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66
어느새 맹주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맹주의 집무실 앞에는 두 무사가 번을 서고 있었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무림맹주 파산검 독고운의 모습이 보였다.
독고운은 이들이 무림맹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독고운의 눈이 제갈린을 지나쳐 단형우에 이러렀다. 날카로운 눈빛의 단형우의 온몸을 쓸어갔다.
독고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무림맹 매T가 표국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독고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밖으로 나와 일행을 맞았다. 독고운 뒤에는 제갈중천과 취월이 서 있었다.
“어서들 오게.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렸다네.”
독고운은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형우와 독고운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독고운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세를 전혀 읽을 수가 없으니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었다. 만일 단형우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자신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취월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할 정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맹주님.”
제갈린이 먼저 나서서 공손히 인사를 했다. 독고운은 여전히 그녀에게 있어 윗사람이었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지금은 비록 아니지만 한때 무림맹에 있을 때도 그랬다. 제갈린은 독고운에게 인사를 한 후, 그 뒤에 있는 제갈중천을 쳐다봤다. 제갈린의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피어났다.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제갈중천의 말에 제갈린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눈앞에서 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나니 입이 떨어지지 않고 목이 살짝 메여왔다.
“할아버지도 좋아 보이세요. 다행이네요.”
“허허, 다 이 친구 덕이다.”
제갈중천의 말에 제갈린이 고개를 돌려 취월을 쳐다봤다. 취월은 더 이상 의자에 앉은 상태가 아니었다. 당당하게 두 발로 서 있었다.
게다가 은은한 내공의 기운마저 느껴졌다. 제갈린의 눈이 놀람으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이내 평온한 눈을 되찾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군요.”
“소저 역시 그렇습니다.”
취월이 빙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자자, 일단 안으로 들어오너라. 그리고 자네도 안으로 들게. 참으로 반갑네.”
독고운은 그렇게 은근히 단형우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단형우는 묵묵히 제갈린을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설 뿐이었다. 단형우의 기세가 한층 더 안으로 갈무리 되었다.
독고운은 단형우가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간 순간 깜짝 놀랐다. 단형우가 갑자기 사라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급히 고개를 돌려 단형우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단형우의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맹주의 집무실답게 안에는 제법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탁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만에 그 침묵을 깬 것은 취월이었다. 취월은 자리에서 일어나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런, 손님들이 오셨는데 아직 차도 준비하지 못했군요.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취월의 말과 행동에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그리고 덕분에 정신을 차린 제갈중천이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복잡하게 말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이제 슬슬 무림맹으로 돌아오너라. 네 힘이 필요하다.”
제갈중천의 말에 제갈린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만큼 무림맹이 절박한 상황이라는 뜻이리라.
“제 힘이 뭐 그리 대단한가요. 저기 취월 공만 해도 충분할텐데요.”
제갈중천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적이 너무 강하다.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모으고 또 모아야 한다. 그리고 넌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구나. 넌 충분히 대단하단다.”
제갈린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싫었다. 지금은 하남표국에서 단가를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몸담고 있는 무림맹과 가족들이 있는 세가를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그녀답지 않게 망설였다.
제갈린의 망설임을 본 제갈중천이 말을 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마. 우리는 하남표국의 힘이 필요하다. 그곳에 있는 검왕과 검마의 힘도 필요하고, 하남표국과 엮어 있는 당가와 우문세가의 힘도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사람의 힘도 필요하다.”
제갈중천이 마지막 말을 하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제갈린은 그 순간 등줄기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하남표국은 제 것이 아니니까요.”
제갈린의 단호한 대답에 제갈중천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말을 꺼내면 손녀가 알아서 화답을 해올 줄 알았다. 이렇게 기대를 배신할 줄은 몰랐다.
제갈중천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자, 이버에는 독고운이 직접 나섰다.
“우리는 그저 무림맹의 복수를 하려고 이렇게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림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너도 한 팔을 거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독고운의 말에 이번에는 제갈린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무 거창하게 나오니 제대로 반박할 말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무림을 구하기 위해서라니.
사실 그녀도 무림에 기이한 암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부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제갈린이 선뜻 대답을 못하자 보고 있던 제갈중천이 답답했는지 말을 거들었다.
“무엇을 망설이는 게냐. 비록 지금은 하남표국에 있다 하지만 넌 분명히 제갈세가 사람이고, 무림맹의 일원이다.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제갈중천이 그렇게 나서서 못을 박으니 제갈린은 점점 더 난감해졌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심력이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림을 전복하려는 세력이라면 분명 거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영각의 이목에 걸려드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보고는 받은 적이 없다.
“아직도 망설이는 게냐?”
제갈중천이 결국 화를 내려는 찰나, 취월이 차를 들고 나타났다.
“그렇게 열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차라도 한잔 드시면서 천천히 얘기를 나누시지요.”
취월의 등장으로 대화의 흐름이 잠시 끊겼다. 제갈린은 덕분에 한숨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었다. 결국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역시 전 빠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확실치는 않은 일에 심력과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어요. 전 할 일이 아주 많답니다. 일단 무림맹을 이 지경으로 만든 북해빙궁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검왕과 검마께서 가셨으니까요. 사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제갈린의 말에 독고운과 제갈중천이 취월을 쳐다봤다. 취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분들이 나서셨군요. 하지만 그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진짜 적은 따로 있으니까요.”
“후우, 무림에 기이한 암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실체가 제대로 확인된 이후에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할 수도 없어요.”
제갈린의 말에 취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은 숨죽여 힘을 키워야 할 때입니다. 적의 힘이 너무 강하니까요. 그래서 지금 힘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하남표국도 그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겠지요?”
취월의 말에 제갈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러니까 하남표국은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니까요.”
제갈린의 답은 한결같았다. 제갈중천은 답답했다. 지금 제갈린의 말과 행동을 보면 마치 하남표국 사람 같았다.
제갈세가나 무림맹 사람이라 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실제로 그러했다.
“이제 어리광은 그만 부리도록 해라. 제멋대로 행동할 정도로 어린 나이도 아니지 않느냐. 넌 이대로 이곳에 남아라. 하남표국에는 다시 돌아갈 필요 없다. 조만간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 줄 테니 혼례 준비나 하도록 해라.”
제갈중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잠시 이곳에서 시간을 들이면 제갈린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할아버지!”
제갈린이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절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시끄럽다! 날 할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내 말을 따르도록 해라.”
제갈중천은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손녀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하남표국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 놓아두기에는 제갈린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너무 컸다.
점점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흘러가자 독고운이 나섰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제갈린의 마음만 상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하게. 자네 손녀도 웬만큼 알아들은 것 같으니.”
독고운의 말에 제갈중천이 몇 마디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여기서 더 떠들어봐야 별 의미 없었다. 제갈린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독고운은 그렇게 분위기를 정리한 후, 단형우를 쳐다봤다. 독고운의 눈에 흥미가 가득했다. 최근 가장 허황되면서도 천하를 들끓게 하고 있는 소문의 주인공 아닌가.
“자네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네.”
단형우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단형우의 위치가 제갈린 옆이었기 대문에 얼핏 보면 제갈린의 호위무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 방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입방도 그러했다.
“어떤가, 우리와 함께 무림을 구하는데 한 손 거들지 않겠는가?”
말로는 자신들을 도우라고 했지만 실상 제갈린을 도우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단형우는 독고운의 말에 고개를 슬쩍 돌려 제갈린을 쳐다봤다.
사실 단형우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곳 무림맹에 제갈린을 따라 온 것은 당시 마음이 내켰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제갈린이 도와달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도울 것은 분명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단형우가 제갈린을 가만히 쳐다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제갈린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니, 침묵이라기보다는 긴장감에 훨씬 더 가까웠다.
독고운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독고운뿐 아니라 제갈중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상황은 마치 그들과 제갈린과 단형우를 데려다 놓고 핍박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단형우는 입을 다문 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더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이분은 무림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결국 제갈린은 그렇게 대답했다. 단형우의 힘은 너무 강하다. 자칫 단형우가 이러저리 이용만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제갈린이 옆에서 도와준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고, 힘이 있다고 해서 쉽게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갈린의 말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 의지는 독고운과 제갈중천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하지만 독고운도 제갈중천도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 사람이 대체 뭐기에 네가 그리 나서서 감싸는 것이냐?”
제갈중천의 말에 제갈린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단형우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제갈중천은 그런 제갈린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대체 하남표국에서 그 사람의 위치가 무엇이기에 네가 그리 비호하려 하는 것이냐?”
제갈중천은 그렇게 말하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제갈린에게 물었지만 답은 단형우에게 들을 생각이었다. 그가 보기에 단형우는 단순해 보였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하다보면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을 듯했다.
제갈중천의 질문에도 단형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제갈린을 쳐다봤다. 단형우는 제갈린의 답을 기다렸다.
제갈린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단형우를 쳐다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고 싶은 걸 해라.”
단형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단형우가 언제나 조설연에게 해주던 바로 그 말이었다. 제갈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가라앉은 마음이 점점 기쁨으로 차올랐다. 그녀의 눈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제갈린이 고개를 돌려 제갈중천과 독고운을 번갈아 쳐다봤다.
“전 이곳에 남지 않아요. 도움은 드리겠어요. 하지만 전 하남으로 갈 거예요.”
제갈린의 단호한 말에 제갈중천의 얼굴이 벌ː?달아올랐다. 그리고 독고운의 얼굴도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섣불리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금 상황을 차분히 분석했다.
제갈중천의 낯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독고운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제갈린의 반응을 떠올렸다. 그리고 답은 그녀에게 있지 않고 단형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형우를 끌어들이면 자연스럽게 제갈린을 끌어들일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남표국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독고운은 단형우를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바로 양고의 주인 아닌가.
“자제는 천기자를 아는가?”
독고운의 질문은 조금 갑작스러웠다. 제갈린도 그 질문에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단형우가 천기자의 전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단형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독고운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혹시 십 년 전, 천기자가 자네엑 뭔가를 먹어지 않았나?”
독고운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형우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자 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혹시 그것이 무엇인줄 아는가?”
독고운의 질문에 단형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친구들이 먹은 그것의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단전에 자리를 잡고 주인의 기운을 먹으며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 충분히 겪어 왔으니까. 그것은 그 대가로 주인에게 강력한 기(氣)를 쌓을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은 음양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네. 이름 그대로 음고와 양고로 이루어진 고라네. 음고는 여러 마리가 있지만, 양고는 단 한 마리밖에 없다네.”
독고운의 설명에 제갈린의 안색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총명한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양고는 내가 먹었네. 내 단전에서 지금도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는군.”
독고운의 말에 단형우가 독고운의 단전 어림을 슬쩍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형우에게도 양고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단전에 틀어박혀 있는 음고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단형우가 먹은 음고는 아직도 그의 단전에 머물러 있으면서 단형우의 기운을 토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찌 정파의 기둥이라는 무림맹에서 고를 이용하실 수 있으십니까!”
제갈린이 소리쳤다. 고를 이용해 사람의 이지를 제압하는 것은 사파에서도 잘 하지 않는 짓이다. 그것은 정도도 사도도 아니다. 마도에 가깝다.
제갈린의 외침에도 독고운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독고운뿐 아니라 제갈중천과 취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양고는 그냥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와는 전혀 다르다. 사람의 이지를 제압해 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따르게 하는 것이다.
고에 중독된 사람도 고 때문에 자신이 그를 따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천기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역작이었다.
“저 역시 음고를 복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음양고는 사실 영약에 더 가깝습니다. 제가 이렇게 멀쩡해진 것을 보며 알 수 있지요. 음양고는 이지를 제압하지 않습니다 .그저 의지의 방향을 약간 바꿀 뿐입니다.”
휘월의 말에 제갈린이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그게 더 무서웠다.
“정말로 무서운 분들이군요.”
제갈린이 치를 떨며 말하자 독고운이 고개를 저었다.
“천기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나도 그렇고. 그만큼 우리가 상대하려는 적은 무섭다.”
독고운이나 제갈중천이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제갈린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음고에 당한 당사자가 단형우이니 당연했다. 제갈린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남표국의 일도 단가를 세우는 일도, 또 무림맹과 세가의 일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단형우의 안위만이 걱정될 뿐이었다.
“재미있군.”
단형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정말로 재미있었다. 천기자가 자신과 친구들에게 먹인 그것이 설마 고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쨌든 그것이 없었다면 지옥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극히 낮아졌을 테니 지금에 와서는 별다른 원망도 생기지 않았다. 물론 천기자에 대한 근본적인 원한도 여전했지만.
단형우는 독고운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양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독고운의 전신에서 양고의 기운이 느껴졌다. 양고는 이미 자신의 힘을 독고운의 몸 구석구석에 뿌려내린 상태였다.
순간, 단형우는 자신의 단전 어림이 꿈틀대는 것을 느꼇다. 뭔가 꿀렁거리는 것이 단전에서 요동쳤다. 그것이 음고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음고가 양고의 존재를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단형우는 굳이 음고의 활동을 막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가만히 지켜봤다. 음고로부터 별다른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형우의 단전에서 꿈틀대던 음고는 이내 잠잼해졌다. 하지만 독고운의 몸속에 있는 양고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취월의 단전에 자리 잡은 음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고운과 취월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에 비해 단형우의 표정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의지의 방향을 바꾼다 했던가?”
단형우가 중얼거렸다. 단형우의 눈에서 빛이 일렁였다. 그것을 보는 제갈린의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그에 반해 독고운과 취월의 안색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우리가 묵을 곳으로 안내해라.”
단형우의 말에 제갈중천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감히!”
제갈중천의 입장에선 분노할 만했다. 독고운이나 자신이나 단형우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배도 그렇고 무림에서의 지위도 그러했다. 하지만 제갈중천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독고운 때문이었다.
“알았네. 안내하지.”‘
독고운의 대답에 제갈중천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멍청한 표정으로 입이 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독고운과 단형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제갈중천뿐 아니라 취월 역시 크게 놀랐다. 얼마나 놀랐느냐 하면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랐다. 덕분에 지금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조금 늦어 버렸다.
취월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독고운은 집무실에서 나갔고, 단형우와 제갈린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