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24
은잠술을 영사의 특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표행은 성도로 들어섰다.
당가는 성도 외곽에 위치했기 때문에 성도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형표를 비롯한 하남표국 사람들은 드디어 표행이 끝났다고 생각해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조설연은 그렇지 않았다. 조설연은 일단 성도로 들어섰으니 우문혜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우문혜와 함께 다니는 것이 껄끄러웠다.
조설연은 조심스럽게 우문혜에게 다가갔다.
“저……”
“무슨 일이죠?”
“가실 곳이 있다 하셨죠?”
“그랬죠.”
조설연은 너무도 당당한 우문혜의 대답에 일순 할 말을 잇지 못했다. 우문혜는 그런 조설연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갈 때가 되면 알아서 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문혜의 말에 조설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단형우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형표가 있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단형우는 그런 조설연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안 가나?”
단형우의 말에 우문혜가 화려하게 웃으며 마차 위에서 허리를 숙여 얼굴을 단형우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갔으면 좋겠어요?”
우문혜의 말에는 유혹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단형우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가라.”
단형우의 단순 명료한 대답에 우문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정말 목석같은 사람이로군요. 절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안 생겨요?”
우문혜는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다. 정말로 단형우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이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귀찮곤.”
단형우의 말에 우문혜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무례하군요.”
우문혜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표정을 푼 후, 다시 단형우를 쳐다봤다. 어떻게든 저 사내를 가지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저렇게 강하고 오만한 사내가 어울린다. 자신의 호위로 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봐요, 하남표국에서 얼마나 받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열 배를 주도록 하죠. 어때요? 나와 함께 갈래요?”
우문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영사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우문혜가 이런 행동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강하고 멋진 사내를 보더라도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런 변화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 아가씨. 함부로 사람을 들이시면……”
영사의 말에도 우문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형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열 배가 모자라면 스무 배를 주죠. 어때요?”
우문혜의 말에 단형우가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우문혜는 가능성을 느끼고 눈을 빛냈다. 하지만 단형우는 다시 앞을 쳐다보며 걷기만 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우문혜는 답답했다. 가타부타 말을 안 하니 속에 뭔가가 꽉 막힌 것 같았다.
“이봐요, 아저씨. 대답 안 해 주실 건가요?”
우문혜의 재촉에 단형우가 간단히 대답했다.
“싫다.”
단형우의 대답에 우문혜는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조건을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부탁하는 말을.
“왜 싫은 거죠? 제가 싫은가요? 아니면 저 꼬마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요?”
우문혜는 화가 났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화가 날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평소의 우문혜를 생각한다면 결코 이런 일로 화를 낼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화가 났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나도 절대 포기 못해요.”
우문혜가 환하게 웃으면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웃음만으로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겠지만 단형우는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우문혜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저들은 갈 생각을 안 하는군요.”
조설연이 말에 형표가 고개를 돌려 우문혜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우문혜는 계속해서 단형우에게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대충 보니 상황을 알 수도 있을 듯했다.
“아무래도 저 친구가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예?”
조설연이 깜짝 놀라 형표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형표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엿다. 조설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니에요.”
형표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이제 거의 다 왔군요. 저기 당가가 보입니다.”
형표의 말에 조설연이 고개를 들고 앞을 쳐다봤다. 멀리 커다란 전각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전각들을 크게 감싸듯 높은 담이 둘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설연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당가에 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사천에 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당연했다.
“저기가 바로 당가로군요.”
조설연의 목소리가 잠시 아련해졌다. 당가의 모습을 보니 조가장이 떠오른 것이다. 당가의 규모가 조가장보다 훨씬 크긴 했지만 조가장 역시 저렇게 커다란 전각이 여러 개 있었다. 조설연이 집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형표는 그런 조설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왠지 예감이 좋군요.”
형표의 말에 담긴 마음이 조설연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조설연은 두 손을 올려 뛰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네. 고마워요, 형 표사님.”
조설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그 누구의 것보다 아름다웠다.
표행이 당가의 문턱을 넘어섰다. 쟁자수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당가 앞마당에 마차를 늘어놓았다. 형표는 미리 당호관과 얘기를 해서 마차까지 모두 당가에 넘기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최대한 짐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정말로 수고 많았네.”
당호관의 말에 형표가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원한다면 당가에서 며칠 쉬었다 가도 좋네.”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도 있어서……”
“아, 그렇겠군. 어쨌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든 언제라도 날 찾아오게.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네.”
당호관의 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형표는 연방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내를 짚어보면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당호관을 비롯한 당가 무사들은 하남표국 쟁자수인 단형우 덕분에 두 번이나 목숨을 구했다. 몇 번이라도 도움을 줘야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당호관은 은연중엔 단형우와 연을 이어두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렇게 연을 이어두고 하남표국에 도움을 주다보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형표는 하남표국의 쟁자수들을 모두 이끌고 당가에서 나왔다.
“휴우, 이제 정말로 끝났군요. 오늘은 근처에서 푹 쉬도록 하는 게 좋母윱求?”
형표의 말에 조설연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성도는 상당히 큰 도시다. 그들이 묵을 객잔 정도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을 따라가고 있는 우문혜 일행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일행에 합류한 것이 아니라 약간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형표는 한숨을 쉬며 객잔으로 향했다.
형표는 객잔을 잡은 후에 조설연을 찾아갔다. 조설연은 여자인 관계로 홀로 방을 써야 했다.
“아가씨.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형표의 부름에 조설연이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
조설연은 형표 옆에 서 있는 단형우를 보고 잠시 놀랐다. 이내 빙긋 웃으며 둘을 방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시죠?”
조설연의 말에 형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친구와 잠시 가 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출발을 조금 늦췄으면 합니다.”
형표의 말에 조설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어디를 가려고 그러시죠?”
“다녀와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요.”
형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설연은 상당히 궁금했지만 일단 두 사람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단형우는 조설연의 방을 나서기 전에 손을 들어 조설연의 머리를 짚었다. 조설연이 깜짝 놀랐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뭔가 화끈한 기운이 조설연의 정수리로 파고들어 온몸을 씻어냈다. 조설연은 마치 혼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아득함이 느껴졌다. 이내 단형우의 손이 떨어졌고, 조설연은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녀오지.”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형표는 단형우를 데리고 객잔에서 나와 어딘가로 열심히 걸어갔다. 우문혜 일행이 멀찍이서 뒤를 따라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형표는 그들이 따라오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단형우는 형표를 따라가며 문득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궁금함’이라는 생소한 감정에 잠시 놀랐다. 입가에 아주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어디로 가는 거지?”
단형우의 물음에 형표가 깜짝 놀라 단형우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단형우와 함께 하면서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하하하. 자네가 궁금한 게 다 있었군. 우리가 가는 곳은 악가장이라는 곳일세.”
“악가장?”
“악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집이지. 우리 아가씨가 살던 것이 조가장이라는 건 알고 있지?”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이 이어지자 형표가 왜 악가장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예전에 얘기했지 않은가. 이번 표행에 좋은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지. 자네 친구 이름이 악세기라고 했던가?”
형표는 단형우의 고개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악씨 성을 쓰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자네가 말한 조건에 부합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네. 사천에 있는 악가장도 그중 하나지. 그나저나 그리 가깝지 않으니 경공을 써서 가는 게 좋겠군.”
형표는 단형우의 동의를 구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비록 표사에 불과했지만 형표의 경공도 꽤 쓸 만했다. 형표가 몸을 달리자 단형우도 그 뒤를 따랐다.
단형우는 형표 뒤에 바짝 붙어서 형표 등에 갖다 댔다. 형표는 순간 등에서부터 뭔가 화끈한 것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다.
“으헉!”
처음에는 깜짝 놀라 내력이 뒤엉키고 발이 꼬였지만 경험 많은 표사답게 안정을 찾았고, 그 이후부터는 훨씬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형표와 단형우의 몸이 마치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헉! 저게 뭐야!”
우문혜는 깜짝 놀랐다. 처음 두 사람이 경공을 전개할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 정도야 충분히 쫓아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두 사람의 속도가 빨라졌다.
우문혜는 속도를 높였다. 그리 버겁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내력을 소모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더욱 놀라웠다. 단형우와 형표가 잠시 주춤하는 가 싶더니 갑자기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진 것이다.
“헉!”
우문혜는 있는 힘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내력 소모가 급격히 늘어나니 점점 힘들어졌다.
내력이 점점 고갈되어 갔다. 눈앞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단형우와 형표의 신형이 달리는 것을 멈췄다.
“헉헉……”
거친 숨이 새어나왔다. 이젠 기척을 감추고 자시고 할 기운도 없었다. 옆을 돌아보니 영사도 힘든 표정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비록 영상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우문혜와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문혜 역시 강자인 것이다.
우문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혀우와 형표를 쳐다봤다. 단형우가 형표에게 진기를 나눠 주면서 몸속의 기운을 조종했다는 사실을 절대 알 수 없었다.
“이곳이 바로 악가장일세. 아주 오래 전에 표행을 온 적이 있어서 알고 있지.”
단형우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문을 쳐다봤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건하게 닫혀 있는 문을 마치 그냥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쾅! 쾅! 쾅!
형표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세가의 정문은 무사들이 지키게 마련인데 악가장은 그렇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형표는 일단 문을 두드려 사람을 불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문이 얼렸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형표는 후자에 무게를 실었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눈이 부리부리한 무사였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체격이 당당했고, 등에는 커다란 도를 메고 있었다. 무사는 잠시 형표와 단형우를 살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악가장은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소이다. 그러니 별일 아니라면 돌아가시오.”
형표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무사를 다급히 붙잡았다. 무사가 의아한 눈으로 형표를 쳐다보자, 형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악세기란 사람을 아시오?”
형표의 질문에 무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눈에서 줄기줄기 광망이 쏟아져 나왔다.
무사의 기세는 정말로 대단해서 순식간에 형표의 온몸을 옭아맸다. 형표의 입에서 다급하고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윽!”
“뭐 하는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