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8
7. 상처 조각
“왜 따라 나와요?”
은채는 식당을 나선 뒤에도 계속해 제 뒤로 따라붙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산책한다며.”
“방에 올라간다면서요.”
“일찍 들어가 봤자 뭐 해. 어차피 네 생각 하면서 또 좆이나 흔들 텐데.”
씽긋, 입꼬리를 해맑게 올리며 웃는 그의 얼굴이 제 둥근 이마 위에서 아른댔다. 제주도에 온 첫날의 그 사고 이후, 돌아가기 전날 밤인 오늘에까지. 하루가 다르게 뻔뻔함을 경신해 가는 천윤제를 어째야 좋을지. 이젠 거의 포기 상태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호텔 로비를 걸어 나와 해변과 이어지는 길을 향해 걸었다. 지난번, 혼자 산책을 하려다 천윤제의 방해로 가 보지 못했던 길이었다.
제법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었다. 벚꽃 흩날리는 계절에 처음 천윤제를 만났고, 어느새 프락치, 아니 매니저 노릇을 한 지도 두 달이 훌쩍 지나고 있었으니 시간이 참 빨랐다. 길어진 햇살에 여름의 초입에 접어든 바다는 눈부신 에메랄드빛을 띠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이는 풍경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고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홀린 듯 오래 바라봤다.
“바다 처음 봐? 뭐 이렇게까지 신이 났어?”
“너무 오랜만에 봐서요.”
이런 바다를 봤던 게 언제였던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까마득하기만 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본 게 마지막이었던가 싶었다.
“방에서 바다 안 보여? 내 방에선 보이던데?”
기다란 다리로 짝다리를 짚고는 건들건들 비뚤게 서선 한다는 말이. 왜 굳이 남 산책하는 데까지 따라와선 분위기를 깨는지 모를 일이다. 올라가서 그냥 혼자 물이나 뺄 것이지.
반쯤 썩은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아. 제 방은 스위트룸이 아니라서.”
“그럼 내 방 올래? 침실부터 욕실까지 오션뷰인데.”
“개수작, 좀.”
새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눈을 흘기자 매끈한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는 얼굴에 붉은 노을빛이 길게 드리워졌다. 갈색빛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져 매끈한 이마 위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불쑥 마주친 눈동자에 가슴이 덜컥였다. 왜 이래. 심장 떨리게, 진짜.
틈만 나면 개수작이나 부리려는 그를 그대로 지나쳐 바다를 향해 걸었다. 사박, 사박, 운동화에 밟히는 모래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고 쏴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어서 들어오라 손짓이라도 하듯 발끝까지 다가왔다 부서져 물러나고, 또 예쁜 빛으로 연달아 밀려들고.
그게 꼭 유혹처럼 느껴져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허리를 숙여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트레이닝복 바지를 무릎 위로 죽 걷어 올렸다. 그러곤 그대로 한 걸음을 더 내딛자 곧바로 차가운 바닷물이 발끝에서부터 발목까지 사르륵, 감겨들었다. 하얀 다리에 닿는, 그 시원하고도 간질거리는 감각이 선연해 가슴 속 저 밑에서부터 무언가가 몽글몽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물 무서워하는 주제에 거긴 왜 들어가?”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 은채의 행동을 지켜보던 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발만 담그는 건데요, 뭐. 그리고 이상하게 바다는 별로 안 무섭기도 하고.”
“논리가 너무 모순적인 거 아니냐?”
돌이켜 보면 바다에선 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바다엔 꽤 자주 왔던 것 같다. 이렇게나 바다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많은 걸 보면. 그녀에게 있어 바다는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추억 같은 거였다.
“좋은 데 논리가 어딨어요?”
“바다가 좋아?”
“네. 오면 살아 있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천윤제 선수는 바다 안 좋아해요?”
점점 더 바다 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저와 달리, 그는 줄곧 그대로 그 자리에 선 채 그런 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영장 레인 앞에서 거침없이 물속으로 뛰어들던 것과는 자못 달라 보이는 모습이었다. 찌푸린 미간과 짜증스레 일렁이는 눈빛이 미묘하게 불편해 보였다.
“어. 난 싫어해, 바다.”
낮게 툭 내뱉은 말이 들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고백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면서도 이끌리듯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쳤고 이제는 파도가 종아리 위까지 올라와 부서졌다.
“왜요? 바다를 무서워해요?”
연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묻자 그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숨을 픽, 흘렸다.
“무서운 게 아니라 싫다고.”
“그게 그거라면서요.”
“누가? 내가?”
절로 씰룩이는 입꼬리를 겨우 통제하며 고개를 까닥,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무튼. 난 무서운 거 아니고 싫은 거고. 근데, 너 왜 자꾸 들어가, 위험하게.”
그가 그녀의 무릎 위까지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와. 뉴스감이네요. 아가미로 호흡한다는 썰도 있는 천윤제 선수가 바다를 무서워하고?”
“아니라고.”
“맞는데 자꾸 뭘 아니래.”
“아주 건수 잡으셨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선 게 꼭 물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겁을 먹고 두리번거리는 대형견 같아서 자꾸 웃음이 났다. 천윤제가 그간 이런 반응 보는 재미에 저를 놀렸나 싶었다.
“아니 왜 자꾸 들어가냐니까? 그거, 바닷물도 물이야, 너.”
쿡쿡 웃으며 이리저리 발을 움직이자 그가 더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물 공포증이 있긴 해도 허벅지 아래로 잠기는 물에 대해선 별반 공포증이 없었고 워낙에 좋아하는 바다인지라 괜찮았다. 사실상 제 트라우마의 기제는 물 자체가 아니라 수영장의 깊은 물이라 해야 더 정확했다.
“정은채, 위험해. 나와, 이리.”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떠는 게 웃기기도, 귀엽기도 해 못 이기는 척 그를 향해 걸어 나갔다. 스르륵, 제 발목을 붙잡듯 감겼다 미끄러져 멀어지는 파도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썹이 깊게 들썩거렸다.
“뭘 이렇게까지 무서워해요. 바다에 트라우마라도 있어요?”
털썩, 모래사장에 앉아 젖은 살갗에 새하얀 모래알이 다닥다닥 들러붙은 걸 떼어 내며 무심히 물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 그가 제 앞에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키를 낮춰 앉았다.
“어.”
“…….”
“있어.”
저를 놀렸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었는데, 돌연 진지하게 굳어 버리는 남자의 표정에 제가 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은채는 멍하니 제 다리에 붙은 모래알을 털어 내곤 손수건을 꺼내 종아리의 젖은 물기를 닦아 주는 그를 응시했다. 촘촘하고 정갈한 속눈썹이 얼굴 위에 깊은 음영을 드리우며 위아래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행여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자신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며 은채는 조금 전 제 경솔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또 저도 모르게 천윤제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그대로 내보였나 싶었다.
“엄마가 바다에서 돌아가셔서.”
담담히 들려오는 말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 친엄마.”
무심히 말을 덧붙인 그가 옆에 있던 제 신발을 가져와 물기를 다 닦아 낸 발에 신겼다. 마음대로 만지지 말라고 발끈 화라도 내야 하건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고백에 넋이 나가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뭘 그렇게 봐.”
“…….”
“민망하냐? 실컷 놀려 먹고 싶었는데 잘못 건드렸다 싶지?”
고개를 들어 올려 저와 눈을 마주친 그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곤 제 옆으로 와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더 붉은색으로 물든 하늘에 보랏빛 어둠이 스멀스멀 내려앉고 있었다. 고개를 길게 돌려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점점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저 먼바다를 내다보는 남자의 동공은 침착하기만 했다.
“…사고당하셨던 거예요?”
“아니, 자살.”
“…….”
“자살이었어. 내가 직접 목격했고. 여섯 살 때였나.”
엄마의 죽음. 자살. 목격. 그의 입에선 계속해 상상도 못 했던 단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몸을 슬쩍 뒤로 기울인 채 손바닥으로 모래를 짚고 앉은 그를 바라봤다.
“어릴 땐 엄마랑 이런 바닷가에서 둘이 살았어. 당연히 아버지가 누군진 알지도 못했어. 뭐 딱히 궁금한 적도 없었고. 워낙 엄마랑 둘이서도 행복하게 살았던 기억뿐이라.”
얼핏 떠도는 풍문으로 들었던 것도 같다. 중간에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랍시고 천 회장이 데리고 들어온 아이가 바로 천윤제였다는 걸. 그럼 그때가 여섯 살 무렵이었단 이야기인 건가.
“어느 날 신나게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집에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들어오더라고. 처음 보는 승용차에 탄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어떤 늙은 아저씨가 우리 엄마한테 막 화를 내는 거야. 어린 마음에 놀라고 무서워서 막 울었던 것 같은데, 엄마가 나를 안고, 달래고. 뭐,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며칠이 안 지나서 엄마가 갑자기 내 옷이랑 장난감, 소지품들을 커다란 가방에 넣어 싸더라. 그러고는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소풍 가는 거라고.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재밌게 놀고 있으면 엄마도 하던 일 마저 다 하고 따라오겠다고.”
담담하고 침착한 목소리는 꼭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남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차분한 목소리가 규칙적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어우러졌다.
“당연히 안 믿었지. 그 어린 나이에도 눈치라는 게, 감이라는 게 있어선 엄마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고, 어디로 보내려고 한다는 걸 빤히 다 알겠더라고. 그래서 안 간다고, 못 간다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데. 엄마는 날 달랬다가, 혼냈다가, 또 같이 울다가…. 한참을 그랬지.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 어린 애가 어른들이 가라면 가는 수밖에. 낯선 차에 타서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데 다행인지 갑자기 접촉 사고가 난 거야. 무단 횡단을 하던 사람이 다쳐서 다들 정신이 없던 찰나를 틈타서 차에서 도망쳤어. 필사적으로 걷고 뛰고. 지금 생각해 보면 꽤 멀었을 텐데 그 어린애가 어떻게 그 먼 길을 혼자서 되돌아갔는지 몰라. 아마 지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엄마를 못 볼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동네 주민들만 아는 지름길로 아주 용의주도하게 도망쳐선 집 근처까지 안 잡히고 그렇게 돌아가긴 했어. 어른들이 생각한 것보다 그때의 내가 꽤 똑똑했거든.”
실없는 농담을 내뱉는 그의 얼굴이 쓸쓸한 미소에 잠겨 들고 있었다.
“근데. 그땐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날 그렇게 보낸 엄마가 어떤 심정이었을지까지는, 전혀 몰랐던 것 같아.”
“…….”
“딱 이렇게 해가 지는 시간이었는데.”
그가 완전히 보랏빛으로 변한 하늘과 그 빛이 반사된 바다를 가만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양 읊조렸다.
“해변 길 따라서 집으로 막 달려가는데, 엄마가 시커먼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걸 봤어. 엄마가 늘 기분 좋은 일, 중요한 일 있을 때만 입던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선. 멀리서 엄마를 본 순간 ‘아, 이젠 됐다.’ 싶었지. 다시 돌아왔으니 이제 다 됐다고. 모든 게 다 원래대로 돌아갈 거라는 착각을 했어. 그렇게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고 엄마를 부르면서 달려가는데, 엄만 내 말이 안 들리는지 자꾸자꾸, 계속, 계속 더 깊이 들어가더라.”
“…….”
“아무것도 못 했어. 그냥 멍하니 서서 바라봤어. 그렇게, 엄마가 죽는 걸, 봤어. 그냥.”
그는 잠시 침묵했다. 쏴아.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착실히 그 침묵을 채웠다.
아무런 말도, 위로도 건넬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이 어떤 건지. 그게 어떤 절망감으로 평생을 살게 하고, 어떻게 인생을 갉아먹는지 누구보다 저가 잘 알기에 그랬다.
몰랐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여유 있고 화려한 모습으로만 천윤제란 인간을 판단했다. 돌부리 같은 장애물은커녕 살며 진자리 한 번 밟아 봤을 리 없다 여겼다. 모든 행운을 거머쥐고 태어났을 그에게 있어 불행이란 단어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라 생각한 거였다. 해서 잘나디잘난 이 남자의 이면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니 당연했다. 이 남자에게 이런 끔찍한 순간이, 기억이 있을 거란 상상은 전혀 못 했던 바였다.
얼마나 참담한 기억을 가슴에 묻고 긴 세월을 버티듯 살아왔을까. 담담히 눈동자를 깜빡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커다란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은채는 퍼석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힘들었겠어요.”
시간을 되돌리는 것 말고는 어떤 말로도 그 상처를 치료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는 걸 알았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곧 잊혀질 거야……. 그동안 자신이 들었던 수많은 위로와 동정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많이 외롭고,”
그래서 그냥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무서웠느냐고. 물어봐 주고 알아봐 주고 싶었다. 잊지 않아도 좋고, 괜찮지 않아도 좋다고.
“무서웠겠다.”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저를 돌아보는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물렸다.
“너…. 왜, 뭘 다 아는 것처럼 말해?”
“…….”
“왜 옆에서 다 본 것처럼.”
깊게 가라앉은 시선의 심연에선 작은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냥요.”
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고 까불었느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이유도, 의미도 모른다.
“이런 말, 듣고 싶었을 것 같아서.”
가장 큰 까닭은 어쩌면 그녀 자신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어서인지도.
“나도 그랬으니까.”
이제껏 담담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잔뜩 화가 난 것처럼 표정을 지우고 입술을 꾹 닫은 그는 그저 저를 올곧게 직시할 뿐이었다.
“어설프게 위로하는 거 아니에요. 동정이나 연민, 뭐 그런 건 더더욱 아니고요.”
“…….”
“어차피 이런 말로 위로가 될 리도 없고….”
철썩, 철썩. 어느새 짙게 내려앉은 어둠에 더 짙어진 바다의 소리가 더 크게 공명했다. 그걸 배경 삼아, 침잠하듯 깊어진 목소리가 나긋이 울렸다.
“돼.”
“…….”
“되니까 해 줘.”
“…….”
“네가 해 주는 건 뭐든 다 위로가 될 것 같아.”
제 눈매를, 제 코끝을, 제 입술을 차례로 훑어내리며 주시하는 시선에 눈앞이 꿈결처럼 아득해졌다.
“그러니까 나 좀 위로해 줘.”
크고 따뜻한 손바닥이 제 뒤통수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 당겼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그의 입술이 제 입술 위에 부드럽게 와 닿았을 때, 그녀는 눈꺼풀을 가만히 내리감았다.
조명을 끈 듯, 검푸른 어둠이 주위를 덮었다.
맞닿은 입술이 촉촉이 벌어지며, 뜨거운 살덩이가 미끈하게 휘어 감겼다. 입을 열어 맡은 달큼한 향내에 소름이 일었다. 그 찌릿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아 쥐고 목덜미를 감았다. 혀가 더 진득이 얽히고설켰다. 목덜미와 어깨, 등을 훑어내리는 손바닥의 마찰도 더더욱 야릇한 감각을 부추겼다.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비비고, 혀를 문지르며 서로의 타액을 넘기고 넘겨 받아 섞었다. 새카만 우주에 오직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완전히 정신을 놓은 채 한참을 키스했다. 싫지 않았다. 아니, 그가 슬쩍 혀를 빼고 입술을 떼어 냈을 땐 도리어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하…….”
숨이 달려 가쁜 호흡을 뱉어내면서도 그의 시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들반들 젖은 입술이 눈높이까지 올라가더니 둥근 이마와 작은 콧날, 인중, 그리고 윗입술까지 차례로 떨어져 내렸다. 무언갈 새겨 넣듯 착실히 꼭꼭 찍어 누르는 그의 입술이 보드랍고 따끈했다.
그 따뜻하고 포근한 체온에 위로를 받은 건 되레 저였다.
부지불식간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행여 이 어이없는 눈물을 들킬까 싶어 몸을 물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손은 금세 제 작은 턱 끝을 톡 잡아 돌려놓았다.
“뭐야. 울어?”
“아뇨?”
제가 더 놀라선 습관적 부인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이미 차오른 물기가 톡,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걸 본 남자가 피식 소리를 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왜. 내 생각 하니까 막 가슴이 아팠어? 저릿하고?”
“누구랑 달리 제가 공감 능력이 좀 뛰어난 편이라서요.”
고요히 웃는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애정을 느꼈다면 눈에 단단히 뭐가 쓰인 건가.
콩콩거리는 심장의 떨림에 귓불까지 새빨갛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알겠네.”
미간을 찡긋거리며 눈가의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 내려는데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스윽, 제 뺨을 문지르고 지났다.
“…뭘, 알아요?”
“이 지랄 난 거.”
은채가 붉어진 둥근 눈망울을 치켜떴다.
“이게 다 정은채, 네가 울어서 생긴 일이잖아.”
“뭐라고요?”
“다 너 때문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거밖에 없어.”
“대체 뭔 소리야.”
“경고하는데, 너 어디 가서 함부로 울지 마. 너 진짜 이 얼굴, 존나….”
후, 하고 길게 내뱉는 한숨에 수많은 함의가 담긴 것만 같았다. 확실히 분위기 깨는 데 뭐가 있는 인간이었다.
“언제는 웃지도 말라더니…. 이젠 울지도 말래. 이거 내 얼굴이거든요?”
젖은 뺨을 연방 문지르며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의 손을 탁, 치워 내고 벌떡 일어났다. 툭툭, 모래 묻은 엉덩이와 손을 털고 호텔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돌연 앞뒤로 흔들리는 제 손목을 느른히 잡아 올린 그가 제 손을 커다란 손에 겹쳐 쥐었다.
“뭐예요? 왜 함부로 남의 손을 잡아요?”
고개를 훅 꺾어 어느새 제 옆에서 나란히 걷는 그를 흘겼다. 연방 입을 삐죽이면서도 느물대며 제 손을 더 꽉 그러쥐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아무리 인적 드문 산책로라 해도 코앞이 호텔이었고, 누구든 천윤제와 손을 맞잡고 있는 이 상황을 목격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밀어낼 수 없었다. 그의 유혹을.
“위로의 연장.”
“위로 타임 아까 끝났어요. 어디서 또 개수작을….”
“개수작도 좀 너그럽게 눈감아 줄 순 없나. 무슨 여자가 이렇게 철벽이야? 네 철벽에 대가리 박고 피 철철 흘리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전혀요.”
“인류애를 좀 가져 봐.”
“아. 천윤제 선수님은 인류애가 넘쳐서 그렇게 스캔들이 많으신 거구나. 선택적 인류애야, 뭐야.”
“왜? 질투 나?”
“아뇨? 질투는 무슨?”
정곡을 푹 찔린 것 같아 어색한 헛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질투는 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천윤제 선수한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아아.”
우뚝, 걸음을 멈춘 그가 제 앞에 마주 서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다행이네. 아무 감정 없어서.”
울컥, 억울하고 아릿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뭐가 다행이래. 이 새끼가, 정말.
그대로 잡힌 손을 뿌리치려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하도 까칠하게 굴길래 난 정은채가 날 무지 싫어하는 줄 알았지.”
손가락 사이사이에 맞닿는 체온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형언할 수 없는 진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주체할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뛰어 대는 심장 소리에 제 귀가 먹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더 빨아 봐도 되냐?”
“…….”
“입술.”
“…….”
“좀 빨다 마니까 감질나서 더 미치겠는데.”
그럼 그렇지.
“또 시작이시네.”
모처럼 진지한 분위기가 길게 간다고 했다. 간질거리는 손을 톡, 놓아 버리곤 그대로 그를 지나쳐 걸었다. 곧 자석처럼 뒤따라와 붙는 그의 그림자가 싫지 않아 부러 느릿하게 걸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 밤. 선수들과 코치, 그리고 전지훈련에 참여한 모든 스태프를 위한 조촐한 회식 자리가 마련되었다. 메뉴는 제주도 흑돼지 삼겹살. 장소는 호텔 근처의 허름한 식당을 통째로 빌렸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은채의 뒤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천윤제를 보며 손성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히 이런 자리에 참석할 리 없는 놈이니 말해 줄 필요도 없다 했던 것 같은데. 제 조언이 무색하게 그녀의 뒤에 대형견처럼 쫄래쫄래 나타난 천윤제의 모습이 퍽 어이가 없었다.
다들 같은 황당함을 느낀 건지 물음표 가득한 시선들이 윤제와 은채에게로 향했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로선 그저 꾸물대는 천윤제 때문에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온 탓이라 여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때마침 국대 팀 전체를 인솔했던 코칭 스태프가 제 앞의 잔을 채워 일어났다.
“오늘로 제주도 전지훈련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모두 정해진 훈련 과정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드리고, 모쪼록 아시안 게임까지 열심히 달려서 좋은 기록, 성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고생하신 코치분들과 스태프분들, 그리고 동료 선수분들께 격려와 감사의 박수!”
작은 식당 전체에 우렁찬 박수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은채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옆자리를 당연하다는 듯 차지하고 앉은 천윤제는 그녀와 마주 앉은 다른 남자 선수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움찔거렸다.
전지훈련 기간 내내 얼굴을 마주친 탓인지 놈들이 괜히 그녀에게 친한 척을 하며 다가와 시시덕거리는 게 영 마뜩잖은 까닭이었다. 그걸 또 친절하게 받아 주고 상대해 주는 그녀의 행동엔 더 배알이 꼴렸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회식 자리에 구태여 참석을 하겠다 쫓아온 것도 다 이놈들 때문이었다. 힘든 일정의 훈련에, 체중 조절에. 대회가 가까워져 오면 가까워져 올수록 수절하듯 강제로 금욕적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 시커먼 사내놈들의 본능은 시한폭탄이 되는 법이었다. 그걸 뻔히 아는데, 폭탄 밭에 정은채를 덜렁 혼자 보낼 순 없었다.
뭣보다도 민지환. 얼마 전 정말로 천화와 에이전시 계약을 체결해 버린 이 자식이 이상하리만큼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자. 매니저님, 한 잔 받으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민지환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잔을 채웠다.
“아, 민 선수님도 고생하셨어요. 부상 때문에 많이 힘드셨을 텐데.”
술을 받으며 둥글게 웃는 말갛고 보드라운 얼굴에 속이 훅 뒤집혔다. 제게만 까칠하게 철벽이지. 하여간에 영 맹탕 같다. 뭐? 좋은 분? 민지환 이 새끼가 여기 있는 새끼들 중에 가장 개새끼라는 거에 제 1년 치 연봉을 걸 수도 있다. 속이 얼마나 시커멓고 음흉한 놈인 줄은 알지도 못하곤.
작은 손에 쥐고 있던 그녀의 맥주잔을 훅, 잡아채 가져왔다. 순식간에 어이없다는 듯한 시선들이 쏟아졌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능청스레 씨익, 입꼬리를 올릴 따름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미안. 내가 갈증이 좀 나서.”
하나도 안 미안한 표정이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잔에 가득 찬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켜 비워냈다. 그러곤 눈 깜짝할 새 비워진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다른 빈 잔을 들어 사이다를 가득 채우는 거였다.
정말 뭐 하자는 건가. 은채는 어이가 없어져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너 술 잘 못 마시잖아.”
“누가요? 내가?”
“주사가 좀 있어, 우리 매니저님이.”
그는 황당하다는 듯 웃고 있는 민지환을 향해 협박조의 어투로 말했다. 마치 군침을 질질 흘리는 다른 수컷들에게도 미리 제 영역을 표시라도 하려는 듯.
“뭔 소리야. 나 주사 없거든요?”
그 속을 알 리 없는 은채가 다소 짜증스레 반박했다. 그러나 곧, 앞에서 크게 들려오는 건배 선창 소리에 묻혀 들었을 따름이었다.
“자, 건배!”
은채는 하릴없이 집어 든 사이다 한 잔을 벌컥벌컥 비워 내곤, 곧바로 제 앞에 있는 맥주병을 집어 들어 보란 듯 빈 잔을 채웠다.
“잘 모르시나 본데, 저 술 잘 마셔요. 주사도 없고요.”
그녀는 제 옆에 버티고 앉은 남자를 흘기고 이를 아득 물며 말을 바로 정정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제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마주 앉은 민지환만 싸늘하게 노려볼 따름이었다. 싸늘한 분위기에 갈증이 이는 건 도리어 저였다. 확실한 건 천윤제는 지금 제게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거였다.
“근데 어쩌다가 매니저를 하게 됐어요? 휴학까지 하고.”
다행히 때맞춰 들려온 지환의 질문에 그녀도 태연한 척 시선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아…. 학교 선배가 천윤제 선수 에이전시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서요.”
“소개?”
“네, 뭐 그런 셈이에요.”
첫 시작은 홍정호의 소개였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데.”
돌연 천윤제의 불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내가 뽑은 건데.”
그냥 좀 대충 넘어가지. 왜 이렇게 사사건건 시비일까.
은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럼 윤제랑은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민지환의 질문에 돌연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특히나 바로 옆 테이블, 손성욱의 눈초리가 아주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뭐 이렇게까지 사람을 뚫어져라 보는 건가 싶어 어설픈 변명을 하려 할 때였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
“맞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사이라 뽑았어. 같이 일하면 편할 것 같아서.”
일순, 사방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천윤제의 한마디에 다들 눈알을 굴리며 그 말을 해석하려 애썼다. 천윤제가 누군가와 잘 아는 사이라 공공연하게 떠드는 것 자체로 이미 구경거리였다.
제 발이 저려서일까. 은채는 연갈색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얼어붙은 사람들을 향해 얼른 두 손을 내저으며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저희 학교 선배님이시라….”
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하나. 우물쭈물 입술을 씹으며 당황한 저와 달리 천윤제는 퍽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아…. 진작에 한국대 가서 은채 씨나 알아 둘걸. 나랑 먼저 알았으면 윤제가 아니라 내 매니저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쵸?”
윤제의 노골적인 적의에도 지환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심 섞인 농담을 했다.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내 매니저로 넘어올래요? 그래도 천윤제보단 내가 케어하기 훨씬 더 쉬울 텐데.”
그 실없는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데 옆에서 묵직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지랄한다, 또.”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찡긋거린 천윤제가 삐딱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낮은 목소리를 뇌까렸다.
“개수작 여전하네.”
분위기가 삽시간에 다시 가라앉았다. 주변 선수들과 스태프들은 쓰게 웃으며 또 시비나 걸러 나왔구나, 하는 싸늘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이 인간이랑 같이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은채는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기며 후회를 했다. 순순히 회식 자리에 동참하겠다 따라나설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어차피 반기는 사람도 하나 없는 자리에 부득불 이 사회성 없는 인간을 끌고 나온 제 탓이 컸다.
지나치게 해맑았던 자신의 실책을 탓하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곤 치이익, 거의 다 익은 고기가 내는 듣기 좋은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렇게 계속 있다간 화기애애하게 회식을 즐기기는커녕 먹은 고기가 체해서 내일 아침 공항에 못 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불량하게 비뚜름히 앉아 있는 그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그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깐만, 좀 나와 봐요.”
드르륵, 의자 미는 소리가 요란히 울리고 한마디에 주저 없이 벌떡 일어난 그가 제 뒤를 졸졸 쫓아 나왔다.
은채는 식당을 빠져나와 모퉁이를 돌아서 좁은 골목 초입에 들어서기 무섭게 그를 홱 돌아봤다.
“왜 으슥한 데로 끌고 와? 뭐 하자고.”
불량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정수리 위에서 느물대며 묻는다.
“자꾸 분위기 깰래요?”
“그건 내가 아니라 민지환한테 물어야 할 말 아니냐?”
“마지막 날, 기분 좋게 마무리하자고 회식하는 건데 자꾸 말 끊고, 가시 세워서 쏘아붙이면 회식 분위기가 뭐가 돼요?”
“언제는 내 편이라더니?”
“그러니까 하는 말이죠. 이렇게 밉상으로 굴면 천윤제 선수만 계속 따돌림받잖아요.”
“반대겠지. 내가 걔들을 따돌리는 건데, 수준 떨어져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되받아치는 말에 기가 막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이 사회성 부족한 인간을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하는 걸까.
“그럼 혼자 계속 따돌리시지, 여긴 뭐 하러 쫓아 나왔어요?”
“불안해서 어디 혼자 내놓을 수가 있어야지.”
주어도 없이 내뱉는 말에 미간을 슬쩍 구기자 그가 혀를 쯧, 차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놀랍게도 저지 주머니에서 딸려 나오는 건 담뱃갑이었다. 놀란 은채가 눈을 크게 치켜뜨며 물었다.
“담배도 피워요?”
“누구 때문에 요즘 계속 담배 당겨서 참느라 죽겠다, 왜.”
“미쳤어요?”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든 담배 한 개비를 탁, 채어 뺏자 그가 황망한 표정으로 헛숨을 내뱉는다.
“지금 이거도 못 피우면 나 답답해 뒈져.”
그는 반듯한 미간을 푹 일그러뜨리며 다시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재빨리 불을 붙였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후, 하고 퍼져 나가는 연기를 내뱉은 그가 짜증스레 콧등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유치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또 얼마나 유치한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잠자코 말을 들었다.
“너 민지환이랑 저 새끼들이 얼마나 더러운 새끼들인지 알아?”
“네?”
“이 여자 저 여자, 그동안 갈아 치우는 여자들 내가 목격한 것만 수십 번이거든?”
“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민 선수 사생활이 어떻든 나랑 뭔 상관이라고.”
“너는 눈치가 없는 거냐, 둔한 거냐. 모르겠어? 딱 봐도 저 새끼들 너한테 개수작 부리는 거잖아.”
“참 나.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앞의 ‘뭐’랑 뒤의 ‘뭐’는 수준이 질적으로 달라. 한 문장에 도매금으로 취급하지 말아 줘. 앞의 ‘뭐’ 기분 좆같아지니까.”
윤제의 밑도 끝도 없는 비난에 은채는 구제 불능이란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이렇게 맹하게 구니까 그 스토커 새끼도 제대로 못 쳐내는 거 아냐, 맨날.”
“아, 왜 또…!”
모처럼 고승준의 스토킹에서 좀 벗어나 그 존재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구태여 상기시켜 주는 그의 악랄한 친절함에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얘긴 좀 그만하죠? 생각하기도 싫은 인간 얘길 왜 자꾸 꺼내요?”
“그 새끼 한 번 더 연락하고 추근대면 서울 가서 바로 신고부터 해. 알았어?”
그가 제법 묵직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로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퍽 가까웠다. 주홍빛 가로등 불을 등지고 선 얼굴엔 적당한 음영까지 내려앉아 그렇잖아도 또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 와중에도 느른히 담배 연기를 내뿜는 남자의 모습이 이렇게나 섹시하게 느껴질 일인가. 중증이었다.
“그거나 좀, 꺼요. 선수가 진짜.”
“어쩌다 한 대쯤 피운다고 어떻게 안 돼. 담배는 저도 피우면서.”
괜스레 그를 탓하며 말하자 뜻밖의 소리가 돌아왔다. 연갈색 동공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떻게…?”
감당하기 힘든 긴장감이 들거나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 때처럼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가끔 한 대씩 피우곤 하는 담배였다.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을 때 한 대씩 피우면 기분이 맑아지는 것 같아 종종 피우긴 했으나 큰 중독성까진 느끼지 못하는 터라 정말이지 어쩌다 한 번씩이었다. 해서 담배를 피우는 건 절친인 예슬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천윤제가 그걸 아는 건지.
“어떻게 알아요? 담배…. 내 친구 빼면 아무도 모르는 건데?”
질문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제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 비밀이었어?”
귓바퀴로 담배 향 섞인 뜨거운 숨소리가 훅 끼쳐 들었다. 바닥을 치는 듯한 낮은 음성에 잔털이 바짝 솟을 만큼 소름이 돋았다. 찌르르, 아랫배가 우는 듯한 야릇한 감각에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 좀 그만 치고요.”
큭큭, 웃는 장난기 어린 얼굴이 못 견디게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덜컥 두려워졌다. 이러다 점점 더 미쳐 가는 건 아닐지.
“학교에서.”
담배 연기를 내뱉느라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비뚜름히 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개교 82주년 기념 행사할 때. 사회대 도서관 건물 뒤에서 너 질질 짜면서 담배 피웠잖아. 불 내가 빌려줬는데. 기억 안 나냐?”
불을 빌려 가면서까지 담배를 피웠던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뿌연 기억을 더듬어 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는….”
“이봐. 너 주사 있어.”
“…….”
“팩 소주 잔뜩 쌓아 놓고 빨면서 여기저기 전화하고 그 스토커 새끼 욕도 하고 그랬는데. 그게 기억이 안 난다고?”
그제야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는 여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설마. 그날인가…?
다짜고짜 아르바이트 중인 아이스크림 가게로 찾아온 고승준이 제게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이별을 고했던 날. 결국 그와 꽤 친했던 홍정호를 추궁해 이별의 이유가 다른 여자 때문이라는 걸 전해 들었던 날.
1년이 넘는 시간을 그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허비하고 낭비했던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해서 유일하게 제 비밀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예슬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그곳, 그 구석에 앉아 팩 소주 하나를 까 물었던 것까진 생생했다. 그 뒤론…. 물론 그렇게까지 취할 생각은 없었다. 그놈의 술이, 아니 그 스토커가 웬수였다.
“그때, 그럼…. 그때 날, 본 거였어요?”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천윤제가 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는 체를 했던 이유가 이거였다. 겨우 담뱃불을 좀 빌려준 것뿐인데. 그저 길을 지나치며 스치듯 본 게 다면서. 결국 엄밀히 말하면 아는 것도 아니었던 주제에 제게 아는 척을 하고 사람을 궁금해하게 하던 그가 괘씸해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빙글거리며 웃는 반반한 낯짝이 영 밉살맞았다.
“워낙 인상적인 장면이라 잊을 수가 있어야지. 더럽게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그렇게 찔찔 짜는 여자는 처음 봤거든.”
왜 하필 천윤제에게 계속 이렇게나 수치스러운 순간을 들키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첫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라 그런 거였나.
“나라 잃은 사람처럼 한참 울더니만 갑자기 대뜸 나한테 불을 달라잖아. 얼굴은 세상 청순한 토끼처럼 생긴 게 발랑 까져선.”
머리를 길게 쓸어 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는데 성큼, 제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온 그의 접근에 덜컥 숨이 막혔다.
“그러게 그렇게 울지 말았어야지.”
“…….”
“왜 함부로 말을 걸어선, 사람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을 말을 늘어놓는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이렇게 만들어 놓냐고, 만들어 놓기를.”
음영이 짙어져 더더욱 위험스레 느껴지는 그의 매끈한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차 담겼다. 그저 가깝게 다가온 것만으로도 가슴이 반사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탄탄한 상박을 방어하듯 밀어내려는데 도리어 탁, 손목을 그러쥐었다.
뿌리칠 수도 없을, 가슴이 간질간질하게 쥐어 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그제야 그가 지금껏 저를 얼마나 봐주고 있었던 건지 깨달았다. 하고 싶다고. 안달 나 미치겠다고, 참느라 뒈질 것 같다고 상스럽게 내뱉던 그의 말이 언뜻 이해가 갔다.
“……!”
손을 잡아 올린 그가 돌연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제 입술을 붙이고 더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저기요.”
“좀 안아도 되냐?”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의식의 흐름인가 싶어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올려다봤다. 질 낮은 욕망이 꽉 들어찬 남자의 시선에 머리털이 쭈뼛 솟는 것 같아 몸이 얼었다.
“보고 있으니까 만지고 싶고. 만지니까 안고 싶고. 왜 이러냐, 나.”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미치겠어.”
“…….”
“잠깐만 안자, 제발.”
금방이라도 손가락을 삼켜 먹을 듯 설핏 벌어진 입술이 낮은 주파수로 간질간질, 살갗을 울려 댔다.
“장난 같겠지만, 내가 진짜 힘들어.”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그가 아래로 짧은 턱짓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그림자가 진 앞섶엔 이미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윤곽이 뚜렷했다. 바지의 천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장난 아니고 진짜 변태 같아요.”
“반박을 못 하겠네.”
“대체 왜. 어느 포인트에 흥분을 하는 거예요?”
분위기 깨지 말라는 얘길 하다, 담배 피우는 얘길 했고, 그러다 언제 저를 처음 봤는지에 대해서 얘기한 것뿐인데. 어느 틈에, 어느 부분에서 흥분을 해서는 이렇게 또 발기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걸 알면 내가 안 이럴까?”
“알 수 있게 도와줘요?”
“함부로 도와준단 말 하지 마.”
이건 또 뭔 소리인지.
“변태들은 그런 말 들으면 바로 버튼이 눌려.”
낮게 뇌까리는 목소리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오는 그의 그림자가 제 머리 위에 짙게 드리워졌다. 특유의 짙은 향이 깊게 스몄다. 이젠 정말 손만 까딱하면 바로 안길 수 있는 거리였다.
“안자, 잠깐만. 다른 짓 안 하고 딱 포옹만 할게, 담백하게.”
담백은 개뿔. 이미 이렇게나 더럽고 끈적하게 보고 있으면서.
답지 않게 애원하는 남자의 정중함에 하마터면 수락을 할 뻔했던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돼? 내가 키스를 하잔 것도 아니고 섹스를 하잔 것도 아닌데, 왜?”
“아니, 안으면 또 다음 게 하고 싶어질 게 뻔하잖아요.”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고.”
“나 괴롭힐 거면서.”
“안 그래.”
“…….”
“절대로.”
“…….”
“내일 서울 갈 때까지 네가 하란 대로 얌전히 입 닥치고 있을게.”
자신감 넘치게 호언장담을 하면서도 내뱉는 호흡은 퍽 불안정하기만 했다. 지독히도 외설적인 적막이 내려앉았다. 도드라지게 솟은 목울대가 꿀렁이며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그것조차 섹시하다는 생각이 다시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순간, 제 불안정한 감정을 무마하려는 듯 질 나쁜 합리화가 이어졌다.
사실 포옹 정도야 친구끼리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스킨십이니까. 외국에선 인사처럼도 하는 건데, 뭐. 잠깐만이라고도 했고….
안일하고도 무서운 유혹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그럼 다른 데는 손대지 말고 그냥 포옹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대로 그의 품속에 빨려 들어가듯 꽉 안겼다. 확연한 키 차이에 자연스레 몸이 딸려 올라가 발끝으로 겨우 섰다. 빈틈 하나 없이 꽉 맞물린 몸이 갑갑해 허리를 꺾었으나 도리어 몸이 온전히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힘이 어찌나 센지 공중으로 떠오른 몸이 꽁꽁 묶인 듯 옥죄었다.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목덜미에 오뚝한 코를 푹 짓이겨 박은 그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가 이내 뽀얀 살 내음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 숨결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기라도 통한 듯 손발 끝이 죄 찌릿했다.
“아, 변태처럼 킁킁대진 말고요…!”
“손대지 말랬지, 냄새 맡지 말란 말은 안 했잖아.”
그는 바둥거리는 제 몸을 더 바짝 옭아매려는 듯 허리를 단단히 끌어 감았다. 그 덕에 위협적으로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제 아랫배를 짓이기듯 찔러 왔다. 야릇한 감각이 차오르며, 동시에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하기 시작했다.
“향수 뭐 써?”
“향수 안 뿌렸어요.”
“근데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 네 냄새 졸라 좋아.”
“간지러… 흐!”
“네 냄새 맡으면 마음이 안정돼. 경기 전에도 이 냄새 맡으면 긴장 하나도 안 하고 신기록 낼 수 있을 거 같은데, 하….”
쿵쿵쿵. 아무리 진정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심박 소리에 머리가 댕댕 울렸다. 온몸을 완전히 밀착한 채 안긴 그에게 이 떨림과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제 속을, 마음을 실시간으로 들키는 것 같아 눈앞이 다 어찔댔다.
“그만…. 그만! 잠깐 끝!”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흔들며 몸부림치듯 허리를 비틀자, 그가 겨우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팔의 힘을 풀어 냈다. 허공에 떠 있던 발끝이 다시 땅에 닿기 무섭게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야박하네, 정말.”
아쉬움이 잔뜩 묻은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흔들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찌르르, 울어 대는 단전 아래의 감각이 말하는 바는 선명했다. 지금 저도 이 남자를 원하고 있다는 거였다.
자각의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단번에 열이 올라 새빨갛게 변했다. 어두운 골목이었으니 망정이지, 천윤제가 이를 안다면 또 무슨 생각을 했냐고 저를 놀려 댈 게 뻔했다.
“들어가요, 그만. 괜히 사람들 오해하겠네.”
탁, 성글게 쥐인 손목을 뿌리치고 잰걸음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나서 다시 모퉁이를 돌았다. 발끝이 울리도록 쿵쿵거리는 제 심장 소리가 이 시끌벅적한 소음에 섞여들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