다. 괘씸죄. 엄밀히 말하자면 고승준이 쓰레기 짓 한 게 홍정호의 탓은 아니니까.
심지어 해코지를 하겠단 것도 아니고 도리어 좋은 기회를 주겠다는 건데.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복에 겨워 스스로 걷어찰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니까. 예슬의 말대로 이 기회는 잡는 게 맞았다.
“엄마한테는 계속 말씀 안 드릴 거야?
“말해 봤자 속상해하기나 하지.”
“하긴. 엄마가 가지 말라는 거 굳이 고집부려서 와 놓고 그런 일 있었다고 하면 나 같아도 속상하긴 하겠다.”
그날의 사고를 떠올린 예슬이 동조했다.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휴학계를 냈다. 엄마는 당연히 당신 딸이 얌전히 학교생활 잘 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을 터였으나 실은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는 중이었다.
갑자기 도진 트라우마 증세 때문이었다. 아마도 오래전 기억이 하나둘씩 돌아오며 그때의 공포와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되살아난 듯싶었다. 처음엔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고 버텨 보려고도 했으나 결국 도저히 정상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해서 어쩔 수 없이 해서 휴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엄마에겐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이 좋지 않은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조금 쉬면서 아르바이트비로 치료도, 상담도 받다 보면 금세 괜찮아질 거란 생각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저 갑자기, 잃었던 기억이 돌아오며 잠시 혼란스러워 이러는 것뿐이라고.
게다가 지난 학기, 엄마까지 한 번 쓰러지고 나선 차라리 휴학을 잘했다 싶기도 했다. 어차피 비싼 등록금이 빠듯하기도 했고, 이참에 엄마도 쉬게 하면서 열심히 돈이나 좀 모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이 여기에 어울리려나.
“와…. 근데 쟨 광고를 도대체 몇 개를 찍냐.”
돌연 예슬이 매장 한구석에 아무 의미 없이 틀어 놓은 TV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최근 들어 몸값이 더 어마어마하게 뛰었다는 천윤제가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는 광고였다.
“TV만 틀면 나와, 아주. 감사하게.”
차 앞에 고급 슈트를 빼입고 서 있는 천윤제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크게 잡혔다. 예슬이 눈을 번뜩이며 읊조렸고, 은채는 쯧, 혀를 찼다. 저게 운동선수인지 연예인인지. 저 반반한 낯짝으로 맨날 이 여자 저 여자 꼬시고나 다니는 거겠지.
누구 덕에 바람둥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고 소름이 끼쳤다.
“남자 얼굴 아무짝에도 쓸모없댔어.”
“누가?”
“내가.”
“뭐래, 누구보다 천윤제 덕질에 진심인 분이.”
“덕질…. 하, 덕질은 무슨.”
“덕질 아님 뭔데. 코치도 너만큼 천윤제 경기 영상 안 돌려 볼걸?”
“그러니까. 나는 천윤제를 보는 게 아니라 수영 경기를 보는 거거든.”
“그래. 그렇다 쳐.”
예슬의 무성의한 대꾸에선 조금의 믿음도 묻어나지 않았다.
“근데 쟤도 휴학한 건가? 그래도 작년 봄까지만 해도 종종 나오는 것 같더니만, 요즘은 영 학교에서 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
연예인들이며 유명 인사들이랍시고 어디 학교에 제대로 나오는 인간을 본 적이나 있던가. 다 그렇고 그런 부류들이지.
은채는 쯧, 혀를 차며 아이스크림 기계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이제 곧 손님이 몰릴 시간이었다.
“너 수업 시간 다 되지 않았어?”
제 말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예슬에게 스윽, 아이스크림 컵 하나를 가득 담아 내밀었다.
“뭐야?”
눈치 빠른 예슬이 불길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대가성 뇌물.”
“무슨 대가를 바라는 건데?”
“정장 좀 빌려 줘.”
“왜? 너 정장 있잖아.”
“라면 먹다 김칫국물 쏟았어.”
“대참사네.”
그제야 수긍하며 제가 내민 아이스크림 컵을 받아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너희 집 앞으로 갈게. 오후에 면접이야.”
예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겨 돌아서 나갔다. 딸랑, 소리와 함께 매장에 혼자 남겨진 은채는 다시 넣어 뒀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위 검색창에 ‘천화 에이전시’라는 글자를 입력하고 검색을 하자 주르륵 관련 정보들이 뜨기 시작했다.
에이전시 대표는 천화 그룹 천노민 회장의 둘째 딸 천혜진. 대부분의 소속 선수들이 천화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고, 천화 재단은 천노민 회장의 이혼한 부인인 조희경 이사장이 맡아 운영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획득했다. 족벌 경영을 일삼는 한국 재벌가의 병폐를 개탄하며 액정을 훑어 내려가던 연갈색 눈동자가 익숙한 이름 위에서 멈췄다.
‘천윤제, 천화 에이전시와 매니지먼트 연장 재계약.’
기사와 함께 뜬 매끈한 얼굴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정말이지, 잘생긴 남자 알레르기라도 생긴 건가 뭔가. 실제론 마주친 적도 없는 천윤제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뒤틀렸다. 단순히 잘나 빠진 인간을 향한 저열한 질투나 제 실연의 사연을 투영시켜 얻은 분노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경기 영상은 잘만 돌려 보는데, 이 멀끔한 얼굴은 볼 때마다 도대체 왜 이렇게나 기분이 나쁜 걸까.
은채는 핸드폰을 툭,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높지 않은 층수의 단독 건물이었다. 잠시 서류를 가지러 안으로 들어간 홍정호를 기다리는 동안, 은채는 세련된 내부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이어지는 휴게 공간엔 건물 전면에 영어로 쓰여 있던 에이전시의 로고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회사 전체에서 고급스럽고 감각 있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꽤 일할 맛이 나겠구나, 싶었다. 이래서 다들 대기업, 대기업 노래를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직원이 적진 않은 것 같지만 생각보다 바쁜 분위기 같아 보이진 않았다. 들은 대로 어렵고 힘든 일은 아닐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잘 왔다 싶었다. 예슬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 후회했겠다 싶었을 만큼.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 고개를 돌리자 한쪽 벽면 전체가 천윤제의 사진으로 도배된 공간이 나왔다. 이 회사엔 소속 선수가 천윤제밖에 없는 건가 싶을 만큼 과했다.
하기야, 천윤제가 어디 보통 대단한 인물이던가.
14세에 이미 한국에선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던 그는 15세 최연소 국가 대표 선발, 세계 선수권 대회를 시작으로 17세에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400m 남자 자유형 종목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기록하며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모두가 어린 마린보이의 활약에 환호하며 큰 성과를 이룬 것을 대견해했으나 그건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천윤제는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를 제패하며 각종 대회의 메달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에 경험과 기술이 쌓이며 기록은 끝도 없이 단축됐다.
결국 그는 두 번째 출전한 올림픽에서 자유형 400m, 200m, 개인 혼영 400m의 금메달 3개와 접영 200m의 은메달까지 총 4개의 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하며 수영계의 역사를 새로 썼다. 동양인이, 그것도 수영의 변방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재능을 가진 천재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벽에 프린트된 천윤제의 사진 중 하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제 기록을 확인하고 포효하듯 환호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낯익고도 낯설었다. 주로 경기 영상만 돌려 보고 곧바로 꺼 버렸던 탓에 경기 후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지까진 자세히 보지 못했나 싶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운동선수 주제에 답지 않게 하얀 얼굴에 시원스레 들어찬 이목구비가 화려했다. 물기 어린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쥔 팔뚝과 어깨 근육이 탄력적이고 육감적이었다. 얼굴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그렇게 염문설과 구설이 많은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그냥 딱 봐도 가만 놔두고 싶지 않게 생기긴 했으니까. 본능적으로 느끼는 불호의 감정과는 별개였지만 말이었다.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사이, 저 멀리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채, 여기!”
사무실 안에 들어갔다 나온 홍정호가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얼른 그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앞서 걷던 홍정호가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황급히 꺼내 들었다.
“아, 이거! 까먹고 있었네. 가 봐야 하는데….”
액정에 뜬 이름에 무언가 떠오른 듯, 홍정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다들 여유로워 보이는데 왜 이렇게 혼자만 바쁜 것 같아 보이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정은채, 복도 따라서 가다 보면 소회의실 나오거든? 이거 들고,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팀장님 금방 오실 거야. 나도 얼른 갔다가 금방 다시 올게.”
홍정호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고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지금 우리 팀이 비상이라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네. 가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홍정호는 황급히 전화를 받으며 사라졌고 그렇게 혼자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얼마쯤 걷자, 소회의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보여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면접 장소가 여기인 듯싶었다.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돌려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무심코 발끝을 옮기다, 저도 모르게 억누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여서였다. 반사적으로 묵례를 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답 없는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려 눈동자를 움직였다.
마주칠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자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회의실 가장 상석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아 꼬아 올린 긴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천윤제였다. 조금 전까지 벽에 붙은 사진으로 실컷 대면을 했던.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친 것처럼 헛숨이 삼켜졌다. 분명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하도 보고 또 본 얼굴인지라 친근감이 들었다. 혼자서 일방적으로 아는 얼굴을 마주한 기분이 퍽 묘했다. 영상 속에서만 보던 천윤제를 직접 대면했단 생각에 조금 두근대기까지 했다. 우습게도.
힘이 풀려 턱과 입술이 저도 모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또한 문 앞에 들어선 은채를 빤히 직시해 왔다.
“뭐야?”
그가 영 무례한 눈빛으로 저를 훑어 내리며 물었다.
“저는 아르바이트 면접, 왔는데…요.”
앉아 있음에도 지나치게 널따란 어깨와 크고 늘씬한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은 얼굴에 붙은 이목구비는 영 현실감 없이 섬세하기만 했다. 쌍꺼풀이 없어 옆으로 길게 트인 눈매는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이미지에 서늘한 분위기를 더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쾌함보다는 열없는 감정이 앞섰다. 시선을 빼앗긴다는 말이 적절했다.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남자 얼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지껄였던 어제의 자신은 까맣게 잊히는 것 같았다.
얼이 빠진 사이, 그가 날렵한 턱으로 짧게 턱짓했다.
“앉아.”
그러면서도 저를 좇는 시선에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려 그와 가장 먼 자리의 의자를 빼 앉았다. 그런데도 남자는 계속해 관찰하듯 집요하게 저를 바라봤다. 동물원 원숭이라도 구경하듯이.
뭘 이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봐.
애써 불쾌한 기색을 억누르느라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면접?”
나른한 목소리가 빈 회의실을 낮게 울렸다.
“무슨 면접?”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
“사무 보조.”
말끝을 잘라먹은 그가 코웃음을 치며 콧날을 긁었다.
“편하게들 일하시네, 잡일 알바까지 다 고용하고.”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인 건지. 잡일이라니. 그 잡일을 구하겠다고 면접을 보러 온 사람 면전에 대고 지껄이는 이 무례한 어투는 또 뭐야.
짧은 순간, 천윤제에 관한 숱한 소문과 구설이 어쩌면 대부분 사실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천윤제란 인간 개인에 대한 관심 없이 그저 경기 영상이나 돌려 보길 잘했다 싶었다. 영상 속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선수 천윤제와 지금 제 눈앞의 무례한 놈팡이 자식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여기가 면접장이야?”
“여기서 기다리면 팀장님 곧 오신다고 하셔서요.”
역시나 관상은 사이언스라 했던가. 제 고정 관념에서 한 치의 빗나감 없이 싹수없고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남자를 보며 눈에 힘을 줬다.
“혹시 제 면접 보시는 건 아니죠?”
“왜. 나한테 잘 보이게?”
눈 하나 깜짝 않고 느물대는 반문이 퍽 뻔뻔스러웠다. 다년간의 진상 손님을 상대하며 터득한 아르바이트의 경력으로 비추어 볼 때 확연하게 남다른 진상인 건 분명했다. 짧은 시간에 사람 기분을 아주 엿 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는 인간이었다.
“근데 왜.”
그리고 자신이 이런 저질스러운 진상에 아주 취약하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이렇게 건들거리는 양아치들만 보면 이상하게 분노 조절이 잘 안 돼서.
“저한테 반말하세요?”
저보다 한 살이 많았던가 두 살이 많았던가. 기껏 해 봐야 한두 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꼬우면 너도 하든가.”
처음 본 사람과 존댓말로 대화해야 한다는 걸 모르나. 운동만 하느라 사회화가 덜 된 건가.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눈앞의 예의 없는 남자를 항의하듯 직시했다.
“선배가 반말하는 게 불쾌해?”
어라, 싶어 동공이 터질 듯 부풀었다. 선배라니.
대체 천윤제가 저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분명히 지금 처음 보는데. 사무 보조 면접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던 그가 제 이력서를 미리 보고 하는 말일 리도 없었다.
“저… 아세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며 묻자, 돌연 굳어 있던 입매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기억 못 하나 봐?”
그러곤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되묻는 거였다.
지금 제가 뭘 기억해야 하는지 머릿속을 빠르게 굴려 시간을 더듬어 갔다. 천윤제랑 무슨 일이 있었지. 아니, 언제 천윤제를 만난 적이나 있던가.
일방적으로 목격한 적은 몇 차례 있었다. 경호원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기자와 팬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못해 등교하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며 혀를 찼던 기억은 있었어도….
“무슨 기억…이요? 전 오늘 천윤제 선수 처음 보는데.”
남자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상대는 알고 있는 정보를 나는 전혀 갖고 있지 못한, 정보의 불균형. 이게 이렇게나 기분이 더러운 것이었음을 체감하며 추궁하듯 그를 바라봤다.
“그래. 그럼 지금 처음 본 걸로 하든지.”
“다른 데서 언제 절 보신 적이 있단 말씀이세요?”
“넌 나 오늘 처음 본다며.”
“근데 절 어떻게 아시는데요?”
“그게 중요해?”
“나는 모르는데 그쪽은 날 안다니까 거슬리잖아요.”
“되게 예민하시네.”
“네?”
“적당히 넘어가. 난 매일 넘어가는 일이야.”
자조인 건지 비웃음인 건지 모를 얼굴로 나긋나긋 대꾸하는 남자의 얼굴이 평온했다.
그래. 괜히 열 내지 말자. 어차피 이 인간한테 면접 볼 것도 아닌데.
짜증이 치미는 내심을 숨기고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이런 부류의 진상과는 아예 말을 안 섞는 게 상책이긴 했다. 최대한 엮이지 말아야지 싶어 그가 앉은 쪽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도 계속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빤히 느껴져 한쪽 뺨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도대체 사람을 왜 저렇게 보는 거야, 기분 나쁘게.
빽빽해진 공간의 밀도에 숨이 갑갑해지기 시작하던 찰나였다. 닫혀 있던 문고리가 달카닥, 돌아가고 훤칠하고 늘씬한 키의 여자가 또각또각 걸어 들어왔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가 대표 천혜진이라는 걸 알아차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윤제를 응시하고 들어왔던 그녀의 시선이 은채의 인기척에 천천히 방향을 바꿨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혜진이 건성으로 인사에 답하며 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의 눈빛이 제 존재의 영문을 묻는 듯했다.
“아… 저는 사무 보조 면접 보러 온 정은채라고 합니다. 정호 선배가, 아. 그, 홍정호 씨가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홍정호 씨? 홍 주임?”
“네.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가 급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아.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긴 하죠. 누구 때문에.”
혜진의 시선이 흘긋, 윤제에게로 향했다.
“근데 여기서 면접 보기로 했어요? 그럼 우리가 자리를 옮겨야겠는데?”
이번에도 천윤제를 향해 하는 말인 듯싶었다. 그녀의 말에도 그는 딱히 일어날 생각 없다는 듯 몸을 더 푹 기대어 앉았다.
“귀찮아. 여기서 해.”
“그래. 그럼 빨리 하고 나가든지.”
그의 건방진 태도가 매우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럼 나더러 나가라는 소리인 건가 싶어 엉거주춤,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떡할 거야? 계속 이렇게 스케줄 다 파투 내?”
그녀가 들고 온 태블릿 피시를 내밀자 윤제가 퍽 귀찮은 표정으로 받아 들곤 액정 위에 연달아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다라니. 지은 죄가 있어서 얌전히 말 잘 듣고 있는 사람한테 말 너무 섭하게 한다?”
“너 내가 진짜 섭한 거 보여 줘?”
혜진은 들고 있던 핸드폰 액정을 켜 앉아 있는 윤제의 얼굴 앞에 가까이 들이밀었다. 뭘 본 건지, 그의 붉은 잇새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할 일 없는 스토커 새끼들이 왜 이렇게 많냐.”
“굶주린 스토커들한테 먹잇감 던져 준 게 너야. 누굴 탓해?”
“그래서 또 무슨 소설을 쓰시겠대?”
“현재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핫한 두 청춘 남녀가 한 프레임에 찍혔는데 얼마나 흥미진진한 시나리오가 나오겠어. 다들 신났지.”
“같이 찍혔다고 다 사귀어? 고작 이딴 사진으로 협박이 돼?”
“안 되니까 내 손에 먼저 들어와 있겠지. 고작 이딴 사진밖에 없으니까 협상도 가능한 거고요, 천윤제 선수.”
꼭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태연히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에 갈 곳을 잃은 시선이 방황을 했다. 듣지 말아야 할 대화를 눈앞에서 엿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진작 나갔어야 하는 건데. 지금이라도 그냥 나갈까. 한 번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 일순간 불청객이 된 제 입장만 난처했다.
“그러니까 얌전히 좀 굴어. 네 코치하면 멱살 잡힌다는 소문 다 나서 보조 코치 구하기도 힘든 마당에 있는 매니저까지 다 쳐내면 내가 대체 널 어떻게 통제해?”
“이제야 자백을 하시네. 매니저 아니고 프락치라고 해, 그냥.”
“그래, 그 프락치. 그거라도 좀 붙여 놓자. 회사 통제 무시하고 다 네 마음대로 할 거면 너 에이전시 왜 계약했어? 너 나 엿 먹이니?”
“이야.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후 태도가 너무 다르시네요, 대표님?”
“도장을 찍었으면 대표님 말씀 좀 들으세요, 천윤제 선수. 확 위약금 청구하기 전에.”
남매라 그런가. 나누는 대화의 재질이 확연 닮아 있었다. 살벌하리만큼 직설적이고 가차 없는 게 듣는 사람 기분이 다 서늘해졌다.
아무래도 더 있다간 더 어색해지기나 할 것 같아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둘 다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으니 최대한 조용히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으로 몇 명 추려서 보낼 테니까 네가 골라, 그럼. 네 손으로 프락치 뽑을 권한 줄 테니까….”
“그래? 그럼 나 쟤.”
“뭐? 뭐가 쟤야?”
“저 알바. 내가 쓴다고.”
살금살금 문고리를 잡아 열려는 순간,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설마 저한테 하는 소리인가 싶어 눈을 치켜뜨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이미 동시에 제게로 향해 있었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어. 나는 쟬 아는데, 쟤는 날 모른대.”
동생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혜진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정은채 씨?”
용케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혜진의 부름에 움찔, 몸을 돌려세웠다. 그녀가 위아래로 저를 자세히 훑으며 살피고 있었다.
“우리 윤제를, 왜 몰라요?”
이어진 당황스러운 질문에 홀연 넋이 나갔다.
제 이력서를 꼼꼼히 훑어 내려가며 읽는 혜진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의 미인형 얼굴인 그녀는 천윤제의 이복 누나였다. 얼핏 기사에서 보기론 천윤제보다 10살 이상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동안인 탓에 은채는 순간 제 기억력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한국대 체교과 2학년. 휴학 중이네요?”
“네.”
“복학은 언제 할 생각이에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일단 다음 학기까지는 복학할 생각이 없습니다.”
“잘됐네요. 우리도 가을까지 버텨 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다른 이력도 다 살펴봤는지, 종이의 마지막 장을 넘긴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근데… 저는 사무 보조로 일하는 줄 알고 온 건데요. 혹시 다른 일을 시키시려는 건가요? 아까 얼핏 들으니까 무슨 매니저….”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보다 월급은 훨씬 많을 거예요. 정은채 씨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천윤제 선수의 귀책으로 그만두게 될 경우 원래 하기로 했던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로 전환시켜 줄 테니까 손해 볼 것도 없을 거고요.”
“그러니까 천윤제 선수 매니저를 하라는 말씀이세요? 저한테?”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진의 모습에, 은채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고작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온 휴학생에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세 살짜리 어린애도 다 안다는 수영 스타 천윤제의 매니저 자리를 제안하다니. 다들 미친 건가.
“들었겠지만, 그냥 호칭이 매니저인 프락치라고 생각하면 돼요. 아. 순화해서 감시원?”
“그런 일이라면, 저보단 남자 매니저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남자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엔 성별이 달라서 곤란한 부분도 있을 테고….”
“상관없어요. 남자 매니저라고 화장실, 샤워실까지 따라 들어가진 않으니까. 뭐. 굳이 걱정이라면 은채 씨가 너무 미인이라 그게 좀 걸리긴 하네요. 알다시피 워낙 구설이 많은 선수잖아요?”
은채의 얼굴을 마주한 혜진이 친절하게 웃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매니저 일은 해 본 적도 없고, 천윤제 선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핑계.
“일은 간단해요. 스케줄 체크하고 관리하는 정도. 그리고 천윤제 선수에 대해서야, 지금부터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거고.”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런 일엔 경험도 없고….”
“네. 그래서 천윤제 선수가 정은채 씨를 콕 집은 것 같네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얼결에 혜진을 따라 대표실에 와 앉아 있긴 했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게 사실이었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었고.
“은채 씨가 잘 모른다니 하는 말인데. 우리 천 선수가 수영 하나는 끝내 주게 잘하거든요.”
모르지 않았다. 아니, 외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알았다. 천윤제가 얼마나 수영을 잘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재능과 실력을 가졌는지. 숱하게 돌려 본 그의 경기 장면과 기술 분석 동영상이 지금도 제 컴퓨터와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선수 천윤제의 성장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봐 왔으니까.
“근데 딱 그거 하나. 수영.”
“…….”
“그거만 잘해요. 나머진 다 개판이고.”
고해 성사를 하듯 털어놓는 혜진의 얼굴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마치 나는 최후의 고지를 하고 있으니 내겐 더 이상 도의적 책임이 없는 거다,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개판인 건 성격이고요. 수영이라도 못 했으면 대체 뭐 어떻게 살았으려나 싶을 만큼 아주 개차반이에요.”
혜진은 나긋나긋 천윤제의 실상을 까발렸다.
사실, 천윤제가 유명인이라 사생활 없이 온전히 노출된 삶이 조금은 불쌍하고 안됐다 여기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의 결점과 허물에 대해 과장해 떠드는 경향이 있으니까. 살다 보면 실수도, 흑역사도 만들면서 사는 건데 그런 작은 결점조차 큰 허물로 부풀려져 뭔가 억울한 상황도 있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지금, 그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혈육이자 소속사 대표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개판에 개차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가늠해 봤을 때 외려 언론이 실제 천윤제의 모습을 감춰 줬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가 얼마나 개판이길래 이렇게까지 경고를 하는 걸까.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천윤제 매니저로 고용된 후에 최대 6개월 이상을 버틴 사람이 없어요.”
“…왜….”
“지랄 같은 천윤제 성질머리 못 견디겠다고 다 그만뒀거든요.”
도대체 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근데 왜 그런 어려운 일을 저한테….”
“걔가 직접 누굴 콕 집은 적도 처음이라서요.”
콕 집은 게 아니라 재수 없게 걸려들었다는 표현으로 정정하고 싶었다.
“자기 옆에 누가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기 일으키는 놈이 웬일로 순순히 정은채 씨를 지목하길래. 좀 신기해서요.”
“…….”
“일에 관련된 사람 말고 누구를 안다고 말하는 것도 처음 봤고.”
가만히 저를 응시하는 혜진의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였다.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 저를 보는 눈동자에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서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 천윤제와 직접 맞닥뜨렸을 때 두근거렸던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오래 그를 지켜보며 그의 성장을 응원해 왔던 사람이긴 했으니까.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막상 그와 대면하고 몇 마디를 나눠 보고 나니 그간의 자신이 얼마나 현명했던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응원하며 지켜봤던 건 수영하는 선수 천윤제이지, 물 밖에서 철없는 망아지처럼 날뛰는 골칫덩이 천윤제가 아니다.
“버텨 줘요. 딱 아시안 게임까지만. 한 6개월쯤 남았네요. 은채 씨만 가능하다면 그 이상, 최대 기록 경신해도 좋고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천윤제의 비인간성을 몸소 체험한 저로서는 도무지 자신이….
“저도 생각을 좀….”
“두 배 줄게요.
“…….”
“은채 씨가 듣고 온 월급의 두 배 정도면 괜찮겠어요?”
내적 갈등이 증폭됐다. 상대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 거래의 도구로 삼을 줄 아는 그녀는 과연 타고난 기업인이었다.
“복리 후생도 정직원들만큼 챙겨 줄게요. 인센티브도 윤제 경기 성적, 기록에 따라 별도로 책정하는 걸로 하고요.”
생각을 해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다, 라고 말하려던 목소리가 꿀꺽, 목구멍 너머로 삼켜졌다. 250의 두 배면 월 500이었다. 한 번도 벌어 본 적 없는 큰 액수의 월급이었다. 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대학생이 어디서 이런 돈을 벌겠나. 두세 달만 버텨도 이 돈이면 엄마 투석비를 내고도 다음 제 등록금까지 보탤 수 있는 금액이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다.
계산을 하느라 또르르, 눈알을 굴리자 혜진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겁먹진 않아도 돼요. 그래도 아주 상식이 없는 놈은 아니니까. 걔가 날 닮아서 또 머리는 좋거든요.”
들으면 들을수록 어쩐지 점점 더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더 들었다간 그냥 안 한다고 말해 버릴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잘 생각했어요.”
혜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은채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계약서는 월요일 날 출근하면 쓰고 바로 일 시작하는 걸로 할게요. 힘든 거 있으면 김 팀장이나 홍 주임한테 말하면 도와줄 거예요. 그 팀이 천윤제 전담팀이라서.”
혜진이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쩐지 껄끄러운 기분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요.”
맞지 않는 정장이 어색하게 몸에 감겼다. 온몸을 사로잡는 불길한 예감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은 어리석다.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잘 알면서도 무시하고 애써 외면하려 했던 실수. 그게 이 어리석은 선택의 시발점이 된 걸까.
어쩐지 가슴이 갑갑한 기분에 두 손으로 들고 있던 물병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천윤제는 새벽 5시부터 사람을 불러 놓고도 무려 3시간째 인사도 없이 제 운동만 하는 중이었다. 근력 운동 두 시간, 러닝 머신 한 시간. 그의 머릿속엔 첫날, 첫 출근을 한 매니저에게 과연 이게 올바른 행위인가에 대한 고민 따위는 전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이렇게까지 노려보는데 눈 하나 깜짝 않고 뛰기만 할 리가 없다.
‘완전 또라이 새끼.’
천윤제가 도대체 어떤 인간이냐 묻는 말에 홍정호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일축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 왜 우리 팀 직원들이 1년 365일 중에 300일 정도를 비상 체제로 근무하는 줄 알아? 잡*** 고용 사이트에는 왜 우리 팀만 따로 빼서 채용 공고 내게? 혹시 직원 퇴사율 175%인 건 본 적 있고?’
더 듣지 않아도 느낌이 왔다. 천윤제가 얼마나 개차반인 인간인 건지.
‘내가 몇 번이나 때려치우려고 했잖아. 천윤제 때문에.’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토로하던 고뇌에 젖은 그의 얼굴에서 그간의 고충이 느껴졌다.
‘그놈 때문에 갈려 나간 사람이 몇 명이야, 일을 좀 가르칠 만하면 나가고, 나가고. 안 그래도 일은 쏟아지는데 거기에 일을 더해 주시니까. 코치 폭행 스캔들에, 열애 스캔들에, 인터뷰 태도 논란에, 아주 가지가지…. 하… 미안하다. 내가 괜히 널 이런 데로 끌어들여서. 안 그래도 내가 너한테 미안한 일이 많은데, 후.’
홍정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 표정을 직시하며, 그냥 가서 못 하겠다고 번복이라도 해야 하나 싶기도 했으나 이미 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한 이후였다. 이미 물은 엎어졌고 상황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거였다.
돌연 잠재된 도전 정신이 들끓었다.
그래. 가을까지만 참자. 딱 6개월만. 그냥 옆에 붙어서 스케줄대로 따라다니며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뭐 하는지만 보고하면 그뿐인 간단한 일이니까.
은채는 저도 모르게 물병을 꽉 움켜쥐며, 거울에 비친 남자를 가만 응시했다. 제 머리통만 한 헤드셋을 귀에 꽂은 채 머신 위를 뛰는 남자를.
아무리 운동선수라지만 3시간째 잠깐 숨 고를 틈도 없이 내리 운동만 하고 있는 게 과연 정상인 걸까. 한 시간이나 같은 속도로 뛰면서도 안색 하나 변화 없는 얼굴은 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그녀는 근심 어린 마음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윤제는 트레이닝 반바지 하나만 입은 채 상의는 완벽한 탈의 상태였다. 덕분에 갈라진 근육 틈틈이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고강도의 운동으로 단련된 그의 몸은 빚고 깎아 만든 것처럼 정교했다. 길고 곧게 뻗은 쇄골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대흉근과 그 아래 선명한 식스팩의 형체를 갖춘 복근. 그리고 조금 더 아래, 허리를 비틀 때마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외복사근까지.
커다란 키와 넓은 어깨, 긴 팔다리는 물론 타고난 것이라 할 만했으나 조각상처럼 섬세하게 다듬어진 근육의 모양들은 분명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감탄과 찬사가 절로 나오는 몸이었다. 그러니 절로 시선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처음엔 눈 둘 곳을 몰라 시선을 굴리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천윤제가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턴 그냥 대놓고 감상을 하는 중이었다. 새벽부터 3시간째, 지은 죄도 없이 벌을 서는데 이런 감상 거리라도 없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영상으로만 보던 맨몸을 실제로 눈앞에서 감상하려니 좀 현실감이 없기는 했다. 운동선수답지 않게 피부는 왜 저렇게 하얗고 매끈한 건가. 그래서인지, 도리어 땀에 흠뻑 젖어 움직이는 근육들이 더 외설적으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천윤제와 거울 속에서 눈이 정면으로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헛, 하는 탄식을 삼키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삐이.
곧바로 버튼을 눌러 머신을 정지한 그가 휙, 수건을 잡아채 땀을 닦으며 저를 향해 걸어왔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일순 저도 모를 양가적 감정이 꿈틀댔다. 그를 훔쳐보고 있던 게 민망해 얼른 눈을 내리깔면서도 제게 인사 한마디 없이 운동만 한 그의 무례에 오기가 치미는 거였다.
성큼성큼, 긴 다리로 몇 발자국을 떼어 제 앞에 바짝 다가온 그가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저를 응시했다. 어릴 때 외국에서 자랐다더니. 원래 이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버릇이 있는 건가 싶을 만큼 집요하고 무례했다.
탐색을 하는 건지 관찰을 하는 건지. 혹은 어떻게 괴롭혀야 하나 간을 보려는 건지. 도통 그 눈빛의 의미를 모르겠다.
“첫 출근이니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정은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건넸다. 3시간 동안 말없이 벌세워 놓은 걸 좀 찔려 하기라도 하라고.
“…….”
그러나 역시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뾰족한 시선을 제게 고정한 채 목을 꺾어 물이나 벌컥벌컥 들이켤 뿐이었다.
길게 뻗은 목에 도드라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깊이 들썩이며 움직였다. 얼굴에 맺혀 있던 땀방울도 날렵한 턱 끝과 목선을 따라 길게 흘러내렸다. 보고 있자니 어쩐지 저도 목이 타는 것 같아 괜스레 크흠,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릴 때였다.
“시선 강간.”
“…….”
“이라는 말이 있지.”
지금 제가 무슨 단어를 들은 건가 싶어 눈을 크게 떠 그를 봤다. 빈 물통을 툭, 내려놓은 그가 다소 경멸을 담은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되게 밝히나 봐. 남자 몸이나 훔쳐보고.”
무어라 반박을 해야 하는데 곧바로 반박할 말이 안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이가 없어서라는 이유 하나와 지극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당혹감이 들어서라는 또 다른 이유가 상충했다. 화르륵, 뺨에 열이 올랐다.
“훔쳐본 게 아니라, 그냥 본 거구요.”
하, 강간이라니. 단어를 골라도 꼭 그렇게 저질스럽고 자극적으로 골라야 했나.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근데 왜 빨개.”
“네?”
“봐.”
턱 끝으로 사방에 널린 거울을 가리키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씨.
거울에 비친 얼굴은 누가 봐도 그의 말을 인정하는 색을 띠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어이없는 말을 하니까 당황해서…!”
“농담이었는데.”
잘린 말에 덜컥 말문이 막혔다.
“뭐 이렇게 발끈해?”
무슨 농담을 이렇게 찬바람 쌩쌩 부는 얼굴로 하냐, 이 소시오패스 새끼야.
간신히 욱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를 아득 물었다.
“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상한 사람을 만들….”
“너나 모르지. 나는 너 안다니까, 정은채.”
“그러니까, 대체 날 어떻게 아시냐니까요.”
“궁금해?”
“네. 아무리 생각해도 제 기억엔 천윤제 선수가 없어요.”
그가 제 앞으로 손을 내밀어 왔다. 정황상 제가 들고 있던 물통을 내놓으라는 의미인 것 같아 그 큰 손 위에 건네자 그가 다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덩치가 커서인지, 흘린 땀이 많아서인지. 무슨 물을 이렇게 짐승처럼 마시는 건가. 순식간에 1리터가 넘는 양의 물을 한 번에 다 들이켜 버린 그가 입가의 물기를 스윽, 손등으로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럼 계속 궁금해해.”
“네?”
“궁금하다니까 말해 주기 싫어.”
이건 또 뭔….
확실히 성격에 문제가 있는 인간 같다. 최소한의 사회화도 덜 된, 아니 안 된 인간의 전형.
제 가슴 앞에 툭, 다시 내민 빈 물통을 받아 들고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1분 1초도 천윤제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시시콜콜한 행동과 말까지 죄다 보고해야 한다는 팀장의 당부가 떠올라서였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얼마나 쳤으면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나 일괄적으로 신의가 없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바로 수영장으로 가실 거죠? 훈련은 보통 오전 내내 하신다고 들었는데.”
“되게 구속하는 스타일이구나. 되게 매력 없는데, 그거.”
앞서 걷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간 그렇게나 매니저들을 괴롭혔다더니만 뭐, 벌써부터 쫓아내려고 시동을 거는 건가 싶었다.
오기가 일었다. 이 안하무인의 소시오패스에게 져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도리어 체육인 특유의 승부욕이 자극되어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날 만만히 보고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수작이었겠지만, 반드시 6개월을 악착같이 버텨 내고야 말겠다고.
“일하면서 제 매력 발산할 생각 없는데요.”
“자의식 과잉인 편이고?”
“자신감 있는 성격인 거고요.”
“건방진 거겠지.”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을, 지금.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으며 화제를 돌렸다.
“대표님이 연습 끝나고 오후에 잠깐 회사에 들러 달라고 하셨어요.”
“귀찮게 왜 자꾸 오라 가라.”
“시즌 굿즈 나온 거, 천윤제 선수가 직접 보고 골라야 한다고요.”
“아주 연예인 놀이에 재미가 들리셨네.”
그가 불평 섞인 혼잣말을 뇌까렸다. 천윤제 본인이야말로 연예인 놀이에 심취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런 일을 반기지 않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의외였다.
“알았으니까 그만 따라와.”
“죄송한데, 천윤제 선수 따라다니는 게 제 일이라서요.”
“어디까지 따라오려고.”
“어디든 다 따라가서 보고….”
홱, 몸을 돌려세운 그의 상체가 코앞에서 아른거렸다. 놀란 은채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마음은 알겠는데, 작작 밝히지? 신고당할래?”
건들거리는 말투에 그제야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남자 탈의실 앞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한쪽 입매를 비틀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그가 그 안으로 휙 들어갔다.
일순 짜증이 훅 치밀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람 기분을 엿같이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으로 인정을 해 줘야 하는 부분이다.
역시나 첫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아…. 재수 없어.”
새어 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읊조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