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8
“뭐가 말인가?”
“대체 왜 조가장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의마가 없을뿐더라 괜히 무림맹에 경감심만 심어줬습니다.”
그 말에 노인이 잠시 혈영을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림맹 따위가 뭐가 두렵나?”
“무림맹은 두렵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천기자의 안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혈영의 대답에 노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변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릴 듯한 한기가 폐허 곳곳에 스며들었다. 혈영은 노인의 그런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그런 혈영의 모습에 표정을 풀었다. 노인의 표정이 풀어짐과 동시에 주변에 스며들던 한기도 따스하게 변했다.
“천기자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나?”
“목숨을 걸고 경쟁하던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혈영의 대답에 노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허헛, 그렇지. 이 혈마자와 천기자는 뗄 수 없는 관계라네. 물론 지금은 나만 남았지만.”
노인. 혈마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그 천기자의 안배가 처음 시작한 곳은 바로 이 조가장이지. 어떤가, 이제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혈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혈마자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천기자가 필생의 노력을 담아 만들어 낸 무공이 있네. 그리고 그 무고을 익힌 자가 백 명이나 되고. 하지만 난 그보다 더 대단하지. 그것을 뛰어넘는 무공을 만들었거든. 천기자는 나를 견제하느라 온전히 힘을 쏟지 못했던게야. 더구나 그 견제마저 많이 희미해지고 말았네. 천기자가 어떤 무공을 만들었는지 내가 알아냈거든.”
“서, 설마 그럼……”
“말했지 않나. 내가 만든 무공이 훨씬 뛰어나다고.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아이들이 있지 않나. 백 명이나.”
혈영은 혈마자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비로소 혈마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혈마자는 천기자의 계획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부숴 버릴 작정이었다. 무림을 얻는 건 그 와중에 저절로 얻어지는 부산물에 불과했다.
“자,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겠나?”
혈마자가 웃으며 물었다. 혈영은 더 이상 혈마자의 웃음이 그냥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두려웠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폐허를 감쌌다. 그 바람은 차가웠다. 혈마자의 웃음소리만큼.
“오, 오라버니……”
조설연이 눈물을 그렁거리며 단형우를 안고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났다는 안도감과 아끼던 사람들이 죽음, 그리고 도망가면서 들은 소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휘저었따.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조설연이 우는 동안 단형우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고마워요.”
조설연이 단형우에게 슬며시 떨어지며 말했다. 단형우는 그런 조설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조설연의 눈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눈물……”
그것은 눈물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아온 것이었다. 지옥에 있을 때는 눈물을 흘릴 틈도 없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싸움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럴 여유가 생겼을 때는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조설연은 남아 있는 눈물을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이제…… 이제 어쩌죠? 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조설연이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사실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묻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옆에 단형우가 있따는 사실만으로 큰 의지가 되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뭐든지.”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이 눈을 크게 뜨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설마 정말로 대답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조설연은 그제야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요, 하고 싶은 걸 해야죠.”
조설연은 대답을 하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그제야 조금씩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합류였다. 원래 조가장을 나온 목적이 그거였으니 표행만은 끝까지 완수해야 했다.
표사들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끝내리라 마음먹었다.
그 다음 조가장에 돌아가 소문의 진상을 확인할 것이다. 조설연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조가장이 건재하고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물론 아닌 쪽으로 저울추가 크게 기울어 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그 후에 다시 계획할 것이다.
“지금 하고 싶은 건 뭐지?”
조설연의 머릿속이 대충 정리되었을 때, 때를 맞춰 단형우가 물었다. 조설연은 옆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누워 있는 사마철을 내려다봤다.
그 옆에는 머리만 남은 조인도 함께 있었다. 흘리지 않겠다고 맹새한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두 분을……”
조설연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단형우는 그런 조설연을 보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한번 휘둘렀다.
콰콰콰!
단형우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ㅂ닥이 패이며 아으로 나아갔다. 마치 땅 속을 용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땅속이 용은 멀찍이 떨어진 바위 아래로 가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콰아아아!
마치 승천하는 용 같았다. 조설연은 그 광경을 멍하게 쳐다봤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이었다.
단형우는 사마철의 시체와 조인의 머릴ㄹ 들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바위 아래 어느새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둘을 그곳에 넣은 단형우가 가볍게 손짓하자 주변의 흔들이 그 위를 덮었다. 순식간에 무덤이 만들어졌다.
조설연이 무덤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나중에는 정말로 근사한 곳에서 쉬게 해 드릴게요, 정말로……”
조설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단형우를 쳐다봤다.
“저도 표행에 합류할 거예요.”
조설연의 말에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왠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그동안 단형우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 단형우가 이렇게 강한 줄도 몰랐고, 이렇게 자신을 구해 줄 줄도 몰랐다.
사마철이 비록 절세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허창에서는 적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사마철이 제대로 상대하지도 못할 정도의 고수들을 스물이나 한꺼번에 처리했으이 얼마나 강하다는 뜻인가.
‘무림맹 장로들쯤 되는 건가?’
아직 경험이 없고 무공이 강하지도 않아 견문이 일천한 조설연으로서는 단형우가 과연 얼마나 강한 것인지 측정할 수 없었다. 그저 강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조설연이 그렇게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단형우가 손을 잡았다.
“지금 간다.”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이 당황했다. 가면 가지 갑자기 왜 손을 잡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단형우만 이렇게 따로 표행에서 떨어져 나온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과 사마철이 아무리 열심히 경공을 펼치며 도망쳤다고 해도 표행을 따라잡으면 앞으로도 꽤 가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적들을 따돌리기 위해 이리저리 어지럽게 움직였으니 더더둑 거리가 있을 터였다.
조설연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야 생각해냈는지 스스로 자책하며 단형우에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단형우가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흐으윽!”
조설연은 갑자기 얼굴을 강하게 압박하는 바람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바람을 피해 숨을 쉬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숨이 막힌 순간 다시 숨쉬기가 편해졌다.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의 압력도 사라졌다.
조설연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어머!”
주변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방금 전에 자신이 있던 곳은 거의 허허벌판이었다. 덕분에 그들에게 따라잡혀 죽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지금 있는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이었다. 나무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아, 아가씨?”
조설연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형표가 서 있었다.
“형 표사 아저씨!”
형표를 보며 반갑게 소리친 조설연이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되어 주변을 둘러봤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건장한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의 옷은 하남표국 쟁자수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 역시 조설연에게 너무도 익숙했다.
“서, 설마……!”
조설연이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단형우를 쳐다봤다.
“합류했다.”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결코 가까운 곳은 아닐 것이다.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다. 그것도 자신을 데리고.
조설연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형우를 바라봤다.
단형우의 도착과 거의 동시에 표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단형우가 조설연을 데리고 오는데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에 그동안 주변 정리는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시체를 태우지 않고 땅에 묻을 수밖에 없긴 했지만.
“아가씨,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형표는 조설연 옆에서 걸었다. 당연히 단형우도 그 옆에 있었다.
조설연은 두 사람을 힐끗 본 후 담담하게 얘기를 풀어나갔다. 어차피 숨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단형우에게도 꼭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묵묵히 조설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형표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무래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거예요.”
“아, 아가씨가 뭔가를 숨겼다는 의미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전 장주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버님이요?”
“그 한순간에 그런 판단을 내리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마 아가씨께선 허창을 벗어나지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무림맹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죠.”
듣고 보니 그랬다. 조설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생각보다 복작한 일이 얽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지금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당가로부터 의뢰비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표행의 의뢰비는 꽤 되니까요.”
형표가 빙긋 웃었다. 조설연은 그 모습을 보며 형표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형 표사님은 벌써 그런 생각까지 하고 계셨군요. 그에 비해 저는……”
“아가씨는 그냥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그 자체로 힘이 되니까요. 그렇지 않은가?”
형표가 단형우를 보며 말하자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걸 해라.”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은 다시 한 번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두 사람이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니까.
관도를 약간 벗어난 곳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 주변에는 청의를 입은 사내들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하게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특별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청의 사나댈은 그 수가 서른이나 되었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덜컹.
마차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한 여인이 사뿐히 내려섰다.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는데도 주변에 서 있는 사내들의 눈에서는 일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마차에서 내려서자 즉시 그 옆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은밀하고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정말로 실패했다고?”
“그렇습니다.”
여인은 믿을 수 없었다. 상대의 전력을 충분히 예측했다. 자신이 계산한 바에 따르면 흑사단(黑蛇團) 전원이 나서면 전혀 피해 없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실패한 것이다.
“믿을 수가 없는 걸? 정말이야?”
여인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전멸입니다.”
“전멸? 하나도 살아남지 못?다고? 흑사단이? 단주는?”
“단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분해. 정말로 자신 있었는데. 그럼 그쪽의 현재 상태는? 남은 무사가 몇이나 돼?”
“변화 없습니다.”
“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흑사단이 전멸하는 바람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쪽에 대단한 고수가 섞여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인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사(影蛇) 생각은 어때? 청사단(靑蛇團) 정도면 성공할 수 있을까?”
“당주님. 지금은 서두르실 때가 아닙니다. 적의 정확한 정보를 모으고 움직이다가는 피해만 가중될 뿐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사의 말에 당주라 불린 여인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나 분해서 참을 수 없었다.
“백사단(白蛇團)도 안 될까?”
“백사단은 사령당(蛇靈黨)의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역시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하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여인, 사령당주 우문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흑사단을 모두 잃은 것만 해도 타격이 상당했다.
흑사단 오십 무사는 비록 청사단이나 백사단보다 약하기는 했지만 대외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만은 최고였다. 그런 흑사단이 전멸했으니 당분간 사령당은 손발이 마지된 거나 다름없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일단 세가로 돌아가 계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돌아가서 제가 세가의 정보를 좀 들춰보겠습니다.”
우문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영사를 쳐다봤다.
“내가 가서 알아볼게.”
우문혜의 갑작스러운 말에 영사가 크게 당황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직접 알아보겠다고. 그쪽에 누가 있는지.”
영사는 잠시 우문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내 그 말뜻을 깨닫고 깜짝 놀라 외쳤다.
“아가씨! 안 됩니다!”
너무 놀라 당주님이라는 말보다 아가씨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우문혜는 그런 영사의 반응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