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eturner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빙왕 (5)
사마진은 사라져 가는 명운을 보며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결국, 떠나가셨네요.”
천준기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자네도 참 어려운 길을 걷는군.”
사마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어려운 길이라고요?”
“자네 부교주님을 사모하고 있지 않은가?”
천준기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이미 읽고 있었다.
‘미인이 영웅에게 끌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사마진이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부교주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나이 차이도 크고. 공자님은 이미 정혼자도 있단 말이죠.”
천준기가 혈도가 찍힌 소진에게 다가가며 말을 받았다.
“두 사람 말이야. 겉으로 보면 그렇게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데 말이야. 많아야 다섯 살쯤? 몇 년 뒤면 같아 보이겠지. 그리고……. 부교주님이 교주님이 되면, 부인을 여럿 두어도 문제가 되지 않지 않는다네.”
사마진도 이와 같은 말을 명운에게 한 바 있었다. 하나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그 말씀은 마치 제가 부교주님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그분을 광명좌에 올리고자 하는 것 같잖아요.”
천준기가 소진을 안아 말 위에 올리며 물었다.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천 단주님!”
“사마 단주, 우리가 구파일방 녀석들처럼 예법에 예속될 필요가 있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이 본교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사마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천 단주님은 당할 수가 없네요.”
천준기가 오른손을 내저었다.
“그런 소리 말게. 난 단지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한 것뿐이니까.”
사마진은 명운이 떠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운, 부디 무사히 돌아와.’
그녀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남쪽으로 십여 일.
명운은 속도를 조절하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경공을 전개하면 금방이지만, 그렇게 하면 십여 일이라는 시간상 거리를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파천궁에서 십여 일과 신교의 십여 일은 거리가 다를 수가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십여 일은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 칠백 리 정도를 뜻했다.
탁.
명운은 걸음을 멈추고는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이쯤에서 멈출까?”
그는 밤에도 달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거리 감각이 무뎌질 수도 있었다.
“빠르게 달리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달려야 한다.”
일정한 시간 동안 정확한 거리를 가는 것.
이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었다.
“흠…… 두 사람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겠지?”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사마진과 천준기 두 사람은 실전 경험과 실력을 함께 갖춘 고수였다.
‘그 두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려 한다면 사신대 이상의 전력이 필요했다.
‘지난번 습격도 그렇고, 파천궁에서 그 정도의 전력을 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운은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 아래로 몸을 숨겼다.
‘차가운 기운이군.’
주변의 한기가 그의 몸을 파고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바로 발아래 흐르는 기운.
즉, 대지에 흐르고 있는 한음진기였다.
‘용맥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차마고도라 불리는 오래된 산길 주변에는 용맥이 아닌 한음진기로 이뤄진 한맥(寒脈)이 흐르고 있었다.
“대지의 기가 쇠약한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용맥이었다.
‘이참에 빙공 쪽을 연마해 볼까?’
그는 낙산원의 연공실에서 한음진기와 양강진기를 동시에 다루는 연공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양강진기보다는 한음진기가 더 어려웠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기질 때문일까?
그는 빙공을 수련하기가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
‘조급하게 갈 필요는 없겠지.’
지금 당장 빙공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명운은 주변에 기의 그물을 치며 눈을 감았다.
휴식을 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감았던 눈을 황급히 떴다.
‘이런!’
기를 펼치자마자 적의 접근을 느꼈던 것이었다.
‘신법이 상당해. 고수다!’
이 정도까지 인기척을 숨길 수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잠행술을 연마한 살수, 또는 기척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고수.
그는 상대가 후자일 것이라 예상했다.
‘최소한 일류다.’
상대가 일류고수라면 절반의 실력으로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고수라면 싸움이 치열해질 수도 있었다.
스윽.
다가오던 상대가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가 명운을 향해 말했다.
“그대의 거리는 이십 보이군요.”
가녀린 목소리.
상대는 여인이었다.
“길손이라면 서로 갈 길을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인이 반문했다.
“길손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명운은 고개를 돌렸다.
‘미인은 아니군.’
미인은 아니었지만, 투박하거나 추한 것 또한 아니었다.
상대는 곱게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 어울리는 중년 여인이었다.
“혹시 파천궁에서 왔나?”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요.”
“그냥 돌아가지는 않겠지?”
“가교의 부교주를 보고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을까요?”
명운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가교라고?”
“예, 가짜니까. 가교.”
“그럼, 그쪽이 진짜란 말인가?”
“물론이죠.”
명운은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짜와 진짜,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비교해 봐야 할 것 같군.”
여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굳이 비교해 볼 가치가 있을까요?”
명운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혼자 나타난 것을 보니, 무공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그는 상대의 실력을 추측해 보았다.
‘일류는 무조건 넘을 것이고, 단아한 기도와 차분한 언행……. 그렇군. 적어도 절정은 될 것 같군.’
아직 검을 마주한 것은 아니지만,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사마진 이상이었다.
‘이런 곳에서 진 이상의 여고수를 만나게 될 줄이야.’
명운은 적풍대를 전멸시켰다는 파천궁의 고수를 떠올렸다.
‘그자의 이름이 풍왕이라고 했던가?’
만에 하나 눈앞의 여인이 풍왕이라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여인이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검을 마주하기에 앞서 서로 이름이나 확인할까요?”
명운은 이름을 말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바로 풍왕인가?”
여인은 그의 질문에 어깨를 살짝 위로 올렸다.
“이런, 이런, 어찌 그런 투박한 자와 저를 비교할 수 있을까요?”
투박하다?
명운은 여인의 한마디에 미간을 좁혔다.
‘풍왕이 투박하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자신의 실력이 풍왕과 동급이라는 뜻이겠지.’
최악의 경우.
그녀의 무공이 풍왕을 압도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명운은 검선 이상의 상대와 마주할 수도 있었다.
‘설마 그렇진 않겠지.’
설마가 사람을 잡기도 했지만, 명운은 이번에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풍왕이 아니면 누구인가?”
여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가 먼저 물었을 텐데요?”
명운은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좌는 명운이라 한다. 이제 됐나?”
여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맺혔다.
“명가의 막내, 맞으시죠?”
“그렇다.”
“이쪽은 빙왕이라 합니다.”
빙왕.
별호만 들어도 어떠한 무공을 사용하는지 알 수 있었다.
‘빙공을 사용한다는 말이군.’
그녀가 명운과 마찬가지로 대지의 기운을 이용할 수 있다면, 한음진기가 흐르고 있는 이곳은 그녀에게 최적의 장소일 터였다.
‘쯧, 느낌이 좋지 않아.’
명운은 혀를 차며 물었다.
“풍왕과 빙왕이 있다면, 화왕과 수왕도 있겠군.”
빙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아직 검을 뽑지 않은 상태였다.
명운은 좁혔던 미간을 폈다.
‘흠, 검을 뽑지 않았다는 말은 이쪽과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말끝을 올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네?”
“그게 아니라면 이처럼 질질 끄는 이유가 듣고 싶군.”
빙왕이 가볍게 웃었다.
“호호호, 제가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였나요?”
“아닌가?”
“절대 아니죠.”
명운은 대화하며 빙왕 주변의 기운을 읽었다.
‘대지의 흐름은 그대로다. 하면 지맥을 사용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군.’
일단은 안심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밑에 한음진기가 흐르는 이상 방심은 금물이었다.
“내게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스릉.
빙왕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생각이 지나치시네요. 뭐, 그 지나친 생각도 여기까지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존대하는 것이 버릇인 듯싶었다.
“어디 실력을 보도록 하지.”
명운 또한 검을 뽑았다.
스르릉.
현검의 검은 검신이 드러나자 빙왕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검은 검신, 혹시 현검인가?’
현철로 만드는 현검은 그 단단함이 다른 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현검이라면 검신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칫 검신을 마주했다가 검이 부러진다면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곤란하지.’
빙왕이 검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있네요.”
명운은 그녀의 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말로 흔들려는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아. 난 쉽게 흔들리는 남자가 아니니까.”
“그럴까요?”
“자신 있는 얼굴이군.”
빙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알아낸 것, 그것은 모두 거짓이에요.”
차분했던 명운의 얼굴에 살짝 실금이 갔다.
‘모두 거짓이라고?’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명운과 사마진, 그리고 천준기는 파천궁의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허풍이 과하군.”
아주 약간이었지만, 명운의 목소리에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
빙왕은 자신이 정곡을 정확히 찔렀음을 깨달았다.
‘통했다.’
그녀는 조금 더 명운을 흔들고자 했다.
“당신들 가교와 본교의 무공은 원래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본교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죠.”
여차하면 파천궁도 사마진이 사용한 섭혼대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쪽에 역으로 거짓 정보를 흘리기 위해서 어설픈 공격대를 투입했다는 말인가?’
명운은 오른쪽 입술 끝을 올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쪽에서 섭혼술을 사용할 것을 알고 거짓된 정보를 심었다면 어떨까요?”
명운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대로군.’
그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내가 겨우 그런 이야기로 내가 흔들릴 것 같나?”
“당신이 흔들리기를 바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차피 당신은 여기에서 죽을 테니까요.”
빙왕의 표정이나 눈빛에는 여유가 넘쳤다.
명운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그녀의 말에 넘어갔을 것이다. 하나 그는 그녀가 어떠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기의 움직임이 중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머물러 있다. 이는 그녀가 미혼술이나 섭혼술처럼 상대의 심신을 흔드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미혼술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후…… 죽기 전에 좋은 것을 알려 주는군.”
빙왕이 살짝 검을 틀며 말했다.
“이쪽은 자비가 넘치니까요.”
명운이 차갑게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이쪽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알려 줄까?”
“네?”
“네 말은 다 거짓말이야.”
순간 빙왕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뭐라고요?”
명운은 그녀가 멈칫한 것을 보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미혼술을 쓸 이유가 없지. 그리고 미혼술이 아니라고 해도 네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빙왕은 미혼술이라는 말에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쪽의 수가 간파당했다. 설마?’
그녀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요?”
명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빙왕이 입술을 모으며 재차 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명운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는 말을 마친 뒤 대지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