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82)
282화 오대세가 (6)
거칠게 몰아치던 폭풍이 잠잠해지자 제갈직은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빨리 싸움이 끝났을 리 없다.’
적어도 일식경, 많으면 반시진 정도 거친 폭풍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흑기병의 말발굽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소리가 완전히 멈췄군.”
제갈전의 한마디에 제갈직이 말 위에 올랐다.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변고가 생겼다는 말이냐?”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흑기병에게 뭔가 변고가 생겼다면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나도 같이 가겠다.”
제갈전도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산동악가의 흑기병을 막아선 것이다.’
천마신교 쪽에 고수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제갈직이 고삐를 틀어쥐며 말했다.
“장로 중 한 명이 왔을 수도 있습니다.”
십장로의 등장.
제갈전은 그의 예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십장로가 상대라면 제갈세가 무인 중 절반 이상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싸움을 피할 수는 없다.’
세가의 안위를 위해 병력을 물린다면 전장에 있는 이백 명의 무인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을 모두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이랴!”
제갈직이 선두에 서서 달리자 세가의 무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두두두.
제갈전은 속도를 높여 제갈직의 옆으로 다가갔다.
“직, 승산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의 물음에 제갈직이 정면을 주시하며 대답했다.
“숙부께서 그를 맡아 주신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제갈전은 가주의 동생으로 제갈세가 안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그는 상대가 십장로라고 해도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교의 간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지금까지 무공을 연마한 것이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이렇게 평가했다.
* * *
악영민은 창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러나 적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갔다.
“다 틀린 것인가?”
그의 혼잣말에 대답하는 이가 있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촌 동생 악영찬이었다.
“영찬?”
“우리가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그랬다.
산동악가 무인 중 서서 창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그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숨이 끊긴 채 전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적이 너무 많다.”
“놈은 없지 않습니까?”
놈.
악영찬이 말한 것은 가주를 쓰러뜨린 정체불명의 무인이었다. 그는 가주 악철군을 쓰러뜨린 것도 모자라 혼자 산동악가의 흑기병을 무너뜨렸다.
“괴물이 없으니, 할 만하다는 말이군.”
쉬익!
파공성과 함께 만도가 날아왔다.
악영민은 창날로 만도를 쳐 내고는 창대로 상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파악!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으으윽.”
만도를 든 자는 신음과 함께 무릎이 꺾였다. 그러나 악영민은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틈이 없었다. 그는 다음 적의 공격을 받아 낸 뒤에 맹렬하게 반격해 그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타타타타탕!
악영찬 역시 악가창법을 극성으로 펼쳐 용호대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자 그들을 포위했던 용호대원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 녀석들 보통이 아니군.”
“산동악가 녀석들이잖아. 쉬울 수는 없겠지.”
“오대세가는 오대세가란 말인가?”
이미 승기를 잡은 상태.
그들은 무리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서서히 상대의 힘을 빼고자 했다.
“암기를 쓰자.”
“그러는 게 좋겠어.”
용호대원들은 원거리에서 암기로 그들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들이 비표와 강침을 꺼내 들었을 때였다.
두두두두.
멀리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기병이 더 있는 건가?”
“설마?”
용호대원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지금이다!”
악영민과 악영찬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창을 휘둘렀다.
솨사사사삭!
두 사람의 맹공에 순식간에 다섯 명의 용호대원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 녀석들이!”
남은 용호대원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은 혈로를 뚫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지금은 전투의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악가의 이름을 이어야 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은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경공을 전개했다.
쉬이익!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용호대원들은 그들이 거리를 벌리자 추격을 단념했다.
“쳇, 빠르기도 하군.”
“겨우 둘이 도망친 것뿐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뒷맛이 찝찝하단 말이지.”
산동악가의 생존자들이 달아났지만,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곳곳에서 무림맹과 용호대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를 멸하라!”
“위군자 놈들이 감히!”
“누가 위군자란 말이냐!”
타앙!
불꽃이 이는가 하면 잠시 뒤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죽어랏!”
“제기랄!”
욕설과 고함 그리고 이어지는 혈향.
대부분 전장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진백강은 전세가 아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대주 곽경음에게 다가왔다. 곽경음은 바위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괜찮은가?”
곽경음이 대답했다.
“죽진 않은 것 같습니다.”
“출혈은?”
“지혈은 했습니다만…….”
진백강은 검신을 움직여 상처 쪽으로 달빛을 반사했다. 상처의 크기가 작지 않았다.
“좋지 않군.”
곽경음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소원대로 되려나 봅니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앞서 저세상으로 떠난 동료들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그래도 이것은 아니지.”
진백강은 다시 한번 혈도를 찍어 지혈했다. 그리고는 상처에 약을 바른 뒤 무복을 찢어 상처 부위를 감쌌다.
“익숙하시군요.”
“그래도 명색이 청룡대주였네.”
곽경음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대산팔가 출신들은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백강이 피식하고 웃었다.
“도련님도 있긴 하지.”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치료를 마무리했다.
“다 되었네.”
“그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백강은 곽경음이 지목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악 가주를 쓰러뜨린 사내 말인가?”
“그런 고수가 용호대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본교에도 은둔 고수 한둘쯤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소림사도 아니고 본교에 말입니까?”
천마신교는 무공으로 그 서열에 정해지는 곳이었다. 서열이 높은 자는 강하고, 서열이 낮은 자는 약했다. 그런 곳에서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교주님의 지시를 받은 자일 수도 있지.”
곽경음이 두 눈을 감으며 말을 받았다.
“그랬다면 교주님께서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군요.”
“버리지 않고, 미끼로 쓰신 것이겠지.”
진백강은 이 모든 것이 계책이라면, 그 계책을 세운이가 공복진이리라 추측했다.
‘그가 서장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공복진은 전대 교주인 명증 시절에도 교주의 꾀주머니 역할을 한 바 있었다.
“미끼가 되었다고 해도 이겼으니, 된 것입니다.”
“싸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닐세.”
진백강은 상대의 수가 많긴 했지만, 최정예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봉 공격 때 선봉에 선 것은 백팔나한이라고 했다. 아직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백팔나한만이 아니었다. 무당이나 화산의 고수들 역시 이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림맹의 전력은 천마신교 못지않게 두터웠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동시에 미간을 좁혔다.
“놈들의 증원인가 봅니다.”
진백강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런 것 같군.”
녹색 무복을 걸친 이들이 순식간에 용호대의 좌익을 덮쳤다. 뒤쪽에서 적이 나타나자 전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제길! 적의 증원이다!”
“뒤로 물러나라!”
용호대의 좌익을 덮친 것은 제갈전이 이끄는 제갈세가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말 위에서 검을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쓰러져라!”
“모두 비켜라! 제갈세가가 왔다!”
제갈세가의 파괴력은 산동악가의 흑기병에 미치지 못했지만, 용호대 좌익 또한 지친 상황이었다. 그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퇴각!”
“전원 뒤로 물러나라!”
제갈전은 적을 추격하는 대신 살아남은 아군을 찾아 물었다.
“악 가주는 어디 있는가?”
누군가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흑기병은 전멸했습니다.”
산동악가의 최정예 흑기병이 전멸했다.
제갈전은 그의 한마디에 미간을 좁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인가?”
“그들이 모두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제갈전은 달아나는 적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들이 산동악가를 전멸시켰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상대한 용호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미간을 좁힌 것을 본 것이었을까?
두 개의 매듭을 가진 개방 제자가 앞으로 나섰다.
“흑기병을 쓰러뜨린 것은 저 녀석들이 아닙니다.”
제갈전은 개방 제자의 말을 듣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음, 그럴 테지.”
뒤늦게 도착한 제갈직이 말의 고삐를 잡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흑기병을 쓰러뜨린 고수들은 어디 있습니까?”
“고수는 한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는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악 가주와 흑기병이 정체불명의 고수에게 쓰러졌다는 것뿐이었다.
“한 명이라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제갈전이 제갈직에게 고개를 돌렸다.
“직, 어떻게 하겠느냐?”
“고수 말입니까?”
“음, 그도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진퇴의 여부다.”
진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퇴각할 것인가?
제갈직은 미간을 좁혔다.
‘적의 좌익을 무너뜨렸지만, 전체적인 전황은 좋지 않다.’
계속 싸운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정체불명의 고수도 마음에 걸리고……. 악 가주가 전사했으니, 지금은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전력을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야습은 실패란 말이군.”
제갈전은 세가의 무인들에게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했다.
쉬익!
하늘로 올라간 신호탄이 폭발하자 푸른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무림맹 무인들은 푸른빛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퇴각 신호다.”
“전원 퇴각하라!”
무림맹 무인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한 뒤 물러났으며, 용호대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고 부상자와 전사한 이들을 살폈다.
이로써 무림맹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가 종료되었다.
* * *
탁.
술잔을 내려놓은 것은 용호대주 진백강이었다.
“그대가 문현인가?”
진백강 앞에 선 청년은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어느 문파에서나 한 명쯤 있을 법한 그런 얼굴이었다.
문현이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합니다.”
진백강은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주변에 사람을 물렸네. 편히 말하게.”
그는 상대의 신분이 낮지 않다고 생각했다.
‘홀로 산동악가를 상대한 고수다. 적어도 사신대주급은 되겠지.’
청룡대주였던 자신과 같은 위치.
진백강은 청년의 정체가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문현은 두 손을 풀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받았다.
“교주님께 명을 받았습니다.”
“역시 교주님인가?”
“대주님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진백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신 모양이군.”
“교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적이라면 구원군을 반드시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자네를 호위로 붙이신 것인가?”
“그렇습니다.”
진백강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앉게.”
“제가 어찌하여 대주님과 합석할 수 있겠습니까?”
진백강이 처연하게 웃었다.
“그대의 솜씨는 나보다 나았다. 본교에서는 직위가 아니라 실력이 우선이지 않던가?”
문현은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며 그 물음에 답했다.
“하면 앉겠습니다.”
그가 앉자 진백강은 술을 권했다.
“한잔하게.”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비웠고,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탁.
진백강은 문현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지만 교주가 보낸 자의 정체를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대 덕분에 살았네.”
“과찬이십니다.”
“검법이 특이하더군.”
“사부님께 배운 것입니다.”
진백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인전승이란 말이군.”
사신대나 삼단에서 배운 무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천원대에서 배운 무공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진백강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믿겠네.”
문현은 그 대답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대는 진득한 사람이로군.”
진백강은 그의 어조가 바뀐 것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생각했다.
‘드디어 본 모습이 나오려는 모양이군.’
그는 앞서도 문현의 신분이 자신보다 낮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득한 것이 나쁘다는 말인가?”
문현이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본좌는 좋다고 생각한다.”
본좌.
이 말을 천마신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딱 두 명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교주님과 부교주님.’
진백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문현이 술병을 잡으며 말했다.
“놀라지 말게. 자네가 놀라면 부하들이 움직일 테니까.”
진백강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설마 교주님이십니까?”
“이제 알았나?”
진백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속하, 교주님을 몰라뵈었습니다.”
문현의 정체는 바로 명운이었다. 그는 과거 중원에서 무림맹 제자들을 속일 때도 문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바 있었다.
“괜찮아. 그리고 그대가 목소리를 높이면 곤란해.”
명운은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를 펼쳐 확인 한 바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커지면 주변에 흩어져 있던 용호대원들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명운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곽경음은 괜찮나?”
“중상을 입었지만, 당장 죽진 않을 것입니다.”
“그는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군.”
이번에는 명운이 그에게 술을 권했다. 진백강은 두 손으로 잔을 받은 다음, 그것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는 그의 말을 받았다.
“교주님의 명에 따라 곽경음을 돌려보내겠습니다.”
명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게 하게. 그리고 오늘 자네는 문현이라는 고수의 공을 치하한 것일세.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가 알아서는 안 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운은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한 역용이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진백강, 공을 세워 죄를 씻도록 하게.”
진백강은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공을 세워 보이겠습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명운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