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43
검왕이 슬쩍 고개를 돌려 단형우를 쳐다보니 단형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크흠, 그만들 둬라. 그나저나……”
검왕의 눈이 마치 쥐새끼를 노리는 독사처럼 빛났다.
“네놈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나한테 아주아주, 그러니까 그 누구하도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손녀가 하나 있는데, 어떠냐?”
그 말에 단형우를 검왕을 빤히 쳐다봤다.
“아, 어떠냐고!”
검왕이 채근했지만 단형우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내 손녀딸을 준다는데 왜 대답이 없어!”
검왕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종칠은 그 말에 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검왕이 단형우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차가 거칠게 흔들렸다.
“이놈아! 마차 똑바로 몰아!”
종칠이 화들짝 놀라며 앞을 쳐다봤다. 그리고 마차를 안정시켰다.
검왕은 단형우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종용했다.
“설마 내 손녀딸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겠지? 왜 대답을 안 해?”
단형우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검왕은 단형우의 단호한 대답을 보며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흘렀다.
“그래, 네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를 보고서 내 손녀를 판단하는 모양인데, 완전히 오산이라는 걸 가르쳐 주지. 일단 나중에 내 손녀를 한 번 만나 보기나 해. 그럼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서라도 사정을 하게 될테니까.”
검왕의 절충안에 단형우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단형우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으니까. 단형우는 지금 세상을 배우는 중이었다.
혈마자는 장막으로 가려진 대전 안에서 새각에 잠겨 있었다.
“혈영.”
혈마자의 부름에 혈영이 즉시 앞에 나타났다.
“마영은 어떻게 되었지?”
“얼마 전 보고를 받았습니다. 헌데 검왕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혈영의 대답에 혈마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못된 버릇이 발동되었겠군.”
혈영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설마 검왕에게 당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 해.”
혈마자의 말에 혈영이 그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혈마검이 구성(九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혈영의 대답에 혈마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그렇습니다.”
혈마자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검왕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과연 천고의 기재다워. 벌써 구성이라니. 이제 거의 적수가 없겠군.”
혈마자는 한동안 만족스럽게 웃다가 다시 혈영을 쳐다봤다. 이렇게 장막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혈마자의 수하들 중에서도 단 세 명뿐이었다.
“이제 슬슬 천기자의 흔적들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혈마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천기자의 흔적을 모두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 나타날 것만은 알 수 있었지. 첫 번째는 비동(秘洞)이다.
비동이라는 말에 혈영이 눈을 빛냈다.
“그래, 네가 원하던 것이 바로 그곳에 있다.”
“그렇다면 혈영검(血影劍)이!”
혈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힘차게 입을 열었다.
“제가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혈영대 전부를 데리고 가라. 천기자의 의도대로 흘러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더 큰 판을 만들어 보자꾸나. 그 비동 안에는 혈영검 말고도 쓸 만한 것들이 꽤 있을 테니까.”
혈마자의 말에 혈영이 깊이 부복했다.
“존명.”
혈마자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 명단이 대체 무언가?”
맹주의 물음에 주작단주 마영성이 공손히 대답했다.
“최근 십 년 새에 두각을 나타낸 문파들입니다.”
독고운은 주작단주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모종의 암계라도 꾸미고 있나?”
“아닙니다.”
“허면?”
주작단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기자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판단되는 곳들입니다.”
주작단주의 말에 독고운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확실한가?”
“거의 확실합니다.”
독고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천기자의 무공이 갑자기 이렇게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명단에 적힌 문파들의 수는 열세 개나 되었다.
“헌데 여기 붉은 줄을 그은 곳은……”
“얼마 전 멸문한 곳입니다.”
독고운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다시 명단을 살폈다.
“호오, 이것……!”‘
“그렇습니다. 최근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문파입니다. 근처에 새로 생긴 신흥 문파에 밀리고 있는 형편이지요.”
독고운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립하고 있는 문파들을 알려 주게.”
주작단주는 명단을 하나 더 품에서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이미 준비해 온 것이다. 독고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명단을 밝아 읽어 내려갔다.
“여기도 붉은 줄이 있군. 흑사방이라면……!”
“예, 바로 그곳입니다.”
독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라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진천뢰가 거론된 곳이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이곳과 대립하던 곳은 어디인가?”
주작단주가 즉시 대답했다. 질문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악가장입니다.”
“악가장이라……”
악가장은 사실 꽤 유명한 가문이라 할 수 있었다. 악가장의 가주 악비환은 패도적인 도(刀)로 이름이 꽤 높은 사람이었다.
“악가장과 하남표국의 관계를 우선 알아보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천기자가 이렇게나 많은 무공을 만들었다니 정말 놀랍군.”
독고운의 중얼거림에 주작단주가 보고를 덧붙였다.
“무공뿐만 아닙니다. 상계(商界)에도 뭔가를 한 듯싶습니다.”
“상계 말인가?”
“아직 확실히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천기자의 입김이 들어간 상단이 몇 군데 있는 듯합니다. 그밖에도 천기자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허어, 정말 대단하군. 천기자라는 사람.”
천기자는 살아 있을 때도 그 위명이 천하를 진동했다. 헌데 죽은 지 십 년이나 된 사람의 이름이 또 슬며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으니 정말로 대단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독고운은 고개를 끄덕인 후, 주작단주에게 명을 내렸다.
“그 천기자가 남긴 흔적들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보게.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네. 놓쳐서는 안 될 무언가가.”
“예.”
주작단주는 인사를 한 후, 맹주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독고운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후후, 천기자라……”
천기자는 여러 가지로 독고운과, 또 무림맹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천기자가 남겼다는 음양고(陰陽蠱) 중 양고(陽蠱)를 독고운이 취하지 않았는가. 현재 양고는 독고운의 단전 어림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처음 그것을 취할 때 꺼림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양고가 독고운의 단전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독고운의 내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양고는 독고운의 단전에 쌓여 있는 내공과 상당히 궁합이 잘 맞았다.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훨씬 강한 기를 만들어 냈다.
독고운은 단전부근을 손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꿈틀.
양고가 단전에서 요동을 쳤다. 독고운의 내공이 늘어날수록 양고의 크기도 조금씩 커졌다. 이제는 단전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자랐다.
너무 터지면 곤란하겠지만 독고운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양고가 어느 정도 자라면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탈피(脫皮)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의 탈피를 거쳤고, 조금만 더 커지면 두 번째 탈피를 할 수 있을 터였다.
단전을 쓰다듬으며 양고의 움직임을 살피던 독고운은 잠시 주변을 살핀 후,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서찰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했다.
“흐음, 비동(秘洞)이라……”
독고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잘못하면 강호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겠구나.”
서찰을 모두 확인한 독고운이 손에 진기를 모았다.
화르륵.
순식간에 서찰이 타올랐다.
독고운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불에 타고 남은 재가 공중에 흩날렸다.
갈팡질팡 마영대(魔影隊)
검왕이 마차 지붕에서 단형우와 종칠에게 본색(?)을 드러낸 이후 세 사람, 그러니까 검왕과 단형우, 종칠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물론 종칠은 여전히 검왕을 어려워했지만 검왕은 처음과 달리 친근한 태도로 두 사람을 대했다.
검왕의 이런 태도 변화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금유화였다. 금유화는 검왕이 이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금자항의 딸이자 유백상의 약혼녀답게 얼굴에 드러난 당황을 깊숙이 감춰버렸다 검왕은 그 이후로 계속 마차 위에서 단형우와 함께 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계속 그렇게 했을 것이다.
종칠이 마차를 모는 실력은 꽤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표행을 하면서 그 실력이 훨씬 더 늘어났다. 검왕과 단형우를 신경 쓰느라 마차 흔들림을 최소화 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사실 금유화는 신경 쓰지 못했다. 금유화가 비록 아름답긴 하지만 마차 안에만 있기 때문에 제대로 볼 시간도 없을뿐더러 검왕이라는 이름과 비교해 보면 별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어쨌든 종칠은 너무도 부드럽게 마차를 몰았다. 지붕 위에 있는 검왕이 감탄을 할 정도로.
“검 보다는 마부가 훨씬 더 어울리는구나. 허허허헛!”
검왕의 웃음에 종칠의 입이 살짝 튀어나왔지만 뭐라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검왕이니까.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가는 터질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해도 당하는 것은 종칠이 될 테지만.
종칠은 마차 모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검술 수련도 그리 흥이 나지 않았다. 원래 훨씬 더 뛰어난 절세의 신공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보다 못한 것을 익히게 되었으니 흥이 날리 없었다.
그래도 매일 수련을 하고 있지만 표국에 있는 다른 동료들과 차이가 날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검왕이 원망스러웠다.
“쳇,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할 것을.”
종칠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아무리 작게 말했다지만 검왕이 그것을 못 들었을 리 없다.
따악!
“크헉!”
종칠은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고삐를 조절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 와중에도 마차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솜씨였다.
종칠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게 벌써 몇 번재인가. 매번 당해 놓고도 또 혼잣말을 하고 얻어맞는 자신도 자신이지만 이렇게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세게 때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검왕이나 되는 사람이.
“허허헛! 그놈 참, 이젠 정말 신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검왕의 말이 종칠의 속을 다시 한 번 뒤집었다. 종칠이 결국 참지 못하고 시를 지르려는 찰나 뭔가가 마차 앞으로 뛰어 들었다.
“헉!”
종칠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마차를 끌고 있는 두 마리 말을 따로따로 조절해 갑자기 뛰어든 장애물을 슬쩍 피해 가는 종칠의 솜씨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뛰어든 사람도 그 솜씨에 깜짝 놀랐다는 듯 크게 치켜뜬 눈으로 지나가 버린 마차의 뒤를 쳐다봤다. 하지만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고 천천히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결국 마차는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내의 예상대로 마차는 결국 멈췄다.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라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내, 마영은 빙긋 웃으며 걸음을 좀 더 빨리 했다. 검왕과 마영대가 충돌하기 전에 도착해야 서로 최상의 상태로 검왕과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마영대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살기조차 피워 올리지 않았다. 마영은 마차에 다가가 마차 위에 앉아 있는 검왕을 쳐다봤다.
“과연 검왕. 여기까지 그 기세가 느껴지는군.”
마영의 말에 검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염철군이라는 걸 알면서 마차를 세웠단 말이지?”
검왕의 말에 마영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