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6
“어쨌든 최대한 서둘러서 표행을 따라잡아야 한다.”
사마철의 말에 팽미령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이쯤에서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팽미령의 말에 팽철영과 남궁진이 크게 당황했다. 사실 지금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웠지만 팽미령의 행동은 그런 사소한 당황은 깨끗이 날려 버릴 정도였다.
“령아! 어찌!”
팽철영이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할 정도로 흥분해 소리쳤다. 남궁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소리치고 싶어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사마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러네. 자네들은 이만 무림맹으로 돌아가게. 여기서부터는 우리 조가장과 하남표국의 일일세.”
사마철의 말에 팽철영과 남궁진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조인도 크게 당황하며 입을 벌렸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이어지는 사마철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래서 일부러 방도 잡지 않았네. 이만 나가 줬으면 하는군.”
너무도 노골적인 축객력이었다. 이는 정도를 넘어선 무례였다. 하지만 팽미령은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팽미령이 그냥 그렇게 결정해 버리자 팽철영이 당황했다. 뭐라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사마철의 냉정한 표정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결국 무림맹에서 온 세 사람은 객잔에서 나가 버렸다. 사람철은 그 모습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수, 숙부님 대체 왜……”
조인의 말에 사마철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우리도 이만 쉬도록 하자. 갈 길이 멀다.”
사마철이 침상에 몸을 뉘었다. 조인도 어쩔 수 없이 누워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령아!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객잔에서 나가자마자 경공을 전개하는 팽미령을 쫓아가며 팽철영이 크게 소리쳤다. 팽미령은 그런 팽철영을 힐끗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마 대협이 시킨 대로 한 것일 뿐이에요.”
“뭐라고?”
“사마 대협이 전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고요.”
팽미령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팽철영이 크게 당황했다. 그것은 남궁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요? 팽 소저?”
“조가장이 습격을 받았따고 했어요. 우리는 서둘러 무림맹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사마 대협의 말투로는 꽤 위험할 것 같긴 했는데 확실한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아봐야겠죠.”
팽미령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팽철영과 남궁진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묵묵히 경공을 전개했다. 조가장이 습격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조가장이 무너지지는 않겠지?”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당사자들을 제외한다면.”
팽미령의 냉정한 대답이 밤하늘에 조용히 흘러들어갔다.
섬서로 들어선 표행은 어느새 서안 근처의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마을이었다. 물론 일행은 마을을 그냥 지나쳐 근처 적당한 곳에서 노숙을 준비했다.
당철기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당호관은 그런 당철기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정신적인 혼란 역시 벽을 허물고 새로운 경지로 발을 들이는 길 중 하나였다. 당호관이 보기에 이것은 당철기에게 찾아온 하나의 기회였다.
당호관은 가만히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당철기를 힐끗 한 번 쳐다본 후, 당형우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당현우는 쟁자수들과 함께 있었는데 여전히 표정을 알기 어려웠다.
“참, 신기한 사람이로군.”
단형우와 함께 다니면서 당호관은 정말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단형우는 밤에도 항상 서 있었다. 눕거나 앉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만일 객잔이라도 들렀다면 앉아서 식사하는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었겠지만 표행을 하는 동안에는 객잔에 드는 일이 거의 없다.
당연히 이번에도 항상 노숙이었고, 식사 역시 길에서 대충 해결했다. 당연히 단형우도 길에서 음식을 먹었고, 서서 먹었다.
음식이야 그렇다 치고 밤에 잠을 안 잔다는 건 당호관으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람은 잠을 자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헌데 단형우는 지금 그러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말하면 서서 자는 거지만 당호관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물론 단형우는 정말로 잠을 자지 않아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아니, 잠이 몸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지금 자는 것은 그저 습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답답하군. 마을에서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좋겠는데……”
당호관은 입맛을 다셨다. 술을 마신 지 너무 오래 되었다. 물론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으니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한참을 앉아 있던 당호관은 당철기를 쳐다보고 흠칫 놀랐다. 당철기의 표정이 점점 죽어 가고 있었다.
“쯧쯧. 고작 그런 심마에 빠져들다니……”
당호관이 일어나 당철기에게 다가갔다.
“이놈! 정신 차리거라.”
당호관은 당철기 앞에서 나직하게 호통을 치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 등에 살짝 손을 올리고 내력을 흘려 넣었다.
당철기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허억! 아, 수, 숙부님.”
“정신을 차렸으니 됐다. 앞으로는 좀 조심하는 것이 좋겠구나.”
“명심하겠습니다.”
당철기가 당호관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했다. 만일 당호관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봤을 것이다.
“조금만 참거라. 서안에 도착하면 잠시 쉬어가자꾸나. 그곳에는 가문의 분가가 있으니 술이라도 한 잔 할 수 있을 것이다.”
당호관의 말에 당철기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숙부의 배려가 너무도 고마웠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다들 지나쳐 가는 길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멋지게 극복하리라 믿는다.”
당화관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당철기는 상당히 뛰어난 기재였으니까.
당철기와 당호관이 대화를 하는 동안 남은 당가 무사들은 알아서 주변을 정리하고 각자 불침번을 정한 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쟁자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녁은 대충 해결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내일의 강행군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것뿐이었다.
형표는 단형우 옆에 앉아서 쟁자수들이 자리를 잡고 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당형우를 슬쩍 쳐다봤다. 단형우는 여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네는 항상 서 있는군.”
형표의 말에 단형우가 형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니까.”
단형우의 대답에 형표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난번 습격 이후로 단형우를 대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단형우가 거침없이 적들을 없애 버리는 광경은 아무리 경험 많은 형표라 하더라도 섬뜩했다.
그리고 그 섬뜩함이 단형우에게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꽤 지났고, 다시 단형우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쟁자수들은 아무도 단형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들의 뇌리에는 단형우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는 뽑지 못할 정도로 깊이 뿌리내려 있엇다. 어떻게 보면 그들과 비슷한 처지인 형표가 그리 쉽게 그것을 해소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내 예전부터 궁금하던 것이네만, 왜 잠도 서서 자는 겐가?”
형표의 말투가 좀 더 편안해졌다. 그리고 표정도 더 편안해졌다. 단형우는 그것을 느끼며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 그 미소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편하니까.”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서서 자는 게 왜 편하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워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하지만 형표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진짜 대답을 알아차렸다.
“그렇군. 그게 편하다 그거로군. 하긴,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정말로 그게 더 편할 수도 있겠어.”
형표의 말에 단형우가 다시 형표를 쳐다봤다.
그 이후로도 형표는 단 형우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켰다.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표행을 시작하기 전에 했던 이야기들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단형우에게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당가를 비롯한 이름난 세가에서는 당연히 각 성(省)의 성도(省都)에 분가를 운영한다.
원활한 정보 수집을 위해서다. 그리고 그 정보가 모이는 곳은 당연히 본가(本家)다. 당연히 섬서의 성도인 서안에도 당가의 분가가 있었다.
서안에 도착한 일행은 놀라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조가장이 사라졌단 말입니까?”
형표는 경악했다. 당호관은 그런 형표를 약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금 놀라고 있는 중이네. 조가장이 습격을 받아 무너졌다고 하더군.”
“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흉수는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하네. 그리고 말 안 해도 알겠지만 하남표국 역시……”
당호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형표는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조가장이 사라졌는데 하남표국이 남아 있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하남표국은 조가장의 절반이었다.
“설, 설마 살아남은 사람은……”
형표의 말에 당호관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형표는 무릎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줬다.
“어떻게 하겠는가? 난 그래도 자네가 끝까지 일을 마무리해 줬으면 하네만.”
당호관의 말에 형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형표가 당호관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당호관은 그런 형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랄 것까지 있나. 당연한 것을.”
형표는 그렇게 대답하는 당호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고마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표행은 하남표국의 마지막 표행이 될지도 몰랐다. 아니, 마지막 표행일 것이다. 이것만큼은 완수하고 싶었다. 멋지게.
“별 문제가 없다면 즉시 출발하고 싶습니다.”
형표의 말에 당호관이 선선히 허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원하던 바였다. 어차피 사안에 도착해서 쉴만큼 쉬었다.
당철기도 차분하게 휴식을 취하며 어느 정도 심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이런 위험한 물건은 하루빨리 당가 안으로 깊숙이 들여 놔야 하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표국이 망했다는 소식은 쟁자수들에게도 알려졌다. 당호관은 당분간 알리지 말자고 했지만 형표가 굳이 알렸다.
모든 쟁자수가 슬퍼했고, 형표와 마찬가지로 마직이 될 표행을 멋지게 마무리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일행은 서안을 떠났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만큼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쟁자수들은 이번 표행을 정말로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형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표행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걱정해야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창 걷고 있는 형표의 귀에 당호관의 전음이 들려왔다.
[살기일세.]
형표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당호관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당가 무사들은 이미 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있었다.
형표는 급히 쟁자수들에게 수신호를 보내 이동을 멈추도록 지시했다. 이내 표행이 멈췄고, 쟁자수들이 마차 주위로 몰려들었다.
쟁자수들은 두려움 반 기대 반의 눈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단형우가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 믿었다.
형표는 신중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형표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당가 무사들이 한군데로 모였다. 그리고 당호관과 당철기가 긴장한 누으로 사방을 살폈다.
한참을 그렇게 있자, 수풀 사이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거 들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영감탱이 실력이 괜찮은가 봐?”
수풀에서 나타난 사람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목소리는 굵은 저음이었으니 사내임이 분명했지만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기도는 당호관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고수다.’
당호관은 직감적으로 사내의 실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내의 기세를 흘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대는 누기기에 살기를 보내는 건가?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것인가?”
당철기가 호기롭게 외쳤다. 당철기에게는 사내의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눈은 그런 당철기의 모습에 경멸의 빛만 가득 머금을 뿐이었다.
“복면을 쓴 사람한테 정체를 묻다니 멍청한 놈이로군. 당가에 개새끼가 한 마리 있다고 하던데 그게 네놈인가 보구나. 큭큭큭큭.”
사내의 도발에 당철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감히!”
당철기가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몸놀림이 전광석화같았고, 손에는 어느새 푸른빛이 은은히 감도는 비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쐐애액!
바람을 찢으며 비수가 날아갔다. 그리고 당철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당철기는 공중에서 급히 몸을 회전시켜 사내를 덮치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땅에 내려섰다. 그리고 사내를 노려봤다. 사내의 손에서 방금 전 당철기가 던진 비수가 이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감히’라는 말을 했다니 역시 개새끼는 개새끼로군.”
사내의 말에 당철기의 안면이 실룩거렸지만 이번에는 섣불리 도발에 응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사내가 보여준 그 한수는 당철기의 걸음을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당철기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자,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마차와 물건을 그대로 두고 꺼져라. 굳이 도망간다면 쫓지 않겠다.”
사내의 말에 당호관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역시 표물을 노리고 온 자였다. 당호관의 감각에 상당히 많은 기척이 잡혔다.
그 수만 해도 벌써 당가무사와 쟁자수들을 다 합한 수보다 많았따. 정말로 제대로 노리고 온 것이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고 준비해라.”
당호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가 무사들은 내력을 다스리며 싸울 준비를 했다. 그 모습에 복면 사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렇게 목숨을 하찮게 여기다니. 안타깝군.”
사내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풀숲에 숨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 역시 모두 복면을 쓰고 있었다.
검은 빛에 더 가까운 혈의(血衣)를 입고 있었는데, 혈의는 그들의 흉흉한 기세와 어우러져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했다.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혈의 복면인들의 기세에 쟁자수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