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57
처음에는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를 쳐다보더니 이제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단형우가 걷기 시작하자 일행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단형우는 어딘가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그저 맴돌고 있었다. 일행이 쉬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 것처럼 행동했다.
결국 조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형우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뭔가를 찾고 계신 건가요?”
단형우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여기로군.”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형우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하다못해 숲에 흔하게 있는 나무나 바위조차도 없었다.
“뭘 찾으셨는데요?”
단형우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다 데려와라.”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의 표정에 잠깐 의아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그녀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을 부른 것은 조설연이었찌만, 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단형우가 자신들을 부른 것이었다. 자연 일행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무슨 일인가?”
가장 먼저 궁금증을 표현한 사람은 당호관이었다. 당호관은 은연중 일행을 이끌었다.
“준비해. 나간다.”
단형우의 말에 일행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형우는 사람들이 놀라건 말건 검을 뽑았다. 검마의 얼굴에 짙은 불신이 깃들었다.
검마는 직접 검을 휘둘러 진법을 상대해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피부에 와 닿는 정도로 진법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마치 허상을 상대하는 듯했다. 그래서 포기한 것이다.
진 내부에서는 기의 흐름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진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단형우가 검을 들어올렸다.
검마는 그 모습을 보며 더욱 짙은 불신의 기색을 비쳤다. 아무런 기운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 때문에 기의 흐름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단형우가 기를 움직였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헌데 지금은 정말로 그저 검을 들어올렸을 뿐이다.
스윽.
단형우가 검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형우가 그은 검의 궤적을 따라 공간이 갈라진 것이다.
갈라진 틈으로 주변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비쳤다.
일행은 너무나 놀랐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단형우가 갈라진 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단형우가 들어간 틈으로 일행이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결국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가득 안은 채 뛰어든 검마를 마지막으로 갈라진 틈이 사라졌다.
조설연이 예상했듯이 진법으로 막혀 있는 천중산 중심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는 무리를 이뤄 몸을 드러내고 있었고, 또 일부는 은밀하게 몸을 감추고 있었다.
몸을 드러낸 쪽은 무림맹을 중심으로 모인 무인들이었고, 숨어 있는 쪽은 천마성을 비롯한 신강과 청해에서 온 마인들이었다.
무림맹주 독고운은 내심 자신이 직접 나서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인들이 득실거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일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마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독고운 옆에 제갈중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미혼진인데, 미심쩍은 부분이 좀 많습니다.”
“그래, 진을 통과할 수는 있겠는가?”
제갈중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냥 통과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진을 완전히 해체해야 할 듯합니다.”
“으음, 해체라……”
독고운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진을 완벽하게 이해해서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그래야 뒤따라온 마인들보다 훨씬 시간적 여유를 많이 가질 수 있게 된다.
마인들의 경우에는 보통 이렇게 복잡한 진법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게 마련이다. 어쩌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제갈세가보다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제갈중천은 세가의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동원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진을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 진은 해체는 쉬워도 통과는 불가능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독고운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해체하게.”
독고운의 명이 떨어지자 제갈중천이 즉시 고개를 돌리고 제갈세가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외쳤다.
“린아, 시작해라.”
제갈중천의 명이 떨어지자 한 소녀가 사람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진이 해체되어 갔다.
독고운은 점점 변해 가는 앞쪽 풍경을 바라보다가 해체를 지휘하는 소녀를 슬쩍 쳐다봤다.
“손녀인가?”
제갈중천의 입가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백봉이라 불린다는 그 아이로군.”
제갈중천은 흐뭇한 눈으로 그의 손녀를 쳐다봤다. 삼봉이화(三鳳二花)의 일인이자, 제갈세가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백봉 제갈린이었다.
제갈린은 제갈세가에서 가장 뛰어난 진법가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천기자가 설치해 놓은 미혼진의 해법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체는 너무나 쉽고 간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해체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진법인데 거기에 제갈세가의 인재들이 달라붙으니 그야말로 순식간에 진이 해체되고 있었다.
진이 해체되는 동안, 그동안 진에 가려져 있던 부분이 흐릿하게 변하고 있었다. 진이 완전히 발동하고 있을 때는 전혀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독고운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무작정 진을 들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될 것입니다. 눈치채게 못한다면 끝없이 그렇게 맴돌다가 진이 완전히 빠져 버립니다. 사실 진 안에서는 체력이나 기의 소모를 훨씬 심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진의 특징입니다.”
독고운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진에 먼저 들어간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독고운이 이곳에 도착한 후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아마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탈진 직전에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가장 유리하긴 하군.”
“그렇습니다. 지형을 살피면, 이쪽으로밖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요.”
흐릿해진 풍경이 다시 또렷해졌다. 물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천중산의 중심부로 통하는 길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했다.
“오라고 손짓하는군.”
독고운이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무림맹 무사들이 따랐다.
무림맹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그때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무림인들이 앞 다퉈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틈에 섞인 마인들이 역시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천중산이 조용해졌다.
틈에서 나온 일행은 드디어 천기자의 비동으로 가는 길에 올라섰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길이 보였고, 그 길은 천중산의 중심부로 뻗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진을 파괴한 것도 아니고 잘라 내다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가?”‘
검마는 계속해서 단형우에게 그것을 물었다. 하지만 단형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형우가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자, 검마도 포기해 버렸다. 사실 대충 어떻게 했는지 눈치를 채긴 했다.
단형우는 기의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듯했다. 그래서 그 흐름의 틈을 갈라낸 것이다.
‘기의 흐름이 일순 끊겼을 거고, 그 얘기는 진법에 구멍이 생겼다는 뜻이지.’
검마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주 수준이 낮은 진에나 해당되는 방법이었다. 천기자가 설치한 이 진은 너무나 대단해서 검마조차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대단한 진이 단순히 흐름을 잘랐다고 갈라질 리는 없었다. 좋은 진일수록 기의 유동적인 흐름이 뛰어난 법이다. 갈라진 흐름은 순식간에 메워진다. 검마는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단형우는 검마가 그리 싫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무나 익숙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거부감도 별로 들지 않았고, 죽이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뭔가를 묻는다면 대충이나마 답해 줄 용의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마의 질문에 답해 줄 수 없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단형우가 이렇게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들게 된 것은 진법때문이었다. 진법을 가르는 순간 느꼈던 작은 뭔가가 단형우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단형우는 단순히 검을 휘둘러 진을 갈랐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진을 잘라 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라진 진의 단면에는 더 이상 기(氣)가 모여들지 않았다.
그 한 번의 휘두름이 단형우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했다.
‘합일(合一)……’
검을 내리그은 그 순간, 단형우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 바로 합일이었다.
합일은 단형우가 지옥에서 홀로 살아가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는 계속해서 생각하는 화두였다.
기의 합일은 오래 전에 이루었다. 천지인(天地人)의 기를 하나로 합일하는 것이 단형우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이었다.
삼재기공은 천기와 지기를 몸에 끌어 모으는 심법이었다. 거기까지가 바로 천기자가 만든 삼재기공이었고, 단형우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합일을 이루었다.
이는 천기자조차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전혀 새로운 삼재기공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걸음의 합일도 지옥에서 나오기 직전에 이루었다.
천기자 만든 보법은 삼재보였다. 천보(天步), 지보(地步), 인보(人步)로 나뉘는데, 그 역시 지옥에서 오래 살아남으며 원형을 잃어버릴 정도로 변화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합일을 이루었다.
남은 것은 검법뿐이었다. 삼재검법(三才劍法), 천기자가 남긴 검법이었지만, 역시 원형을 완전히 잃은 전혀 새로운 검법이 되었다. 그리고 아직 검법의 합일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 경지를 한 번 엿보긴 했는데, 덕분에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지옥의 치열함이 사라져 더 이상 강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검의 합일은 은연중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평화로움……’
단형우는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갈망하던 그 평화와 여유가 바로 검의 합일로 가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었음을.
방금 전 그 일 검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단형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할 일이 또 생겨버렸다. 여기까지 올라섰는데 마지막 합일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단형우가 고개를 돌려 조설연을 쳐다봤다.
조설연은 지금 우문혜, 당문영과 뭔가를 얘기하며 걷고 있었다. 단형우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조설연 덕분에 할 일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단형우는 그것이 즐거웠다.
사람들과 계속해서 만나고 부딪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조설연이 너무 좋았다.
“좋군.”
단형우의 의미 모를 중얼거림에 검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여기가 입구인가 보네요.”
당문영이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동굴 입구를 조심스레 살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장 들어가 버렸겠지만 당문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후, 동굴을 면멸히 살폈다.
“과연, 기관 장치가 있었군요.”
동굴 입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들이 잔뜩 있었다. 아마도 그 안에서 뭔가가 나와 동굴을 지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일단 이걸 해체해야겠죠?”
당문영의 말에 검마가 앞으로 나섰다.
“언제 일일이 기관을 해체하고 있느냐, 그냥 부소고 가면 되지.”
검마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동굴 입구를 향해 휘둘렀다.
파츠츠층!
검마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막강한 경기(勁氣)가 동굴을 때렸다.
콰과광!
바위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동굴은 멀쩡했다. 검마의 검으로도 동굴의 돌 부스러기 하나 떨어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검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잘난 듯 나서서 해결하지 못하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검을 휘둘러서 마음대로 못 한 것은 천마와 단형우가 유일했다.
헌데, 천기자의 비동을 찾는 동안 그것이 두 개나 더 늘어버렸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검마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리고 검에서 칙칙한 기운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짙은 마기였다.
처음에는 연기처럼 흘러나오던 마기가 결국에는 형체를 이뤘다.
검강(劍强)이었다.
새까만 검강이 검에서 한 자나 솟아나왔다.검마는 묵빛 검강을 휘둘러 다시 한 번 동굴을 때렸다.
콰과과과광!
어마어마한 폭음이 사방에 울렸다. 그리고 결국 동굴 입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하지만 그뿐이었다. 금이 간 동굴 벽은 여전히 멀쩡했으며 돌 부스러기도 떨어지지 않았다. 검마는 인상을 쓰며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콰광!
콰드드드!
결국 동굴 입구가 부서져 내렸다. 금이 갔던 천장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왔고, 입구에 수북이 쌓였다.
“후우우……”
검마는 그제야 속이 좀 풀렸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부쉈으니 충분했다.
“이제 됐겠지?”
검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굴 입구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ㅡ!
마치 돌이 긁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당호관이 소리쳤다.
“모두 피해!”
당호관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동굴 입구에서 최대한 멀리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몸을 피했다. 움직이지 않은 사람은 단형우뿐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단형우를 부르려는 찰나 동굴 입구에서 뭔가가 쏟아져 나왔다.
촤좌좌좍!
쩌저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