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27
‘나라면 머릿속에 보관했을 텐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머리 굴리지 말게. 그 책자는 내가 만든 것이니까. 천기자가 그런 책자를 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혈마자의 말에 혈영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럼 더 이상하지 않은가.
책자로도 남기지 않은 천기자의 무공을 어떻게 혈마자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책으로 엮어낼 정도로 자세하게.
혈영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런 깊은 내막까지 알 필요는 없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천기자의 무공과, 혈영검의 각성이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혈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영이 필요합니다.”
“사영?”
혈마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영은 혈마자의 진정한 그림자였다. 암중에서 혈마자를 보호해 주는 혈마자의 호위무사였다.
“이유가 뭔가?”
“혈영검을 깨우기 위해 필요합니다.”
혈마자는 그 말을 듣고 혈영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영을 내주려면 좀 더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자세히 말해 보게.”
“혈영검의 각성을 단형우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현재로선 그자만이 혈영검을 깨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다시 혈영검을 회수하기 위해선 누구보다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혈영의 말에 혈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은밀함이라면 누구보다 사영이 뛰어나긴 하지.”
혈마자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하남표국 정도에 숨어드는데 사영이 필요할까 계산을 했다.
하남표국에는 검마와 검왕이 있다. 그리고 단형우라는 천기자의 후인이 있다.
“문제는 단형우로군. 그래 혈영이 보기에는 어떤 것 같은가?”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혈마자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혈영의 대답이 예상과 달랐다. 보통 때라면 이런 질문을 받으면 혈영은 자신 있는 태도로 무조건 이긴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혈영이 단형우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뜨시다.
혈마자도 물론 단형우가 상당히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혈영도 단형우를 당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그 차이가 혈영의 자신감까지 없애버릴 정도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던가? 그 단형우라는 천기자의 찌꺼기가?”
혈마자의 말에 혈영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드러나 결과만 보자면 보통이 아닙니다. 특히 소주에서 허창까지 단번에 이동한 사술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섣불리 예단할 수가 없는 자입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로군.”
혈마자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분간 단형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단형우가 혈영검의 각성에 반드시 필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이상 더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다.
“쯧, 가뜩이나 조서단에 손이 모자라는데…… 할 수 없지. 조서단에 그놈에 대해서 낱낱이 조사하라 지시를 내리게. 그 놈의 과거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현재의 능력을 소상히 알아내야 하네.”
혈마자의 말에 혈영이 고개를 숙였다.
“존명.”
“그리고……”
혈마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미 결정은 내렸지만 막상 그것을 지시하려니 머뭇거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영은 언제나 혈마자를 지켜주고 있는 그림자였다.
“하는 수 없지. 사영.”
혈마자가 사영을 부르자 혈며자와 혈영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스며 나왔다.
묵빛 옷을 입은 사내, 사영이었다. 사영의 몸에서는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하지만 그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혈영뿐이었다.
혈영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영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이 느낌은 점점 짙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분위기에는 도저히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혈영을 도와라.”
혈마자의 말이 떨어지자 사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사라졌다. 혈영도 사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귀신같은 신법과 은신술이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혈영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혈마자가 고개를 저었다.
“됐네. 혈영검의 힘이 지금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지. 어쨌든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 하네. 알겠는가?”
“존명.”
혈영은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혈마자는 혈영이 사라지자 왠지 허전했다. 항상 곁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사영이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을 적셨다.
“끄응,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
사영이 당한다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정면대결이라면 모를까 은밀함으로 승부를 한다면 이 세상에 사영을 이길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게 바로 천하제일인이지.”
그것이 바로 혈마자의 사영에 대한 평가였다.
단형우의 감각은 항상 열려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몸에 새겨진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항상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오랜 시간 살아오다 보니 언제나 감각을 활짝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예전의 그곳보다 훨씬 평화로운 이곳에와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단형우의 감각이 가장 집중된 곳은 하남표국 내부였다. 단형우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곳이니 당연했다.
그리고 비록 하남표국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 허창 전체에 퍼져 있었다. 허창에는 하남표국말고도 단형우와 인연을 맺고 있는 곳들이 몇 군데 있으니 당연했다.
즉, 허창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단형우의 감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단형우가 관심을 가져야만 하겠지만.
깊은 밤, 단형우는 자신의 방에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비록 몸은 잠을 청하지만 항상 열려 있는 감각이 하남표국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아직 종칠은 보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이 아직 잠들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다.
단형우는 여전히 감각을 유지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자고 있지만, 감각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포착되면 즉시 눈을 뜰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단형우는 허창의 경계에서 있는 사람들은 발견했다. 그들은 허창에 들어설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단형우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속에 품고 있는 기운이 그렇지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들은 마기를 품고 있었다. 마인들이었다.
결국 단형우가 눈을 떴다. 단형우는 잠시 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뗐다.
혈도객과 마궁은 허창 경계에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이곳에 살고 있는 단형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직접 겪어봤으니 당연하다. 단형우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따르는 천마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다.
혈도객은 착잡한 눈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여덟 마인들을 쳐다봤다. 은밀하게 이동해오긴 했지만 여기까지 함게 왔다는 자체가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들 중 다섯은 천마성의 마인이었고, 셋은 천마성과 관계없는 마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천마신교의 교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젠장, 환마 이 자식, 나보고 대체 어쩌라고……”
혈도객이 짜증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허창에 들어가면 안 된다. 그것이 천마신교의 법이다.
천마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가 바로 허창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했는지 아는 사람은 오로지 단형우를 아는 사람들뿐이었다.
혈도객이나 마궁은 단형우를 알고 있기에 이해를 하지만, 함게 따라온 여덟 마인들은 여전히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허창에 신이 살고 있다니, 그게 말이 돼?”
여덟 마인은 하나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그 신으로부터 힘을 받아 금마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까? 일단 허창으로 들어가 그 신인지 뭔지를 만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결국 마인 중 하나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혈도객은 그 말을 듣고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혈도객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교의 교리를 저버릴 셈이냐?”
“자, 장로님. 그, 그게 아니라……”
혈도객은 이제 천마신교의 장로였다. 이곳에 함께 데려온 여덟 마인들은 환마가 고르고 고른 자들이었다.
비록 대세에 따라 천마신교에 속해 있긴 하지만 실제로 금마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믿지 않은 마인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이유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허창에 살며, 자신들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해 금마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리고 허창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허창에 사는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젠장. 그럼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란 거야? 언제 나올 줄 알고?’
마인들이 하나같이 그런 생각에 젖어 있을 때, 단형우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허억!”
처음 말을 꺼냈던 마인은 자신 앞에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는 마인이다. 즉시 손을 뻗어 장력을 내갈겼다. 아니, 내갈기려 했다.
빠악!
“컥!”
뒤통수를 가격해 그의 장력을 무산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혈도객이었다.
혈도객은 급히 앞으로 처박힌 마인을 일으켜 뒷사람들에게 넘기고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단형우는 혈도객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마가 왜 이들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혈도객과 마궁은 단형우도 아는 얼굴이니 별다른 확인 절차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혈도객은 공손히 단형우에게 허리를 숙였다. 지나날은 어찌되었건 단형우는 지금 교의 신이었다. 모든 마인들이 모셔야 하는 마신이었다.
혈도객이 허리를 숙이자 마궁도 얼른 옆에서 따라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뒤에서 멀거니 서 있는 마인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서 인사를 하라고.
마인들은 그제야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였다.
마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동그란 패를 하나 꺼냈다. 아수라의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진 패였다. 마궁은 그것을 반으로 쪼갠 후, 한쪽을 단형우에게 넘겼다.
“앞으로 이것으로 증명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궁의 말에 단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패를 받았다.
“이곳에 있는 열 명인가?”
단형우의 물음에 혈도객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번 신의 은총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혈도객의 말에 단형우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커억!”
“쿨럭!”
단번에 열 명 마인들의 마공이 산산히 흩어졌다. 혈도객과 마궁을 제외한 자들은 경악한 눈으로 피를 토하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사 금마공이라 하더라도 이리 단번에 마공을 부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제야 신이라고 치켜세우던 혈도객의 말이 떠올랐다.
단형우는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허어억!”
그 간단한 손짓 한 번에 뿌득하게 마공이 차오른다. 마인드른 주체할 수 없는 희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도 순수한 마기.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그런 마기가 그들의 단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금마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이거였군. 그래서 환마가 겪어보면 안다고 했던 거였어.”
혈도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단전에 차오른 순수한 마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단형우는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가라.”
단형우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혈도객과 마궁은 그런 단형우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 역시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고수. 방금 단형우의 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이는 빠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능력이다.
“설마 정말로 신인가……”
마궁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긴 자신이 예전에 겪은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곳에 있는 마인들이 모두 마궁의 말을 들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단형우는 정말로 신이나 다름없었다.
혈영은 조서단으로부터 건네받은 정보들을 면밀히 살폈다. 지금 혈영이 있는 곳은 허창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거야 원…… 새로운 건 하나도 없군.”
혈영은 조서단의 정보를 모두 읽은 후, 불에 태워 버렸다.
“사영? 넌 어떻게 생각하지?”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혈영의 질문에 대한 답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판단은 네가 해라. 난 그저 행할 뿐.”
사영의 대답에 혈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사영이 도움이 될 때는 좀 더 나중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사영을 혈마자에게 돌려보내야 했다. 사영은 혈마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호위무사니까.
“흐음, 아직도 그 빠른 이동의 비밀은 못 알아냈군.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리는데 말이야. 그것만 아니라면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더라도 별일은 없겠군.”
조서단의 정보를 분석해서 낸 결론은 단형우가 혈영보다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혈영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서단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그건 사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사영이지.’
사영의 강함은 무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은밀한 싸움이라면 아무도 사영을 이길 수 없다. 문제는 사영의 은밀함이 단형우에게도 통할지다.
“통하겠지. 분명히 통한다.”
혈영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혈영조차 사영이 지금 어디 숨어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혈영을 공격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은밀한 다른 뭔가를 한다면 분명히 통할 것이다.
‘그저 검을 들고 나오는 것뿐이니 충분하지.’
단형우가 혈영검을 몸에 지니고 있지만 않다면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진행한다.”
혈영은 결국 결심을 굳혔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혈영검이 가진 힘이 너무나 탐났다.
“자아, 그럼 작전을 짜 볼까.”
혈영의 머리가 열심히 굴러갔다.
하남표국은 외원과 내원으로 나뉘어져 있다. 본래 그런 구분이 없었으나, 형표가 표국을 크게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