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25
무사의 외침에 단형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형표를 옭아맸던 기운들이 가닥가득 끊어져 버렸다. 형표는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어났다.
“허억! 허억!”
무사는 살짝 놀란 눈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등의 도를 슬쩍 풀어 손에 쥔 후 단형우를 노려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단숨에 베어 버리겠다는 의지를 가득 안고 도를 치켜 올렸다.
“자, 잠깐!”
형표가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사내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도를 끝까지 들어올렸다.
“이 사람은 친구요!”
형표가 소리쳤다. 형표는 사내의 반응에 악세기란 자가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소리쳤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뭐라고? 친구?”
사내가 도를 슬쩍 내렸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단형우와 형표를 쳐다봤다. 형표는 그제야 앞으로 나서서 사내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난 안내를 해 주기 위해 온 형표라고 하오.”
“악웅이오.”
사내도 대충 포권을 취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형표와 단형우를 쳐다봤다.
형표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이제 자네 차례일세. 이서 말을 해 보게.”
단형우는 형표의 말에 잠시 고민을 했다.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의 가족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전혀 생각해 놓은 것이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그들의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단형우가 여전히 말없이 서 있자 형표는 애가 탔다.
“뭐 하나? 그렇게 찾고 싶어 했으면서.”
형표의 재촉에 단형우가 악웅을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단형우.”
단형우의 말에 악웅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형표가 화들짝 놀라 부연 설명을 했다.
“이 친구의 이름입니다. 산에서 오래 생활한 탓에 아직 세속의 예의에 밝지 않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형표의 설명에 악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세기의 친구라고?”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깊숙한 곳에서 악세기에 대한 것을 조금씩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의 외모는 악세기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악세기 역시 저렇게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당당했다.
악웅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우리 세가가 사라진 지 벌써 십 년이 흘렀네. 혹시 그 사이에 세기를 만난 겐가?”
십 년이라는 말에 단형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십 년?’
절대 아니었다. 자신이 그 지옥에서 견딘 시간은 고작 십 년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열 배가 넘는다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 괴롭고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인 나날이 계속되어 착각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십 년은 너무 짧았다.
“아닌가?”
악웅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단형우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세기만큼이나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맞소.”‘
단형우의 대답에 형표가 크게 놀랐다. 단형우의 입에서 이렇게 반 공대라도 나온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당신은……”
“난 세기의 숙부일세. 그런데 정말로 우리 세기 친구가 맞는가?”
악웅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단형우는 그런 악웅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친구 악세기는…… 죽었소.”
단형우의 말에 악웅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눈에 분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이……! 이런 개 같은 놈!”
악웅의 도가 결국 바람을 갈랐다.
허벅지만큼이나 넓은 도가 정확히 단형우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쩡!
악웅의 도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단형우의 정수리에 꽂혔다.
악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형표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악웅과 형표의 눈이 단형우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서 있는 우문혜가 서 있었다.
우문혜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단형우를 가리켰다.
“대, 대체 무슨 짓을……”
우문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눈이 붉게 물들어갔다.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익!”
우문혜가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악웅 앞으로 달려든 우문혜의 섬섬옥수가 악웅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악웅은 그 손을 보면서도 미처 그것을 피해낼 수가 없었다.
턱!
우문혜는 깜짝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쳐다봤다. 투박하긴 했지만 매끈한 손이었다.
우문혜의 시선이 팔을 타고 손목이 주인을 확인했다.
“어, 어떻게……”
단형우의 무심한 눈이 우문혜에게 향했다. 단형우는 우문혜의 손을 악웅의 가슴에서 치웠다. 그리고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슬쩍 닦아냈다.
우문혜는 여전히 단형우의 정수리에 꽂혀 있는 도를 멍하니 쳐다봤다. 단형우는 멀쩡했다.
눈물이 사라져 맑아진 시야로 확인하니 도는 정확히 정수리 한 치 위에 멈춰 있었다.
단형우는 다시 악웅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 친구 악세기는…… 죽었소.”
우문혜는 왠지 단형우의 말에 서글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마신 2권
과거의 편린
악웅은 안절부절 못했다. 가주인 악비환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고스란히 악웅에게 향했다.
“그 급한 성질을 고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가!”
악비환의 외침에 악웅이 찔끔 놀라 살짝 목을 움츠렸다. 원래 악비화은 이렇게 말로 일을 해결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일단 먼저 손부터 나가고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있어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악웅은 새삼 미안한 감정과 고마운 감정을 섞어서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형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 우리 세기의 친구라고?”
“그렇습니다.”
단형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그 옆에 있는 형표는 정말로 놀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단형우가 존댓말을 쓸 줄 모른다고 생각햇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서운함이 밀려왔다.
“세기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악비환의 물음은 당연했다. 악세기가 사라진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처음 삼 년간은 악세기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악세기를 포기했을 무렵 악가장에 기연이 찾아왔다.
천기자의 무공을 얻은 것이다.
패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름조차 짓지 않은 도법이었는데 악비환은 그 도법의 이름을 파월도법(破月刀法)이라 짓고 악가장 무사들에게 전반부 세 초식을 전수했다.
악가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강해졌고, 악비환도 아들 잃은 슬픔을, 무공수련을 통해 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노력해도 악세기를 잊을 수 없었다. 워낙 뛰어났던 아인지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데 너무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미련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이제 악세기를 잃은 슬픔에서 세가가 막 벗어나려 하고 있는 찰나에 단형우가 온 것이다. 그것도 악세기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들고.
“동료입니다.”
형표의 대답에 악비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동료라……”
악비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만일 세기가 살아 있따면 스물이 되었겠군. 자네도 같은가?”
“그렇습니다.”
단형우의 대답에 악비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형우 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형표야 그렇다고 해도 우문혜의 등장은 꽤 놀라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우리 세가가 어떻게 죽었는가?”
악비환의 눈에서 진한 슬픔이 일어났다. 단형우는 그 슬픔을 몸으로 느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슬픔이었다. 새로운 감정 하나를 몸에 새기며 단형우가 입을 열었다.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단형우의 대답에 악비환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다운 죽음이로군. 그래, 그랬군. 그랬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악비환의 눈가에 살짝 비친 눈물을 볼 수 있었다. 분위기가 점점 숙연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악비환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단형우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 내 아들의 친구라고 했지? 이름이 단형우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너도 내 아들이다. 앞으로 날 아버지라 불러라.”
악비환의 갑작스런 말에 악웅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너무도 파격적인 말이었다. 악웅이 놀란 눈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형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크게 벌렸다.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으하하핫! 과연 세기의 친구로다! 호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
악비환의 웃음소리가 크게 방 안을 뒤흔들었다.
악웅은 그런 악비환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따.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아들에게 못 다 한 것을 그 친구에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자그마치 십 년이나 속으로 묵혀온 감정들이었다. 오늘은 그 감정들을 모조리 날려 버린 날이었다. 그것은 악웅도 마찬가지였다.
“자자, 십 년 만에 아들이 찾아왔는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가세!”
악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악웅은 악비환의 등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술이로군.”
악웅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지더니 급기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핫! 이 얼마만이냐! 술이다! 술!”
그렇게 웃어젓히던 악웅은 결국 방 안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 버렸다.
형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일어났다. 그것은 우문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어쩌실 거죠?”
우문혜가 단형우에게 물었다.
“글쎄.”
단형우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단형우의 혼란은 시간의 괴리로 인해 온 것이었다. 고작 십 년. 십 년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죽기 전까지 매일 날짜를 헤아리던 동료 하나가 있었다. 그가 헤아린 날만해도 십 년이 넘었다. 비록 그 회색의 세상에서 하루를 가늠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친구는 자신의 계산법을 확신했다.
그 친구가 죽고 다른 모든 친구들이 죽어 나갈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날짜를 헤아리던 친구는 꽤 일찍 죽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십 년이라니. 그럼 그 회색의 세상, 잿빛 지옥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모든 친구들이 죽고 홀로 그 세상을 방황하며 각종 괴물들과 싸운 시간만 해도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의 몇 배는 될터였다.
단형우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자네 괜찮은 건가? 혹시 칼을 머리에 맞아서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형표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단형우가 그를 쳐다봤다. 형표의 눈빛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오로지 단형우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외에 다른 사심은 보이지 않는 순수한 눈빛이었다.
단형우가 눈을 돌려 우문혜를 쳐다봤다. 우문혜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단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형우의 입가가 살짝 가늘어졌다. 조설연이 봤다면 웃었따고 좋아할 만한 표정이었다.
“어? 설마……”
우문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게 웃는 건 아니죠?”
우문혜의 말에 단형우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우문혜와 형표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방 밖에는 영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사는 우문혜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우문혜의 표정을 보고 살짝 굳어졌다.
우문혜의 얼굴에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는 감정의 선들을 볼 수 있었다. 십 년이나 우문혜를 모셔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다.
영사의 머리도 점점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악가장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사천(四川) 성도(成都)에 있는 한 객잔에 있는 소녀는 한숨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하아,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조설연은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설연이 있는 방은 객잔 2층에 있었기 때문에 창 밖으로 거리 풍경을 멀리까지 살필 수 있었다.
단형우와 형표가 사라진 후부터 조설연의 시선은 창 밖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다시 돌아오는 모습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단형우를 떠올린 조설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금 이런 사치스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설연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단형우가 떠나기 전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어주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느꼈던 그 아득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마치 온 몸을 뭔가로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