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74)
274화 진짜 그림자 (4)
경은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정인을 향해 달려든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을 밝은 얼굴로 맞이하는 사내.
중원, 아니 세상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냥 넘길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가?’
사내의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경은은 문득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 저 자리에 있으면 어떨까 하고.
그녀 또한 같은 표정이 되지 않았을까?
경은은 생각했다.
왜 자신은 그녀처럼 하지 못했을까?
그녀에게는 무수한 기회가 있었다.
어제도 심지어 오늘 아침에도.
‘어쩌면 기회가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화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륵.
여인의 외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 가려는 것일까?
설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움직여야 한다.’
그녀는 교주의 시녀로서 교주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은은 서재에서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부둥켜안았던 두 사람이 살짝 거리를 벌렸다.
“교주님.”
“진.”
감정이 듬뿍 담긴 대화.
경은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내 실수다.’
그녀는 진즉 서재를 나가야 했다고 생각했다.
툭.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한 여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 단주가 도착했다고요?”
여인은 급히 달려온 듯 머리 장식이 한쪽 밖에 달려 있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서재에서 나온 것입니까?”
“교주님께서 회포를 푸시는데, 어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경은이 되묻자 여인은 눈썹을 위로 세웠다.
“회포란 말씀입니까?”
경은이 오른손 식지로 여인의 입술을 눌렀다.
“쉬잇, 교주님께서 들으십니다.”
눈썹을 세운 여인은 시녀장 원영재였다. 그녀는 연적인 사마진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이곳으로 뛰어온 터였다.
“경 서관, 그대는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것을 막지 않는가?
그대는 교주님을 사모하는 여인이 아니란 말인가?
“교주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영재는 세운 눈썹을 아래로 내리지 못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내가 사모하는 사내가 다른 여인을 품어도 그것을 허락할 수 있다고?
그녀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안 됩니다.”
경은은 두 손을 펼쳐 그녀의 앞을 막았다.
“경 서관.”
“시녀장님, 본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시녀장의 본분은 교주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교주를 모시는 것.
원영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저는 교주님께서 이렇게 작은 꼬마일 때부터 모셔 왔습니다. 그분께서 제가 아닌 정인을 찾으셨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시녀가 아닌 어머니 또는 누이와 같은 마음.
원영재는 평소 경은의 눈빛을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그녀는 경은이 교주를 사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그대와 같은 여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신분이 높으신 분들은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아래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이랍니다.”
“흔다고?”
“지체 높으신 분들이 삼 첩 사 첩을 두는 일은 그야말로 흔하디흔한 일이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 무렵.
서재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를 가져오너라.”
운우지정이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짧은 시간.
경은이 반색하며 답했다.
“지금 즉시 올리겠습니다.”
원영재는 경은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뭔가 있는 것인가?”
“글쎄요.”
원영재는 경은의 흐릿한 대답에 시선을 다른 시녀들에게 돌렸다. 그녀들은 서재 밖에서 경은이나 교주의 부름에 응하는 이들이었다.
“교주님께서 사마 단주를 만나신 지 얼마나 되셨느냐?”
시녀들이 대답했다.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원영재는 그들의 대답에 뒤로 물러섰다.
‘깊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래서 경 서관이 얼굴이 밝아진 것이고?’
본심을 감추고 참는다.
그녀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경은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를 수 있는 여인이었다.
‘쉽지 않은 상대구나.’
원영재는 사마진의 미모보다도 경은의 마음이 더 상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 * *
“부교주님을 뵙니다.”
부교주 유청에게 고개를 숙인 이는 사마진이었다.
“사마 단주가 여긴 무슨 일인가?”
사마진이 두 손을 풀며 답했다.
“이제는 단주가 아닙니다.”
유청이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원하는 호칭이 있는가?”
“후배라 불러 주실 수 있으신가요?”
“후배?”
“아직 직함이 없으니까요.”
유청이 오른손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냥 사마 단주라 부르겠네.”
그녀와 유청은 한 항렬 이상의 차이가 났다. 유청은 후배라는 호칭이 양대충이나 공복진 정도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깐깐하시네요.”
“자네는 예전보다 부드러워졌군.”
“나쁘게 말하면 능숙해진 것이겠죠.”
유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비를 보면 피하게.”
“예?”
“연비가 자네를 보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비무 말씀이신가요?”
유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자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교주님께서 연비를 탓할 수밖에 없을 걸세.”
그는 제자가 교주의 눈 밖에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장 단주가 되었다고요?”
“그대보다 많이 늦었지.”
사마진이 자명단주에 임명된 일이 십 년 전이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드득.
문이 열리면서 시녀가 차를 들고 나타났다.
탁.
탁자 위에 놓인 용정차에서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것인가?”
“특별한 용무가 있어야만 부교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대와 난 친분이 없지 않은가?”
사마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부교주님께서는 낯을 가리시는군요.”
“설마.”
사마진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부교주님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인가?”
“진심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유청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 뒤 손바닥이 위로 보이게 뒤집었다.
“어떤 부탁인가?”
“부교주님과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유청은 그녀가 비무를 청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하하, 비무라.”
그가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의외로군.”
“장 단주와 겨루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마진은 진심으로 그와 겨루려 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교주님께서 해 주지 않으시니까요.”
“교주님 대신 나라는 말인가?”
“제게 가르침을 내려 주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유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돌아가게.”
“부교주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교주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것이라고.”
“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단정 지어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유청이 책상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대의 무공이 약하지 않기 때문이야.”
약하지 않기 때문에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거짓말!’
사마진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교주님, 제가 강하다면 어찌하여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유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대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눈이라고요?”
“내가 상대인데도 자신감이 엿보이더군. 그 말은 즉, 과거보다 검이 날카로워졌다는 말이겠지.”
안다함에서 그녀는 양대충이 말릴 정도로 검에 집착했다. 그 결과 그녀의 검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부교주님, 가벼운 칭찬으로 넘어가려 하시는군요.”
“가벼운 칭찬이 아니야. 그대와 비무를 하게 되면, 진심으로 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네. 말해 보게. 그대는 진심으로 휘두르는 검에 사정을 둘 수 있단 말인가?”
사정을 둔 검은 진심으로 휘두르는 검이 아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진심으로 휘두르는 검은 손에 사정을 둘 수 없다는 말이 되었다.
“지금 비무를 벌이면 피를 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유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것을 원치 않네.”
“결국, 교주님밖에 없을까요?”
“사마 단주, 왜 무리하는가?”
“교주님께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요.”
“지금 이대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사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장에서 전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음.”
“교주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죠.”
유청은 그녀의 말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파천궁의 무공이 그 정도란 말인가?”
“제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유청은 그녀와 생각이 달랐다.
‘교주님을 습격한 흉수나 비로궁 앞에서의 싸움도 그렇고. 파천궁의 무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돌아가게.”
“돌아가서 교주님을 위한 수나 놓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교주님의 벗이 되어 드리게.”
“부교주님.”
“그것이 여인의 행복 아닌가?”
사마진은 얼굴을 굳혔다.
“여인은 강해지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런 법은 없지.”
그런 법이 있다면 애초에 장연비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유청은 남녀의 일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무인이었다.
“단 한 번이면 됩니다.”
유청이 가볍게 탄식했다.
“그대는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군.”
“목검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검론으로 하지.”
실제로 검을 휘두르는 대신 말로 검법을 논하자.
사마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은 목검까지입니다.”
절정을 넘어선 고수들 간의 싸움이었다. 실검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검기나 검풍이 남아 있었다.
“도무지 말릴 수가 없군.”
유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마진이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교주님의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 * *
툭.
바닥에 떨어진 것은 땀이었다.
유청은 검결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땀을 흘리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비로궁에서 검을 쓸 때도 땀을 흘린 적이 없었다. 하나 오늘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훌륭하군.”
사마진이 검을 아래로 내리며 자세를 잡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겨룬 것이 벌써 팔십 초식.
유청은 사마진을 끝내 제압할 수 없었다.
과거였다면 아마 오십 초식 안으로 그녀를 제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사마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른쪽?’
유청은 기의 흐름을 읽은 뒤 검을 휘둘렀다.
퍼엉!
둔중한 폭음과 함께 연공실 안에 기파가 휘몰아쳤다.
두 사람은 실검이 아닌 목검으로 겨루고 있으나, 목검에 내력을 가득 불어넣어 겨뤘기 때문에 실검을 싸우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슈슈슈슉!
전후 그리고 좌우 사방에서 사마진의 검기가 그를 노렸다.
‘제법이군.’
유청은 검을 맹렬히 휘둘러 검기를 막은 뒤 몸을 돌리며 검을 뻗었다.
‘슬슬 끝을 내도록 하자.’
찌지지직!
그의 붉은 검기는 거칠었다.
사마진은 이것이 평범한 검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타핫!”
기합과 함께 검을 아래로 내리자 붉은 검기가 그녀의 목검을 타고 위로 흘렀다.
‘검기가 흩어지지 않고 스며든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수법이었다.
‘손에 닿기 전에 해소해야 한다.’
사마진은 검을 놓지 않은 채 내력을 검에 집중했다. 이윽고 그녀의 검에서 푸른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솨아아아아!
강대한 내력으로 붉은 검기를 태워 버린 것이었다.
“허, 그런 것까지 가능한 것인가?”
유청은 사마진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마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역시 많이 부족하군요.”
“그대의 실력 말인가?”
사마진이 검을 거두며 두 손을 모았다. 이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유청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단기(丹氣)를 소멸시켰음에도 패배를 인정한단 말인가?’
사마진이 답했다.
“조금 전 보여 준 한 수. 막긴 하였으나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후배의 패배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당황한 것만으로 패배했다?”
“진심으로 검을 쓰셨다면 제가 당황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유청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금의 난 진심으로 검을 쓴 것이 아니었군.”
호흡이 거칠어지고, 땀이 날 정도로 검을 휘둘렀지만, 살기가 가득 찬 검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사마진이 두 손을 풀며 답했다.
“검을 놓을 생각입니다.”
유청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검을 놓다니?”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일선에서 은퇴.
유청은 물러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아닙니다. 부교주님의 말씀대로 교주님의 벗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족한 실력으로 전선에 선다면 명운은 항상 그녀를 걱정할 터였다. 그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운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
사마진은 여인의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