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ve Moment RAW novel - Chapter 9
8. 양아치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선 단답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선 대표실의 한가운데,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던 천혜진이 흘긋, 고개를 들어 안으로 들어서는 은채의 얼굴을 확인했다.
“대표님, 서류 가져왔습니다.”
은채는 천윤제에게서 받아 온 서류가 담긴 봉투를 혜진의 앞에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 서류를 쓰윽, 한번 빠르게 훑어본 그녀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까딱였다.
“제주도에서 재밌었다면서요.”
서류를 훑던 혜진이 돌연 흘긋, 은채를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뜻인지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자 그녀가 뒷말을 덧붙였다.
“듣자 하니 재밌는 구경거리 되게 많았던 모양이었나 봐요. 아쉽네. 나도 따라갈걸.”
혜진이 돌연 탁, 서류를 내려놓고 눈을 반짝였다.
“개인 수영장을 줘도 지 거슬리면 청소하는 직원들까지 다 내쫓는 애가 열흘 넘게 얌전히 단체 훈련을 받고. 심지어 회식까지 참석했다면서요.”
그녀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대체 비법이 뭐예요? 뭘 어떻게 했길래 23년 그 짧은 일평생을 착실히 지랄같이 살아온 자식이 왜 갑자기 안 하던 사람 짓을 해요?”
직접 고른 매니저이니 그래도 기존의 매니저들보단 좀 오래 가겠거니, 막연한 기대는 했어도 이렇게까지 신기한 일이 벌어질 줄은 그녀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일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도 아니고 그저 휴학한 대학생일 뿐이니, 아시안 게임 때까지만이라도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나 해 줄 단순 노무 아르바이트를 뽑은 거라 여겼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건실한 학생이 이렇게까지 기막히게 천윤제 컨트롤을 잘해 줄 줄이야. 그간 통제 불가한 소속 선수를 관리하느라 들인 시간과 노력이 다 무색해 후회스러웠다. 수많은 스캔들과 사건 사고에 발 동동 구르며 수습할 시간에 진즉 이런 인재를 뽑아 앉혔어야 했다. 그녀로선 어느 날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나 준 은채를 운명의 은인처럼 느낄 수밖에.
“나 진짜 은채 씨 선수 케어에 너무 감동받았잖아. 요즘 같아선 천윤제 같은 선수 열 명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니까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소리에 은채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것도 봐. 이런 것도, 이런 결재 서류도 막 사인을 턱턱 받아 오고. 그 전 매니저들은 이런 것도 한 달씩 걸렸어요. 그 자식이 사인 안 한다고 하도 개겨 대서.”
어느새 그 자식으로 호칭을 변경한 혜진이 치 떨린다는 듯 고개를 저어 댔다.
“혹시 걔, 은채 씨한테 뭐 빚졌어요?”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이러지? 나 천윤제 이렇게 착한 거 처음 봐서 좀 무서워지려 그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하면….”
“아, 신변 이상이 있으신 건 아닐 거예요. 병원 진료도 안 빼고 꾸준히 받고 있으시니까요.”
“그러니까. 그래서 더 겁나잖아. 신체 건강, 정신 건강 아무 이상도 없는 애가 왜 이러냐고.”
미간을 찡그리며 고뇌하는 그녀의 얼굴이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전혀 다른 분위기의 형제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두 사람이 퍽 닮은 게 아닌가 싶었다.
“뭐…. 대회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몸 관리에도 신경 쓰고 특별히 분란거리 안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닐까요.”
“으음, 모르는 소리.”
“…….”
“걔가 그런 걸 아는 새끼였으면 진작에 사람대접을 해 줬죠, 내가.”
아. 그런 정도인 건가.
알면 알수록, 까면 깔수록 끝없이 나오는 천윤제의 과거 행적에 제가 더 민망한 기분이었다.
“아무튼. 난 은채 씨 같은 인재를 발견해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몰라요. 은채 씨만 괜찮으면 아시안 게임 때까지가 아니라 평생 우리 천 선수를 좀 컨트롤해 줬으면 하는데….”
“아, 그건 좀….”
“네. 욕심이죠, 역시.”
혜진은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퍽 끔찍한 소리였다는 걸 인정하듯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리는 은채의 반응에 수긍을 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고민 좀 해 줘요. 연봉이나 근무 조건은 은채 씨 원하는 대로 다 맞춰 줄 준비가 돼 있으니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빈말 아니에요.”
그저 웃어넘기고 말려는 제 의도를 귀신같이 파악한 그녀가 다시 한번 정곡을 찌르듯 되짚어 말했다. 의도 다분한 한마디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천윤제와 닮은 구석이 없지 않았다.
대표실을 나와 팀장님에게도 나머지 서류들을 전달했다. 전지훈련을 마치고 공항에서 간단히 열린 기자 회견 관련 서류였다. 기자 회견은 국대팀 내 불화설에 관심이 깊은 한 기자의 질문 탓에 꽤 분위기가 삭막했었다. 팬들이 몰려 짧게 끝났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천윤제의 필터 없는 막말이 또 포털 메인 화면에 줄줄이 인용되어 박제될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을 상황에 진저리를 치며 택시를 잡아탔다. 곧장 그가 훈련 중일 수영장으로 향했다. 어찌나 빨리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던지 귀가 다 따가웠다. 어차피 일찍 가 봤자 저 훈련하는 거나 멍하니 보고 있어야 하는데.
주차장 입구에서 택시를 세우고 내렸다. 수영장까진 한참 더 걸어 들어가야 했지만, 오랜만에 햇빛이나 맞으면서 좀 걷고 싶어진 까닭이었다. 농땡이도 좀 피울 겸.
“저기요.”
불현듯 뒤에서 저를 부르는 앳된 여자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언니, 혹시 윤제 오빠 새 매니저세요?”
윤제 오빠? 혹시 천윤제랑 아는 학생인 건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그럼 이것 좀 전해 주세요.”
학생이 불쑥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제 앞에 내밀어 왔다.
“…이게 뭔데요?”
“홍삼이요.”
“네?”
“어제 기자 회견 영상 보니까 영 얼굴이 안 좋으신 것 같길래…. 아, 윤제 오빠 예전에 드시던 브랜드 거니까 몸에 안 맞고 그러진 않으실 거예요.”
그제야 제 앞의 학생이 천윤제의 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그전에도 몇 번 수영장이나 회사 앞에서 천윤제의 모습을 보려 기다리는 팬들을 지나치듯 본 적은 있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마주친 건 또 처음인지라 좀 당황스럽긴 했다. 팬이라니. 천윤제가 확실히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대단한 유명인이라는 게 실감이 돼서.
“안에 편지도 있다고 얘기해 주시고요.”
“알겠어요. 잘 전달할게요.”
순진무구한 얼굴로 제 대답을 기다리는 학생의 얼굴이 귀여워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감사하지만 이런 거까지 안 줘도 돼요. 워낙에 자기 몸은 끔찍하게 여기는 인, 아니 선수라 본인이 알아서 관리 잘하거든요. 학생일 텐데, 이런 비싼 선물은….”
“그거 별로 안 비싼 건데요.”
종전과 달리 퍽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딴에는 학생의 빠듯한 경제 사정을 걱정해 한 말인데 아마도 제 말을 곡해해 들은 모양이었다.
“아, 안 비싼… 거구나?”
어쩐지 당황해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요.”
“…….”
“언니 몇 살이에요?”
생각지 못한 당돌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저를 위아래로 훑고 있는 학생의 시선엔 날카로운 경계심이 가득했다. 아마도 사랑하는 윤제 오빠의 새 매니저인 자신이 퍽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스물 둘.”
대답을 들은 학생의 표정이 대뜸 구겨졌다. 오빠보다 한 살 어리네. 부러 들으란 듯 읊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뭐라 말을 더 이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암튼, 그거 꼭 오빠한테 전해 주세요.”
부탁을 하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모를 눈빛이었다.
이 애는 천윤제가 어떤 미친놈인지 알고 좋아하는 걸까.
타박타박, 멀어져 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쯧, 차고 돌아섰다. 손에 든 쇼핑백이 묵직했다.
막상 도착한 수영장 안엔 아무도 없었다. 벌써 훈련이 끝난 건가 싶어 지나가던 관리 직원에게 물어보니 코치님 사정으로 좀 일찍 끝났다고 했다. 곧장 천윤제에게 전화를 걸어 귓가에 가져갔다. 일찍 끝났으면 끝났다고 연락을 해 줄 것이지, 평소엔 그렇게 뻔질나게 찾아와서 사람을 귀찮게 굴었으면서 이럴 땐 또 조용할 건 뭔지. 청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어디 있어요? 저 지금 수영장 왔는데.”
– 라커 룸.
바로 코앞에 라커 룸 문이 보여 걸음을 멈췄다.
“그럼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다 하고 나와….”
– 문 앞에 있는 거 알아. 들어와.
“네? 어딜 들어와요?”
– 들어오라고. 다 퇴근해서 아무도 없어.
“아니, 저기, 무슨…!”
제 할 말만 하고 뚝 끊겨 버린 통화에 핸드폰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아무리 아무도 없다지만 남자 선수들의 라커 룸에 들어오라니.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다시 핸드폰 액정을 꾹 눌렀다. 그는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거길 내가 어떻게 들어가요? 다 하고 나와요.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때였다. 라커 룸의 철문이 달카닥, 열리더니 안에서 뻗어 나온 길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훅 낚아채듯 당겨 안으로 끌어들였다.
쿵.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고개를 쳐들었다. 익숙한 스킨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막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칼에서 물기를 뚝뚝 흘리는 천윤제가 저를 벽에 가둔 모양새로 빙글대며 내려다봤다.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면서.
“미쳤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누가 봐. 아무도 없는데.”
“아니, 여기 남자 라커 룸이거든요? 잊었나 본데, 나 여자예요.”
“어떻게 잊냐. 스치기만 해도 이렇게 여자 냄새 진동인데.”
고개를 깊이 기울여 제 귓가에 대고 쓰읍- 길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아주 저속했다.
“이젠 아주 대놓고 변태 짓을….”
“아직 안 했는데, 변태 짓.”
“얼굴이 이미 변태인데, 뭘.”
“네 주변엔 잘생긴 변태가 흔하냐?”
“제가 좀 편견이 없어서요.”
은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훅 들어 올렸다. 그러곤 방어막을 치듯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려는 그의 상체와 제 사이를 차단했다.
“자요. 이거나 받아요.”
“뭔데?”
덕분에 슬쩍 뒤로 물러난 그가 쇼핑백을 받아 대충 안을 살폈다.
“들어오던 길에 만난 학생이 전해 주래요. 요즘 영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신다고.”
“내 팬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좋네. 안 그래도 밤마다 딸치려니 기력이 좀 달렸는데.”
느물거리며 입꼬리를 올리는 그를 향해 쯧, 혀를 찼다.
“팬들도 천윤제 선수 이렇게 저질인 거 알까요?”
“모를 거라고 생각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야.”
“그 위대한 사랑에 좀 걸맞은 훌륭한 사람이 될 생각은 없으실까요.”
“여기서 어떻게 더 훌륭해져? 나 세계 랭킹 1등인데?”
“선수로서 말고, 인간으로서요.”
“너 은근 자꾸 나 개차반 취급한다?”
제법 똑똑한 반문을 하는 그의 말에 찔려 흠칫,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 봐. 너 나만큼 훌륭한 남자 본 적 있어, 없어?”
“‘훌륭한’의 기준과 근거가 저랑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다를 게 뭐 있냐? 이 각박한 세상에서 객관적으로 믿을 게 뭔데. 얼굴이랑 돈. 두 개 아니야? 근데 난 그 두 가지 모두 다 완벽해. 이게 얼마나 훌륭한 일이야?”
말을 말아야 했다. 애초에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렇게 훌륭한 나랑 왜 안 하겠다는 건지 내가 이해를 해, 못 해.”
“또 그 소리….”
“나 이렇게 하찮은 취급당해 보는 거 정은채 네가 처음이거든?”
“요즘 이런 진부한 대사는 드라마에도 안 나와요.”
“정말 나랑 안 할 거야?”
“하, 몇 번을 말….”
“왜 자꾸 안 된단 소리만 하는데. 대체 언제까지 사람을 피 말릴 거냐고.”
씨발, 낮게 뇌까리는 욕지거리에 놀란 눈을 치켜뜨자 얼른 뒷말을 붙인다. 너한테 한 욕 아냐.
애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막무가내인지 모를 일이었다. 툭,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가 다시 위협적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레 능글거리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심각하게 굳은 얼굴이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신으로 밀어붙이는 접촉에 뜨겁고 딱딱한 아랫도리가 여지없이 배를 찔렀다.
“농담 아니야. 매일 밤새도록 네 생각 하면서 흔드는데도 너만 보면 발정 난 개처럼 자꾸 서. 종일 그 생각만 나서 훈련에 집중도 잘 안 된다고. 이러다 나 기록 안 나오면 정은채 네가 책임질 거야?”
“이건 좀,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아요?”
“사실이거든?”
지나치게 낮은 음성이 음험하게 울렸다.
“한번 맛보고 나니까 더 미치겠어. 너랑 하면 얼마나 환장하게 좋은지 알고 나니까 씨발, 혼자 물 빼는 것 정도론 만족이 안 돼.”
“아니, 그러니까 그걸 나더러 어쩌라고…!”
“쑤시고 싶어.”
“…….”
“그날처럼 네 다리 벌리고 네 가슴 빨면서 네 구멍에 쑤셔 박고 싶다고.”
저속하게 내뱉는 말에 솜털이 쭈뼛거렸다. 단전 아래가 움찔거리고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미친 새끼라고, 성희롱으로 고소하겠다고 소리를 버럭 질러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커다란 손이 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만지작대는 까닭이었다. 더불어 흉악하게 발기한 제 하체를 바짝 밀어붙이고 더운 숨결을 내뱉는 남자의 페로몬에 머리가 다 어찔댔다. 흡사 온몸으로 제 욕정을 드러내려는 발정기 수컷의 유혹과도 같았다. 아무래도 이런 짓을 하려고 저를 이곳으로 끌고 들어온 게 분명했다.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 할 건 뭐야. 처음보다 오히려 더 잘할 자신도 있다는데.”
샤워실의 뜨거운 수증기가 라커 룸까지 새어 나온 건지, 주위에 온통 습습한 열기가 가득했다. 그 탓이었을까, 배꼽 아래, 그 어딘가에서 시작된 더운 열기가 온몸 곳곳으로 퍼졌다.
“네 거에 박게 해 줘.”
“…….”
“원하는 거 뭐든 해 달란 대로 다 해 줄게.”
원하는 거? 해 달란 대로? 섹스로 거래를 하잔 건가. 무슨 이런 난잡한 개소리가 다 있나, 싶었다.
“지금 그 말 되게 오해하기 좋은데, 알아요?”
“무슨 오해? 오해할 만큼 내가 어려운 말 했냐?”
그 태연한 얼굴에 불쾌감이 훅 치밀어 올랐다. 육욕에 몸이 달아 생떼를 쓰고 있는 줄은 알았어도 이렇게나 노골적인 개소리를 할 줄은 또 예상 못 했어서.
이런 식으로 섹스를 제안하고 대가를 지불했을 여자가 대체 몇 명인 걸까. 얼마나 많고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이렇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개소리를 씨불이는 걸까.
“천윤제 선수 말, 나랑 자는 걸로 거래하잔 소리로 들린다고요.”
“꼬아서 해석하지 마. 이상한 의미 아니고 말 그대로일 뿐이니까. 내가 지금 진짜로 너한텐 뭐든 다 갖다 바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동안은 그랬나 봐요. 뭐든 갖다 바치면서 유혹하면 다들 그냥 넘어가고 그랬어요?”
“넌 아니라는 소리야?”
“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사람인지를 모르겠네.”
기가 막혀 머리를 길게 쓸어 올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래도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밤 그가 확인해 보자고 한 것이 그저 욕정이 전부는 아닐 거란 기대도 일말 했는데.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부질없는 감정에 몸이 달아 그의 무례한 장난과 언행을 고스란히 받아 줬던 제가 등신이었다. 천윤제는 그냥 섹스에 환장해 발정 난 개새끼였다.
“저 지금 되게 기분 나쁘거든요?”
들썽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입 속 여린 살을 꽉 누르며 말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욕망 어린 눈을 직시했다.
“왜?”
“지금 절 싸구려 취급하셨잖아요.”
“내가?”
“네.”
그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 다 갖다 바친다고 내가 천윤제 선수랑 자면, 그거 싸구려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니라….”
“뭘 자꾸 그런 뜻이 아니래?!”
“…….”
“자꾸 그렇게 말하면서!”
짜증이 나 버럭 목소리를 높이자, 입술을 질근 깨문 그가 꼬리 내린 짐승처럼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정도로 개새끼는 아닌데….”
말끝이 사그라드는 목소리에 갈증이 서렸다. 안달이 나긴 많이 난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꼬아 듣는 능력도 좋다며 저를 또 조롱했을 게 뻔한데.
후, 하고 길게 내뱉는 뜨거운 숨이 목덜미로 홧홧하게 흩어져 내렸다. 치솟는 열감을 정말로 참기 어렵다는 듯 그는 미간을 깊이 찌푸리며 얼굴을 쓸었다.
모르겠다. 어린애처럼 다 제 욕망을 다 드러내 놓고 달려드는 것 같은데도 하나도 모르겠다. 진짜로 어쩔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어쩌자고 사람을 뒤흔들곤 죄책감도 없이 날뛰기만 하는 건지. 역시 그냥 내가 만만한 건가. 아니, 생각이라는 걸 하고는 있나. 답답함에, 은채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냥 담백하게 하고 싶단 말만 하세요. 괜히 쓸데없이 주둥이로 업보 쌓지 마시고.”
“알았어, 그럼. 나 너랑 존나 하고 싶어, 정은채.”
“…….”
그럼 그렇지. 순간 약해질 뻔한 마음이 다시 찬물을 뒤집어쓴 듯 얼었다. 그녀는 이를 아득 물고 그를 직시했다.
“미안한데, 난 안 하고 싶어요.”
사실이었다. 솔직히 이 라커 룸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 또한 천윤제에게 성적으로 끌리고 있단 걸 부인하진 않았다. 그의 별것 아닌 시선, 목소리, 체향에도 그날의 아찔한 감각이 떠올라 다리 사이가 습습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전 원하는 걸 해 주니, 어쩌니 하는 개소리를 듣는 순간 그 모든 욕망이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휴학생이라도 이 정도의 자존심은 있는 까닭이었다.
“섹스할 마음, 없다고요. 나는.”
이 정도 거절 의사면 상처를 받을 법도 하건만 천윤제는 어쩐지 포기를 몰랐다. 정말로 오히려 자신의 이런 거절이 그의 승부욕에 불이라도 지핀 건 아닐까 싶은 찰나. 그가 믿을 수 없는 제안을 이어 갔다.
“그럼 이렇게 하자.”
“…….”
“일단 내가 널 만져 볼게.”
진짜 이 정도의 개새끼인가.
누가 보면 매우 공정하고 합리적인 협상안이나 제시한 것 같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올 소리였다.
“널 애무하고 빨아 보고, 그래서 너도 나랑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박을게. 내가 만지고 빨아도 네가 싫다고 하면, 오케이. 그땐 깔끔하게 포기한다, 내가.”
이 미친 새끼야….
“맹세해. 네가 쑤셔 달라고 애원할 때까진 절대로 안 박아.”
결백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펴 보이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얼굴을 세게 한 대 치고 싶었다.
“만지게라도 해 줘.”
“돌았어, 완전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눈앞의 중증 변태에게 넋이 나가 있는데, 불쑥 제 손을 움켜쥔 그가 제 아랫배로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좁은 공간을 이기지 못해 위로 솟아오른 기둥의 일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당황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 드로어즈 속으로 잡힌 손이 달려 들어갔다. 열기가 몰려 뜨겁고 습습한 성기가 막 바로 손에 닿았다.
“이거 봐. 거의 24시간 이렇다고.”
흉측하게 불거져 오른 핏줄들이 불끈거리는 크고 두꺼운 기둥 끝에선 이미 끈적한 액체가 흥건히 새어 나왔다.
“자지 아파 죽겠어, 씨발.”
위아래로 깊이 꿀렁대는 그의 목울대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화나고 어이없고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이 매력적인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럴까 봐, 얼굴값 하는 놈에겐 절대 눈길조차 주지 않겠노라 그렇게 다짐을 했던 건데….
“살려 줘, 정은채.”
제 손등 위를 덮어 쥔 커다란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기둥을 쓸었다.
“살려 주세요, 매니저님.”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축축이 속삭이며 살랑대는 이건 분명 유혹이었다.
자연스레 제 손바닥에 닿은 그의 성기 표피들이 끈적하게 미끄러지고 붙기를 반복했다. 이 징그럽고 흉측스러운 게 제 안을 뚫고 들어왔었다는 게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저도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던 게 분명했다.
“입술 빨아도 돼?”
어느새 제 코앞까지 기울어진 그의 입술이 나른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물어 왔다. 아예 이젠 작정하고 육탄 공세를 퍼부을 모양인 듯싶었다.
왜 눈을 이렇게 뜨는 걸까. 거절할 수도 없게.
이미 제 아랫입술을 혓바닥으로 할짝, 핥으며 스치는 남자의 체향이 짙었다.
“혀 내밀어 봐.”
소름 끼치게 낮은 음성에 가랑이 사이가 찌릿했다. 붉은 입술을 설핏 벌리고, 홀린 듯 작은 혀를 보이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입술 전체를 덮으며 더운 숨을 불어 넣었다. 위아래 입술을 몇 번이나 번갈아 핥고 빨다가 천천히 입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넓적하고 긴 혓바닥이 뱀처럼 부드럽게 은채의 혀를 휘감았다.
발정 나 죽겠다고, 쑤시게 해 달라고 안달 나 저를 보채던 것과는 자못 달리 부드럽고 달콤한 키스였다. 그날, 수영장에서 퍼붓던 거칠고 사나웠던 그것과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입 속 여린 점막과 고른 치열을 살살 달래듯 훑고 지나며 혀를 문질렀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이어지는 혀 놀림에 어지럼증이 일었다. 질척하고 야릇한 촉감에 다리 사이가 더 젖어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저도 천윤제를 성적으로 욕망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이 온통 희미한 빛으로 뭉그러져 내리는 거였다. 뭉근하게 달아오른 어딘가에서 짙은 갈증을 호소하는 듯했다.
그 갈망에,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감았다. 매달리듯 안겨 입 안으로 들어온 혀를 빨아 당기자 목덜미와 허리를 받쳐 든 남자가 단단히 힘을 주어 여린 몸을 고정시켰다.
그는 불편하게 기울인 고개의 각도를 계속 바꾸어 가며, 입술을 빨고 혀를 섞었다. 채 삼킬 여유도 없이 턱을 타고 새는 침이 꼭 높은 온도에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크림 같았다.
“하, 아아….”
돌연 등 뒤로 느껴지는 딱딱한 문의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열기 오른 그의 눈을 직시했다. 참았던 숨을 내뱉기 무섭게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온 그의 손이 브라 탑 위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커다란 한 손에 버거우리만큼 가득 들어찬 젖가슴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뭉그러지듯 삐져나왔다.
“흣….”
“넌 어떻게, 비쩍 마른 애가 가슴에만 이렇게 살이 쪘냐.”
침이 진득이 늘어진 그의 아랫입술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손가락 사이에 톡 불거져 오른 유두를 끼워 넣고 주물럭거리는 손놀림은 분명 의도적이었다. 다만 지난 섹스를 생각하면 젖이 터져라 콱 움켜쥐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가 이번엔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지작거린다는 게 의아하긴 했다.
“젖꼭지 섰다. 흥분했어?”
“흐…. 만지는데 그럼 안 서요?”
“짐승이냐? 만진다고 다 서게. 아, 혹시 너도 발정 났어?”
느물거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를 향해 있는 대로 눈을 흘겼다.
“미쳤어. 그만해요, 하아, 이러다가 진짜 누가 오면….”
“오면 좋겠어. 나랑 이러고 노는 거 알면 짐승 같은 새끼들, 더는 너한테 침 안 흘릴 거 아니야.”
“흐으…!”
이젠 아예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굴리며 슬쩍슬쩍 약하게 비틀어 댔다. 그러곤 젖은 혀를 내밀어 귓바퀴를 길게 핥다가 귓구멍 속으로 푹, 혀를 찔러 꽂는 거였다.
“아흐! 그래, 도 이건, 아아….”
“그냥 손장난 좀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
여린 살갗에 닿는 뜨겁고 습한 감촉에 예민한 감각이 일었다.
“내가 좆을 박겠단 것도 아니고.”
후, 뜨겁게 불어 넣는 숨결에 절로 몸이 떨렸다.
“어차피 이렇게 열심히 만져도 넌 또 별로였단 소리나 할 거잖아. 그날 내 좆 따먹으면서 질질 쌌던 건 싹 다 잊은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귓속으로 박혀 드는 난잡한 속삭임이 흥분의 기폭제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아, 하아, 그, 만…! 여기서는, 안, 흐읏, 그만…!”
있는 힘을 다해 그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조금도 움찔하지 않은 남자가 여전히 제 허리를 감은 채 낮게 물었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선 괜찮고?”
귓불을 잘근잘근 짓씹는 듯한 목소리가 여우처럼 음탕했다. 결국 이러려고 덫을 놓은 거였다.
“딴 데로 갈까? 우리 집 갈래?”
“하…. 이 양아치야!”
크큭, 귓가와 목덜미에 번지는 웃음소리가 꼭 유혹에 성공한 악마의 그것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