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63
“존명.”
무영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하자 혈마자가 손을 휘저었다. 혈마자를 중심으로 겹겹이 기의 장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무영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내 대전 안이 온통 기의 장막으로 꽉 차올랐다.
혈마자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하남표국 조설연의 방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했다. 그들의 눈은 제갈린에게로 향해 있었다.
“빙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제갈린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빙궁주는 하남표국이 목표였다.
빙궁주는 죽었지만 지금 빙궁은 그의 제자가 장악했다. 궁주의 목표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이동경로를 보건대 아마 목적지가 이곳인 것 같아요. 궁주의 복수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목표가 우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요.”
제갈린의 말에 검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여기게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놈들이 이렇게 달려드는 건지 모르겠군.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느냐?”
“보무링 두 개나 있으니까요. 천섬도 그렇고 혈영검도 그렇고 세상에 다시없을 보물인 것은 확실하지요.”
제갈린의 대답에 조설연이 입을 열었다.
“천섬과 혈영검이 천 명이나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인가요?”
조설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수백 명이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앗아간 쪽이 하남표국이었으니 사실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니까.”
제갈린은 그렇게 대답하며 조설연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두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북해빙궁이나 그들의 배후에 있을 누군가는 그 가치를 보통보다 훨씬 낮세 두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거고, 이대로 두면 하남표국은 북해빙궁과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제갈린은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ㅁ라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고찰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해결하는 게 먼저다.
“수는 어느 정도인가?”
“육백 명 정도예요.”
“많군.”
검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북해빙궁이 이곳에 끌고 온 무사는 모두 천 명이나 된다. 그중 사백 명이 사라졌으니 죽은 사람도 많고 남은 사람도 많다.
“육백이라……”
육백 명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만일 검왕과 검마가 없었다면 하남표국의 힘만으로는 절대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하남표국에 있는 무사들이 최근 상당히 강해지긴 했지만 그리 큰 변수는 되지 못한다.
검마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슬쩍 고개를 내려 허리춤에 있는 검을 쳐다봤다. 자신도 모르게 혈영검 손잡이를 잡은 검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검집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혈영검이 울어대는 듯했다. 은은한 마기가 손을 타고 전해졌다.
“이번에는 내가 한 번 나서 볼까.”
검마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몰렸다.
“가능하시겠어요?”
제갈린의 물음에 검마가 빙긋 웃었다.
“글쎄. 일단 해봐야 알겠구나.”
검마의 대답에 제갈린은 왠지 불안해졌다. 그 불안감이 느껴졌는지 검왕이 투덜거렸다.
“늘그막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나도 가마.”
검왕의 말에 제갈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놈도 데려가지.”
검왕의 손이 옆에 쥐죽은 듯 앉아 있떤 종칠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헉!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종칠이 기겁을 하며 소리치자 검왕이 씨익 웃었다.
“실전훈련이지 뭐긴 뭐냐. 이런 좋은 기회가 언제 또 올 것 같은가?”
검왕의 말에 종칠이 소태 씹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십대고수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최근 단형우 덕분에 강해졌다지만 상대는 육백이나 되는 북해빙궁의 정예들이다.
“진천뢰가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아니, 분명히 남아 있을 거예요.”
제갈린의 말에 검마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딴 것들로 우리를 막을 수 없을 테니 걱정 말거라.”
검마의 단호한 대답에 제갈린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불안감이 가득한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묵묵히 서 있던 단형우가 문득 손을 들어올렸다. 단형우의 양손이 검마와 검왕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검마와 검왕은 어깨에서부터 밀려들어오는 이질적인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몸을 가득 채우는 기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내 단형우가 손을 떼고 이번에는 종칠의 어깨를 쥐었다. 종칠은 그저 가만히 앉아 단형우가 전해 주는 기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종칠의 어깨에서 손을 뗀 단형우가 제갈린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제갈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단형우가 무엇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최손한의 안전 장치를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안전장치가 이들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제갈린은 그렇게 믿었다.
“그럼 부탁드려요.”
제갈린은 검왕과 검마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빌었다.
검왕과 검마는 그런 제갈린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후우…… 그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음 문제를 얘기하도록 할게요.”
제갈린은 잠시 뜸을 들였다. 살마들의 시선이 다시 제갈린을 향하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림맹에서 저와 단공자님을 불렀어요. 한 번 보자고 하는군요.”
제갈린의 말에 검왕과 검마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흥, 감히 무림맹이 뭔데 오라가라 하는 거지? 그런 요구에는 응할 필요가 없다.”
검왕의 말에 제갈린이 난처하게 웃었다. 사실 그녀도 그저 무림맹의 요구였으면 그다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 일을 강력하게 요청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할아버지인 제갈중천이었다.
“단공자님이야 그러실 피룡가 없지요. 하지만 전 가봐야해요.”
제갈린의 말에 검왕과 검마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난처한 표정을 확인한 두 사람이 나직이 혀를 찼다.
“쯔쯧. 네 할애비냐?”
제갈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는 그녀의 본가다. 아무리 하남표국과 함께하고 있지만 간단히 등 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처음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지금 하남표국에서 제갈린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무영각을 휘어잡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고, 새로 짓는 장원을 설계한 사람도 그녀였다.
“끄응,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검왕이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갈린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방 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의 눈치를 보기만 할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조설연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라버니께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조설연은 여전히 같은 눈과 표정으로 단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형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는 게 좋겠지.”
단형우의 대답에 모두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단형우가 거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면 그뿐이다.
그 누구도 그의 앞을 막지 못할 것이고 그 누구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조설연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모두의 고개가 조설연을 향해 돌아갔다.
“평생 등 돌리고 살 수는 없지 않겠어요? 가족인데.”
조설연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웃음이 웃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가족을 잃은 살마이 바로 그녀다. 누구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웃을 수 있고, 제갈린과 단형우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잃기 전에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법이니까.
“고마워, 연매.”
제갈린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표출할 수가 없었다.
“자자, 그럼 오늘은 이쯤 하고 일어나는 게 어떻습니까?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요.”
형표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싸울 준비도 해야 하고, 길 떠날 준비도 해야 한다.
그렇게 정리된 방에는 조설연과 제갈린만 남았다.
“언제쯤 출발하실 건가요?”
조설연의 물음에 제갈린이 미소 지었다.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으니, 그것만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야.”
방 안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설연이 제갈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오실 거지요?”
제갈린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금방 올 거야.”
제갈린은 그렇게 대답하며 이곳이, 하남표국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족과 같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안에 단형우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비로소 깨달았다. 절대 이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잘 다녀오세요.”
조설연의 인사에 제갈린이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핀 웃음은 한참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검왕과 검마는 종칠을 데리고 하남표국을 나섰다. 큰소리를 쳤으니 해결을 해야 한다.
사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검왕이나 검마라는 명호는 놀이로 딴 게 아니다. 아무나 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라설 수 없다.
“저도 꼭 같이 가야 됩니까? 괜히 방해만 될 텐데……”
종칠의 말에 검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방해 안 된다. 사람이 몇인데/.자그마치 육백 명이다, 육백 명. 네놈은 멀리 떨어져서 싸우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하면 위험한 순간 우리가 도와줄 수야 없겠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 그냥 살아만 있으면 나중에 다 살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싸워 봐라.”
종칠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건 숫제 죽으러 가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아, 진짜 이럴 겁니까?”
“이놈이.”
쾅!
종칠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피할 틈도 없이 맞았다. 검왕과 자신의 실력차가 이 정도로구나 하는 거리감을 확실히 각인한 한방이었다.
“제길!”
종칠은 나직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종칠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검왕과 검마도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검마는 걸음을 옮기며 검왕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도를 힐끗 쳐다봤다. 검마의 눈길을 느꼈는지 검왕이 자신의 도를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녀석이 하도 성화를 해서……”
왠지 변명처럼 느껴지는 검왕의 말에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천섬이었다. 천섬은 검왕의 손녀인 염혜미의 것이다 . 예전에는 그녀가 천섬의 주인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검마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약간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혈영검은 지금 날 주인으로 인정하지. 만일 이것을 저기 저놈이 쓰게 된다면 진정한 위력은커녕 오히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할 거야.”
검마의 말에 어린 염려를 이해한다는 듯 검왕이 미소 지었다.
“그게…… 거 참.”
검왕은 쓴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다.
“이놈이 날 주인으로 인정하더군.”
검왕의 대답에 검마의 눈이 커졌다. 혈영검의 주인 된 입장으로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형우라면 모를까 그 외에 다른 사람이 혈영검이나 천섬의 또 다른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인가?”
검마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나도 손녀딸도 이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되었네.”
검마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이애할 수 없었다.
“설마 천섬은 주인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검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왕이 그 말을 듣고 생각났다는 듯 천섬을 풀었다.
“자네가 한 번 써보게.”
검왕의 말에 검마는 주저하지 않고 천섬을 받아들었다.
챙!
천섬을 뽑은 검마는 은은하게 느껴지는 뇌기에 감탄했다. 천섬의 도신을 따라 뇌기가 빠직대며 요동쳤다.
“정말로 훌륭하군.”
처음 천섬을 봤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염혜미가 열심히 천섬을 휘두른 덕에 도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검왕은, 검마가 그런 판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섬이 그 정도로 깨어난 게 바로 어젯밤이었네.”
“어젯밤?”
검마가 놀란 눈으로 검왕을 쳐다봤다.
“어젯밤에 내가 몇 번 휘둘렀거든. 손녀딸 성화에 못 이겨서……”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려 먼 하늘을 쳐다보며 검왕을 검마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검왕을 쳐다보던 검마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천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왕을 보고 있을 대가 아니라 천섬을 휘둘러봐야 할 때였다.
비록 도(刀)였지만 검왕이나 검마나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풀잎 한 줄기를 휘둘러도 충분히 검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검마는 가벽게 내력을 담아 천섬을 휘둘렀다.
빠지지직!
“크윽!”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검마는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천섬을 휘두르는 순간 손을 타고 뇌기가 침범해 왔다.
손잡이를 쥐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뇌기였다. 비록 억지로 도를 쥐고는 있었지만 이것을 더 휘두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