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27
기억 깊은 곳에서 다시 떠오른 단형우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술을 퍼붓고 있는 악비환을 쳐다봤다.
악비환은 갑자기 단형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술동이를 내려놓았다.
“왜 그러느냐.”
악비환의 부드러운 말에 단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단형우의 말에 악비환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내 그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크흐흐흑!”
악비환의 눈물을 주변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친구의 마지막 말을 전해 준 단형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갑작스런 단형우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
악웅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급히 물었다. 단형우는 그 모습을 보며 간단히 대답했다.
“급한 일입니다.”
단형우의 대답에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 악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나도 도와야지. 아들의 급한 일을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없는 법 아니냐.”
악비환의 말에 단형우가 그를 쳐다봤다. 악비환은 어느새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길에 단형우는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 뭔가가 슬며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나치게 생소한 감정에 당황한 단형우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단형우의 말에 악비환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꼭 돌아와야 한다.”
“예. 그럼.”
말을 마친 단형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바로 앞에 있던 악비환마저 단형우가 갑자기 어떻게 사라졌는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방금 전 단혀우가 있던 자리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조설연은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저들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이었다.
쉬익!
조설연의 손이 앞에 있던 사내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청의 사내는 그 손을 간단하게 낚아챘다. 아니, 낚아채려고 했다.
퍼벙!
“헉!”
사내는 놀란 신음을 삼키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조설연의 손목을 낚아채는 순간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손이 튕겨져 나갔다.
조설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그 능력과 비슷한 것 같았찌만 정확히 무슨 일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청의 무사는 화난 표정으로 몸을 날렸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어차피 약간의 상처야 상관없었다. 그 짓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쉬익!
퍼버벙!
사내의 손이 조설연의 가슴을 가격했다. 보통 무인들이 여인을 향해서는 절대 쓰지 않는 치졸한 수였지만 사내는 그런 것쯤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사내는 조설연이 바닥에 누웠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드러난 광경은 전혀 달랐다.
비록 몇 발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조설연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과연, 한 수가 있긴 있단 말이지.”
챙!
사내가 검을 뽑았다. 이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미색을 해칠 생각은 없었으니 다리 쪽을 찌를 생각이었다.
“흠집 나지 않게 조심해!”
사내의 동료들이 음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청의 무사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하지 마. 그쪽 방면에는 천하제일이니까.”
사내의 손에서 검이 이리저리 춤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조설연 앞으로 쇄도했다.
조설연은 황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도저히 검을 피해낼 수 없었다. 사내의 검이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며 조설연의 가슴 얼림을 지나 허벅지로 미끄러졌다.
서걱!
가슴 쪽 옷가지가 잘려 나가며 옷이 나풀걸렸다. 그리고 허벅지에 검이 빨려들듯 꽂혔다.
쩡!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설연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청의 무사 역시 뒤로 물러섰다.
청의 무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호신강기?”
마치 단단한 철ㅂ겨을 찌르는 듯했다. 게다가 손목까지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반탄지기(反彈之氣) 때문데 뒤로 세 발이나 물러나야 했다.
조설연은 조설연대로 놀랐다. 꼼짝없이 허버지를 뚫렸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멀쩡하고 상대만 타격을 입은 듯하나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몸속 가득히 들어 있던 뭔가가 빠져 나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주던 것은 바로 단형우가 자신에게 넣어준 그 무언가였다.
“아……!”
조설연은 그제야 단형우가 왜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는지 깨달았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자신을 지켜 준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나마도 끝났다. 방금 전 한 번의 호신강기로 모든 힘이 소진되었다.
청의 무사가 조심스럽게 조설연에게 다가갔다. 섣불리 혼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의 그것이 호신강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했다. 잘못하면 괜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청의 무사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검을 뽑았고, 눈에서 음심이 뒤섞인 살기를 뿜어냈다.
조설연은 초탈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어……’
죽음을 예감한 조설연의 뇌리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단형우의 얼굴이었다. 죽기 전에 그를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조설연이 앞에 있는 사내에게 뛰어들었다. 그는 조설연이 갑자기 움직이자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초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호신강기를 본 마당이니 힘을 아낄 수 없었다.
콰콰콰콰!
강렬한 검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리고 그 검기들이 조설연의 온몽으로 쏟아졌다.
조설연은 자신을 휘감으며 화려하게 터져 나가는 검기들을 바라보며 사내의 검으로 뛰어들었다.
턱!
막 검 끝에 배가 뚫리려는 순간, 누군가 조설연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사방을 조여오던 검기들은 흔적도 없이 공중에 흩어져 버렸다. 조설연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쳐다봤다.
“무슨 짓이지?”
단형우였다. 조설연이 보기에 화가 난 듯했다. 무표정했지만 입꼬리의 모양이 살짝 쳐진 걸로 봐서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아……! 오, 오라버니!”
단형우는 조설연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단형우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청월단 무사들은 단형우의 눈빛에 걸려든 순간부터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공포였다.
“넌 뭐야!”
무사 하나가 있는 용기와 기력을 모두 쥐어 짜 소리쳤다. 그러자 몸을 옭아매던 압력이 조금 느슨해졌다. 사내의 용기가 조금 더 솟아났다.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흑사방이 무섭지도 않느냐!”
사내의 외침은 동료들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그렇다. 자신들은 장차 사천을 지배할 흑사방의 무사들이었다.
“흐아아압!”
“하아압!”
연방 거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내들의 몸 주위로 기(氣)가 휘몰아쳤다. 비록 완전히 속박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졌다.
사내들은 무서운 눈으로 단형우를 노려봤다. 단혀우는 무심히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검을 좌(左)에서 우(右)로 그었다.
콰드드득!
청월단 무사들과 조설연은 놀란 눈음 감추지 못했다. 단형우의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사방으로 당이 파헤쳐지며 수십 개의 지룡(地龍)들이 생겨났다.
마치 땅 속을 뭔가가 이동하는 듯 땅이 마구 파헤쳐지며 청월단 무사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것이 무려 스무 개였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땅을 이리저리 헤집고 꿈틀거리는 기의 덩어리 스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으아아아!”
청월단 무사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사방으로 몸을 날리며 흩어져 도망가는 그들의 뒤로 땅에 숨은 지룡이 빠른 속도로 쫓아갔다.
애초에 도망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단형우가 만들어 낸 지룡들은 각자의 속도에 맞춰 빠른 자는 빠르게, 느린 자는 느리게 쫓아갔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발아래에서 터져 나갔다.
콰과과광!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 흙과 돌멩이들이 고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흙 알갱이 하나하나, 돌멩이 하나하나에 막대한 기운이 잠들어 있었다.
퍼버버버벅!
그리고 그 기운들은 청월단 무사들은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조설연은 넋을 잃고 그 잔인한 광경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하나였지만 이번에는 스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것을 이용해 무덤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살육을 자행했다는 점이 달랐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이것이 이리도 대단한 무공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무, 무서운 무공……”
조설연이 중얼거리자 단형우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지룡(地龍)이다. 삼재검법의 두 번째 초식이지.”
단형우가 그렇게 말을 끊은 후, 조설연을 쳐다봤다.
조설연은 단형우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연방 움직이는 그녀의 눈에서 슬며시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 자신을 생각하고 지켜 준다는 기쁨이 만들어 낸 눈물이었다. 그리고 단형우를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져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악가장의 술잔치는 슬슬 열기가 식어갔다.
악비환과 악웅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있고, 단형우가 사라질 무렵 분위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에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다만 단형우가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오겠다고 했으니 그것을 기다리기 위해 자리를 정리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악비환은 눈앞에 놓인 술동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십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 어린 아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아들이 원하니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악비환이 말없이 술동이를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술동이에 가득 담긴 술이 악비환의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크아하! 좋다!”
빈 술동이를 내려놓은 악비환의 표정은 더없이 개운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악웅도 악비환을 따라 술동이를 들고 술을 목에 흘려 넣었다.
악가장 사람들이 모두 악비환이나 악웅처럼 단순하고 호탕한 것만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이렇게 규모가 큰 장원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을 것이오, 이만한 발전을 이룰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연백. 그는 악가장의 살림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악가장 고수들에 비하면 조금 손색이 있긴 하지만 지닌 무공도 꽤 대단했고, 무엇보다 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좋아 악가장 같은 큰 장원을 이끌어 나갈 만한 역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연백은 악비환 옆에서 살짝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거의 술도 마시지 않고 있다가 악비환이 마지막 술동이를 비우자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
“왜 그러는가? 또 뭔가 걱정이 있는 겐가?”
악비환이 농을 섞어 말했지만 사실 악비환은 연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연백 역시 악비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사실 걱정이 됩니다. 흑사방은 그 어떤 파렴치한 짓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건……”
“자네의 걱정이 뭔지는 다 알고 있네. 하지만 내 아들의 친구일세. 그리고 이젠 내 아들이나 다름없네. 아니, 내 아들일세. 그러니 걱정 하지 말게나.”
악비환의 말에 연백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만일 이 일 자체가 흑사방이 만든 음모라면……”
사실 연백의 걱정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악비환과 악웅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 년 전 사라져 악비환의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긴 악세기의 친구라는 것은 이성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비환의 아들이었다. 그것도 유일한. 악비환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악세기가 유일한 자신인 것이다.
연백의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흑사방이 그런 틈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찔러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 악세기의 친구 역시 흑사방이 만들어 낸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연백은 우문혜와 형표를 쳐다봤다. 한 명은 서시도 울고 갈 경국지색(傾國之色)이고, 다른 한 사람은 평범한 표사,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를 의심하게 되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우문혜 옆에 있는 영사조차 의심스러웠다. 영사의 실력은 그야말로 대단해서 거의 악웅과도 맞상대를 할 수 있을 듯했다.
“끄응, 골치 아프군.”
정말로 골치 아팠다. 자신이 어떻게 하기 어려우니 더욱 그랬다. 그래도 뭔가 수를 내지 않으면 곤란했다. 현재 악가장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당가에서 뭔가 힘을 발휘하지 않는 한, 악가장 역시 괴멸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악가장이 그렇게 쉽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우리의 힘도 절대 무시하지 못하지. 방심이라도 하지 않는 한, 흑사방도 결코 쉽게 넘보지 못하지. 암.’
연백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어쩌면……!’
악가장이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었다.
두 달간의 금주령을 풀고 잠깐이나마 환영의 자리를 만들려고 하는 지금이었다. 원래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연백도 찬서을 했다. 너무 조이기만 하면 삐걱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공교롭게 흑사방이 일을 벌이지는 않을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단형우가 흑사방의 간세라면? 그리고 지금 사라진 것이 흑사방에 적절한 시기를 알리기 위함이라면?
연백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