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AW novel - chapter 96
“정말로 대단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천기자가 천섬에 만든 진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물론 제갈린 정도나 되니까 그나마도 알아봤자 다른 사람이었따면 이해도 못했을 것이다. 천섬을 연구하면서 진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제갈린은 천기자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엇다. 그리고 그 천재적인 진법의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매일같이 애썼다.
진이란 결국 기의 흐름을 변화시키거나 조절해 원하는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천섬에 새겨진 진법은 그 요체를 너무나도 명확히 꿰뚫고 있어 제갈린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제갈린이 한창 연구 삼매경에 빠져 들고 있을 때, 그녀의 방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제갈소자, 계시오?”
제갈린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이 깨져 버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사람이었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고 안으로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하원후였다.
“요즘 너무 바빠 보이오. 아, 그건 천섬 아니오?”
하원후는 제갈린의 방으로 들어서며 천섬을 발견하고는 이채를 띠었다. 천섬은 대단한 보물이다. 그리고 그 주인은 검왕의 손녀다. 벌써 그런 소문이 사방에 파다하게 나서 천섬의 사실상 주인은 검왕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군.”
하원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갈린에게 한 발 다가섰다.
“무슨 일인가요?”
제갈린의 물음에 하원후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맹에서 연락이 왔소.”
맹이라는 말에 제갈린이 살짝 긴장했다. 하원후는 그런 제갈린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즉시 돌아오라는 명이오. 하남표국도 이만하면 충분히 자리를 잡았으니 더 이상 우리가 도울 필요가 없지 않소.”
하원후의 말에 제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하남표국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남에 위치한 대부분의 문파들과 친분을 다졌고, 우문세가와 사천당가의 모든 표행을 도맡았으며, 심지어 무림맹의 도움도 받고 있으니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하단주님은 돌아가세요. 전 남겠어요.”
제갈린의 말에 하원후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명을 거역하겠다는 뜻이오?”
“제가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제갈린의 말에 하원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세가가 무림맹의 축인데소저가 아니라고 하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군사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것이오.”
제갈중천은 확실히 그럴 것이다. 제갈린도 그것을 알고 있다.
“전 이것을 연구하는 게 더 중요해요.”
제갈린의 말에 하원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작 천섬 때문에 무림맹을 버리겠다는 말이오?”
“하단주님께는 고작이겠지만 제겐 중요해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하원후는 자신의 힘으로는 제갈린의 고지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회할지도 모르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제갈린의 말에 하워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제갈린은 하원후가 나간 후, 조용히 일어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천섬을 들여다봤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직전이었는데 하원후에게 방해받아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제갈린이 천섬에 새겨진 선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갈린의 방에서 나온 하원후는 일단 조설연을 찾아가기로 했다. 제갈린이 고집을 꺾지 않으니 우회해서 공략해야 했다. 표국주인 조설연이 직접 축객령을 내리면 나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무림맹으로부터 복귀명령을 받은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최근에는 사실상 하남표국에서 할 일이 없었고, 무림맹에 정황을 보고했더니 간단히 복귀명령이 떨어졌다.
하원후와 승룡단원들이 하남표국에서 해야 할 일은 사실 검마의 감시였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검마를 감시할 의미가 사라졌다.
가장 우려했던 천섬은 제갈린이 조사하고 있었고, 천섬은 금마공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 확인했다.
이젠 대국적인 관점에서 하남표국을 관찰하면 된다. 그런 일은 굳이 하원후 같은 고수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저 몇몇 적당한 사람들을 표사나 쟁자수로 들여보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조금 신경이 쓰이지만.’
하원후의 신경을 묘하게 거슬리는 사람은 바로 단형우였다. 처음 정천맹으로 갈 때부터 단형우 때문에 자신들이 떨어져 나갔으니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적어도 하워후보다는 고수라는 뜻 아닌가.
그래도 검왕이나 검마보다 대단할 수는 없었다. 일개 표국에 십대고수가 둘이나 있다는 사실은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문제였다.
하원후는 항상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행동을 한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림맹에 복귀해 다시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무림맹은 정천맹과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싸우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가장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제갈린이었다.
‘그 지모를 이렇게 썩히려고 하다니, 그냥 둘 수 없지.’
다른 것은 몰라도 제갈린의 머리만은 정말로 대단했다. 하원후도 그것만은 인정했다. 아마 무림맹의 차기 군사는 분명히 그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 차기 맹주는 내가 되겠지.’
그것이 하원후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었다.
조설연의 방에서 나온 하원후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감히, 날 무시해? 무림맹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건가? 검왕과 검마가 도와준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조설연은 하원후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조설연으로서는 하원후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제갈린과의 관계가 더욱 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무림맹은 하남표국에 있어서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조설연의 선택은 당연했지만 하원훈는 그것을 그렇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은혜도 모르는 것.”
하원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원후가 하남표국에 준 도움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한 하원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존재 자체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무림맹 승룡단주가 있는 표국이니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효과는 검왕과 검마만으로 차고 넘쳤다.
무림맹의 역할을 그저 이름만 얹혀 있는 꼴이었다. 물론 하원후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강제로 끌고 가야 하나?”
하원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퍼뜩 놀라 마음을 가라앉혔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해선 안 될 말을 햇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감각을 날카롭게 해 멀리까지 살폈지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이성을 되찾은 하워후는 되도록 빨리 무림매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승룡단원들을 데리고 빨리 복귀한 후, 제갈린에 대한 문제를 제갈중천과 의논해야 했다.
“이번 기회에 미리 혼사를 진행하는 것도 괜찮겠군.”
아직 일가를 이루기에는 좀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제갈린 정도라면 서두를 수도 있었다. 그만큼 최근 제갈린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하원후는 그녀를 다시 본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보다 뛰어난 사람을 아내로 맞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리고 자신 정도라면 제갈중천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하원후는 자신감이 넘치는 발걸음으로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이동했다.
하원후가 이끄는 승룡단은 즉시 하남표국에서 나가 무림맹으로 향했다.
하남표국에는 표사도 쟁자수도 아닌 기묘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쟁자수라 칭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쟁자수로 여기지 않았다.
오늘도 그들은 하남표국의 새로운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파직!
파지직!
연무장에 서른 명 정도의 사내들이 적당히 퍼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단순히 내려치기만 반복했다.
그나마도 멋들어지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힘없이 밋밋하게 휘두르니 보는 사람이 있다면 속이 뒤집어져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파직!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치 조그마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게다가 그들의 검도 미약하게 빛났다. 그렇게 빛나는 검을 보는 그들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그들은 그렇게 하루 종일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표행에 나서지 않은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들은 그저 검만 휘둘렀다.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연무장에 새로운 사내가 등장했다. 그는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너무들 하는군.”
여방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는 사내는 바로 종칠이었다. 종칠은 다른 쟁자수들과 달리 표국의 일을 도와야 했다. 그나마 오전에만 일을 하고 오후에는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서 수련을 할 수 있었다.
종칠은 한쪽 구석으로 가서 검을 휘둘렀다.
쉬익! 쉬익!
종칠의 검에서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났다. 사실 이들 중 가장 고수는 바로 종칠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종칠은 검을 휘두르며 다른 동료들의 검에서 미약하나마 뇌전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더욱 투덜거렸다.
“젠장! 그놈의 검왕인지 뭔지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따악!
“컥!”
종칠은 뒤통수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급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검왕이 보인다.
“어디 그 주둥아리 다시 놀려 봐라.”
종칠은 사색이 된 얼굴로 그저 입을 벌리고 검왕을 쳐다볼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불쌍한 놈! 도와주려고 여기까지 달려왔더니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검왕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종칠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검왕의 다리를 꽉 붙들었다.
“어르신!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냐, 이놈아!”
퍽!
검왕의 다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종칠의 손을 교묘하게 빠져 나와 그대로 뒤통수를 때렸다. 종칠은 방근 맞았던 곳에 또 격통을 느끼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아야 했다.
의식이 희미하게 멀어져갔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그것이 종칠이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을 떠올린 생각이었다.
검왕은 종칠이 정신을 잃자, 살짝 입맛을 다시고는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쟁자수들에게 소리쳤다.
“수련들 안 해?”
검왕의 한 마디에 쟁자수들은 서둘러 수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련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그들은 검왕의 눈치를 보며 검을 휘둘렀다.
“에잉, 하나같이 쓸 만한 놈들이 없구먼.”
검왕은 종칠을 달랑 들쳐 메고는 연무장을 빠져 나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나오며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내 연무장에는 다시 후끈한 수련의 열기가 뻗어 나갔다.
“예에? 마차요? 또?”
종칠은 멍한 표정으로 검왕을 쳐다봤다. 검왕은 그런 종칠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에 종칠이 흠칫 놀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옛날 생각나지? 아주 즐거울 것 같지 않으냐?”
종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옛날 소주까지 마차를 몰고 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물론 단형우와 함께 있었으니 위험할 일이야 없었지만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때 검왕 때문에 단형우의 무공인 천뢰에서 멀어졌다. 그것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종칠을 괴롭혔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구나. 네놈한테는 오히려 이게 더 잘 된 일이라는데 사람 말을 그렇게 못 믿어서야, 에잉, 쯧쯧쯧.”
그 말을 단형우가 했따면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결정 난 이상 종칠이 빠져 나갈 구멍은 없었다.
‘확 그만두고 나가 버려?’
종칠은 속으로 홧김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어떻게 표국을 그만둔단 말인가. 그리고 그만두더라도 어차피 마부는 하게 되어 있다. 법보다 주먹이 훨씬 가까우니까.
종칠은 검왕을 따라 표국 앞마당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이미 출발 준비가 끝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마차를 본 종칠의 눈이 커졌다.
“뭐, 뭐가 이렇게 커요?”
종칠의 말에 검왕이 빙긋 웃었다.
“사람이 몇인데, 저 정도는 돼야지.”
마차는 엄청나게 컸다. 마차를 끄는 말만 해도 여섯 마리나 됐다. 종칠은 그것을 보며 살짝 머리가 아파왔다.
말 여섯 마리를 동시에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몰았던 마차는 고작 두 마리의 말로 달리는 마차였다. 그것을 모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여섯 마리라니.
“지난번에 보니 마차를 아주 잘 몰더구나. 더도 덜도 말고 딱 지난번처럼만 몰아라.”
검왕의 말에 종칠은 심각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검왕의 말은 분명히 뒤에 한 마디가 생략되어 있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종칠은 인상을 쓰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잠시 서 있으니 마차에 탈 사람들이 나타났다. 꽤 많은 사람들의 나타났지만 종칠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단형우가 있었다. 그제야 종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단대협도 가시는 거였군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종칠이 약간 원망스런 눈으로 검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만일 미리 얘기 ?다면 이렇게 맘고생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단형우가 간다는데 다른 사람에게 마차를 맡길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하나둘 마차에 올랐다.
그들 대부분이 여인이었다. 종칠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연 단형우라고 생각하며.
가장 먼저 마차에 오른 사람은 당연히 우문혜였다. 단형우가 가는데 우문혜가 따라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제갈린과 염혜미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놀랍게도 조설연도 함께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호관과 당문영도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모두 마차에 타니 단형우가 마차 지붕으로 가볍게 올라섰다. 검왕과 검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따랐다.
종칠은 그런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붕에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또 온갖 긴장을 다 하며 마차를 몰게 생겼다.
종칠은 천천히 마부석에 올랐다.
커다란 마차가 하남표국을 출발했다.
형표는 바쁜 와중에도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있었다. 형표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사실 단형우의 능력이라면 혼자서 금방 목적지에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표는 일부러 단형우를 혼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조설연과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