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62
빙궁과의 싸움이 있은 후로,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항상 연무장에 서 있는 것은 같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아니, 눈빛이 달라졌다.
“오라버니, 무슨 생각 하세요?”
조설연의 질문에 단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뭔가를 대답하려고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다시 앞을 쳐다봤다.
조설연은 단형우가 과연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궁금했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왠지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 더 묻기가 어려웠다.
“다들 제대로 수련을 할 수 없어 보이네요. 그런데도 묘하게 활기차니, 오랜만에 쉬어서 좋은 걸까요?”
조설연이 말을 돌렸다. 얼굴에 미소까지 만들며 농담을 섞어 말을 했지만 단형우는 그저 묵묵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조설연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지었다.
연무장 분위기는 상당히 밝았다. 너무 비좁아 수련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수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몸으로 수련을 할 수 없으니, 입으로라도 수련을 하려는 것이다. 각자 지금까지 해온 수련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덧붙여 얘기를 했다.
때로는 이렇게 입으로 하는 수련에서 뭔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게 입으로 수련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황성 무사들이 있었다.
무황성 무사들은 자신들이 겪은 북해빙궁과의 싸움을 적당한 과장을 섞어 열심히 얘기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가장 열성적으로 들어주는 사람들은 바로 당가 사람들이었다.
무황성 무사들 입에서 나오는 당호관은 이미 예전의 뇌황을 뛰어넘은 존재였다. 당호관의 손짓 한 번에 수백 수천의 벼락들이 쏟아져 북해빙궁 무사들을 단번에 몰살시켰다는 얘기를 마치 진실처럼 떠들었다.
물론 당가 무사들은 그 말에 약간의 과장이 섞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들었다.
당호관이 천뢰를 완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백 수천 개의 벼락을 떨어뜨릴 정도는 절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수련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주목한 것은 당호관 혼자서 북해빙궁을 막아냈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무황성 무사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남표국에 어우러질 수 있었다.
혈마회
달이 뜨지 않아 별이 밝은 밤, 어둠이 사위에 휘몰아쳤다.
단형우는 그 어둠에 파묻힌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서 있었다. 오늘따라 왠지 방에 있고 싶지 않아 앞뜰에 고요히 서서 묘한 기분을 만끽했다.
꿈틀.
단형우는 단전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눈을 떴다. 고개를 숙여 단전 어림을 쳐다봤다.
물론 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에서는 상당히 치열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형우는 자신의 단전에 벌레 한 마디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벌레는 자신뿐 아니라 지옥에 함께 있던 친구들의 몸에도 살고 있었다. 그 벌레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고 있다. 천기자다.
천기자를 떠올린 단형우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천기자가 이미 세상에 없단느 것을 전해 듣기 했지만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천기자……’
단형우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순간적인 일이었다. 살기는 나타나타마자 사라졌다. 단형우의 얼굴은 다시 평온해졌다.
단형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사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천기자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심이 많이 엷어졌다.
이해할 수 없던 십 년.
단형우 스스로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긴 시간이었지만 실제로 흐른 시간은 십 년이라는, 그 이해할 수 없던 시간동안 단형우를 지탱해 준 것은 어쩌면 그 복수심과 원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정말로 마음속에 오로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단형우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들이 가득하다.
당시 지옥에 있을 때의 단형우는 그야말로 파괴와 살육의 화신이었다. 특히 친구들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되었을 때부터는 근처 수백 장 이내에 생명이 아예 없을 정도였다.
단형우는 그 지옥 자체를 천기자가 만든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부수고 죽였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전혀 상관없었지만.
단형우는 단전 어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단전에서 꿈틀대던 벌레가 한바탕 요동을 치더니 잠잠해졌다.
그 벌레와 단형우는 함께 자라왔다. 단형우는 분명 벌레의 도움을 받았다.
단형우뿐 아니라 그의 친구들도 벌레의 도움을 받았다. 벌레는 단전에서 단형우가 강해질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도움을 줬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벌레도 점점 힘을 얻어갔다.
벌레는 단형우 안에서 몇 번이나 허물을 벗었다. 벌레가 벗은 허물은 그대로 단형우의 온몸에 스며들어 단형우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벌레가 아무리 강해 봐야 그저 벌레일 뿐이다. 벌레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강해지지 않았고, 그저 이렇게 가끔 몸부림을 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단형우는 조금 더 기억을 헤집었다. 벌레가 꿈틀대니 오래 전 기억들이 계속해서 사념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떠오른 기억들은 단형우의 뇌리를 마구 휘젓고 돌아다녔다.
예전 같으면 괴로웠을 것이다. 만일 지금 단형우가 지옥에 있었다면 또 다른 생명체를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온몸을 적신 마수의 피를 털어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괴롭지 않았다. 머리에 떠오른 기억들이 오히려 단형우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머리를 차갑게 식혀줬다. 덕분에 단형우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옥에 있었다면 친구들의 죽음이 떠올랐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을 뿐이다. 단형우의 머리를 가득 메운 친구들의 모습은 입가에 미소를 그려냈다. 추억을 머금은 따뜻한 미소를.
무림맹은 일시적으로 잃었던 영향력을 다시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진천뢰라는 마병을 이용했다지만 무림맹 본단이 괴멸당한 것은 크나큰 불명예였다. 무림맹은 그 불명예를 씻어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무림맹은 한편으로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대문파에 은밀히 전갈을 넣었다. 무림맹 장로들이 모두 건재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림맹 장로들은 대부분 구대문파의 사람들이다. 그것도 문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다.
이번 빙궁의 공격으로 무림맹 본단이 괴멸당하긴 했지만, 다행이 주력 전투부대는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백호단과 청룡단은 빙궁 무사들을 뒤쫓았기 때문에, 처음 부딪쳤을 때 진천뢰에 당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주작단의 경우 그 특성상 대부분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거의 피해가 없었고, 현무단의 경우 절반 정도가 죽었다.
무림맹 본단이 완전히 박살난 것이 비하면 정말로 미미한 피해였다. 물론 그렇게 피해가 적은 이유는 취월이 미리 적절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무림맹 사람들이 속속 팽가로 모여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림맹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남은 북해빙궁 무사들은 아직도 산서에 있는 겐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한 번 대대적으로 날뛰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흐음……”
독고운은 제갈중천의 대답에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산서에 남은 빙궁 무리는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만일 현무단에 큰 피해만 없었다면 당장 무사들을 움직였을 것이다. 일단 그들을 박살내지 않으면 실추된 무림맹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 쉽지 않다.
“그들을 그냥 두어선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독고운은 제갈중천과 취월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독고운의 질문에 제갈중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산서에는 별다른 문파가 없으니 섬서에 있는 화산파를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화산파라면 충분히 기대에 부응해 줄 것입니다.”
제갈중천의 대답을 들은 독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파는 강력한 문파다. 그들의 검은 빙궁쯤이야 문제없이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과연 움직여 주겠나? 아무리 빙구주가 죽었다지만 그대로 남은 인원이 수백이나 되니 화산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텐데.”
독고운의 의문에 취월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 장문인은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맹주님께서 정식으로 요청하신다면 분명히 움직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릅니다.”
취월의 말에 독고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멸의 길이라……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 하지만 무림맹이 그저 손놓고 가만히 있으면 떨어진 명예는 언제 다시 줍겠나?”
“명예는 어차피 나중에 무림맹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현 무림을 양분하는 것은 무림맹과 정천맹. 하지만 정천맹은 혈마회이 주구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존재지요. 결국 무림맹만 남는다면 명예쯤은 저절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취월의 말에 독고운과 제갈중천은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그 말이 옳다는 것은 알지만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취월은 두 사람의 태도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한 마디를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혈마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상대해야 할 적은 혈마회라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구대문파의 전력이 완벽하더라도 쉽지 않습니다.”
취월의 말에 독고운과 제갈중천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혈마회라는 곳에 대해 취월만큼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취월은 혈마회에 소속되어 혈마자를 여러 번 대면했기 때문에 경각심이 높았지만, 독고운과 제갈중천은 아직도 혈마회의 존재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중이었으니까.
“혈마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들의 실체를 어떻게 전 무림에 알릴 생각인가? 자네 얘기를 들어보니 그것도 쉽지만은 않을 듯한데 말일세.”
“아직 대국을 구상하는 중입니다. 좀 더 명확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변수가 워낙 많아 구상이 쉽지 않습니다.”
취월의 대답에 제갈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중천도 취월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지만 조만간 답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제갈중천은 취월의 능력에 감탄에 또 감탄을 거듭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뛰어난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제갈중천이 내리는 평가로는 취월이 제갈린을 훨씬 넘어섰다. 제갈린을 만나본 지 오래 되었으니 당연했다. 제갈중천은 제갈린이 얼마나 변하고 발전했는지 아직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사람도 참으로 탐난단 말이야.’
제갈중천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갈린의 나이가 차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신랑감을 찾아야 했다. 사실 문제는 제갈린이었다.
제갈린을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제갈중천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제갈세가는 결코 작은 가문이 아니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는 반대도 심하고 반발도 하겠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너도 깨닫게 될 게다.’
제갈중천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취월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불편한 다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다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치유되고 있어다. 그리고 최근에는 단전에 내력까지 모이고 있었다.
‘볼수록 마음에 들어.’
제갈중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만간 제갈린을 팽가로 불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함께 있다 보면 훨씬 정이 깊어지는 법이다. 취월도 예전에 제갈린을 만나본 적이 있고,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니 더 볼 것도 없었다.
“군사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
독고운이 물음에 제갈중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이 너무 깊었다. 제갈중천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의 대국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독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대국은 제갈중천이 이렇게 고민할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울 거라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쨌든 두 군사만 믿겠네. 일단 정천맹이 먼저 정리하는 것이 순서겠지?”
제갈중천과 취월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정천맹을 정리하고 무림을 하나로 만들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 혈마회를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참, 그리고 그 하남표국의 단형우라는 자, 일단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이번에도 둘 모두 찬성했다. 사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하남표국을 얻어 무림맹의 힘을 키우면 정천맹을 상대하기가 훨씬 쉬워질 테니까.
“제가 서찰을 쓰겠습니다. 어차피 손녀도 부르려 했으니 함께 오라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제갈중천의 손녀 제갈린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잘 안느 독고운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남표국과 제갈린까지 무림맹에 합류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렇게 하게.”
독고운이 허락하자 제갈중천이 공손히 허리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갔다. 이런 일은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다. 사실 무림맹에게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혈마자는 대전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얼마 전 분노로 인해 근거지 하나를 완전히 날려 버렸다. 덕분에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혈마자가 있는 곳은 동정호 군산 안에 있는 또 다른 근거지였다.
혈마자는 천하 곳곳에 근거지를 만들어 두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편리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다.
특히 군산에는 세 개나 되는 근거지를 만들었는데, 지금 있는 곳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혈마자가 항상 동정호에서 월영을 만났던 것도 그 근거지가 군산에 있기 때문이었다.
혈마자는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금 혈마자의 뇌리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단형우였다. 그리고 천기자였다.
“천기자……”
혈마자는 마치 신음을 흘리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이름이었다. 그 오랜 시간 자신을 어둠 속에 거가둬 버린 존재이기도 했다.
그 지긋지긋한 천기자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것들이 혈마자를 괴롭힌다.
으드득.
혈마자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천기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분노가 솟구쳤다. 천기자 때문에 그 어둠 속에서 벌벌 떨어야 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그 어둠 속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존재의 소멸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항상 혈마자를 따라다녔다.
“다 부수겠다. 천기자 네놈이 지키려 했던 이 무림 자체를 박살내 버리겠다. 네놈이 몸담았던 이 세상을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
혈마자는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분노와 한이 서려 있었다.
“다 네놈 탓이다. 날 이렇게 미치게 만들었으니까. 큭큭큭큭큭.”
혈마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공을 한 번 휘저었다.
화아악.
허공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기의 장막이 흩어졌다. 그러자 대전 안으로 무영이 서둘러 들어왔다.
무영은 혈마자 앞에 부복했다. 이제 더 이상 장막은 없었다. 무영은 이제야 혈마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혈마자가 믿을 수 잇는 부하 중 둘이 사라졌으니, 그 남은 자리를 누군가 차지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무영이었다.
무영이 부복하자, 혈마자가 무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혈마자의 몸에서 뭉클거리며 일어나는 기세는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런 선명하게 무영을 짓눌렀다.
무영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지만 신음소리 하나 흘리지 않았다.
“혈마대에 대해 보고해라.”
본래 혈마대는 혈영이 관리했다. 하지만 이제 혈영은 죽고 없었기에 무영에게로 넘어갔다.
“조만간 폐관을 깨고 나온다 합니다.”
무영의 대답에 혈마자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슬쩍 물었다.
“만나보니 어떻더냐?”
무영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서울 정도입니다.”
무영이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은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혈마대가 성장했다는 뜻이다. 무영은 혈영 앞에서도 당당했다.
절대 이렇게까지 떨지 않았다. 혈마대를 떠올리기만 하는 것으로 이렇게 떨 정도라면 혈마대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 된다.
“좋군. 기대 이상이야.”
혈마자는 혈마대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들이 나오면 아무리 천기자의 전인이라 하더라도 분명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놈이 혈영과 사영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혈마대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혈마자는 그렇게 믿었다.
“혈영이 하던 일은 모두 파악했나?”
“예. 지금 그 일들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혈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생각보다 유능했다.
“다만 사천 쪽은 아예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인력이 많이 모자랍니다. 그리고 시간도 없습니다.”
사천을 다시 장악하려면 새로운 문파를 선정해 키우거나 회의 무사들을 투입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두 가지 다 어려웠다.
“어쩔 수 없지. 사천은 포기한다. 사천을 격전장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도록.”
혈마자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존명.”
사천을 격전장으로 이용하라는 것은 천마신굘르 끌어들이라는 뜻이다. 천마신교와 무림맹의 싸움을 사천에서 하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천은 굳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독강시 두 구는 어떻게 되었나?”
“아직 비밀 거점에 남아 있습니다. 독영이 몇 가지 보완할 것이 있다고 해 손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혈마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더 질문을 하고 보고를 받았다.
“이제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해야겠군. 우선 천마신교를 한 번 흔들어 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