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26
“후훗.”
입에서 웃음이 살짝 새나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봤다.
“음?”
잠깐 눈을 뗐던 것뿐인데 거리 풍경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도 황급히 몸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무복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사내들이 날카로운 눈빛을 사방에 뿌리며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었다.
모두 스무 명이었는데 뭔가를 찾는 듯 연방 두리번거렸다.
“저기다!”
그중 한 명이 소리치자 순식간에 스무 명의 사내들이 몸을 날렸다. 상당한 고수인 듯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조설연은 그 광경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들이 향하는 곳이 다름 아닌 그녀가 묵고 있는 객잔이었기 때문이었다.
콰지직!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객잔 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조설연은 다급히 문을 박차고 나갔다. 혹시라도 1층에서 술이나 음식을 먹고 있을지 모르는 쟁자수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조설연이 방에서 나와 일단 난간으로 향했다. 1층을 폭넓게 살피는 데는 그곳이 가장 좋았다.
난간에서 살피니 역시나 종칠을 비롯한 몇몇 쟁자수들이 술을 마시다가 놀란 표정으로 객잔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흥, 고작 여기인가?”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사내의 눈이 향한 곳은 쟁자수들의 바로 옆에 있는 세 중년인이었다.
세 중년인의 표정은 낭패가 가득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결국 죽지 않았다.
“네놈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당가에서 가만있을 거 같은냐!”
중년인의 말에 청의(靑衣) 사내가 더욱 짙은 비웃음을 흘렸다.
“흥, 당가? 우리가 당가를 무서워할 것 같은가? 지금 당가의 상황이 어떤지 아직 소문을 듣지 못 했나보지?”
중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역시 최근 당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는 청의 무사들, 즉 흑사방 때문이라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대천문(大天門)을 이리도 핍박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중년인의 외침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흑사방 무사들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흑사방 무사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아무리 방의 하급 무사라 할지라도 대천문 일대 제자를 가볍게 압도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며서 왜 묻는 거지? 방주님의 말씀을 무시했지 않나.”
“우, 우리가 언제……”
서걱!
중년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청의 무사 하나가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사방으로 피분수가 퍼져 나갔고, 객잔 안은 짙은 혈항으로 가득 찼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쟁자수들이 흠칫 놀라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형우의 살육을 몇 번이나 지켜 보고 그 뒤처리를 해 온 쟁자수들답게 표정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조설연이 재빨리 쟁자수들 곁으로 다가섰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조설연의 말에 쟁자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있어 봐야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쟁자수들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조설연 역시 그 뒤를 따르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청의 무사 하나가 조설연을 발견했다.
“호오, 이런 보잘것없는 객잔에 왠 꽃이지?”
청의 무사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조설연을 향해 걸어갔다. 조설연은 순간 몸이 살짝 굳는 것 같았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사내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2층으로 향하려 하는데 사내의 빠른 몸놀림이 어느새 조설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쟁자수들은 벌써 2층으로 올라갔고, 조설연만 1층에 남아 있었다.
앞이 막힌 조설연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비켜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잘 생각해 봐. 잘하면 팔자를 고칠 수도 있으니까.”
사내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조설연의 얼굴과 몸을 훑어봤다. 사내는 스스로의 눈을 믿었다. 아직 피어나지는 않았지만 장차 천하를 뒤흔들 우물(尤物)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상일! 뭐 하고 있나? 다 끝났어!”
뒤에서 동료가 부르는 소리에 상일이라 불린 사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덕분에 사내들 역시 조설연을 발견하고 말았다.
“제길, 어쩔 수 없군.”
상일이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상일의 염려대로 동료들이 몰려들며 조설연을 둘러쌌다.
“호오, 이거 꽤 괜찮은데?”
청의 무사 스물에 둘러싸인 조설연은 살짝 몸을 떨었다. 도저히 피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조설연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어렸다. 단형우가 뇌리에 떠올랐지만 지금 그는 조설연 옆에 없었다.
사내들의 눈에 음심(淫心)이 어리기 시작했다.
만일 조설연의 행색이 조금만 더 그럴듯했다면 이렇게 함부로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조설연의 행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비록 깨끗한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고급스럽거나 좋은 옷은 아니었다.
오랜 도망에 이어 표행을 해 왔고, 또 앞으로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옷 따위에 함부로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청의 무사들은 흑사방 청월단(靑月團)이었다. 청월단은 비록 흑사방에서 가장 하급에 속하는 무사단이었지만 흑사방이 워낙 사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 위세가 막강했다.
사내들은 조설연의 겉모습만을 보고 자신들 정도라면 충분히 건드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 흑사방 사람들이 사천에서 일삼고 있는 패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 정도는 상당히 가벼운 편에 속했다.
객잔 안에는 세 구의 시신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피와 음심에 취한 사내들이 충혈 된 눈으로 조설연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조설연은 용기를 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음이 일어나자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몸이 움직이자 내력이 일어났다.
조설연의 발끝이 바닥을 찍었고, 순식간에 청월단 무사들 틈을 빠져 나갔다.
“헛!”
청월단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저 일개 힘없는 소녀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신중했으면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잡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자칫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 물론 일이 커진다고 해서 사천 지방에서 자신들이 피해를 입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크게 키울 필요는 없었다.
스무 명의 사내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거리에 들어차려고 했던 활기가 다시 가라앉아 버렸다.
조설연은 힘껏 달리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은 분명 실력 이상의 힘을 내고 있었다. 그저 마음을 일으킨 것뿐이었는데 어느새 화살처럼 몸이 날아갔다.
“저쪽이다!”
뒤에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설연은 더욱 힘을 내서 달렸다. 하지만 곧 파탄이 나고 말았다. 다시 속도가 원래 실력으로 돌아온 것이다.
청의 무사들이 어느새 조설연 주변을 둘러쌌다.
조설연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대로 그냥 당할 수는 없었다. 조설연이 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악가장의 술판은 두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악비환과 악웅은 마치 지금 아니면 절대 술을 못 먹는다는 듯 술을 동이 째로 입에 들이부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형표나 우문혜, 그리고 영사는 질린 눈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술을 무식하게 먹는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놀라게 한 사람이 더 있었으니 바로 단형우였다.
단형우는 놀랍게도 악비환이나 악웅과 거의 비슷한 양의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말 질리도록 마시는군요.”
우문혜의 말에 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두 사람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술잔을 연방 들이키던 악가장 무사 하나가 웃으며 변명했다.
“최근 금주령(禁酒令)이 내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것이 두 달이 넘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무사의 말에 형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고라도 있었습니까?”
“사고라기보다는 싸움이 있지요. 사실 이렇게 괜찮은 분위기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형표는 더욱 궁금해졌다.
“싸움이란 말입니까? 악가장은 꽤 대단한 가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악가장 만큼 강한 가문이 싸움으로 긴장할 정도라면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천에서 그 정도로 강한 곳은 ㄷ아가나 구파(九派)에 속하는 청성파, 아미파 정도였다.
“아직 제대로 된 충돌은 없었지만 아마 조만간 흑사방과 크게 한 판 붙을 겁니다. 흑사방이 일방적으로 악가장을 흡수하겠다고 했으니까요.”
말을 하는 무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흑사방의 도발은 악가장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사내는 말을 하고 나니 화가 치미는지 연방 술잔을 들이켰다.
형표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흑사방은 이렇게까지 강한 문파가 아니었다.
비록 최근 상당한 성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더군다나 흑사방은 지금 당가와도 대립 중 아닌가.
형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문혜가 형표에게 살짝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표사님?”
우문혜의 은근한 목소리에 형표가 화들짝 놀랐다. 형표는 놀란 눈으로 우문혜를 쳐다봤다. 술을 마셔서 살짝 불그레해진 볼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뭐, 뭐가 말이오?”
형표가 말을 더듬자 우문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더욱 가까이 얼굴을 들이 밀었다. 형표가 언제 이런 도발을 받아봤겠는가. 그저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뭐가 그리 이상하시냐고요?”
우문혜의 질문에 형표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눈을 떴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흑사방 때문이오. 소저.”
우문혜는 형표의 대답을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우문혜도 몇 겪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다. 형표 정도되는 나이에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남표국……이라고 했죠?”
우문혜의 뜬금없는 말에 형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혜는 그런 형표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화려하게 피어나 형표의 숨이 다시 한 번 멎을 수밖에 없었다.
“크, 크흠, 큼. 아, 아무튼 흑사방이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 같소. 당가와 악가장을 동시에 상대한다니 지나친 무리수요.”
형표가 당황하며 재빨리 말을 쏟아내자 우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그건 그렇죠. 그렇지? 영사?”
우문혜의 말에 영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죠.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흑사방은 지금 사천 쪽의 다른 중소 문파들마저 모두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형표가 놀란 표정을 짓자 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서 꽤 많은 문파가 무너졌고, 그와 비슷한 수의 문파를 흡수했소. 기세가 너무 대단해서 웬만한 작은 문파는 손도 못 쓸 지경이라고 했소.”
영사의 설명에 형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뒤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오.”
형표의 말에 영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증거는 없소.”
형표와 영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문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형표를 쳐다봤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 격이었다.
지금까지 일개 표사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인데 지금 보니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문혜의 묘한 눈길을 느낀 형표가 급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점점 잔치가 무르익어 갔다.
단형우는 익숙지 않은 자세로 앉아 연방 술을 들이켰다. 단형우 역시 악비환, 악웅과 마찬가지로 동이를 잔 삼아 술을 마셧따.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다만 술이라는 새로운 맛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하하핫! 자네 정말 대단하군!”
한껏 취기가 오른 악웅이 단형우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단형우의 입가가 살짝 가늘어졌다. 단형우의 기억 깊은 곳에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기억들이 떠오르며 자신이 왜 친구들의 집을 찾으려 했는지 생각났다. 악세기 때문이었다.
단형우가 살짝 눈을 감았다. 기억 깊은 곳에 스며 있는 악세기와의 추억으로 슬며시 잠겨들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회색 하늘과 잿빛 땅, 그리고 그 위에서 새까맣게 몰려드는 별의 별 모양의 마수들.
악세기는 그것을 보며 부리부리한 눈이 반달이 될 정도로 깊이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불안한데?”
악세기의 말에 단형우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별것 아니니까.”
단형우가 보기에는 그저 수만 많았지 진짜 강한 마수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마수들에게 악세기나 자신이 당할 리가 없었다.
“나도 알아. 그냥 불안해서 그래.”
악세기가 중얼거리며 미소를 거둔 얼굴로 몰려오는 마수들을 잠시 쳐다봤다. 악세기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었다.
“반드시 여기서 나가자. 이 지겨운 회색 세상에서 나가서 화려한 세상에 몸을 담는 거야. 그리고 그동안 못 해 봤던 것들을 모조리 다 해 보는 거야. 어때? 멋지지?”
단형우는 악세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악세기는 지나칠 정도로 말이 많았다.
“그렇게 하자.”
“약속한 거지?”
악세기의 다짐에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세기의 표정이 환해졌다.
“마음이 놓이네. 만일 나가게 되면 꼭 우리 집에 들러줘. 그리고 아버지께 내 얘기를 전해 줘. 죄송하다고. 그때까지 살아계실지 모르겠지만.”
악세기의 말에 단형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 해라.”
“하하하! 당연하지. 직접 할 거야.”
악세기는 크게 웃다가 마물들을 보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단형우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단형우가 본 악세기의 마지막 미소였다.
당시 마수들을 뒤에서 조정하던 강력한 괴물들 몇 때문에 단형우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악세기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단형우를 구해냈다.
덕분에 단형우는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오랜시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