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20
19. 결정적 순간
나른한 햇살이 유리창 한가득 밀려들고 있었다. 손님이 많지 않은 일요일 오후, 다소 쌀쌀해진 날씨에 사람들의 옷차림이 제법 두툼했다.
보고 싶어서 돌겠어. 사진 좀 보내 봐.오후 3:31
잠시 창밖을 내다보다 손안의 진동에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얗고 말간 얼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천윤제는 엊그제부터 캐나다에 잠시 출장을 가 있는 중이었다. 세계 수영 연맹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초청장을 받은 까닭이었다. 저에게 같이 가자고도 했지만,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펑크 내고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라 거절을 했다. 그러자 그는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해 오는 중이었다. 고작 며칠 못 봤다고 죽을 것 같다며.
가게에서 셀카 찍기 부끄러운데.오후 3:32얼굴 좀 보여 줘. 아니면 나 지금 당장 비행기 탈 것 같아서 그래. 응?오후 3:32그럼 천윤제 선수 얼굴부터 보여 줘요. 나도 보고 싶으니까.오후 3:33사진오후 3:34
그냥 던진 말에 곧장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캐나다는 아마도 새벽 시간일 건데, 이 시간에 훈련이라도 했나. 잘생긴 이목구비에 물기가 가득했다. 어떻게 이렇게 막 찍은 각도에서도 잘생겨 보일 수가 있나. 사진을 감상하며 한참을 넋 놓고 바라봤다.
지이잉.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제 네 얼굴도 보여 줘.오후 3:35
결국 닦달에 못 이겨 카메라 어플을 켰다. 나름 필터까지 써 각도를 잡아 보지만, 카메라에 비친 제 얼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행여 조명발을 받으면 좀 나을까 싶어 이리저리 핸드폰을 돌려 가며 최대한 예쁜 척을 해 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바르고 나올 걸 싶었다.
사진자요. 됐죠?오후 3:42
그런데 어쩐 일인지 천윤제는 읽고도 한참을 답이 없었다. 기껏 부끄럽게 셀카까지 찍어서 보내 줬더니만 아무런 반응도 없고.
뾰로통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리는데 돌연 가게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들어선 사람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중년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품과 우아함이 흘러넘치는 듯한 여자는 또각또각, 발을 내디뎌 아이스크림 매대 앞으로 다가왔다. 제게로 가깝게 다가선 여자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내리까는데 문득 그녀의 구두에 시선이 갔다. 반짝반짝, 화려한 장식으로 빛나고 있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하이힐이 제 눈에 익었다.
뭐지.
“제일 잘 팔리는 맛으로 한 컵 주세요.”
나긋한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서른한 가지의 맛을 앞에 두고도 그녀는 오로지 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든 걸 제 선택에 맡기겠다는 듯이. 이런 우아한 사모님에겐 어떤 맛이 어울리려나, 잠시 고민을 하다 손끝으로 블루베리 요거트를 가리켰다.
“블루베리 요거트는 어떠세요? 적절히 상큼하고 깔끔해서 누구나 드시기에 무난할 것 같습니다.”
“괜찮겠네요. 그래요. 그걸로 줘요.”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시선이 꽤 집요하게 이어졌다. 계산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퍼 올리고, 다시 그녀 앞에 컵을 내밀 때까지도 그녀는 제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 자신감 넘치는 눈빛마저도 낯설지 않게 느껴져서.
께름칙한 기분을 지우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필요한 거 있으세요?”
그러자 살며시 그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예쁜 아가씨가 친절하기도 하네요. 직접 보니 알겠어요. 우리 윤제가 안달이 날 만도 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천윤제의 이름에 연갈색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 천윤제 엄마예요. 반가워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많은 기사 속에서 꽤 자주 본 적이 있던 천화 그룹의 안주인 조희경이었다. 물론 이제는 천 회장과 이혼한 전 부인이었지만.
“아, 안, 안녕하세요.”
은채는 아차, 싶은 얼굴로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조희경은 그런 그녀를 기특한 듯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아…. 아니요, 아닙니다.”
“아니긴, 많이 놀란 표정인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연방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무례한 거 알면서도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왔어요. 우리 윤제가 홀린 아가씨가 어떤 아가씨인가 내가 직접 만나 보고 싶어서.”
역시나 재벌들의 정보력은 엄청난 것인지도 몰랐다. 천윤제와 연애를 시작한 지 고작 열흘 만에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그리고 내가 은채 씨한테 부탁해야 할 것도 있고 해서요.”
부탁이라니. 무슨 부탁을 한다는 건지….
돌연 느낀 긴장감으로 손바닥에 땀이 찼다. 혹시 우리 아들과 급이 맞지 않으니 당장 헤어지라는 소리를 하러 온 걸까. 어쩌면 저 값비싼 명품 핸드백 속에서 돈 봉투를 꺼내 내던지며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아이스크림을 제 얼굴에 뿌릴지도 몰랐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못 헤어진다고 울고불고 빌어야 하나. 그러긴 싫은데. 그냥 돈 많이 받고 헤어지는 걸 택하자니 그건 절대 못 할 것 같고.
찰나의 순간, 작은 머릿속이 조잡한 생각들로 복잡해져 갔다.
“무슨… 부탁을….”
긴장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우리 윤제 같은 놈이랑 사귀어 준다니까 당연히 내가 부탁을 해야지. 은채 씨한테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네?”
“혜진이한테도 얘기 들었는데, 우리 윤제가 은채 씨 말이라면 철석같이 잘 듣는다면서요. 그 감당 안 되는 애를 그래도 은채 씨가 인간 비슷하게 만들어 놨다고, 혜진이가 아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대체 어떤 아가씨인가 궁금했는데.”
은채는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에 잠시 당황해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근데 직접 만나 보니 알겠네. 내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윤제 눈에는 얼마나 더 예쁘겠어.”
조희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윤제 해외 나갔다길래 몰래 와 봤어요. 인사도 하고 싶고, 나도 은채 씨랑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해서요.”
“아아…. 네.”
“아, 부담 갖지는 마요. 난 진짜 그냥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온 거니까.”
어색하게 짓는 제 미소를 읽은 건지, 조희경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제 의도를 확실히 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좀 사 주면서 더 친해지고 싶은데, 지금 일하는 것 같아서 그러자고도 못 하겠고…. 혹시 다음 주에 시간 괜찮은 날 있어요? 내가 은채 씨랑 밥 한 끼 하고 싶어서, 밥 먹자고 부탁하러 왔어요.”
“주말에….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잘됐네. 주말에 윤제 오면 윤제랑 같이 저녁 먹으러 와요. 이건 내 연락처.”
이렇게 직설적인 건 이 집안사람들 내력인 건가. 어쩐지 천윤제와 퍽 닮은 듯한 조희경이었다. 은채는 천화 재단 이사장인 그녀의 명함을 얼결에 받아 들었다.
그때. 때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보낸 셀카에 대한 천윤제의 답 메시지였다.
네 얼굴 보니까 또 꼴려서 사진 보면서 혼자 하고 왔어.오후 4:13자기야, 너무 보고 싶다. 나 언제 한국 가지?오후 4:14
미친….
이 변태는 지금 제 앞에 제 어머니가 서 있다는 걸 아는 걸까. 마주 선 조희경에게 메시지 내용이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제 발이 저려 황급히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윤제예요?”
“아…. 네.”
조희경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윤제한테는 은채 씨가 말해 줘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녀석이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쩐지 퍽 사이가 좋은 모자 같았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내리는데 문득 낯익었던 그녀의 구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완전히 기억이 났다. 몇 달 전 그 어느 날, 천윤제의 뒷좌석에 있던 박스 안에서 봤던 그 구두였다.
“…아.”
저도 모르게 작게 탄식하자, 조희경이 제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예쁘죠? 우리 윤제가 생일 선물로 준 구두인데, 사내 녀석이 답지 않게 이런 감각도 있고 센스도 있어요. 성질이 좀 까탈스러워서 그렇지, 알고 보면 꽤 괜찮은 구석이 많은 놈이라니까.”
설핏 웃음이 났다. 어머니 생일 선물로 산 구두를 혼자서 그렇게 오해했으니, 그가 안다면 얼마나 기막혀할까.
자신이 골라 준 블루베리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맛본 조희경은 마음에 든다는 듯 만족해하며 같은 맛으로 아이스크림 통 전체를 사 들고 사라졌다. 자신의 갤러리 직원들 간식으로 돌려야겠다면서.
감당 안 되는 천윤제의 직진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무모한 끈기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집안의 고유한 내력이지 싶었다.
지이잉.
핸드폰이 길게 울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게로 찾아왔다는 말에 그가 전화를 걸어 온 거였다.
– 어머니가 거길 왜 찾아가?
천윤제는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질문부터 했다.
“그냥 지나치다가 제가 궁금해서 들르셨대요. 아들이 어떤 여자랑 연애하나, 궁금하셔서 보러 오셨겠죠.”
– 그래서, 뭐래? 혹시 너한테 뭐라고 해?
“고맙다고요. 당신 아들이랑 연애해 줘서 고마우시대요.”
수화기 너머에서 허,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그도 저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게 귀여워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 그러게. 우리 어머니 아주 어지간히 고마우셨나 보네. 거기까지 찾아가신 거 보니까.
“아이스크림도 엄청 많이 사 가셨어요. 갤러리 직원들 주신다고.”
짧았지만 그의 어머니를 본 소감과 기분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제 말에 맞장구를 치고 다정히 반응을 해 오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따스해 가슴이 간질거렸다.
“보고 싶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 나도. 돌겠어, 보고 싶어서.
“그렇다고 막 당장 올 생각은 하지 말고요. 일 잘 끝내고, 조심히 와요. 나 어디 도망 안 가니까.”
충동적이고 대책 없는 천윤제의 성정이 걱정스러워 노파심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의 긴 한숨 소리가 아스라했다.
– 하…. 한 번 쌌는데 또 섰네.
“…….”
– 넌 왜 목소리도 꼴려서는.
“아, 진짜 감당하기 힘들다.”
픽, 헛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쓸었다.
– 한국 가면, 가자마자 너부터 안을 거야.
아이처럼 다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누가 천윤제를 말릴 수 있겠는가.
조금 더 기울어진 햇살이 길게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어둠이 더 깊어 가는 시간일 거였다. 이곳의 밝고 따뜻한 태양이 몇 시간 뒤 그가 있는 곳까지 무사히 가 닿기를.
그를 떠올리는 시간, 빠르게 울리는 심박이 꼭 듣기 좋은 음악처럼 들려왔다.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일어나고야 말았다. 천윤제가 캐나다에서 돌아오기로 한 오후, 온갖 포털이 그의 새로운 열애설 기사로 뜨거웠다. 천윤제의 열애설이야 늘 있어 왔던 것이기에 새로울 것도 없었으나 문제는, 그 뜨거운 열애설의 주인공이 저라는 데에 있었다.
기사에는 일주일 넘게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락거렸던 것과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던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도 함께였다. 나름 일반인이라며 제 얼굴 위에는 모자이크를 올려놓긴 했지만 실상 아무런 신변의 보호는 되지 않았다. ‘전 매니저였던’, ‘정 씨’, ‘한국대 재학 중인 선후배 사이’라는 한 문장만으로도 제 신상은 이미 털리고도 남는 거였으니까.
결국 SNS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제 이름과 사진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천윤제와 연애를 하기로 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참 스펙터클하기도 했다.
당연히 에이전시에서 곧 대응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그저 비즈니스적 관계일 뿐이라는 상투적 변명의 부인 기사를 내고, 억측과 추측성 구설을 자제해 달란 공지를 할 거라고. 당연히 그런 수순으로 일이 진행될 거라 생각했다. 그게 현역 선수인 천윤제에게는 최선의 대응이란 게 너무나 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천윤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저만의 섣부른 착각이었다.
“미쳤어요?!”
조명이 켜진 새파란 물속에서 걸어 올라오는 그를 보자마자 은채는 버럭, 목소리를 높이고 이마를 짚었다.
“하, 결혼이라니…!”
풀 죽은 눈망울이 핸드폰 액정을 눈앞에 들이밀며 입술을 짓깨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화를 내. 열애설 난 김에 그냥 결혼하겠다고 발표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정말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은퇴를 앞두긴 했지만 아직은 현역인 선수가, 심지어 웬만한 아이돌, 연예인을 능가할 만큼의 인기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각 없이 하루아침에 결혼을 발표할 수 있는가, 싶었다. 게다가 저와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혼할 여자라고 선포해 버린 꼴이지 않은가.
“인정을 할 거면 그냥 연애하는 거만 인정하면 되지, 왜 묻지도 않은 결혼 얘기를 해요?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해요? 대표님은요? 대표님한테도 말 안 했죠? 팬들은 또 얼마나 실망을 하겠어요? 그리고 나한테 미리 말도 없이….”
“그래서. 너는 나랑 결혼하기 싫어?”
“그걸 왜 지금 물어요? 언론에 보도 자료 띄우기 전에 물었어야죠!”
“너랑 연애 중인 거 맞고, 너랑 결혼하고 싶은 것도 맞고. 그래서 결혼까지 생각 중인 여자라고 말한 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어느새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눈썹을 들썩이고 미간을 찡긋거리는 게 짜증이 났다는 증거였다.
지이이잉.
아니나 다를까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천혜진이란 이름을 본 그가 가차 없이 핸드폰을 꺼 던졌다. 타닥. 타일 바닥에 떨어진 기계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말해 봐.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하기 싫어서 이래?”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한테는 그런 말처럼 들리니까 그렇지!”
왜 이렇게 애처럼 떼를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나랑 열애설 난 여자들 다 피해 본다고 해서 걱정했어. 혹시 너한테 누가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근데 그냥 시원하게 빨리 인정하고 결혼까지 할 여자라고 밝혀 버리면 더는 할 말이 없겠지, 싶었다고. 그래서 난 내 나름대로 최선의 방어를 한 건데….”
“내 방어를 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본인 방어를 해야지.”
“그딴 거 몰라, 나는.”
“저기요.”
“난 그냥 너만 내 옆에 있으면 돼. 안 다치고, 안 아프고 무사히 내 옆에 있으면 된다고.”
은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가…. 왜 이렇게 중간이 없어요? …하.”
답답해 한 질문이었지만 답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경주마처럼 오로지 제 갈 곳만 보고 달리는 것 같은 이 남자를 사랑한 저를 탓해야지.
그의 새카만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이제 와 그가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걸 알기에 저 또한 하릴없이 이곳으로 달려온 게 아니겠는가.
한국에 오자마자 천윤제는 언론에 입장을 표명한 보도자료를 돌림과 동시에 제게 차를 보내 이곳으로 오게 했다. 경기도 어디쯤, 한적한 교외의 별장이었다. 아마도 그의 말대로 나름은 저를 보호하겠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 같긴 했다. 이미 예슬에게 제 자취방 앞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잔뜩이란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대답해. 너 정말로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어?”
“우리 사귄 지 한 달밖에 안 됐어요. 알죠?”
“그래서. 그게 뭐.”
“게다가 우리 아직 어리고요.”
“그래서 싫다고? 나랑 결혼 안 한다고?”
“안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얘기까지 하기에는 많이 이르다는 뜻이잖아요.”
“이르긴 뭐가 일러, 난 씹, 지금 당장도 너랑 살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애예요? 진짜 왜 이렇게 막무가내예요?”
“나 좋아한다며. 사랑한다며. 그래 놓고 결혼은 하기 싫다고?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야? 그냥 따먹고 잠깐 즐기는 놈으로 생각하는 거냐고. 날 이렇게 등신 천치로 만들어 놓고…. 후, 정은채, 너 진짜 존나 양아치 같아, 알아?”
“하, 누가 누구보고…!”
기가 막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긴 헛숨을 내쉬었다.
잔뜩 상처받은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버거웠다. 왜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인지 모를 일이었다.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타격을 입을 사람은 다름 아닌 천윤제였다. 그는 정말로 그걸 모르는 걸까.
“그만해요. 하….”
이렇게 흥분한 상태에서 대화를 해 봤자 서로 감정만 상하겠다 싶어 고개를 돌렸다.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미 눈앞이 뿌예지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이런 일에 감정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상황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천윤제 대신 혜진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함께 의논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성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분명 복도를 디뎠다고 생각했던 발끝이 쭈욱,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미끄러졌다.
풍덩.
놀란 정신이 돌아왔을 땐 이미 물속에 빠진 이후였다.
“어읍…!”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들이 왈칵왈칵 밀려들었다.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러운 침몰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분명 발을 디뎌 몸을 세울 수 있을 만한 깊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의 공포감이, 그날의 충격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서. 물에 잠긴 채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 하고 눈을 감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이 생생했다.
공포가 엄습해 들었다. 폐부 가득, 물이 차오르는 것 같은 질식감이 느껴졌다. 발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그렇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하…!”
이제는 물속에서도 익숙한 체온이 제 몸을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하아! 콜록! 콜록!”
“너, 진짜…!”
저도 모르게 물을 꿀꺽꿀꺽 들이켠 탓에 연방 잔기침이 터졌다. 물 먹은 솜뭉치처럼 늘어진 몸이 그의 단단한 품 안에 안착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듯 안겼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아기 새처럼.
“하아…!”
“너야말로 애야? 잘 보고 걸어야지, 물도 무서워하는 애가 왜 이렇게 막…! 후….”
다그치듯 사납게 몰아세우는 목소리에도 어쩐지 안도가 됐다. 저를 안고 있는 사람이 천윤제라는 게, 제 앞에 서 있는 이가 그라는 게 너무나 안심이 됐다. 더 이상 막연한 공포도, 끝 모를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그의 목을 더 바짝 끌어당기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울어 버렸다. 흐윽, 끕,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제 목덜미와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은 그의 손이 토닥토닥, 위로하듯 몇 번이고 제 등을 쓸어내렸다.
“왜 우냐, 울고 싶은 건 나인데.”
“흐윽, 윽….”
“고개 들어 봐. 응?”
그가 상체를 설핏 뒤로 물리며 달래듯 말했다.
“은채야, 고개 들고 나 봐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발개진 눈자위에서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젖어 가물대는 시야에도 한 손으로 제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저를 보는 남자의 감정이 선연히 들어왔다.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러게 왜… 흐윽, 나한테….”
“애처럼 굴어서 미안. 내가 성급했고, 경솔했어. 미안해.”
“하아….”
“근데 너랑 결혼하고 싶은 건 진심이야, 정은채.”
짧은 한숨을 내쉰 그의 미간이 설핏 조여들었다.
“넌 진짜… 아니야?”
나직하지만 초조한 목소리였다. 잔뜩 풀이 죽은.
“하, 끝까지….”
“나는 정말로, 너랑 평생 같이 못 있으면 죽어. 너 없으면 안 돼. 그래서 너랑 결혼을 꼭 해야겠는데….”
“나도 당연히, 하고 싶죠. 결혼.”
왜 아니겠는가. 이렇게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터질 듯 폭주하고 그의 체온만 닿아도 온몸이 저릿저릿 울릴 만큼 그를 사랑하는데.
“나도…. 하아, 당연히 천윤제 선수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하고 싶은데…. 읏!”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기울인 그가 제 입술을 집어삼켰다. 흐릿해진 목소리가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찰랑, 물속에서 맞닿은 그의 몸이 제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며 자신의 골반 위로 허벅지를 올려 감았다. 그의 두꺼운 흉근 뒤로 두 다리가 교차하며 단단히 고정됐다. 더 이상은 허리 아래에서 찰박이는 시퍼런 물이 두렵지 않았다.
“흐으, 음…!”
그의 목을 끌어안고, 저돌적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혀를 받았다. 뜨끈한 호흡이 담뿍 밀려들었다. 달큼한 타액이 저를 달래듯 부드럽게 섞여들고, 고른 치열과 입 속 말캉한 점막을 샅샅이 훑고 지났다. 혀가 쓸린 곳곳에 열꽃이 피어났다.
후드득, 눈가에 잔뜩 고였던 눈물이 낙하하듯 흘러내렸다.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지지하고 있던 그의 손이 미끄러져 목덜미를 단단히 받쳤다.
“사랑해, 정은채.”
입술을 조금 떼어 낸 채, 침잠하듯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젖어 무거워진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려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네가 결혼하기 싫다고 하면 오늘 밤에 그냥 물에 대가리 박고 죽으려고 했어.”
“…하아, 미쳤어.”
“그 정도로 내가 널 사랑한다는 뜻이야.”
“…….”
“사랑해, 은채야. 나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아까처럼 그렇게 나한테 화내지 마. 지금처럼 이렇게 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보면 나…. 정말, 미칠 것 같아. 응?”
그의 애원에 심장이 콕콕 쑤셨다.
“…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보는 거 아니에요. 내가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하지 마. 사랑한다고 말해 줘. 난 그거면 돼.”
“…사랑해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다해 속삭였다. 새카만 그의 눈동자에서 불안이 걷히고 있었다.
“내 결정적 순간이 언제인 줄 알아, 정은채?”
끝없는 기다림과 기약 없던 불안의 끝. 그는 그 순간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
“정은채가 이렇게 완전히 나한테 온 지금.”
제게도 지금 이 순간이 삶의 가장 결정적 순간이리라.
새파란 물을 배경으로, 저를 향해 나직하게 웃고 있는 천윤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랑해.”
돌아보면, 그를 사랑하게 된 모든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그를 알고, 그를 알아 가고, 그를 열망했던 그 순간의 기억들이 이 결정적 순간을 이뤄 준 자양분인 거였다.
천윤제가 푸른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듯, 저 또한 그를 마음껏 안고 사랑한다 말해 줄 생각이었다. 결정적 순간은 기회를 잡는 자에게만,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을 잘 안다.
“사랑해요.”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고요 속, 찰랑찰랑, 동그란 파문이 이는 물소리만 귓가에 아스라했다. 이제는 천윤제와 함께, 이 푸른 우주를 함께 유영할 준비가 됐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