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69
검왕의 말에 검마가 고개를 돌렸다. 검마도 단형우를 당할 수는 없었다. 아니, 검마는 오히려 더 힘들었다.
아직까지 검마의 몸과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그때의 강렬한 기억 때문이었다. 제갈린은 검마와 검왕이 다투는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일도 이런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치가 떨렸다. 어쨌든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다. 따끈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일행은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제갈린은 홀로 별빛을 받으며 후원 뜰을 거닐었다. 낮에는 쉴 틈 없이 달려야 하니 이렇게 밤이라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사실 잠을 자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잠도 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단형우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른 속도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달리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다. 소문대로 검왕과 검마를 일 검에 제압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제갈린은 하마터면 검왕에게 직접 물어볼 뻔했자. 정말로 단형우에게 단 한 수만에 졌느냐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칫 검왕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검왕이나 검마는 그 한 사람만으로 충분히 무서운 존재였다.
“하아, 대체 알 수가 없구나.”
제갈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흠칫 놀랐다. 후원에 서 있는 사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 단 소협.”
그는 단형우였다. 단형우는 가만히 서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갈린은 그런 단형우를 보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설레거나 하는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여기서 뭘 하시죠?”
제갈린의 질문에 단형우가 고개를 슬쩍 내려 제갈린을 한번 쳐다봤다. 단형우의 서늘한 눈빛이 제갈린의 동공을 파고 들었다.
“별.”
단형우는 그 말 한 마디만 남기고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제갈린은 단형우의 그런 반응에 슬쩍 웃었따. 가만 보면 이상하지만 어떻게 보면 한없이 단순한 사람이었따.
“별을 좋아하시나 보죠?”
단형우는 하늘을 바라본 채로 대답했다.
“아니, 처음이거든.”
“예?”
제갈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처음이라니 대체 뭐가 처음이란 말인가.
“설마 별을 처음 보신다는 건 아니죠?”
제갈린은 슬쩍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저 가벼운 농담이었다. 분위기를 조금 부드럽게 하기 위한.
하지만 분위기는 부드러워지지지 않았다.
“별이 떠 있는 하날을 올려다본 건 지금이 처음이다.”
단형우의 대답에 제갈린은 그대로 경직되었다. 다시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설마 정말로 별을 처음 보는 줄은 몰랐다.
사실 단형우 입장에서는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 회색의 세상에는 밤낮 구분이 거의 없었다. 분명히 반과 낮이 존재하긴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밤에는 마물들이 훨씬 강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곳의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세상에 나오고 나서 단형우는 처음에는 새파란 하늘만 쳐다보고 살았다. 지옥에 없던 것이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밤하늘을 발견했다. 그동안은 신경조차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에 반해 버렸다.
“아름답군.”
단형우의 중얼거림에 제갈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그래도 감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갈린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단형우 옆에 계속 서 있었다. 마음속에는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라고 마구 소리치는데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단형우는 그 이후로 한참이나 서서 하늘의 별을 바라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단형우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제갈린을 쳐다봤다.
“뭐지?”
단형우의 질문에 함축된 의미를 제갈린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누구보다 명석했고, 이해력도 빨랐다.
“궁금한 게 있어요. 정말로 두 어르신을……”
제갈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단형우가 그녀의 말을 잘라 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답으로.
“내가 더 강하다.”
단형우의 말에 제갈린은 입을 다물었다. 본인에게 직접 들은 말과 소문은 확실히 와 닿는 정도가 다르다.
“정말로 일 검에……”
“아직은.”
제갈린은 단형우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속으로 저 말이 과연 진짜일까를 계산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재고 있는 자신이 왠지 서글프고 싫어졌다.
“뭔 얘기들을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 게냐?”
제갈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검왕이 허허롭게 서 있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느냐?”
검왕의 질문은 그녀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어찌 되었건 이건 검왕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가 무조건 잘못한 것이다.
“저, 저는……”
“됐다. 변명할 필요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그뿐인 것을.”
검왕의 말에 제갈린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단형우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검왕은 단형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아직은 일 검밖에 안 필요하다 이거지?”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왕이 크게 웃었다.
“허허허헛! 그래, 좋아. 가능성은 있는 모양이야. 허허헛!”
검왕의 말에 제갈린은 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이야. 이제 슬슬 들어가서 자지 않으면 내일 힘들어질게다. 장강이 있는 곳까지 가면 배를 타고 좀 편하게 가자꾸나.”
검왕의 말은 부드럽고 인자했다. 제갈린은 하마터면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급격하게 변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의아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별빛이 뜰에 쏟아져 내렸다.
단형우는 그 빛을 막으며 그렇게 계속 서 있었다. 새벽의 미명이 별빛을 모두 몰아낼 때까지.
천섬(天閃)
다음 날부터 단형우는 현저히 속도를 떨어뜨렸다. 마치 그동안 빠르게 달린 것은 전부 하원후와 승룡단을 떼어 놓기 위해서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제갈린은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단형우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떼어 놓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냥 힘으로 눌러 버릴지언정 도망을 갈 사람은 아니었다.
어쨌든 속도를 떨어뜨린 덕분에 제갈린은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여유도 생겨났다. 그동안 달리느나 조금도 볼 수 없었던 주변 풍경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원.”
검왕의 투덜거림과 함께 단형우가 걸음을 멈췄다. 일행은 의아한 눈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물이군.”
단형우의 말에 제갈린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따. 그리고 몸을 날렸다. 반각 정도 신법을 최대한 전개해서 달려가니 물이 보였다. 장강(長江)이다.
“세상에…… 얼마나 빨리 달려온 거야?”
제갈린은 내심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의 고생이 떠올라 몸을 부를 떨었다. 그렇게 고생을 했으니 벌써 장강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배를 타고 편하게 장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아마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단형우가 또 달려가자고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제갈린은 서둘러 배를 구했다.
보통 세가 사람들과 움직일 때, 이런 일은 다른 사람이 하기 마련이다. 꼭 세가 사람과 움직이지 않고 다른 누구와 움직이더라도 제갈린이 이런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해야만 했다.
제갈린은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다만 최대한 빨리 배를 구했을 뿐이다.
제갈린이 구한 배는 상당히 괜찮았다. 그리고 배를 몰 선원들도 몇 구했다.
예상보다 훨씬 여행 기간이 단축된 덕분에 돈이 너무 많이 남았다. 아끼는 것도 좋지만 제갈린은 절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일행이 모두 배에 올라타자, 배가 출발했다. 장강을 따라 남족으로 내려가다 보면 동정호가 나오고, 그 동정호를 지나면 바로 장사다.
일행이 탄 배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빠르고 괜찮았다. 선원들도 숙련된 솜씨를 가지고 있어서 예상보다 더 빨리 장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다른 일만 없다면 말이다.
배의 선실, 단형우가 가만히 서서 탁자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천섬이 보였다.
그동안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왠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들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배에 올라타고 나서부터 갑자기 관심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천섬에 관심이 생긴 게 아니라 천섬이 가지고 있는 기(氣)에 관심이 생겼다.
천섬(天閃)이 가진 기는 천뢰(天雷)와 닮아 있었다.
천섬은 틀림없이 천기자가 만들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천기자가 만든 삼재검법으로는 지금 단형우가 쓰는 것과 같은 펀뢰를 펼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그 안에 천뢰와 닮은 기운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천기자가 삼재검법이 결국 천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예측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천섬에서 흐르는 기는 크게 손잡이와 도신, 둘로 나뉘어 있었다. 손잡이에서는 한기(寒氣)가 끊임없이 생성되어 흘렀고, 도신에서는 온기(溫氣)가 끊임없이 흘렀다.
그리고 도를 휘두르면 그 두 기운이 부딪쳐 궁극적으로 뇌기(雷氣)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꽤 오랜 수련과 요령이 피룡하지만 말이다.
단형우는 천섬을 들어올려싸. 그리고 내리쳤다.
파지직!
천섬이 아래로 떨어지면 순간적으로 뇌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도신에서 뇌전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흘렀다.
단형우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훌륭한 수준이었다. 진짜 천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이것은 순수하게 천섬만으로 만들어 낸 뇌기였다.
그저 요령껏 휘두르기만 하면 이렇게 뇌기를 뽑아낼 수 있으니 대단한 무기였다.
단형우는 그것을 몇 번 더 휘둘렀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도를 휘두를 때마다 뇌전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파바바박!
조금 더 강하게 휘두르니 뇌전이 살짝 쏟아져 나갔다. 단형우는 천섬을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봤다.
천섬이 만들어 낸 뇌전은 강렬하진 않지만 끈질겼다. 뇌전을 길게 뽑아 채찍처럼 만들어 쓸 수도 있었다.
그렇게 천섬을 한 시진 정도 휘둘렀다. 그리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알만한 건 다 알았다.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제 남은 호기심은 천기자가 이것을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만들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기자가 만든 삼재검법으로 과연 지금의 천뢰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검법에 대한 고민은 단형우를 상당히 즐겁게 했다. 그동안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궁리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즐거움을 위해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 같지만 다른 사실이 단형우를 너무나 즐겁게 만들었다.
단형우가 그렇게 고민을 하며 서 있는 동안 제갈린은 선실 밖에서 방 안에 있는 단형우를 살피고 있었다.
단형우가 천섬을 휘둘러 뇌기를 뽑아내는 광경도 모두 볼 수 있었다. 뇌기를 이용해 채찍을 만들어 내는 광경은 경이 그자체였다.
“저걸 가지면 천하무적이겠네.”
제갈린이 중얼거렸다. 왜 아니겠는가. 벼락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 제갈린의 뒤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흥, 무기의 이점으로 천하제일이 된다고?”
제갈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검마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제갈린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검마는 그런 제갈린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저걸 들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검마의 말에 제갈린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뇌전을 다룬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힘의 차이가 너무 심한 검마나 검왕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알고 있었다.
무기만으로 천하제일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제갈린도 안다. 그저 너무 대단한 무기를 봐서 자신도 모르게 한 말일뿐이었다.
“그리고 저 무기를 든다고 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도 아니지.”
검마의 말은 힘없이 숙이고 있던 제갈린의 고개를 단번에 다시 들어올리게 했다.
제갈린의 눈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알고 있던 것 아니었나? 소문이 그렇게 퍼졌는데.”
검마의 말은 소문은 사실이라는 뜻이다.
제갈린이 고개를 돌려 단형우를 다시 쳐다봤다. 전혀 새롭게 보였다.
어젯밤 검왕이 얘기를 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충격이 컸다. 그만큼 제갈린이 검마를 무서워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모, 몰랐어요. 생각도 못했는데……”
“소문이 오히려 좀 모자라지. 난 그저 기세에 눌리는 것만으로 마공이 박살났으니까.”
검마의 말에는 약간의 자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제갈린은 이제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었다.
검마의 눈이 한순간 강렬하게 빛났다.
“그래도 이렇게 끝나지는 않는다.”
검마의 몸에서 은은하게 기세가 피어올랐다. 검마의 기세에는 마기가 섞여 있기 때문에 제갈린을 괴롭게 했다. 제갈린은 숨이 턱 막혔고, 그 순간 마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내가 너무 흥분했군. 미안하다.”
검마는 그렇게 사과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보지 않아도 검왕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고부터, 아니 그 이전 언젠가부터 검왕과 검마는 자주 어울렸다.
하지만 제갈린은 지금 검마가 사라진 사실보다 검마가 자신에게 사과를 했다는 사실에 더 크게 놀랐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검마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