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5
조설연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뒤에 숨은 평범한 사내 하나를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두 사람이 막 몸을 날리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
그 목소리에는 내공이 실려 있어서 남궁진과 팽철영의 흐름을 순간적으로 끊어 놓았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맹주인 독고운의 목소리인데 모를 리 있겠는가.
독고운은 순식간에 남궁진과 팽철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저 한 걸음을 걸은 것 같았는데 십여 장이라는 거리를 없애 버린 것이다.
남궁진과 팽철영은 맹주의 놀라운 신법에 눈을 크게 떴다. 과연 파산도 독고운이라는 생각을 하며.
독고운은 조설연 뒤에 서 있는 단형우를 쳐다봤다. 낯선 얼굴ㅇ었다. 하지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독고운이 보기에 단형우는 그저 사냥꾼 정도였다. 조금 특이한.
“보아하니 무공도 익히지 않은 사람인 듯한데…… 설마 그런 사람을 공격하려던 것은 아니겠지?”
독고운의 말에 남궁진과 팽철영이 흠칫 놀랐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들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저자가 수상하다 판단을 하여 조금 조사를 해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남궁진이 급히 변명을 하자 독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정(正)과 협(俠)의 중심인 무림맹의 일원에게 내 너무 심한 착각을 했군. 미안하게 되었네.”
“아, 아닙니다. 맹주님.”
남궁진과 팽철영은 등줄기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감추려 애썼다.
독고운은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단형우를 쳐다봤다. 독고운의 눈에 순간적으로 번쩍 빛이 일었다.
하지만 단형우는 그런 눈빛을 받고도 그저 자연스럽게 서 있을 뿐이었다. 독고운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자네의 정체가 뭔가?”
독고운의 질문에 조설연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독고운은 무림맹의 맹주였다. 조금 전 상대하던 두 사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단형우.”
단형우의 간단한 대답에 독고운 주변에 있던 무사들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감히!”
무사들이 금방이라도 단형우게 달려들 듯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독고운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허허허. 거 참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독고운은 단형우에게 한 발 다가섰다.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자연스럽게 조설연을 밀어냈다. 조설연은 크게 당황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독고운은 한 발을 내딛으며 단형우와 마주보게 되었다.
“이곳에 왜 왔는지 말해 주지 않겠나?”
단형우가 독고운을 쳐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얼마 전 취운루에서 점소이와 대면했을 때 했던 고민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단형우는 조금 더 복잡한 길을 택했다. 힘을 써서 피를 보는 것은 간단했지만 새롭게 얻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굳이 깨고 싶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자산의 목숨을 노려서 평화를 깨려는 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힘을 자제할 생각이었다. 이 역시 하루동안 세상을 겪으면서 결정한 일이었다.
“내가 살던 곳이니까.”
단형우의 말에 지금까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독고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의 의미는 혹시 자네가 저 절벽 안에서 살아왔다는 뜻인가?”
단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절벽 안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옥에서 왔지 않은가.
독고운은 단형우의 고갯짓을 보고는 그가 단순히 이 근처에서 야인처럼 살아가던 사람이라 판단했다.
“사냥이나 하는 사람치고는 대난한 검을 가지고 있군. 그 검은 어디서 났는지 혹시 말해 줄 수 있나?”
독고운의 말에 이번에는 조설연이 냉큼 나섰다.
“친구 분의 검이라고 했어요. 친구 분의 목숨 대신 얻은 검이라고……”
조설연은 단형우가 취운루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의 기억이 꽤 강렬했었다. 조설연은 어쩌면 그 강렬할 때문에 자신이 이 사내에게 이렇게 호의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거기까지 들은 독고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서며 무림맹 무사들에게 명령했다.
“철수한다.”
독고운의 명령에 모두가 잠시 놀랐지만 이내 일사분란한 모습으로 철수 준비를 했다.
조설연은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형우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단형우는 뭐가 다행이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조설연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단형우는 왠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여 줘야겠군.’
단형우는 속으로 생각하며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의 습관과 다르게 말이 나가지 않고 생각으로 머물렀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변화였다.
사마철과 조인은 거의 숨도 못 쉬고 있다가 맹주가 돌아서서 철수를 명하고 나서야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조설연에게 다가갔다.
“다, 다행이구나. 어쨌든 우리도 돌아갈 준비를 하자꾸나.”
사마철의 말에 조설연과 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무림맹 사람들이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다였다.
무림맹 무사들이 준비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 있는 독고운에게 제갈중천이 다가갔다.
“맹주님, 저 친구는……”
제갈중천이 조심스럽게 묻자 독고운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렇군요. 혹시나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닐세. 천기자의 무공을 익힌자라고 하기엔 조금 미흡하지 않나?”
독고운의 말에 제갈중천이 ‘조금이 아니라 지나틸 정도입니다.’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아마 친구의 복수를 위해 산에 들어와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듯하네.”
“그렇군요. 하긴, 일백이라고 했으니…… 그나저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 친구 하남표국으로 갈 듯한데, 가서 표사노릇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남표국은 다른 표국과는 상당히 다를 터인데……”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가서 쟁자수라도 하겠지. 그리고 혹시라도 그곳에 있으면서 조가장의 무공이라도 배운다면 복수에 조금쯤은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검을 보아하니 힘들 듯 하지만 말일세.”
독고운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더 이상 그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것 말고도 신경 쓰고 처리해야 할 무제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어느새 철수 준비가 모두 끝났고, 이동을 시작했다.
조가장 사람들은 무림맹 사람들과 길을 달리했다. 원래대로라면 무림맹이 있는 무한으로 함께 간 후에 관도를 타고 하남으로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계획을 조금 바꿨다.
조설연이 이왕 나온 김에 동정호에서 시간을 조금만 보내자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조설연은 단형우가 무림맹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기 어려울 거라 여겼다. 이들은 모두 경공을 이용해 빠르게 달려갈 것이 뻔한데 보통 사람이 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리 없었다. 그리고 조설연 자신도 그들과 함께 속도를 맞추기 힘들었다.
사마철과 조인도 그런 속사정을 이해했기 때문에 흔쾌히 조설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단형우는 조가장 사람들이 가는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사실 어딘가로 가고 싶어도 길을 알지 못하니 갈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절벽에서 나오자마자 움직여서 바로 장사에 도착한 것도 실로 대단한 우연이었다.
무림맹 사람들이 떠나가자 정말로 조용했다. 그리고 남은 네 사람은 여유롭게 길을 걸었다.
그들이 있던 곳에서 근처 마을까지 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노숙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열심히 걸어 밤늦은 시간에 꽤 큰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고,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장에서 쉴 수 있었다.
사마철은 방을 두 개 잡았다. 어쨌든 조설연은 여자였으니 방을 따로 잡아줘야 했고, 남자들은 한방에서 자기로 했다.
대충 끼니를 때운 일행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단형우는 사마철이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 하나? 가서 누워 자게.”
사마철이 단형우에게 말하며 침상에 드러누웠다. 방에는 세 개의 침상이 있었는데 조인은 벌써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단형우는 그런 조인과 사마철을 잠시 쳐다볼 뿐 여전히 서 있었다.
“안 잘 겐가? 아무튼 알아서 자도록 하게. 난 먼저 자네.”
사마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자리에 누웠다. 오늘 하루 종일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조설연만 계속해서 떠들고 단형우는 그저 어쩌다가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마철도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사마철은 눈을 뜨며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나다가 화들짝 놀랐다.
“으헉!”
단형우가 방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 자네 설마……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허헛.”
사마철은 설마 단형우가 밤새 한잠도 안 자고 저렇게 서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보다 조금 늦게 자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난 것뿐이라 생각했다.
“잠이 별로 없는 친구로구먼.”
사마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인을 깨웠다.
“인아, 슬슬 일어나거라.”
조인은 사마철의 말에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형우가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쾅쾅쾅!
“오라버니! 숙부님! 일어나셨죠?”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조설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마철은 그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그저 허허 웃고 말았다.
“허허허. 이것 참, 저런 연아의 모습을 처음이로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좀 의외로군요.”
조이은 대꾸하면서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옷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조설연은 벌써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마치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고는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 소협도 잘 주무셨죠?”
단형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자 조설연이 또 환하게 웃었다. 사마철과 조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라니, 이 숙부는 너에게 그런 인사를 받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만.”
“아이 참, 숙부님도 어서 내려가서 밥 먹어요. 배고파요.”
조설연은 사마철의 팔을 잡아끌며 애교를 부렸다. 사마철은 그런 조설연의 모습에 그저 빙긋 웃고는 못이기는 척 따라 내려갔다. 어떤 행동을 해도 조설연의 모습은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결국 조가장 일행은 동정호를 시작으로 적당한 유람을 하며 허창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조설연은 단형우와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사마철이나 조인은 도저히 단형우와 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단형우가 워낙 말이 없는 탓도 있겠지만 말을 하더라도 윗사람이나 타인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 없었다.
그들은 그가 산속에서 야인 같은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인정해 주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기분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두 사람은 단형우와 꼭 붙어다니는 조설연을 보며 가끔 한숨지었다.
“하아, 인아.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으나.”
“아무래도 설연이가 그동안 겪어왔던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탓에 호기심을 강하게 느끼는 듯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호기심을 조금 넘어선 듯하다만……”
조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래 보여도 설연이는 누구보다 총명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입니다. 아마 가문에 더 도움이 되는 짝을 고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후우, 그래. 어리다면 어린 나이이긴 하다만…… 설연이가 지금 열입곱이라는 것은 알고 있느냐?”
조인이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그리고 그 나이라면 충분히 가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지요. 세상을 알기에는.”
“그래서 걱정하는 것 아니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 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어느새 얘기를 하다 보니 조가장 앞에 도착했다. 조인은 단형우와 함께 문으로 들어서는 조설연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연인을 부모님께 인사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일단 저 친구를 떼어놔야 하지 않습니까.”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사마철이 바람같이 몸을 날려서 조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 안, 조가장주 조일현이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 별 일은 없었는가?”
조일현의 말에 사마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별 속득도 없었습니다.”
“사도련과 녹림이 덤벼들었다고 들었네.”
“그새 여기까지 소문이 났나보군요, 별 것 없었습니다. 대체 고작 그 인원으로 왜 덤벼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사마철의 대답에 조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된 것이다.
“그래, 연아는 어땠나?”
조일현의 은근한 질문에 사마철과 조인 모두 쓴 웃음을 지었다. 가주가 원하는 답을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 별 인물이 없었습니다.”
조인이 담담하게 말하자 조일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룡단장 하원후라는 친구가 꽤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별로던가?”
“그는 너무 바빠서 설연이를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크흠, 그렇군. 하긴 사안이 사안이니……”
조일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조금 아쉽긴 했다. 무림맹에서 승룡단이라면 후기지수들 중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자들만 모인 곳이었다.
하원후는 그곳의 단주였으니 얼마다 대단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남자, 조일현은 하원후가 자신의 딸인 조설연을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단번에 빠져들 것이라 생각했었다. 조설연은 조일현이 그렇게 자신 있어 할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그래, 어떻던가?”
조일현이 다시 정색을 하고 묻자 사마철이 조용히 대답했다.
“정확한 얘기는 해 주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 내부가 완전히 파괴된 모양입니다.”
사마철의 말에 조일현이 해연히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 그럼 천기자의 무공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쳤을 수도 있습니다. 안에서 뭔가 발견하긴 한 모양인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천기자의 무공일 가능성은 없는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그것과는 좀 다른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