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7
6. 유혹
은채는 얼빠진 얼굴로 눈앞에 일렁이는 수영장 물을 바라보고 섰다. 어젯밤, 바로 저 안에서 천윤제와 키스를 하며 몸을 맞댔다.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몸을 끌어안고. 그렇게 열기가 올라 결국 그의 방까지 쫓아가 섹스를 했다.
“…미쳤지.”
뼈아픈 자조가 샜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지끈거리는 머리와 쪼개질 것 같은 허리를 붙잡으며 깊이 고뇌했다. 자그마한 머리통 속에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하나가 툭 던져진 것 같았다.
키스까진 어떻게,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다고 해도 그 이후의 일들은 정말이지 지극히 비이성적이고도 정신 나간 짓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천윤제와 섹스를 하다니.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날벼락 같은 사고였다. 불의의 사고. 자신의 의지에 반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그런 사고 말이다. 은채는 이성을 잃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 않고선 당장 짐이라도 싸 들고 서울 가는 비행기를 타고픈 심정이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미칠 것 같았다. 쪽팔리고, 어이없고. 일생일대 이런 대책 없는 사고를 친 것도 처음이고, 수습조차 막막한 일탈을 한 것도 처음이라.
천윤제야 원래부터 그런 놈이었으니. 이 여자 저 여자, 아무 여자나 꼬셔서 침대로 끌고 가는 놈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쳤다. 늘 가지고 다니는 더플 백에 콘돔을 소지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 쓴 것만 봐도 평소 성생활이 눈에 훤했다. 천윤제에게 있어 섹스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하룻밤 스포츠 같은 것 아니겠는가. 나쁜 걸레 자식.
그러니 확실히도, 문제는 저였다. 뻔한 개수작이란 걸 알면서도 놀아난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자괴감이 밀려왔다. 어쩌자고 그 악마 같은 놈의 유혹을 못 이겨 본능에 굴복하고 만 걸까. 그 뱀 같은 놈이 이젠 대놓고 저를 만만히 가지고 놀려는 수작임이 분명한데 왜 거기에 넘어가선 스스로 흑역사를 생성한 건지.
돌연 수영장의 기류가 바뀌고 있었다. 멍해 있던 눈동자를 거두고 설핏 고개를 돌린 순간, 은채는 저도 모르게 잔뜩 부은 제 입술을 꾹 눌러 깨물며 뒷걸음질을 쳤다. 놀랍게도 천윤제가 수영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당연히 아침 훈련에 나타나지 않고 개인 수영장에서 따로 연습이나 하고 있을 거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멀리서부터 저를 보며 저벅저벅 다가오는 얼굴이 태연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예의 그 뻔뻔하고도 느물대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더니 제 앞에 바짝 다가와 섰다.
“좋은 아침.”
고개를 숙여 귓바퀴 가까이에 낮게 속삭이는 그 음성에 잔털이 쭈뼛 솟았다.
차라리 대놓고 엿을 먹였으면.
간절히 기도하며 그를 마주했다. 매끈한 얼굴이 빙글빙글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연한 걸 넘어서 도리어 퍽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 변태 사디스트 새끼.
“잘 잤어?”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어 던지며 묻는 목소리가 나긋했다. 굳이 제 앞에서 옷을 벗는 의도가 아주 뻔했다.
말려들지 않겠단 의지로 부러 시선을 주지 않고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들고 있는 태블릿 피시에 어제저녁 김 팀장님이 메일로 보내온 화보 A컷들을 골라 띄우며 그 앞에 내밀었다.
“사진작가님이랑 회사에서 고른 A컷들인데, 최종적으로 확인해 달래요.”
“매니저님 아침부터 열일하시네.”
“늦어도 점심 식사 시간까지 짧게라도 회신 달라고 하셔서요.”
그는 태블릿을 받아 들며 대충 툭, 툭 사진을 넘기고 있었다.
“콘셉트는 남성미, 뭐 그런 거라고 하셨어요.”
사실 김 팀장은 정확히 ‘짐승 같은 남자의 금욕 섹시’랬다. 그걸 그대로 내뱉었다간 또 무슨 말꼬리를 잡힐까 싶어 대충 뭉뚱그릴 단어로 대체했을 뿐이다.
“야, 우리 매니저님이 딱 좋아하는 콘셉트네? 그쵸?”
눈치 빠른 천윤제가 사진을 훑으며 읊조렸다. 그러더니 다시 제 가슴 앞에 태블릿을 내밀었다.
“나보단 매니저님이 더 잘 고르겠다. 대충 알아서 오케이 해.”
“몇 장 안 되니까 직접 보시죠.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시고요.”
“딴소리를 왜 해? 내 남성미에 대해선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건데.”
의미심장한 말로 고집을 부리는 그에게서 태블릿을 받아 들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싶었다.
어느새 하나둘 모여든 선수들이 저마다 스트레칭을 하고, 가벼운 몸풀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 중 오동훈의 모습이 눈에 띄어 저도 모르게 가만 눈치를 살피자, 돌연 옆에 서 있던 천윤제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긴 다리를 움직였다. 행여 또 시비라도 걸까 싶어 저도 모르게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지켜보던 이들 모두 다 같은 마음인 건지 두 사람에게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발목을 짚고 바닥에 앉아 몸을 풀고 있던 오동훈이 제게로 다가온 천윤제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수영장 전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역시나 먼저 입을 연 건 천윤제였다.
“야, 너도 나 재수 없지.”
“뭐?”
다짜고짜 서두를 잘라 먹고 묻는 그의 말에 오동훈의 얼굴에 당황과 짜증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도 너 재수 없거든.”
“…하.”
또 싸움이라도 나면 코치님을 빨리 불러와야 하나. 아직 방에 계실 텐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래도 무슨 큰일이야 나겠는가 싶으면서도 불안했다. 워낙에 예측이 안 되는 인간인지라.
은채는 그 짧은 순간, 수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하며 가장 현명할 대처를 고민했다.
“피차간 재수 없는데 웬만하면 서로 부딪치지 말자. 솔직히 나 너랑 이렇게 말 섞는 것도 귀찮거든.”
“아침부터 이게 시비를….”
“시비 거는 거면 벌써 네 멱살 잡고 올려붙였지. 시비 아니야, 이거.”
“아니면 뭔데?”
“충돌 방지. 네 말대로 너랑 나 때문에 훈련 분위기 좆창 나니까, 그거 하지 말자고. 괜히 말 섞다 빡치는 거. 아예 서로 없는 셈 치면 편하잖아, 서로. 안 그러냐?”
천윤제의 말에 오동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짚었다. 그러다 결국 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휴전이라 봐도 좋은 걸까. 낯선 타협은 그렇게 평화롭게 끝이 났다. 그의 등 뒤에서 잔뜩 긴장해 손가락을 움켜쥐고 있던 게 무색해질 만큼 간단했다.
그렇게 먼저 말 거는 것조차 싫다고 뻐기더니, 웬 변덕이 불어 갑자기 이런 중대 결심을 한 건지 의아해 빤히 쳐다만 보는데, 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맞춰 왔다. 마치 어떠냐고, 잘하지 않았느냐며 칭찬을 갈구하는 대형 사냥개 같은 표정이었다.
뭐. 어쩌라고?
미간을 좁히며 눈을 깜빡거리는데 때마침 손 코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를 틈타 슬쩍 자리를 피하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돌아서는데 뒤통수로 쏟아지는 천윤제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져 얼얼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건데.
한쪽에 죽 늘어선 킥 판 하나를 빼 들고 구석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최대한 그의 눈에 띄지 않을 구석으로.
레인의 출발대 앞에 자리를 잡고 선 커다란 덩치가 눈에 띄었다. 보지 않으려야 도무지 보지 않을 수 없는 우월한 몸이었다. 무려 저 몸과 어젯밤 그렇게 진하게 맞붙어 야릇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랫배가 절로 찌르르했다. 솔직히 저 몸으로, 저 얼굴로 대놓고 한 번 하자면서 몸부터 들이대면 거부할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결국 어제의 그 사고엔 제 탓이 없는 게 아닌가. 다 저 빌어먹을 변태 놈 때문이지.
풍덩, 물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그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실, 늘 동경하고 감탄하던 천윤제의 유영을 이렇게 눈앞에서 가까이 볼 수 있게 된 것까진 좋았다. 싸가지 없고 무례한 그의 매니저 일을 해 보겠다 수락한 건 비단 금전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으므로. 물론 그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매니저 이전에 선수 천윤제의 오랜 팬이었다.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작은 거실에 엄마와 나란히 붙어 앉아 두 손을 꼭 맞잡고 그를 응원하고 그 이름을 부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때마다 실망은커녕 더 엄청난 기록을 보여 줬던 그 희열을 어떻게 잊겠는가. 천윤제는 하릴없이 꿈에서 한 발짝씩 멀어져야 했던 두 모녀의 오랜 꿈이었고 대리 희망인 거였다.
그래서 어쩌면 더 지금의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지 몰랐다. 마치 처음 천윤제의 난잡한 스캔들을 접했던 그날처럼.
“후…….”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 이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걸까.
휘슬 소리와 함께 물 위로 튀어 올라 몸을 일으키는 천윤제의 시선이 오뚝이처럼 다시 제게로 꽂혀 왔다.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오후 훈련까지 마치고, 예정된 하루 일정이 모두 끝난 시각이었다. 종일 깨질 것 같은 머리로 천윤제를 바라보고 있던 은채는 저녁 시간,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밥 생각은 있지도 않았고, 갑갑해 호텔 근처라도 좀 산책을 하고 싶어서였다. 씻으러 방에 올라간 천윤제도 한두 시간쯤 쉬다 나올 거란 계산이 섰다.
호텔 정원에 난 길을 따라 걷기를 한참. 해변과 연결된 산책로가 비밀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지이잉.
길게 우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천윤제였다.
– 어디야?
제발 좀 잠깐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줬으면 싶은데. 이 자비 없는 인간은 그조차 허용하지 않을 셈인 듯싶었다.
“잠깐 밖에 나왔는데요.”
– 밖에? 어디?
“그냥 밖에요.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 어. 있는데, 어디냐고.
“…호텔 앞에서 산책 중인데요.”
– 그럼 로비로 와.
제 할 말만 하고 끊긴 통화에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헛숨을 내뱉었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법을 모르는 인간인 게 분명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목전에 두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남들 다 쉬는 휴식 시간에 대체 제게 시킬 일이 뭐가 있다고 굳이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건지.
타박타박 한참을 걸어 도착한 로비 앞, 원형 광장엔 익숙한 스포츠카 한 대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조수석 앞에서 멈칫멈칫 걸음을 멈추자 짙게 선팅된 차창이 스르륵 내려갔다.
“어디 가시려고요?”
“타. 너도 갈 거야.”
불길했다. 어두운 차 내부가 꼭 알 수 없이 시커먼 천윤제의 속 같아서 바짝 긴장이 됐다. 이 차에 오르면 금방이라도 그 어둠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어디 가는데요?”
“제발 타라. 안 잡아먹을게.”
귀찮게 굴지 말고 빨리 타라는 듯 다시 뇌까리는 음성이 퍽 고압적이었다. 하릴없이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 벨트를 맸다. 제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이 따갑고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뭐 먹을래?”
“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맛있는 거 사 줄게.”
“…왜요? 천윤제 선수가 왜, 저한테 맛있는 걸 사 줘요?”
“너한테 맛있는 거 먹이고 싶으니까.”
이 자식은 뭐가 이렇게 당당하고 뻔뻔스러운 건가. 저는 이렇게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한데, 노골적으로 저를 훑고 느긋이 관찰하는 꼴이 못 견디게 얄미웠다.
“죄송하지만 저는 밥 생각이 없는데요.”
“왜 없어? 점심도 그렇게 깨작거려 놓고.”
그런 사고를 쳐 놓고도 밥맛이 있는 네가 더 이상하지 않냐고 되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뭐 먹고 싶냐니까.”
필요한 게 있다더니, 고작 밥이나 먹자고 제 시간을 빼앗고 구태여 이 불편한 공간으로 저를 불러낸 건가 싶었다.
“말 안 해? 그럼 내 마음대로 간다.”
시선을 거둔 그가 전방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 차는 호텔 로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빠져나가며 수풀이 우거진 도로를 내달렸다.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론 카플레이 액정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 끝이 능숙했다. 꼭 어젯밤 제 몸을 매만지던 손길처럼.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민망하고도 불편한 기억에 귓불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오늘따라 왜 답지 않게 과묵하실까.”
얼마나 정적이 이어졌을까.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운 그가 관자놀이에 손을 괴고 고개를 틀어 다시 저를 응시했다.
“우리 해야 할 얘기 있지 않아?”
부러 떠보는 시선에 지고 싶지 않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없는데요, 전.”
어차피 벌어진 일,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구는 천윤제에게 괜히 끌려가지 말자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혼자 아무리 끙끙대고 고민해 봤자 그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하룻밤 즐길 거리였을 터다. 그걸 약점 잡아 저를 흔들고 괴롭히고 찔러 가며 놀리고 약 올리는 게 최종 목적일 거였고.
안 말릴 거야, 이 악랄한 변태 사디스트 놈아.
“뭐가 이렇게 뻔뻔해?”
짙은 눈썹을 설핏 들썩이며,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남자의 얼굴이 오롯이 저를 향했다.
“왜 할 말이 없어? 어제 날 그렇게 격렬하게 따먹어 놓고.”
따먹어…?
“그렇게 안 봤는데, 정은채 되게 발랑 까졌네.”
“하. 뭐? 까져?”
적반하장으로 개소리를 지껄이는 반반한 낯짝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번 따먹었으니 볼 장 다 봤다 이거야, 뭐야? 왜 쌩을 까? 너도 좋아했잖아. 아니야?”
들썩거리는 그의 눈매가 돌연 가늘어지고 있었다. 입가에 맴도는 건 쌍욕뿐이라 입을 악물었다. 아니,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고 해야 옳았다.
“아니야?”
한층 더 높아진 목소리가 위압적으로 재차 추궁을 해 왔다. 천윤제의 질문을 이 상황의 논점을 벗어나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지금 어제 제가 좋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은가.
따먹다니. 쌩을 까다니. 다른 인간도 아니고 천윤제 입에서 나오기에 적합한 말이던가,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었냐니까?”
“아니, 하.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아요?”
“안 좋았어? 왜 대답을 안 해? 너 설마, 지금 어제 나랑 했던 게 별로였던 거야? 그래서 이래?”
딱히 별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급발진을 한 천윤제가 사납게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하기야. 그렇게나 걸레처럼 아랫도리를 놀렸을 그가, 누구에게고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들어봤을 그가, 승부욕 빼면 시체인 그가 가장 타격을 받을 말이긴 했다.
확신이 왔다. 이게 천윤제를 들쑤실 수 있는 패가 될 거란 게. 돌연 못된 심술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라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그를 흔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대답해야 해요?”
일순 충격으로 무너지는 천윤제의 얼굴이 느리게 감은 화면처럼 눈앞에서 재생됐다. 이렇게나 당황하는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이상하리만큼 짜릿한 쾌감이 온몸에 번져 나갔다.
“…와.”
빠앙.
“와, 뭐 이런 게….”
파란불로 바뀐 것도 모르고 멍하니 계속 제 얼굴만 쳐다보던 천윤제의 잇새에서 기막힌 헛숨이 터져 나왔다.
빠아앙.
뒤차는 계속해 클랙슨을 눌러 대고 있었고, 그는 여전히 짜증스럽고도 얼빠진 얼굴로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뭐 해요. 안 가요?”
정면을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하자 운전대를 불끈 감아쥔 손등에 핏줄이 우드득 솟았다. 부우웅, 거칠게 밟는 액셀에 배기음 소리가 요란했다.
자존심이 상해 잔뜩 골이 난 그 표정에 스멀스멀 웃음이 샜다. 이렇게 간단하고도 효과 좋은 복수법이 있으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얼마 달리지도 못해 돌연 그가 핸들을 꺾어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가 다급히 갓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그래서. 진짜 넌 안 좋았다고?”
“솔직히 말해요?”
“어. 말해, 빨리.”
“아프고, 힘들었어요.”
“그건 네가 처음이니까….”
“네, 처음이니까 내 탓이 아니라 천윤제 선수 탓이죠. 그렇게 큰 걸 무식하게 막….”
“뭐, 무식?”
눈을 크게 치켜뜬 그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너 내가, 내가 그렇게 배려를 해서 했는데, 그렇게 꾹꾹 참고, 누르고,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너 놀랄까 봐 혼자 자위까지 해 가면서 그랬는데, 무식? 그냥 아프고 힘들기만 했다고?”
아프고 힘들었기만 했으면 이렇게나 마음이 혼란스럽겠냐마는. 경악한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일부러 입술을 감쳐물고 말을 아꼈다. 아직 그간 제가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에 당황과 어이없음, 그리고 묘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 해.”
새려는 웃음을 겨우 삼키고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찰나.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다시 해. 이번엔 안 아프게, 안 힘들게 잘할 수 있어.”
“미쳤어요? 뭔 소리야. 뭘 다시 해요?”
“섹스 다시 하자고. 어제는 처음이라 내가 좀 조절이 안 돼서 힘들었는데, 다시 하면 기막히게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애초에 이런 인간을 상대로 이겨 먹으려 했던 것부터 욕심이었을까.
“말을 막 자기 마음대로 바꿔요, 왜? 한 번 하고 나면 안 괴롭히겠다면서요?”
“몰라. 마음 바뀌었어. 다시 해.”
“저기요. 양아치세요?”
“한 번밖에 안 해 보고선 네가 뭘 알아? 적어도 몇 번은 해 봐야 이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너 이렇게 성급하고 경솔한 타입이었어?”
“그렇게 섹스가 하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알아봐요. 나 아니어도 되잖아요. 굳이 왜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그러니까 왜. 왜 싫어. 왜 나랑 섹스하는 게 싫으냐고!”
“그냥 싫어요. 싫다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요? 그리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왜 짜증이에요? 천윤제 씨,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예요? 진짜 왜 이래요, 유치하게?”
“억울해 죽겠어서 그런다. 나는 씨발, 좋았는데. 존나 존나 좋았는데. 좋아서 밤새도록 좆 잡고 흔들고도 모자라 지금도 이 지경인데, 넌 전혀 아니라니까. 하나도 안 좋았다니까. 나 혼자만 발정 나서 미친 새끼처럼 구는 거라는데, 내가 눈이 안 돌아? 어떻게 안 돌아. 이렇게 짜증 나 죽겠는데!”
도무지 부끄러움이라곤 모르는 것 같은 말들이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 처음 보는 흥분하고 짜증 내는 모습에 뭐라 대꾸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다소 상기된 얼굴로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급기야는 도대체 이 자식이 왜 이러나 싶은 근원적 의문까지 들었다.
“병원 가 봐요. 진짜 미친 거 같아.”
“미친 거 알았으면 해, 나랑.”
“싫어요.”
“야.”
“그래요. 어제는 나야말로 잠깐 미쳐서, 술도 안 마셨는데 분위기에 취해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어요. 실수였어요.”
“뭐?”
“그래도 어쨌든 내가 자발적으로 한다고 한 거였으니까. 내 입으로 오케이 하고 한 일이니까 그거에 대한 책임 전가나 원망은 안 해요. 내가 한 행동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요.”
“쉽게 말해. 그래서 뭐. 나랑 한다고, 만다고.”
“그러니까 거기까지라고요. 다시 같은 실수 반복하면서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되새기고 싶지 않다고요. 다신 실수 안 해요, 천윤제 선수랑. 절대로.”
또다시 소리를 높이고 생떼라도 부릴 줄 알았건만, 의외로 침묵이 길었다. 괴괴한 정적이 빼곡히 내려앉았다. 저를 빤히 응시하는 얼굴이 잠시 혼란과 분노로 일렁이더니, 이내 코웃음을 친 그가 느긋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 그럼 넌 네 마음대로 해.”
드디어 포기를 하는 건가. 이제야 어제의 그 미친 짓거리가 저를 놀리는 데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가.
“난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덧붙이는 사족이 퍽 불안하고 의문스러워 그를 바라봤다. 그는 그대로 다시 액셀을 밟고 운전대를 꺾을 뿐이었다.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가는 바퀴에 속도가 붙었다.
“무슨 뜻이에요?”
“뭐가 무슨 뜻이야. 내 마음대로 하겠단 말에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또 있어?”
“그러니까. 천윤제 선수 마음이 뭐냐고요.”
“꼭 너랑 다시 섹스하고야 말겠다는 마음.”
“…….”
“그래서 반드시 네가 내 좆 먹으면서 좋다고 엉엉 울게 만들겠단 결심.”
이건 또, 뭔 변태 같은.
“저기요? 내 말 뭐로 들었어요? 다시는 안 한다고요.”
“너는 내 말 뭐로 들었냐? 난 꼭 다시 할 거라고.”
“안 한다니까?”
“그래. 하지 마. 난 할 거니까.”
“지금 말장난해요?”
“넌 내가 하는 말이 다 장난 같냐?”
장난 같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타고난 집안, 타고난 금수저에 타고난 외모, 타고난 재능까지. 부족할 것 하나 없이 탄탄대로를 달려온 인생을 살아왔으니 이 모든 게 얼마나 장난 같고 재미있을까. 인생이 얼마나 장난 같을까.
그러니 사람을 이렇게 우습고 만만하게 알고 덤비는 게 아니겠냐고.
“장난이었으면 좋겠는 사람이 누군데, 지금.”
낮게 뇌까리는 욕지거리가 희미하게 사그라들었다.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그의 옆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간절히 알고 싶었다. 천윤제란 인간에 대해. 당최 어떤 사람인 건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훈련이 없을 땐 뭘 하고, 어떻게 쉬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정말로 어울리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지.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왜 이렇게까지 변태적인 성욕을 가지고 있는 건지….
“네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는데.”
돌연 그가 제 속을 읽은 듯 느긋이 입을 열었다.
“난 시작을 안 했으면 안 했지 중도에 포기는 안 해. 아니, 못 해.”
“…….”
“못 하면 잘할 때까지 하고, 안 되면 될 때까지 해. 그래서 지금껏 살면서 마음먹고 못 이룬 건 없어.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선에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하고, 어떻게든 해. 다른 건 몰라도 근지구력 하나는 누구랑 싸워도 안 질 자신 있어.”
“대단하시네요. 그래서요.”
“고로 정은채, 넌 잘못 걸렸단 소리지.”
“협박이에요?”
“그럴 리가. 협박한다고 넘어올 매니저님 아니시잖아. 그 정도는 파악했거든, 나도?”
“그럼 뭔….”
“협박 아니고 유혹.”
“…….”
“그거 할 거야, 지금부터.”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번들거렸다. 어젯밤 저를 안아 들고 끊임없이 허리를 쳐올리던 그 눈빛과도 퍽 닮아 있었다. 육체적 욕망과 승부욕이 가득 담긴, 저 위험한 눈빛은.
매끈히 웃는 낯에 가슴이 쿵쾅거리고 근원 모를 불길함이 엄습해 들었다.
천윤제에게 이끌려 간 곳은 제주 바다에서 갓 잡은 해산물을 재료로 쓰는 예약제 레스토랑이었다. 방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었고, 예약된 테이블 외의 다른 손님은 일절 받지 않는 곳으로, 주변 관광객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어 안심인 곳이었다. 어쨌거나 천윤제 얼굴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음식도 분위기도 모두 훌륭했다. 특히나 대게 살과 다진 전복살이 듬뿍 들어간 리조또와 옥돔 스테이크는 입에 넣는 순간 그대로 혀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러니 감탄할 겨를도 없이 입 속에 음식을 밀어 넣을 수밖에.
“생각 없다더니, 잘 먹네. 이런 거 좋아하나 봐. 바짝 말라선 맨날 깨작깨작, 빵 쪼가리나 먹고 사는 줄 알았더니.”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손등 위에 날렵한 턱을 올려 괸 그가 노골적으로 저를 바라보며 말해왔다.
“맛있냐?”
“맛있어요. 이런 덴 어떻게 알았어요?”
“어머니랑 제주도 오면 자주 오는 데라.”
“새어머니요?”
무심코 물어 놓고 아차, 싶었다. 그의 가족 관계를 떠올리다 죽은 친어머니와 새어머니가 있다는 걸 상기하며 저도 모르게 ‘새’ 자를 붙여 되물은 거였다.
“어. 새어머니.”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은근 다 알아봤나 봐?”
“…대한민국에 천화 그룹 오너 일가 가족사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뭣보다, 천윤제 선수랑 대표님이랑 하나도 안 닮았어요.”
천혜진 대표가 번쩍이는 불처럼 화려한 미인형이라면 천윤제는 얼음을 끌로 깎은 듯한 분위기의 미남이었다.
“그래도 내 면전에 대고 ‘새어머니’라고 콕 집어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인 것 같아, 정은채.”
너무 생각 없이 말을 했나 싶었다. 다 가진 남자이니 그에겐 아무 상처도 없을 거라고, 그 어떤 아픔도 그늘도 없을 거라고 섣부르게 판단한 게 문제였다.
들고 있던 포크를 달카닥,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를 마주 봤다.
“불쾌했으면… 미안해요. 다른 뜻은 없었고, 무심결에 한 말이에요.”
“불쾌할 게 뭐 있어, 사실인데. 괜찮아. 새어머니를 새어머니라고 말한 건데. 그냥 대놓고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 봐서 신기해서 한 말이야, 나도.”
짙은 눈매가 느른히 깜빡거렸다.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아무튼, 실수였어요. 미안해요.”
“미안하면 나랑 한 번 더 자주든지.”
하여간에, 잠시도 진지할 수는 없는 인간이다, 싶었다.
“성희롱을 되게 숨 쉬듯이 하시네요.”
“신고할 거야?”
“봐서요.”
“그래. 고마운데 안 고맙네.”
헛숨을 내쉬며 다시 포크를 집어 들자, 그가 자신의 앞으로 제 스테이크 접시를 밀어 옮겼다.
“내 거 더 먹어.”
“천윤제 선수는요. 안 먹어요?”
혼자만 계속 오물대고 먹었던 게 어쩐지 민망해졌다. 생각 없다고 해 놓고 너무 열심히 먹은 건가 싶어서. 저를 말과 행동이 영 다른 인간이라 판단할까 봐.
“배불러.”
“그거, 반도 안 먹어 놓고 배가 불러요?”
“어. 너 먹는 거만 보고 있어도 배불러.”
미친 건가. 설마 그 유혹인지 나발인지를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린 애도 아니고 먹을 거 사 주면서, 이게 무슨 유치한….
게다가 그는 한참 전부터 도무지 저를 보는 진득한 시선을 거둘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만 좀 쳐다봤으면 좋겠는데, 사람 먹는 걸 왜 이렇게 빤히 구경하고 있는 건지. 삼키는 족족 식도에 걸려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좀 안 쳐다보면 안 될까요? 계속 그렇게 보고 있을 건가? 나 체할 것 같은데?”
“체하면 내 주치의 불러 줄게. 걱정하지 말고 먹어.”
“아니. 쳐다보지를 말라니까요?”
“싫어. 내 눈이야. 네가 뭔데 보지 말래?”
“지금 보고 있는 거 내 얼굴이거든요?”
“얼굴에 금칠했어? 좀 본다고 닳아?”
“하,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네, 진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식기를 내려놓고 물을 벌컥 들이켰다. 무시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계속 천윤제의 장난을 받아 주다간 정말로 말려들 것만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의 기억이 문득문득 상기돼 미칠 것 같은 상황에.
“나도 이해가 안 가. 그렇게 고민하고 혼자 딸 칠 시간에 진작 너나 꼬실 걸, 뭐 하느라고 시간 낭비를 했나 싶어.”
“혹시 나 좋아해요? 그동안 그렇게 괴롭히더니만 미운 정이라도 들었어요?”
“이렇게까지 발정 난 게 좋아하는 감정 때문이라면 맞는 것 같아. 맞아. 내가 너 좋아하나 봐, 정은채.”
이 경망스럽고 가벼운 인간. 깊은 고뇌라고는, 감정에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한없이 가벼운 솜털 같은 말을 내뱉는 남자를 보며 환멸 담긴 눈빛을 쏘았다.
“하…. 뭐라는 거야. 저기요. 발정이 났으면 치료를 받으세요. 동물 병원 가서 중성화 수술이라도 하시든지.”
그대로 드르륵,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증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영수증을 탁 채어 나와 타박타박 카운터 앞에 섰다. 그러고는 영수증에 쓰인 숫자를 확인하며 지갑을 꺼내 들려는 순간. 그녀는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오늘 드신 디너 코스 두 분, 82만 원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82만 원이라니. 미친 건가. 저녁 한 끼 먹는 데 이렇게까지 돈을 낭비할 일인가 싶었다. 단둘이 이렇게 사적인 장소에서 밥을 먹은 건 처음인데. 혹시 법인 카드를 써도 되는 건가. 아니, 이건 업무가 아니었으니까 쓰면 안 되는 건가.
당황에 젖은 눈동자가 방황하듯 지갑 속 카드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사이,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여기요.”
기다란 팔이 제 어깨를 타고 넘어왔다. 어느새 뒤따라 나온 천윤제가 카드를 내밀고 있는 거였다.
민망함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실컷 자신 있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선 계산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꼴이 얼마나 우습고 하찮았을까.
“이사장님이랑 오실 때 늘 드시는 딱새우, 오늘은 좀 물이 안 좋아서 준비 못 했는데. 괜찮으셨어요?”
제 끓는 속은 조금도 모를 레스토랑 직원이 여유 있게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여기, 제 매니저님께서 엄청 맛있게 드셨어요. 입맛이 아주 고급이셔서 맨날 깨작거리는 분인데, 이분이.”
“아, 그러셨구나.”
조롱을 하겠다는 건지, 장난을 치겠다는 건지. 도통 모를 그의 말을 들으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곤 레스토랑을 나섰다.
“잘 먹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선 그의 등짝을 향해 작게 말했다. 어쨌든 제가 얻어먹은 요리가 그렇게 비싼 저녁이라는 걸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싹 씻을 순 없었다. 물론 천윤제의 82만 원과 자신의 82만 원의 가치가 매우 다르다는 건 잘 알지만.
“이렇게 맛있는 거 사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요.”
“그래. 거기까지만 들을게.”
하여튼 이 눈치 빠른 새끼.
“저한테 이런 비싼 거 사 주셔도 소용없어요.”
“뭐가 소용없는데?”
“유혹이요. 안 넘어간다고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코웃음을 치며 저를 돌아봤다.
“유혹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뭔 유혹이래.”
은채는 내뱉지 못한 작은 탄식을 삼켰다. 또 수에 말려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천윤제 앞에서 꼴이 얼마나 더 우스워져야 하는 걸까.
“애야? 넌 누가 맛있는 거 사 주면 막 끌리고 그래? 아, 너 초콜릿 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유혹이 아니면. 나한테 왜 이렇게 비싼 걸 사 줘요? 것도 법카도 아니고 개카로 막 결제를 하고?”
“데이트하자고 겨우 꼬셔서 끌고 나왔는데, 그럼 뭐, 천국이라도 가? 말했잖아. 너 맛있는 거 먹이고 싶었다고.”
데이트라니. 행여 제가 알고 있는 데이트란 단어의 의미와 그가 알고 있는 의미가 다른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가늠해 봤다.
“유혹이나, 데이트나.”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지.”
물끄러미 저를 들여다보는 능글맞은 시선을 홱 피하는데,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빠른 걸음으로 사각의 공간을 벗어나듯 걸어 나갔다.
“다음부턴 이렇게 개인적으로 단둘이 저녁 먹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진도 빠르다? 그새 다음 데이트를 생각했어?”
“생각한 거 아니고요, 경고. 경고하는 거거든요.”
이를 아득 물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나 맛집 많이 아는데. 오늘 여기는 맛집 축에도 못 끼는 수준이었고.”
어쩌라는 건지. 정말로 저를 먹을 거 사 주면 쫓아가는 어린 애 수준으로 만만히 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유혹 아니라면서요.”
“아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네가 의외로 먹을 거에 좀 약한 것 같아서.”
“아니거든요. 전혀?”
“디저트 먹을래? 입에 넣자마자 녹는 케이크 파는 데 아는데.”
조수석 문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저보다 앞서 나간 기다란 팔 하나가 달카닥, 문을 열어젖혔다. 은채는 느물느물 물으며 저를 향하는 시선에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에 올랐다.
“오늘은 이쯤 끝내자. 내일은 한 시간 일찍 집합하는 거 잊지 말고.”
손성욱의 목소리에 지친 기색의 선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윤제도 얼굴에 맺힌 물기를 쓸어 닦으며 물에서 나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저 멀리, 당연히 정은채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들을 일일이 훑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 수영장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이상한 초조함에 마음이 달았다. 개새끼처럼 발정이 난 것도 모자라 이젠 고작 눈에 안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불안함을 느끼는 걸 보면 정말이지, 확실히 정상은 아니란 걸 스스로도 잘 알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이렇게 돼 버렸는걸.
속는 셈 치고 확인이나 한번 해 보려고 정은채와 섹스하는 동안 완전히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23년을 수절한 까닭은 다 정은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걸. 처음엔 이 좋은 걸 이제야 경험했단 게 억울했고 다음엔 다른 여자도 아닌, 그 요망한 여자에게 아다를 따였다는 게 눈물 나게 감사해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사춘기 소녀처럼 들썽거렸다. 마음이 급해지고, 몸이 달았다. 어떻게든 다시 그녀를 안고 싶어서.
라커 룸으로 가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길어지는 신호음을 들으며 마른 수건으로 매끈한 얼굴 위 물기를 닦아 낼 때였다. 달칵. 그제야 수화기 너머에서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보여?”
– 끝났어요? 편의점에서 이온 음료 좀 사고 오전에 찾으셨던 마사지 볼도 들고 가는 중이에요.
다시 제게로 오고 있다는 말에 불안하게 뛰던 심박이 정상 범주로 돌아오고 있었다. 스스로도 기가 막힌 분리 불안 증세였다.
아무래도 이런 정도의 미친 증세인 걸 안다면, 그나마도 더 뒷걸음질을 칠까 싶어 있는 대로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뭐 먹을래.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어제 초밥 먹었으니까 오늘은 한식 먹을래? 흑돼지 메인으로 하는 한정식집 아는데.”
– 아뇨. 이러다 제가 돼지 될 것 같아요. 오늘은 그냥 다른 선수들이랑 같이 호텔 밥 먹으면 안 돼요?
“그게 먹고 싶어?”
– 네.
“알았어. 금방 씻고 나갈 테니까 로비에서 기다려.”
전화를 끊고 서둘러 수영복을 벗었다. 그러자 곁에서 잠자코 보고 있던 손성욱이 그를 보며 말을 붙여 왔다.
“넌 전지훈련을 왔냐, 맛집 투어를 왔냐?”
흘긋, 말을 거는 얼굴을 확인하곤 무심히 수영모와 수경도 마저 벗어 냈다. 머릿속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라.
“저녁마다 정 매니저랑 둘이서만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닌다며.”
“전 거의 안 먹으니까 체중 걱정은 마세요.”
“먹지도 못하면서 뭐 하러 맛집 투어를 다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윤제를 보며 헛기침을 한 손성욱이 조심스레 다가와 작게 속삭여 물었다.
“너희, 혹시 사귀냐?”
윤제는 그제야 고개를 완전히 돌려 손성욱을 마주했다.
“그래 보여요?”
“사귀냐고.”
손성욱은 행여나 누가 들을까 싶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재차 추궁을 해 왔다.
“너 인마, 안 그래도 이 소문 저 소문으로 시끄러운 놈이 매니저 하고까지 그런 소문 나면….”
“걱정 마시죠. 아주 철벽을 어찌나 치시는지 들어갈 틈도 없습니다.”
“…뭔 소리야.”
혼잣말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윤제의 심각한 표정에 영문을 알 리 없는 손성욱이 돌연 뒷걸음질을 쳤다. 눈빛이 영 싸했다. 그가 아는 한, 천윤제가 이렇게까지 싸한 눈깔로 얼빠진 소리를 하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무언가에 집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을 때.
오래 옆에서 그를 지켜본바, 대부분의 경우 그 대상과 목표가 기록 단축이긴 했다. 천윤제는 일단 한번 목표를 정하면 무서울 만큼 매달리고 집착해 어떻게든 끝을 보고야 마는 광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별론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갑자기 미간을 푹 우그러뜨리며 버럭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코치님이 보기엔 어때요?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 나 매력 없어요? 안 꼴려?”
“뭐?”
“아니, 이상하잖아. 내 얼굴 보겠다고 달려드는 팬들이 몇이고, 당장 호텔 문만 열고 나가도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들이 줄을 섰는데. 도대체 왜 저 혼자만 특이 취향인 거냐고요. 내가 왜. 어디가 어때서.”
“야, 너, 진짜로…?”
설마 하며 얼굴을 구기는 손성욱을 뒤로한 채, 윤제는 터벅터벅 샤워실로 걸어 들어갔다. 애초에 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라 그저 혼잣말에 가까운 한탄이었던 모양이다.
샤워기 밑에 선 그가 물을 틀어 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진 물줄기가 미끈한 근육을 타고 후드득 흘러내렸다.
그날 밤을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키스만으로도 이미 흠뻑 젖어서 방에 들어왔을 만큼 그녀도 흥분해 있었고, 어설프고 서툴렀으나 어찌 됐든 삽입에 성공했으며, 버거워하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욕구를 누르며 부드럽게 움직이고자 노력했다. 절정의 순간, 그녀도 저를 꽉 끌어안으며 신음했고 충분히 오르가슴을 느낀 듯한 표정까지도 직접 제 두 눈으로 확인을 했다.
도무지 모를 일이다. 도대체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을 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날의 섹스가 왜 별로였다는 건지. 아프기만 하고 힘들기만 했다는 소릴 들어야 하는 건지.
“…씨발.”
또다시 묵직하게 부피를 키우는 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발기를 할 만큼 미쳐 있는데, 언제까지 유혹을 해야 정은채가 다시 제게 넘어올는지는 기약이 없다는 게 가장 좆같은 부분이었다.
“도대체 이게 왜 싫다는 건데.”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하며 수전을 오른쪽 끝으로 홱 돌렸다. 머리 위로 얼얼해질 만큼 차가운 물이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찬물을 맞으면서도 열 오른 단전의 묵직함은 한참이나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