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enders score goals well RAW novel - Chapter 47
우리 동네에는 왜 온 거야!?
“여긴가?”
웨스트햄 사무실을 나와 북런던으로 갔다.
이 동네에 와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동런던과 비슷하게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우중충했다.
[하이버리 아스널 스타디움]주택가에 정말 뜬금없이 축구장이 있었다.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다.
100년이 넘는 경기장답게 낡았지만 듬직한 포스가 장난 아니었다.
아직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이사 가기 전이라 현역 경기장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번 시즌에 여기서 뛸 수 있다는 거군. 후후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생에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볼 때면 맨유의 올드 트래퍼드만큼 멋진 구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바로 하이버리 스타디움이었다.
당시 아스널의 축구처럼 스마트하고 “이것이 영국의 축구장이다!” 하는 포스가 있었다.
나는 관광객처럼 경기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물론 내가 한가하게 남의 축구장을 구경하러 북런던까지 온 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왔다.
나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
[더 구너스 레스토랑]“식당 이름부터 빡세네. 괜찮을까.”
구너스는 아스널 팬을 뜻하는 단어다.
선수단은 거너스, 팬은 구너스.
한 마디로 여기는 아스널에 미친 놈들만 오는 식당이니까 다른 팀 응원하는 놈들은 썩 꺼지라는 뜻이었다.
“어서오세요~”
나는 간첩처럼 모자를 눌러 쓰고 식당 구석에 앉았다.
빨간 아스널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방긋 웃으며 나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스테이크와 토마토 샐러드 주세요. 고기는 웰던으로.”
대충 주문을 하고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았다.
쪽지에 적은 주소를 확인했다.
[하이버리 스트리트, 더 구너스 레스토랑.]설마 이런 이름의 식당이 또 있을 리는 없었다.
“미치겠군.”
나는 나의 정체가 들통날지도 몰라 잔뜩 긴장한 채로 일단 밥을 먹었다.
딱히 아스널에 죄를 지은 건 아닌데 어쨌든 같은 런던 라이벌팀의 식당에 있는 거라 불편했다.
“하여튼 재밌네.”
북런던으로 올라오니 이곳은 별세계였다.
식당 벽에는 100년은 됐을 법한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아스널을 거쳐 간 수많은 스타 선수의 사진과 사인이 걸려 있었다.
시대별 유니폼부터 오래된 입석표까지.
이곳은 아스널 FC 박물관이었다.
동런던 펍에 가면 온통 웨스트햄 세상인데.
참 재밌었다.
반면 서런던은 달랐다.
그곳은 어디를 가도 첼시 구역이나 풀럼 구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워낙 부자 동네고 관광객이 북적이는 국제화된 동네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북런던과 동런던은 아직도 중세시절 잉글랜드라고 할법한 독특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괜한 걱정을 했나?”
벽 한쪽에 아직 인화지가 다 마르지도 않은 듯 반짝이는 새 사진이 걸려 있었다.
더 인빈서블은 천하무적이라는 뜻이다.
앙리와 피레스, 베르캄프, 융베리 등 무패우승의 주역들이 메달을 목에 걸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이 빛났다.
“저게 진짜 우승컵이지.”
2부리그 우승컵을 자랑스럽게 진열해놓은 우리 구단이 떠올라 창피했다.
그때 식당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내가 기다리던 그 남자였다.
“미안. 미안. 구청에 들렀다가 늦었어. 공무원 놈들 일처리 속도가 어찌나 느린지… 한국이었으면 금방 됐을 텐데…”
그 남자가 투덜대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그다음 여직원에게 나의 용무를 알렸다.
“안녕하세요. 제임스 그랜트 지배인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그래요? 어머. 한국에서 오셨어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젊은 영국 아가씨가 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행이면서도 좀 서운하네.
그녀가 탈의실로 가서 제임스에게 알렸고 잠시 후 그가 정장 차림으로 등장했다.
“어!? 영웅 씨!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오랜만입니다. 제임스 선생님.”
내가 찾아온 남자는 서울 종로 [브리티시 어학원]에서 나에게 영국식 영어를 가르쳐주었던 제임스 선생님이었다.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 나는 학원에 연락해서 그를 만나려고 시도했었다.
놀랍게도 그는 3달 전 한국 부인과 이혼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히고 어학원에 그의 영국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그래서 얻은 게 이 식당 주소였다.
“어떻게 여기를 찾았어?”
그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랐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 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여기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니야. 그건 아니야. 난 단지 교정만 해줬을 뿐이야. 편지를 쓴 것도 영웅이고 실력으로 지금 위치까지 오른 것도 영웅이야. 고마워할 거 없어.”
“뭐. 그럼 같이 했던 일로 하죠.”
우리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임스는 나의 모든 경기와 기사를 챙겨보고 있다고 했다.
“영웅이는 뭔가 해낼 줄 알았어. 그 나이에 그렇게 계획적으로 살기는 쉽지 않거든. 그래도… 이렇게 빨리 성공할 줄은 몰랐네. 축하해.”
“이제부터죠.”
“맞아. 이제부터지. 하핫.”
제임스의 웃음이 씁쓸했다.
전에 만났을 때 그는 꽤 잘나가는 영어 강사였고 나는 중학교 중퇴자에 불과했다.
몇 년 사이에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
“식당 일은 할 만해요?”
“… 뭐. 먹고살려면 해야지. 런던에서 영국인을 상대로 한국어 수업을 할 수는 없잖아.”
유럽에 한류열풍이 불어 한국어를 배우는 유럽인들이 늘어나는 건 앞으로 아주 먼 훗날의 일이다.
아직도 내가 북한 사람인 줄 아는 영국인도 꽤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내가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식당으로 인상 고약한 노인이 들어왔다.
직원들이 기합이 바짝 들어 인사했다.
누가 봐도 이 식당의 주인이었다.
그가 나와 아들 제임스를 발견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 경찰 국장으로 나올 법한 살벌한 포스였다.
“웨스트햄 선수가 여기는 왜 왔지?”
그가 큰 소리로 말하자 식당이 조용해졌다.
안에 있던 직원과 손님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소리쳤다.
“어! 저 동양인! 어디서 봤다 했더니! 웨스트햄의 나영웅이잖아!?”
“우리 동네에는 왜 온 거야!?”
[히어로]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들렸다.워낙 특이해서 한번 들으면 모두가 기억했다.
원래 내 한국 이름 발음으로 활동했으면 이렇게 단번에 기억하지 못했을 거다.
어쨌든 나는 지금 북런던에서 인민재판을 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하하하! 지난 시즌 2부리그에서 활약이 대단했다지? 동양인 선수가 덩치도 크고 멋지구만.”
제임스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자네. 밥은 먹었나? 잘 먹고 다녀야지. 다음 시즌에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힘들 거야. 웨스트햄 그 굼벵이들하고 축구를 하려면 말이야. 으하하하!”
“맞아! 맞아! 저 친구 고생길이 훤~ 하구만~!”
“그런 삼류 구단에 언제까지 있을 거야? 벵거 감독한테 연락 한번 해봐. 후보팀에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제임스 아버지의 말에 다들 낄낄대며 웃었다.
아무도 웨스트햄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반감도 없었다.
오히려 나를 격려하고 걱정했다.
제임스가 미안해하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에 하이버리에 오면 각오하라구! 앙리와 데니스가 네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니까! 으하하하!”
구너스들은 나에게 뜻깊은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제임스와 일단 하이버리를 벗어났다.
이 동네에 있으면 아스널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서 이성이 작동하지 않았다.
“미안해. 사람들이 좀 짓궂어. 다들 이번 무패우승에 어깨뽕이 이만큼 올라갔거든.”
“아니에요. 이해해요. 이 정도는 애교죠. 뭘.”
“근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요.”
“나한테?”
나는 제임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
그날 밤.
북런던에서 제임스를 만나고 동런던 집으로 돌아왔다.
아스널의 세계에서 웨스트햄의 세계로 넘어온 거다.
거실 소파에 폴이 누워있었다.
숙취에 절은 얼굴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몇 년은 늙어 보였다.
“지금 그딴 게 보고 싶어요?”
“…”
폴이 보고 있는 방송은 [매치 오브 더 데이]라는 영국 최고의 축구 방송이다.
유명한 은퇴 선수들이 패널로 나와 축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데 영국 축구팬들은 이 방송을 마약처럼 장기복용했다.
“축구는 아무 죄가 없으니까. 죄는 인간에게 있을 뿐이지.”
“회사에서 짤리더니 철학자가 되셨네요.”
“…”
폴은 초록빛 피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가득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빛나는 그 세계는 축구 소년들의 꿈이었다.
유소년 선수였던 폴은 부상으로 그곳에서 한번 쫓겨났고 어른이 돼서는 구조조정으로 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이제 축구장 밖에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앞으로 어쩔 셈이에요?”
“뭐? 일? 모르지. 업튼 파크 앞에서 핫도그나 팔아볼까? 하핫.”
폴이라는 남자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생에서 나는 어린 나이에 은퇴를 당하고 축구장 밖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어떤 일을 해도 나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 남보다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축구장 밖은 결코 만만한 세계가 아니니까.
서러워서 혼자 눈물도 많이 흘렸다.
덩치만 큰 어린아이가 되어 사회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운 좋게 분식집을 물려받아 죽도록 일해서 겨우 생활이 안정되자 또 생각하는 건 오직 축구였다.
폴도 나도 축구중독자다.
우리는 축구 밖에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내가 일을 하나 맡겨도 될까요?”
“일? 무슨 일? 나한테?”
“나의 다음 시즌 연봉 협상이요. 형한테 맡길게요. 새 단장이 만만치 않더라구요.”
“뭐!?”
폴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본인을 놀린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 에이전트가 돼줘요. 미스터 폴 고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