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68
단형우가 그것을 쓸 일은 없지만 왠지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갈린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단형우 방 앞에 걸려 있는 천섬을 들어올렸다.
처음 표국에 온 날부터 매일 천섬을 살폈다. 천섬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함이었고, 혹시 금마공이 이 안에 숨어 있지 않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천섬을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도(刀)였다.
손잡이를 쥐면 청량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어와 몸을 상쾌하게 해 준다. 그리고 도를 휘두르면 뜨거운 기운이 도에 어린다.
제갈린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비밀을 풀어보려 했지만 아직까지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특별한 재료를 쓴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부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남은 것은 도를 잘게 부숴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천섬의 주인도 아닐뿐더러 이런 보도(寶刀)를 부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지만, 이렇게 한계를 넘는 보도를 만드는 것은 하늘이다. 인간의 힘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보도를 어떻게 부수겠는가.
제갈린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천섬을 방 앞에 걸었다.
“그렇게 서 있기만 하시면 힘들지 않나요?”
도를 원래 자리에 놓은 제갈린은 단형우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동안 단형우에게 호기심이 일었지만 제대로 얘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오늘 같은 기회가 쉽게 올 것 같지 않았다.
제갈린이 단형우 옆에서 걸어갔다. 단형우는 그런 제갈린을 가만히 쳐다봤다.
제갈린은 신기한 눈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아무리 살펴도 단형우에게서 강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절정을 넘어선 고수들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세도 없었고, 내공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움직임도 무인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런데도 검마와 검왕이 목을 매고 쫓아다닌다. 그 이유가 정말 놀라웠다.
단형우라는 사내를 이기기 위해서라니. 그럼 검왕과 검마를 이길 정도의 고수라는 뜻 아닌가.
제갈린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어쨌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문혜.’
제갈린이 놀란 것은 우문혜도 있었다. 처음 우문혜를 봤을 때, 경악을 넘어설 정도로 놀랐다. 우문혜는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 질투심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제갈린도 스스로를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아니, 사실은 조금 자신했다. 자신과 비견될 만큼 예븐 여자들은 거의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 자신감은 우문혜를 만나면서 여지없이 깨졌다.
그 우문혜가 단형우를 쫓아다닌다. 마음을 얻기 위해서. 미소를 얻기 위해서.
제갈린은 다시 한 번 단형울를 살폈다. 어디에도 특별함은 보이지 않았다.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세가의 공자들처럼 미남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손색이 있었다. 물론 사내다운 얼굴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우문혜뿐 아니라 조설연도 마음에 있는 것 같던데.’
그 정도면 가히 대단하다 하지 않겠는가.
“소협은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에요.”
제갈린의 말에 단형우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앞으고 고개를 돌린 단형우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제갈린은 그런 단형우의 행동에 흠칫 놀랐다.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한 행동이 은근히 불쾌했다.
지금까지 이런 행동을 보이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백봉 정도는 눈에도 안 찬단 말이지?’
“볼일이 끝났으면 가라.”
단형우의 말에 제갈린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살짝 분노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소원이시라면 그렇게 해 드리죠.”
제갈린은 분을 참지 못하고 살짝 씩씩대며 걸어 나갔다. 단형우는 그런 제갈린의 행동과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깊은 생각의 늪으로 침잠해 들었다.
며칠 후, 단형우는 표국 문을 나섰다. 정천맹의 개파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조설연과 형표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표국을 나설 수 있었다.
여전히 마음에 깃든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일단 어딘가로 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정천맹이 위치한 곳은 호남(湖南) 장사(長沙)였다. 장사는 단형우도 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형산에서 나와 처음으로 들른 도시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리고 처음 조설연을 만난 곳이기도 했다.
“소면이 먹고 싶군.”
나직하게 중얼거린 단형우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정천맹에는 단형우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형우 뒤로 검마와 검왕이 따랐고, 검마가 가니 당연히 하원후와 다섯 승룡단이 따랐다. 그리고 제갈린이 함께였다.
제갈린은 단형우가 천섬을 가져간다는 핑계를 따라가긴 했지만 사실 더 이상 천섬에 관심이 없었다. 천섬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은 이제 포기해 버렸다.
대신 단형우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놈아, 어떠냐? 이제 좀 달라진 것 같으냐?”
검왕의 말에 단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검왕과 검마가 나란히 서서 따라오고 있었다. 단형우는 다시 앞을 쳐다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렇게 대답한 단형우가 속도를 더 높였다.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일행이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력이 가장 딸리는 승룡단 다섯이 조금씩 뒤처졌다.
“단 소협! 속도를 조금만 늦추시오! 동료들이 따라오질 못하고 있소!”
하원후가 급히 외쳤다. 하지만 단형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헉!”
이번에는 하원후도 깜짝 놀랐다. 갑자기 단형우의 등이 멀어졌기 때문이다. 하원후는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신히 단형우를 따라잡았다.
남은 사람은 검마와 검왕, 그리고 하원후와 제갈린이었다. 검마와 검왕은 여유롭게 발을 놀렸고, 하원후와 제갈린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애를 썼다.
제갈린 역시 백봉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여인이었다. 비록 하원후보다는 못하지만 신법은 오히려 더 뛰어난 감이 있었다. 덕분에 힘들긴 해도 뒤처지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출발한 일행은 해가 중천을 넘어설 때까지 그 속도로 달려야 했다. 결국 승룡단 다섯은 떨어져 나갔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처진 것이다. 어쩌면 포기하고 중간에서 쉬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원후는 숨을 헐떡이며 밤에 자는 동안 승룡단이 찾아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마저도 하원후의 바람으로 끝났다.
쉬는 동안 정말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시 단형우를 따라 달려야 했다. 오후에는 오전보다 훨씬 힘들었다.
그렇게 해가 넘어갈 때까지 달린 결과 일행은 비교적 큰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오, 오늘은 여기서 쉬는 거겠죠? 어, 어서 씻고 싶어요.”
제갈린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녀의 온몸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일행은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으로 들어가 후원을 통째로 빌렸다. 모든 재정 관리는 제갈린이 했다.
형표는 단형우에게 돈을 맡길 수 없어 제갈린에게 여비를 전해 줬다.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갈린은 제갈세가의 여식, 돈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돈을 아껴본 적이 없었다. 형표가 전해 준 돈은 제갈린이 가지고 있던 돈과 합해졌고, 모든 비용을 제갈린이 지불했다.
사실 형표가 전해 준 돈으로 이런 후원을 빌리며 여행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갈린을 가능했다.
후원에 도착한 제갈린은 가장 마음에 드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준비된 목욕물을 이용해 몸을 씻기 시작했다. 낮동안 쌓인 먼지와 땀을 씻어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편 방에 들어간 검마와 검왕은 단형우 앞에 앉아 있었다.
“거 참, 아직도 못 앉는 게냐?”
검왕은 그렇게 말한 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게냐? 설마 그 다섯을 떨어뜨리려 한 거냐?”
검왕의 질문에 단형우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쫓아오나 보려고 한 겁니다.”
검왕도 검마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형우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쫓아오더군요.”
단형우가 하얗게 웃었다. 검왕과 검마는 그 웃음에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 섬뜩하고 무서운 웃음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렇게 웃지 마라. 이놈아.”
검왕은 그렇게 말한 후 가슴을 슬쩍 쓸어내렸다. 그리고 검마를 쳐다봤다. 마침 검마도 검왕을 쳐다보고 있었기에 둘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고 단형우를 쳐다봤다.
“끄래, 네가 보기에 우리가 얼마나 변한 것 같으냐? 한 번 싸워 볼 테냐?”
검왕의 말에 단형우가 간단히 대답했다.
“죽고 싶다면.”
단형우의 대답에 검왕과 검마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이놈 말하고는. 쯧쯧……”
검왕과 검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오늘처럼 달릴 생각인 게냐?”
검왕의 물음에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단형우의 대답에 검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뭐 알아서 하거라. 네 일이니까. 그나저나 쟤들은 내일 불쌍해서 어떻게 보나……”
검왕의 중얼거림이 꼬리처럼 뒤에 남았다. 검왕과 검마는 밖으로 나가 후원에서 잠시 몸을 풀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단형우는 방 안에 있는 침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나온 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서서 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여기는 세상이지 지옥이 아니지 않은가.
단형우는 침상으로 천천히 걸아갔다. 그리고 침상 위에 앉았다.
순식간에 인상이 일그러졌다.
“어색하군.”
어색하다기보다는 불편했다.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불안감이 등 뒤로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당장이라도 땅속에서 뭔가가 튀어올라와 자신을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밥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첫날 소면을 먹을 때도 하지 않았는가.
침상에 앉은 단형우는 드디어 눕는 것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침상에 완전히 올라간 후, 천천히 몸을 뉘었다.
벌떡!
단형우는 눕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눕는 순간 뭔가가 등을 꿰뚫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땅속에 숨어 있는 마물이 길고 날카로운 촉수를 뻗어 등을 찌를 것만 같았다.
실제 지옥에 있을 때는 그런 식으로 촉수에 찔려 온몸에 체액을 깨끗이 마물에게 빨리고 죽어간 동료도 있었다.
“쉽지 않군.”
단형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매일 시도할 생각이었으니까. 여기는 지옥이 아니다. 세상이다. 마물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다음 날도 일행은 빠른 속도로 달려가야 했다. 하원후와 제갈린은 죽을 맛이었지만 검왕은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셨다.
“아깝군. 그놈을 데려왔으면 좋은 수렴이 되었을 텐데.”
검왕이 말하는 그놈이 바로 종칠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검왕이 이 말을 할 때, 종칠은 하남표국 연무장에서 때 아닌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하원후와 제갈린은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더 이상 단형우를 쫓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점점 분노가 치밀었다. 이건 분명히 자신들을 떼어 놓으려는 수작이었다.
“이건 너무하지 않소!”
결국 하원후가 소리쳤다. 하지만 단형우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더욱 속도를 높였다.
“허억!”
소리치느라 호흡이 꼬인 하원후는 크게 뒤처지고 말았다. 제갈린은 그런 하원후를 앞질러 검마와 검왕 뒤에 바짝 붙었다.
그녀는 말도 아꼈고, 호흡도 아꼈다. 그렇게 해서 끈질기게 단형우에게 붙었다.
한 번 호흡이 꼬여 뒤쳐진 하원후는 긴장의 실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계에 부딧 몸이 반란을 일으켰다.
쿠당탕!
바닥에 꼴사납게 널브러진 하원후는 하늘을 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따. 결국 정오가 지난 시점에서 하원후도 일행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날도 열심히 달린 덕에 해나 넘어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날 무렵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꽤 큰 마을이었다.
검왕은 마을에 들어서며 단형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길은 알고 있는 게냐?”
검왕은 정말로 혹시나 해서 물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검왕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단형우가 고개를 저은 것이다.
“뭐라고? 그럼 길도 모르면서 앞장서서 달렸단 말이냐? 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검왕은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것은 검마나 제갈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단형우를 따라 달리기만 한 것이다.
단형우는 그런 일행을 슬쩍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남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물이 나오고, 그 물에 배를 타면 된다고 했는데, 아닌가?”
단형우의 말에 검왕이 입을 다물었다. 틀리지는 않다. 허창에서 남쪽으로 계속 가면 장강에 합류할 수 있었다.
방향만 잘 맞추면 무한을 지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식한 방법이었다.
“설마, 그래서 산이고, 들이고, 가리지 안고 그냥 똑바로 뛴거라고?”
단형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내일부터는 내가 앞장설 테니 네놈이 따라와라. 너무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
검왕의 말에 검마와 제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길로 가는 것이 좋을 듯 했다. 하지만 단형우는 정말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따로 가지.”
단형우의 말에 검왕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살짝 짜증을 섞어 대꾸했다.
“에잉, 마음대로 해라. 며칠만 더 고생하지 뭐.”
검왕이 물러나자 검마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검왕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 뭘 봐? 그렇게 못마땅하면 네놈이 직접 해 보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