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50
“내, 내공이……”
내공이 모이지 않았다. 아니, 마치 단전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뿌듯할 정도로 차올라야 하는 단전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호혁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어찌 이럴 수가……”
모두 허탈감에 빠져 버렸다. 그 와중에 단형우의 목소리가 마치 유부의 사자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어디로 갔나.”
단형우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단형우를 쳐다봤다. 그들은 직감했다. 단형우가 일부러 자신들의 내력을 금제했다는 사실을.
손도 대지 않고 내력을 제압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만이 희망이었다. 단형우가 금제했다면 단형우가 풀어 줄 수 있을 테니까.
“처, 처, 천중산으로 갔습니다.”
“천중산?”
당연히 단형우는 천중산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것을 눈치챈 한호혁이 재빨리 나섰다.
“제가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단형우가 즉시 입을 열었다.
“지금 간다.”
단형우의 말에 한호혁이 잠시 머뭇거렸다.
“내, 내공이……”
그 말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음습한 기운들이 순식간에 단형우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사람들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공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구에 안도와 두려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꺼져라.”
단형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하남표국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형우와 한호혁뿐이었다.
단형우가 한호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호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도망갈 수 없었다. 그만큼 단형우에게서 풍기는 느낌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오십시오.”
한호혁은 공손히 말한 후, 몸을 날렸다.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 경공을 펼쳤다. 단형우가 못 쫓아올 리 없을 테니까.
그렇게 단형우는 한호혁을 따라 천중산으로 향했다.
하남표국 일행은 거칠게 말을 몰았다. 사실 무리해서 말을 몰면 천중산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루 밤낮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들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추적자들이었다.
처음에는 의표를 찔러 허창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지만, 그들이 목표가 천중산이라는 것이 알려진 이상 허창에 있던 무림인들의 추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목적지를 다른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나마 천중산으로 가는 것이, 그들이 살 확률을 가장 높여줄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는 무림맹도 있을 테니까.
어쨌든 추적자들은 하남표국이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쫓아왔다.
“힘내십시오. 아가씨, 이제 천중산이 멀지 않습니다.”
형표의 외침에 조설연이 안타까운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말을 탄 사람들이 수십이나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쉬지 않고 쫓아와 온통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래도 눈빛이 살아 있었다. 그들은 무림고수였다.
“다른 분들은 괜찮으신가요?”
조설연의 말에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괜찮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들은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햇다. 하지만 몸에 무리가 간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조설연이 그런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조설연의 눈에 뿌연 습막이 차올랐다. 조설연은 소매로 눈을 한 번 훔치고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천중산 안으로 들어가면 좀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들도 쉽게 우리를 찾지 못할 겁니다.”
조설연의 말에 이제 표사가 된 쟁자수들이 희망을 불태웠다. 그들은 표사였지만 단형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회의(灰衣)를 입고 있었다. 제대로 무공을 익히기 전까지는 표사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어느새 천중산 초입에 도착했다.
“서둘러!”
형표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수해(樹海)로 스며들어갔다.
“무영대(無影隊) 전원 대기 중입니다.”
수하의 말에 무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영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커다란 바위를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회주의 명도 없었는데……”
수하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영은 전혀 염려하지 않았다.
“괜찮다. 회주의 명은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너희는 내 명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무영이 그렇게 말하자 무영대 전원이 대답 없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주변 사물들로 녹아 들어갔다.
무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른 무영대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천기자의 비동이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난 하나만 있으면 돼.”
아무도 없는 숲에 무영의 중얼거림이 맴돌았다.
“허억! 허억! 여, 여기입니다.”
한호혁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헐떡대며 말했다. 뒤에는 마치 계속 그거곳에서 서 있던 것처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은 단형우가 있었다. 한호혁은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리 달려왔다. 그것도 극성의 경공을 발휘해서, 덕분에 한호혁의 단전은 이제 텅 빈 상태였다.
약간의 내상도 입은 듯 했다. 경공만으로 내상을 입을 정도니 얼마나 무리해서 달려왔다는 뜻인가.
어쨋든 그렇게 무리를 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일찍 천중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계를 넘어섰어.’
한호혁은 숨을 고르며 생각햇다. 달려오면서 몇 번이나 한계에 부딪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조금만 늦추려 해도 그때마다 뒤에서 덮쳐오는 강렬한 존재감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한계라고 생각할 때마다 그것을 넘어섰고, 다시 닥쳐온 한계를 또 넘어섰다.
비록 내상을 입긴 했지만 그래도 거듭 한계를 넘은 덕분에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진짜 한계에 다다르자 내공의 사용 범위가 넓어졌다. 혼자서 하는 수련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성취이자 기연이었다.
“여긴가?”
단형우의 무심한 중얼거림에 한호혁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여기가 바로 천중산입니다. 아마 아직 무사하다면 이곳에 있을……!”
한호혁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단형우가 한 발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한호혁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 단형우의 모습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정말로 그냥 사라진 건 아니겠지.”
한호혁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저 단형우가 너무 빨라 자신이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천중산 깊은 곳을 쳐다보던 한호혁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욕심이 생기긴 했지만 한호혁은 현실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제다 저들을 유인할 테니 아가씨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더 깊은 곳으로 피하십시오.”
형표의 말에 조설연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랬다간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최근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결코 쉽게 당하지 않읗 테니 걱정 마십시오. 일단 지금은 아가씨의 안위가 우선입니다.”
형표는 더 이상 조설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뒤돌아 몸을 날렸다. 조설연은 미처 형표를 부르지 못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잠시 형표가 있던 곳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쟁자수들을 돌아봤다.
“서둘러요.”
조설연이 더욱 속도를 올리자 쟁자수들이 굳은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힘들었지만, 죽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결코 뒤쳐질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형표가 어떤 각오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형표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형표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살아남아야 할 때였다.
조설연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지만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이놈들아, 여기다! 하아압!”
형표가 소리치며 추적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열심히 쫓아가는 데 집중하던 추적자들은 갑작스런 형표의 행동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채채채챙!
형표의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어쨌든 만년 표사의 실력을 그다지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렬한 기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추적자들의 발을 잠시 묶는 데 성공했다.
“제법이군. 하지만 넌 선택을 잘못했다.”
형표의 검을 막은 사내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검을 한 번 떨쳤다.
쉬익!
챙!
형표는 가까스로 그 검을 막으며 연방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대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사내의 입가에 맺힌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스팟!
사내의 검이 다시 하늘을 수놓았고, 날카로운 검기 한 가닥이 형표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스걱!
“크윽!”
형표의 등에 정통으로 파고든 검기가 등짝을 마구 해집었다. 하지만 형표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뭣들 하는 건가. 저놈이 해약을 가지고 있으면 어쩔 셈이지?”
사내의 말에 발을 멈췄던 추적자들이 그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도망가는 형표의 뒤를 쫓아 몸을 날린 사내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고 살기를 피워 올렸다.
형표는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었다.
운이 좋다면 조설연과 쟁자수들은 무림맹의 그늘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남표국의 억울한 누명을 무림맹의 힘으로 벗겨낼 수도 있었다.
물론 운이 아주 좋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운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더 열심히 발을 놀려야 했다.
그렇게 일각이나 도망 다녔다. 그것도 일행이 도망간 곳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지만 그 대가로 형표는 많은 상처를 입어야 했다.
마침내 형표는 추적자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말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다니는군.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형표에게 검기를 날렸던 사내가 살짝 분노를 담아 중얼거렸다. 사내는 하남 낙양에게 가장 큰 문파인 천의문(天意門)의 제자였다.
천의문은 이번 고독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문파였다. 사내는 천의문에서 그리 높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고독에 당하지 않은 제자들 중에서는 가장 강했다.
천의문의 위세가 위세인만큼 추적자들을 은연중에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비록 실제 무공은 추적자들 중 최고라고 볼 수 는 없었지만, 그래도 문파의 위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내가 검을 슬쩍 들어올렸다.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다. 살아 있어야 뭔가를 얻어낼 수 있을테니까.
“이제 슬슬 포기하는 게 어떤가? 고독을 해독하는 방법을 말하면 너만큼은 살려 주지.”
사내의 말에 형표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애초에 알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않은 일을 뒤집어씌우는 게 천의문에서는 당연한 일인가 보군.”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사내의 검이 거칠게 움직였다.
피피피핏!
형표의 감슴에서 핏줄기들이 솟구쳤다. 형표는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두면 피를 많이 흘려 죽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라. 하남표국의 총표두라는 자가 그런 것도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그저 이름뿐인 총표두라서 그런 건가?”
사내의 비아냥에 형표가 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훗, 내가 모자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남표국이 이대로 끝날 거라고는 생각지 마라.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남아 있는 사람? 누가 있다는 거지? 조설연? 그 어린 계집이 하남표국을 예쩐의 절반까지라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십분의 일만 되어도 감지덕지지.”
“마음대로 생각해라.”
형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끌고 싶었지만 이젠 그것도 틀린 것 같았다.
사내가 벌써 결심을 굳힌 듯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온몸에서 흘러나오던 살기가 진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나도 기(氣)에 제법 민감해졌군.’
모두 단형우 덕분이다.
형표는 단형우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단형우는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하남표국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위기만 잘 넘길 수 있다면.
‘아가씨, 꼭 살아남아야 합니다.’
형표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며 눈을 감았다.
“정말로 모르는 것 같으니 아쉬울 것도 없군.”
사내가 섬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검을 들어올렸다. 사내의 검에 검기가 아롱거리며 맺혔다.
“잘가라.”
쌔애애액!
검기를 머금은 사내의 검이 형표의 목으로 떨어져 내렸다. 형표를 포위한 사람들은 형표의 목이 떨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