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82
이번 침묵은 상당히 길었다. 단형우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무거운 기세가 사방을 짓눌렀다. 덕분에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단형우가 문득 손을 등 뒤로 뻗었다. 그리고 등에 걸려 있던 천섬을 잡았다.
“인연을 찾았군.”
단형우의 중얼거림이 딱딱하게 굳은 방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검왕이 궁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단형우는 천섬을 등에서 떼어 검왕에게 건넸다.
검왕은 천섬을 받아들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하지만 단형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그대로 나가 버렸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단형우의 그런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특히 검왕은 천섬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검왕을 일깨운 것은 제갈린이었다.
“단소협은 인연을 찾았다고 하셨습니다.”
제갈린의 말에 검왕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제갈린은 검왕의 손에 들린 천섬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천섬의 주인이 결정되었네요.”
제갈린의 말에 검왕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 그럼?”
“예, 손녀 분께서 천섬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거예요.”
제갈린의 말은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걸 제갈소저가 어떻게 확신하죠? 우리 단 공자님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것도 아님녀서.”
우문혜의 말에 당문영도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리고 천섬은 특별한 사람들이 쓰는 검이에요. 그 기운을 저분이 감당하지 못하면 오히려 큰일 아닌가요?”‘
제갈린은 아쉬운 눈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설명할 것은 설명해야 했다. 그것이 단형우의 뜻이었으니까.
“천섬은 저도 상당히 오랫동안 연구를 했어요. 천섬에는 특별한 기운이 흐르는데 그것이 저분을 도와줄 거예요. 그건 사람의 몸을 해치는 기운이 아니니까요.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별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의 기운에 불과해요. 하지만 저렇게 몸이 약한 분께는 큰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단소협은 분명히 뭐가 다른 것을 발견하셨을 거예요. 저는 볼 수 없는 뭔가를요.”
제갈린의 설명으로도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제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우문혜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단형우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우문혜가 밖으로 나가 버리자 제갈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천섬은 제갈린도 상당히 탐을 내고 있었다.
제갈린은 그동안 단형우가 천섬을 어떻게 다루는지 눈여거 살펴왔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정확히는 배에서 그 화려한 뇌전의 향연을 펼친 이후부터 천섬을 대하는 것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치 미련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그냥 줘 버리려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끔 자신을 쳐다보며 살짝 갈등하는 모습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착각은 절대 아니었는데……’
제갈린은 아쉬운 눈으로 염혜미를 쳐다봤다. 아마 염혜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결국 단형우는 천섬을 자신에게 줬을 것이다. 그건 정말로 확실했다.
제갈린이 그렇게 아쉬워하고 있을 때, 우문혜가 얼굴이 살짝 상기된 채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당히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갈소저의 말이 맞았어요.”
우문혜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천섬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사실보다, 제갈린은 단번에 헤아린 단형우의 마음을 자신은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억울했다. 뭔가 제갈린에게 뒤처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의선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의선이 생각하기에는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염혜미는 정상적으로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도를 주다니. 그것도 세상에 다시 없을 보도라 알려진 천섬을.
“허허, 배포가 큰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건지……”
의선이 중얼거린 이 말은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천섬의 새로운 주인이 결정되었다. 의선문에서.
흑전사의 비밀
염혜미의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깊게 빠져들었던 잠에서 이제야 깨어난 것이다.
눈을 뜬 염혜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염려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검왕의 모습이었다.
“깨어났느냐?”
“할아버지……”
염혜미는 검왕을 부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 전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천형이 되어 항상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고통도 깨끗이 사라졌다.
염혜미는 떨리는 눈으로 다리를 쳐다봤다. 이제 다리만 움직이면 정말로 완벽하다. 염혜미의 다리는 그녀의 의지를 담고 천천히 움직였다.
염혜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침상에서 홀로 내려와 똑바로 섰다.
염혜미의 눈에 감격이 어렸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검왕의 눈에 살짝 물기가 비쳤다.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드디어 손녀의 병을 고친 것이다. 새삼 의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잘 됐어.”
염혜미는 잘됐다고 중얼거리는 검왕을 꼭 끌어안았다. 자신의 병을 고쳐 준, 자신의 고통을 없애 준 할아버지가 너무나 고마웠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감사하다는 인사는 병을 고쳐 준 사람에게 해야지.”
검왕의 말에 염혜미는 그제야 탄성을 지르며 검왕에게서 떨어져 의선을 쳐다봤다. 의선은 흐뭇한 표정으로 염혜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염혜미는 공손히 절을 올렸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수고했다. 본인의 의지가 강했기에 이룰 수 있는 성과이니 너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염혜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제야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치료를 받았던 방에는 검왕과 의선 외에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그것도 모두 여자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런데 이분들은……”
“손님이다.”
검왕의 간단한 대답에 염혜미가 밝게 웃으며 새 여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 그렇군요. 반가와요.”
염혜미의 인사에 제갈린을 비롯한 세 여인들도 마주 인사를 했다. 염혜미가 가지는 분위기가 너무나 밝아 그녀들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린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소녀였다. 자신에게 없는 천성적인 밝음이 있었다. 아마 단형우에게는 이런 밝은 여인이 훨씬 더 어울릴 것이다.
“이제 천섬을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갈린은 속마음을 깊이 가두며 검왕을 향해 말했다. 검왕은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과연 천섬을 자신의 손녀에게 주어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천섬이 무엇인가요, 할아버지?”
염혜미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검왕은 슬며시 천섬을 들어올렸다.
“이게 바로 천섬이란다.”
“와, 굉장히 좋아 보이는 도(刀)네요.”
염혜미는 비록 익힌 무공은 없지만 그래도 검왕의 손녀다. 옆에서 지켜본 시간이 상당하니 누구보다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천섬이 얼마나 대단한 도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도집에서 꺼내지 않아 확실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검왕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이것 참. 그놈을 믿어야지. 별 수 있나.”
검왕은 단형우를 믿기로 결정했다. 그간 옆에서 지켜본 단형우라면, 그리고 자신 따위는 발끝에도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올라선 단형우라면 분명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것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검왕이 천섬을 염혜미에게 내밀었다. 염혜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검왕과 천섬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걸 왜 저에게……?”
“받아라. 앞으로 이것은 네 것이다.”
검왕의 말에 염혜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정말이요? 그럼 이제 저도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된 건가요?”
염혜미의 질문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검왕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것은 네 것이다.”
염혜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은 치료를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병을 완전히 고친다 하더라도 특이한 체질 때문에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충분히 수긍했다.
그리고 염혜미는 무공을 익힐 수 없도 좋다고 생각해다. 그녀에게는 몸을 갉아먹는 고토을 없애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전 그것을 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 그것은 할아버지께서 쓰세요.”
염혜미의 말에 검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검왕의 고민은 옆에 있던 제갈린이 대신 해결해 주었다.
“그 도, 천섬(天閃)은 앞으로 염소저의 것이에요. 다른 누구도 쓸 수 없답니다. 그것의 원래 주인이 염소저에게 주었으니까요. 그분이 염소저를 선택해쓰니까요.”
제갈린이 그 말을 하니 염혜미의 가슴에 뭔가가 와 닿았다. 제갈린은 천섬에 대한 아쉬움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 아쉬움이 말을 절절히 담겨 염혜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전 이것을 휘두를 수도 없는데…… 차라리 저보다 더 필요한 분에게 드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제 이것의 주인은 저라고 했으니 제가 다른 분꼐 드려도 되잖아요.”
염혜미의 말에 제갈린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분노를 살짝 담은 제갈린의 눈빛이 염혜미에게 쏘아져 나갔다. 염혜미는 제갈린의 눈빛을 받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제갈린은 잠시 염혜미를 그렇게 쏘아보다 이내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 버렸다.
염혜미는 너무나 당황해 그런 제갈린의 등을 쳐다보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검왕을 쳐다봤다. 하지만 검왕 역시 약간 엄한 눈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결국 염혜미는 주변의 강압에 못 이겨 천섬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검왕은 염혜미에게 천섬을 넘겨주고 나서 빙긋 웃었다.
“이제 네 것이 되었으니 앞으로 잘 관리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염혜미는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것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에 못 이겨 받았을 뿐이었다.
검왕은 천섬을 받아들고 고민에 잠겨 있는 염혜미를 보며 내심 제갈린에게 감탄했다.
그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염혜미가 천섬을 받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나저나 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네놈은.”
검왕의 뇌리에 단형우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중을 알 수 없어다. 어쨌든 이제 의선문에서 볼일이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허창으로.
‘그러고 보니 아직도 표사로군.’
검왕은 빙긋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매일 손녀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검마가 그곳에서 계속 표사로 있는 한 끝까지 경쟁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차피 남은 세월은 얼마 안 될 것이다. 그동안 검왕이 원하는 거라고는 손녀가 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과, 검의 길을 계속 걸어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단형우는 침상을 노려봤다. 깊은 어둠이 이미 세상을 삼킨지 오래였다. 이제는 자야할 시간이다.
“후우……”
단형우는 그답지 않게 길게 숨을 쉬었다. 오늘로 벌써 몇 번째 시도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들었다. 앉아 있는 것도 힘든데 눕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잡을 자야 한다. 조심스럽게 침상으로 다가간 단형우는 천천히 그곳에 몸을 뉘었다.
땅 속에서 뭔가가 급격히 솟아오르는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것이 실체가 아니란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눈을 감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이 더욱 커졌다. 죽음조차 초월했다고 여겼는데, 그래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
다시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이래서는 전혀 진전이 없지 않은가. 단형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억지로 참고 잠을 청해 보려 하는데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척들 때문이었다.
이렇게 늦은 밤인데도 아직 의선문 안에는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의선문 밖에도 여기저기 움직이는 사람들이 존재했따.
한껏 긴장하고 있었기에 감각이 너무나 예민한 상태였다. 덕분에 그런 알 필요 없는 기척들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차단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누워 있으니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게 조금 더 노력을 해 보려고 눈을 감았는데, 의선문 밖에서 느껴지던 기척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방에서 담을 뛰어 넘었는데, 움직임이 은밀하기 그지없었다.
전혀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단형우는 일단 신경을 끄고 누워서 자는 것에 열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그들의 움직임이 계속 거슬렸다.
결국 단형우는 침상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침상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니, 너무나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과연 굳이 이렇게 힘들게 누워서 잘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방문을 연 단형우의 몸이 어둠 속에 녹아 들어갔다.
흑의에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어둠에 몸을 숨겨 의선문의 담장을 넘었다. 담장을 넘은 흑의 복면인들은 은밀하게 몸을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행동은 흡사 뭔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움직여 의선문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의선문에는 아직 잠을 자지 않고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번을 서는 무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흑의 복면인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은밀했다.
흑의 복면인들은 결국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의선문 깊숙한 곳, 왠지 허름해 보이는 건물 앞에 모인 그들은 조심스럽게 건물의 문을 열었다.
굳게 잠긴 문이었지만 흑의 복면인 중 하나가 나서서 손을 몇 번 움직이자 간단하게 문이 열렸다. 문 안으로 스며들어간 흑의 복면인들은 눈을 빛냈다. 그들이 찾던 것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 안에 늘어선 수많은 나무침상들 위에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아니, 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체였다.
흑의 복면인들은 나무침상 위에 놓인 시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마다 시체를 들쳐 메기 시작했다.
의선문 안으로 들어온 흑의 복면인의 수는 모두 스물이나 되었는데, 그들이 한 명당 시체를 다섯 구 이상씩 들쳐 메야 할 정도로 시체가 많았다.
시체들의 상태는 다양했는데, 목이 잘리거나 팔이 잘린 시체도 있었다. 흑의 복면인들은 그 잔해들도 하나 놓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자루에 시체의 잔해까지 몽땅 챙겼다.
작업이 모두 끝나자 흑의 복면인들이 건물에서 빠져 나왔다. 커다란 시체를 가득 들고 있는데도 은밀함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건물에서 막 빠져 나온 그들은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한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흑의 복면인들은 잠시 몸이 굳었지만 판단력과 행동력은 빨랐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날렸다.
여전히 은밀한 몸짓이었지만, 이동속도는 의선문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빨랐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던 단형우는 그 중 한 사람을 정해 발을 옮겼다.
“컥!”
단형우는 한 걸음으로 흑의 복면인 하나의 목을 쥘 수 있었다. 다른 흑의 복면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누구를 죽인 것도 아니고 살기를 피워댄 것도 아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이들이 훔치는 것은 의선문을 습격했던 흑전사들의 시체였다.
목을 제압당한 흑의 복면인은 즉시 입 안에 감춰둔 독단을 깨물었다. 아니, 깨물려했다. 헌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젠장.’
흑의 복면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게 제압당한 것이다. 과연 단주(團主)가 그렇게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라고 당부에 또 당부를 거듭한 이유가 있었다.
흑의 복면인은 비록 제압당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따. 물론 단형우를 어떻게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단형우에게 당해서 무림맹 형산 지부에 감금된 마염기는 이미 구해냈다.
덕분에 단형우에게 붙잡히면 어떻게 당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기회를 틈타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단형우의 관심이 멀어지게 해야겠지만.
흑의 복면인이 그렇게 궁리하고 있을 때, 단형우는 과연 이 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