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01
남은 맹호대원들은 검왕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해야만 했다. 그들의 설명을 들은 검왕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르쳐 놓으니까 조금 구실은 하는구나.”
검왕의 말을 들은 맹호대 무사들은 해연히 놀랐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다.
‘거, 검왕의 제자!’
감이 입 밖으로 내서 외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소리쳤다.
자신들이 검왕의 제자에게 시비를 걸고 덤빈 것이다. 그저 표국의 표사나 쟁자수 정도로만 알았지 설마 검왕의 제자일 줄은 몰랐다. 그것을 인지하고 나니 슬슬 두려움이 몰려왔다. 검왕이 자신의 제자를 건드렸는데 가만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검왕은 자신을 건드린 사람은 그냥 두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도련이 몰락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 하지 않던가.
맹호대원들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검왕의 눈치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가니 지났을까.
검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맹호대원들을 쳐다봤다.
“아직 볼일이 남았는가?”
“아, 아닙니다!”
“그럼 가 보지 않고 뭐 하나?”
검왕의 말에 맹호대원들의 표정이 구원 줄을 잡은 것처럼 환해졌다.
“그,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맹호대원들은 정중히 포권을 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담아 포권을 취한 후, 재빨리 연무장에서 빠져 나갔다.
이제 연무장에는 단형우를 비롯한 다섯 명만이 남아 있었다.
“고작 저런 놈한테 밀려서 어디 얼굴이나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으냐?”
검왕의 말에 종칠이 흠칫 놀랐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잇었다. 종칠이 도움을 바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형우는 그런 종칠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연무장에서 나가 버렸다.
단형우가 나가자 영사가 서둘러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남아 있다가 괜히 말려들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연무장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검마가 중얼거렸다.
“심심한데 잘 됐군.”
검마의 말이 떨어진 순간 종칠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잘 되긴 뭐가 잘 돼!’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먹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을. 종칠은 온갖 욕을 속으로 삼켰다.
잠시 후, 연무장에 고통에 가득 찬 비명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연무장에서 나온 단형우는 다른 일해이 들어간 전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단형우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미소는 평소와 달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 같았다.
술에 취한 달그림자
상당히 넓은 방,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조설연 일행이 앉아 있었다. 팽가 가주인 팽진평을 비롯한 팽가의 쟁쟁한 고수들이 그들을 마주봤다.
그 자리에는 무림맹에 있어야 할 팽철영도 함께 있었다.
“어떠냐? 조금 갑작스러운 감이 있지만,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터.”
팽진평은 조설연에게 그렇게 말한 후, 동의를 구한다는 듯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한 차례 둘러봤다.
하지만 그의 눈길에 수긍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설연 역시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조설연이 거절의 뜻을 비치자 팽진평이 손을 살짝 내저으며 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쉽게 결정하지 말거라. 너무 갑작스럽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며칠 쉬면서 좀 더 생각을 해 보도록 해라.”
팽진평이 그렇게 말하니 조설연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팽진평은 마치 조설연이 그렇게 대답할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대화를 마무리해 버렸다.
조설연은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지은채 팽진평과 그 옆에 앉은 팽철영을 바라봤다. 팽철영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조설연은 속으로 살짝 한숨지었다.
“자자,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사람들을 붙들고 너무 시간을 지체했군.”
팽진평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안으로 들어와 일행을 밖으로 안내했다.
일행이 모두 나가자 팽진평이 팽철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다른 아이들도 꽤 괜찮아 보이던데, 정말로 저 아이로 만족하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팽철영의 대답에 팽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조설연을 식구로 맞이한다는 것은 하남표국을 팽가 아래로 들인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즉 십대고수를 둘이나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취월공게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취월이라는 말에 팽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월은 팽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위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취월공이 하남표국 일행들을 한 번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 참 궁금하구나. 취월 공이 과연 어떤 평을 내릴지 말이야.”
팽진평의 말에 팽철영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저도 그렇습니다.”
팽철영은 취월이 과연 조설연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했다. 사실 이번 조설연에게 청혼을 하는 문제는 팽철영이 취월에게 은밀히 부탁한 것이었다.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상황에서 취월이 조설연을 추천해 줄 리가 없기에 팽철영이 약간 손을 쓴 것이다.
취월은 다행이 팽철영의 부탁을 들어 주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팽진평은 취월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다. 그만큼 취월이 팽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팽철영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조설연은 절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팽철영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자신이 이렇게 빠져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더 취월의 평가가 궁금했다. 취월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테니까 말이다.
팽가에서 취월이라는 사람이 묵고 있는 곳은 내원에서도 꽤 깊숙한 곳이었다. 은은한 정취가 묻어나는 풍경 속에 서 있는 작은 전각이 바로 취월의 거처였다.
취월은 팽가에서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외부에 잘 알려질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취월이 팽가에 몸을 의탁한 지도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취월이 세상에 알려질 이유가 별로 없었다.
취월의 존재는 팽가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팽가의 내원에는 거의 직계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다가 깊숙한 곳에 거처를 정했으니 팽가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취월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취월의 거처, 그 아늑한 곳에 한 사람이 발을 들였다.
“정말 운치 있는 분이라니까.”
팽미령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그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취월의 거처를 가장 자주 찾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이곳은 취월의 지시를 토대로 팽미령이 직접 사람을 부려 꾸몄다. 당연히 애착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취월이 마음에 들어했으니 더더욱 그랬지만.
“취월공, 저 왔어요. 들어가도 되죠?”
팽미령은 그렇게 말한 후, 상대의 동의도 얻지 않고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전각 내부는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단출했다. 그저 전각 자체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쪽에 침상이, 그리고 그 근처에 서탁과 의자가 있었다.
취월은 그 서탁 앞에서 커다란 종이를 펼쳐두고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저 왔다니까요.”
팽미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취월을 향해 걸어갔다.
취월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팽미령을 쳐다봤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아, 팽소저.”
“아이, 또 그렇게 부르신다. 그냥 미령이라 부르시라니까요.”
팽미령이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그녀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뒤로 나자빠졌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 이렇게 누군가에게 애교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어찌 그럴 수 있겠소.”
취월은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팽미령은 그 미소를 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나저나 오늘은 또 어쩐 일이시오?”
취월의 말에 팽미령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취월 사이에 있는 간격은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사내를 보면서 마음을 빼앗긴 것은 처음이었다.
팽미령은 내심을 감추며 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아기 주먹만 한 단약이었다.
“이번에 괜찮은 단약을 구했어요.”
취월은 팽미령의 손바닥에 놓인 단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음단(天陰丹)이로군요.”
“본래 익히셨던 무공이 음(陰)에 바탕을 둔 것이라 들었어요. 그래서……”
취월이 그 말을 들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됐소이다. 난 그것을 받을 수 없소.”
“왜요? 이건 그냥 제가……”
취월은 팽미령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중간에서 잘라냈다.
“지금의 내 몸에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되오. 소저의 성의는 고맙지만 받을 수 없소.”
취월의 말에 팽미령의 눈이 살짝 일렁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녀는 천음단을 다시 품에 갈무리했다.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하니 도저히 그것을 줄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해요. 전 그것도 모르고……”
“당치 않소. 팽소저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너무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하오.”
취월의 말에 팽미령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이후로도 팽미령은 취월 옆에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거의 한 시진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서야 팽미령이 돌아갔다. 취월은 그녀가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이지 내가 이 꼴이 되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는 고마운 소저로군.”
취월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옆으로 돌렸다. 취월의 의자에는 커다란 바퀴가 달려 있었다. 그 바퀴를 굴려 창문으로 다가간 취월은 창 밖의 정취를 잠시 만끽했다.
창가에 있는 탁자에는 항상 술이 놓여 있었다. 취월은 탁자에 있는 술을 조용히 들이켰다.
“하아, 이런 젠장.”
취월이 술을 한 병 비우고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때, 누군가 그의 등 뒤에 나타났다. 마치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여기 있었군.”
취월은 그 목소리를 듣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취월의 의자가 조금씩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나타난 사람이 말을 잇는다.
“월영(月影).”
그는 혈영이었다. 취월, 아니 월영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하고 혈영을 바라봤다.
“과연 회의 능력은 대단하군. 어쩔 방도도 없이 여기 갇혀서 평생을 썩어야 할 줄로 알았는데.”
월영의 말에 혈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일이냐?”
월영은 양팔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혈영의 표정이 굳자 월영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놈들이 날 습격했지. 나도 꽤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놈들 보통이 아니더라고. 덕분에 이렇게 당했지. 단전이 박살나고 반신불수가 되긴 했지만 때마침 팽가 놈들이 나타나 간신히 목숨만 건졌어.”
월영의 말을 들은 혈영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께서 많이 걱정하시고 계시다.”
회주라는 말에 월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시겠지. 맡기신 임무도 있었는데.”‘
“임무 때문이 아니야. 회주께서 널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혈영은 그렇게 말하며 월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월영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우우웅.
혈영의 장심에서 웅혼한 내력이 뻗어 나왔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월영의 내부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월영은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흐음, 나도 잘 모르겠군. 일단 회주께로 돌아가야겠어. 아마 어떻게든 해 주실 거다.”
혈영의 말에 월영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몸 상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흉수는 정말로 지독한 놈들이었다.
“소용없다. 어차피 잘 됐어. 난 여기 있겠다. 네 능력 정도라면 언제든 여기 올 수 있을 테니 별 문제는 없겠지.”
월영의 말에 혈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회를 벗어날 생각인가?”
“그럴 리가. 회주께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지. 그저 은신처로 이만큼 괜찮은 곳이 없다는 뜻이야.”
월영의 말에 혈영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혈영은 품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냈다.
“받아라.”
혈영의 손에서 날아간 책이 월영의 무릎 위에 살며시 떨어졌다.
월영은 책 표지에 쓰여 있는 제목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천기진해(天氣陳解)!”
혈영은 월영이 놀라거나 말거나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 덕에 발굴할 수 있었던 책이다. 아직 발굴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성과는 그것밖에 없지만 머지않아 대부분의 물건들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혈영이 뭐라 말을 하건 월영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천기진해의 표지를 넘기고 있었다.
천기진해. 천기자가 이른 진법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책이다. 월영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혈영은 그런 월영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는 놈이로군. 며칠 후에 다시 오지. 그놈들을 찾아서.”
혈영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팽가 안에서 그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명 있었지만 그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월영은 점점 천기진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혈영은 월영을 만난 후, 곧장 혈마자를 찾아갔다. 월영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그래야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혈영은 혈마자의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혈마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인자한 얼굴에 은은한 미소. 그리고 조용히 넘어가는 책장……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감탄을 자아낼 만한 광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