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19
“괜찮아. 나도 그리 약하지 않아. 만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 한 몸 빼내는 것 정도는 자신 있어.”
우문혜가 약하지 않다는 것은 영사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강호에는 우문혜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처리할 수 있는 고수들도 있었다. 만일 그들과 함께 있는 고수가 그런 사람이라면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영사는 우문혜를 쳐다f다. 우문혜는 아름다운 눈을 일렁이며 영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아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로서는 도저히 그녀의 부탁이나 명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대신 금사(金蛇)와 은사(銀蛇)를 데려가셔야 합니다.”
“금사랑 은사?”
우문혜가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걔들 보다 영사가 훨씬 강하지 않아?”
“물론 저도 따라갑니다. 전 당주님의 그림자니까요.”
영사의 대답에 우문혜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영사는 우문혜의 환한 웃음을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미소를 보면 어느 사내라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얼어붙은 가슴을 가진 사내라 하더라도.
조가장에서 몸을 피한 팽철영 일행은 조설연이나 다른 조가장, 혹은 하남표국 사람들과 달리 별다른 추적도 받지 않고 무사히 무림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림맹에 도착한 그들은 즉시 맹주에게 조가장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조가장이 멸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맹에서는 즉시 자체적인 조사단을 편성해서 조가장이 있는 허창으로 파견했다.
팽철영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남궁진이 팽철영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갔어야 했어. 그녀를 끝까지 따라 갔어야 했어. 대체 내가 왜……”
팽철영의 중얼거림에 남궁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젠 다 지난 일일세. 흉수가 밝혀지면 복수나 제대로 해 주게.”
남궁진의 말에 팽철영이 벌떡 일어섰다.
“그래야지,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겠지.”
팽철영이 밖으로 나가자 남궁진이 그 뒷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대체 진담인지 아닌지 구분을 할 수가 없군. 몇 번 보지도 않은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리는 없고……”
남궁진은 고개를 저었다. 팽철영은 분명히 함께 따라갈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알 수가 없군.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행동이라기엔 조금 지나친 면이 있는데…… 그럴 이유도 없고.”
남궁진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방에서 나갔다. 어쨌든 자신도 충분히 준비를 해야 했다.
흉수가 밝혀지면 남궁진 역시 힘을 써야 했다. 이유나 원인이 어찌 되었건, 그들은 조가장주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까.
허창에서 시작한 표행이 어느새 사천으로 들어섰다.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모두 노련한 덕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형표는 조설연이 나타난 이후로 좀 더 단형우와 가까워졌다. 대하는 게 편해졌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조설연은 가족들의 죽음을 한시라도 빨리 잊으려 노력했다.
섬서에서 사천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편한 반면 지루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당연했다.
평소 표행을 할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이번에는 초반에 워낙 큰 일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평안한 길을 가니 당연히 대화가 많아졌고, 단형우도 처음 조설연을 만났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그리 강한 거죠? 저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조설연은 계속해서 이런 식의 질문을 했다. 단형우가 그렇게 강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단형우는 그런 조설연이 질문에 꽤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목숨을 걸고 오랫동안 싸우다 보면 자연히 이렇게 된다.”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실전보다 좋은 수련은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 실전이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거라면 그 효과도 탁월할 수밖에 없다.
“대체 누구랑 그렇게 싸우신 거예요?”
“마물.”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요괴 말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조설연이 놀란 눈을 했다. 요괴와 싸웠다니. 그럼 신선이 되는 수련이라도 했단 말인가.
“단 오라버니는 형산에서 살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글쎄.”
조설연은 단형우의 대답에 살짝 기가 막히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력 하나만큼은 꽤 자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다.
“분명히 그랬던 것 같은데……”
단형우가 직접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거의 수긍하는 듯 대답했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점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형산에서 살아왔음이 분명했다.
조설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산에 요괴가 나타난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형우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럼…… 그 얘기를 해 주세요. 요괴랑 싸웠던 얘기요.”
조설연의 질문에 단형우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물론 아무도 그 표정 변화를 알아볼 수 없었다. 조설연을 제외하고는.
“왜요? 기분이 안 좋으셔……, 아!”
조설연은 뭔가가 기억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살짝 가렸다.
단형우는 아흔아홉 명의 친구가 있었다고 했고, 그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 했다. 아마 요괴들에 의한 짓일 것이다.
그 일을 물었으니 당연히 기분이 안 좋으리라 생각한 조설연이 급히 입을 다문 것이다.
조설연은 단형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심 요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아쉬웠다.
잠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단형우를 힐끗 쳐다보던 조설연은 문득 요괴가 나타나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를 생각해 봤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 안에서는 그런 곳이 없었다.
“그럼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에서 살다 오신 거예요?”
조설연의 질문에 단형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지옥.”
단형우의 대답을 듣는 순간 한기가 흘렀다. 조설연은 갑자기 든 오한에 살짝 몸을 떨었다. 조설연의 눈이 조심스럽게 단형우에게로 향했다.
단형우의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가 갑자기 허무지기로 바뀌었다. 그곳을 떠올리니 천기자가 생각났고, 천기자가 죽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천기자는 정말로 죽었나?”
“그렇게 알려져 있어요, 십 년 전에 죽었다고.”
단형우의 허무지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조금씩 무기력해졌다.
“사실 난 아직도 믿지 않는다네.”
형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사방에 퍼져 있던 허무지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먹던 무기력증이 깨끗이 사라졌다.
민감한 사람들은 이 변화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어쨌든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믿지 않는다고?”
“사실 천기자가 죽었다는 소문 자체를 난 믿지 않는다네. 그 소문에는 뭔가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단형우의 눈이 빛났다. 형표는 기대감으로 빛나는 단형우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ㅐ그런지 자세히 설명하자면 기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그 소문은 뭔가 의도적인 것이 엿보인다네.”
“의도적인 것이요?”
조설연이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어느새 형표의 말에 조설연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쟁자수들까지 빠져들었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천기자가 죽었다고 소리치고 다니는 듯하다고 할까.”
“그럼 천기자가 아직 살아 있따는 건가?”
단형우의 말투에는 약간의 기대감마저 실려 있었다. 평소 말할 때 감정을 거의 싣지 않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단형우는 약간 흥분까지 한 상태였다.
“대체 누가 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거죠?”
조설연의 질문까지 이어졌다. 형표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후, 조설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게 일단 가장 큰 의혹입니다. 소문의 근원이 확실치 않습니다. 즉, 확실치 않은 소문이었다는 뜻이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마치 확인된 듯 믿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상하네요.”
“어쩌면 천기자 스스로가 퍼뜨린 소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장난으로 퍼뜨린 소문일 수도 있겠지요. 사실 전 천기자가 했다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었다고 소문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십 년 전이라고 했나?”
단형우의 질문에 형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이라……”
단형우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서 시간의 유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지옥에 있던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십 년 전이 과연 언제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설마 자신과 친구들이 잡혀왔던 시기는 아닐 거라 믿었다.
그때라고 하기엔 자신이 지옥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얼마나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형우가 생각에 잠겨들자 형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형표의 뒷얘기가 궁금했지만 그들 역시 단형우의 눈치를 보느라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형우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당호관이 멈추며 손을 들어올렸다. 당호관의 손짓을 본 형표는 급히 표행을 멈추고 당호관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
“저길 좀 보게.”
당호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마차 한 대가 있었다. 상당히 화려했는데 마차 옆에 두 명의 사내가 서서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형표는 사내들의 눈빛에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마차와 그 주변을 살폈다. 마차의 바퀴들이 모조리 부서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직 마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 모양이군요.”
형표의 말에 당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호관을 비롯한 당가 무사들의 눈에는 강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차 옆을 지키고 있는 두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형표는 일단 자신이 가서 말을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부서진 마차가 길을 막고 있었으니 길을 지나가려면 마차를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마차의 위치는 참으로 교묘해서 그것을 치우지 않는다면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형표가 막 나서려고 할 때, 마차 문이 덜컹 열리더니 누군가 내려섰다.
흑의를 입고 있는 사내였는데, 체격도 단단했고, 기세도 잘 갈무리 되어 있었다. 사내는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형표와 당호관을 향해 똑바로 걸아왔다. 그리고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쳐드리게 되었군요.
사내의 정중한 말에 형표가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마차가 부서진 모양이군요.”
“예, 갑자기 바퀴가 내려앉았습니다. 혹시 마차를 고치도록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내의 말에 형표가 고개를 돌려 쟁자수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차를 몰던 쟁자수가 눈치 빠르게 달려왔다.
“자네가 한 번 보게. 고칠 수 있는지.”
형표의 말에 쟁자수가 급히 달려가 마차를 살폈다. 쟁자수가 이러저리 살펴보고 있는 동안 그 옆에 서 있던 두 사내는 쟁자수에게 눈을 떼지 않고 감시했다.
“성도(成都)까지 가야 하는데, 사천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되어서 참으로 난감하던 차였는데 다행입니다.”
어느새 쟁자수가 마차를 살피고 다시 형표에게 달려왔다.
“고치는 건 불가능합니다요, 바퀴가 완전히 부서지고 축이 부러졌습니다요.”
쟁자수의 말에 형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쟁자수는 급히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형표는 어떻게 하募윰캑?듯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나감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참 난처하게 되었군요.”
“일단 마차를 치워야겠습니다.”
형표의 말에 사내가 급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일단 아가씩께 말슴 드려야겠습니다.”
사내는 형표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차로 달려갔다. 가볍게 몸을 날리는 모습이 상당히 매끄러웠다. 형표와 당호관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사내가 마차 문을 열고 안에다 뭔가를 얘기하자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내려섰다.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여인이 내려선 순간 좌중에 적막만 감돌았다.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저 옆모습만을 봤을 뿐인데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사내들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대부분은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꿀꺽.”
누군가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을 신호로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렀다.
“하아……”
한숨과도 비슷한 탄성을 배경으로 여인이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섰고, 미소를 지은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사내들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심지어는 나이가 상당한 당호관조차도 놀라 눈을 부릅뜰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놀라고 있는 사이 마차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다시 형표 앞으로 달려왔다.
“죄송하지만 길이 같은 곳까지 만이라도 함께 가면 안되겠습니까?”
사내의 말에 형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흠칫 놀라 당호관을 쳐다봤다. 당호관은 형표의 눈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래선 안 되지만 당호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심 저 정도 여인이라면 함께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얻은 사내가 포권을 취한 후 여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여인을 조심스럽게 모시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여인은 당호관과 형표 앞에 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우문혜에요.”
청아한 목소리가 사내들의 귀를 뒤흔들었다. 몇몇 사내들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형표입니다.”
형표가 서둘러 인사했다.
우문혜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남표국의 표사 분들이시군요.”
“아, 예. 그, 그렇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문혜가 그렇게 인사하자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