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무림맹주 (5)
툭. 툭.
바닥에 흘러내리는 피는 제갈전의 것이었다.
“얼마나, 얼마나 오래 검을 수련했는가?”
그는 자신을 쓰러뜨린 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상대는 검을 회수하면서 그의 물음에 답했다.
“삼십 년쯤 되지 않을까 싶군.”
제갈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검을 수련한 시간이 삼십 년이라면 나이를 아무리 적게 잡아도 불혹이었다.
‘내가 약관의 무인에게 당했을 리가 없지.’
그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쓰러뜨린 마지막 한 수를 되새겼다.
‘이 자는 검이 아닌 봉을 다루듯 했다.’
검법의 틀을 깨고, 검으로 검법 이상의 경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확실히 대단했다.’
강대한 검기나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검강.
그런 것들이 아님에도 명운의 마지막 한 수는 그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후후후, 죽을 때까지 검만 생각하다가 가는군.’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그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검법을 생각했다.
천하를 호령할 만한 무공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검법에 미친 무림인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투욱.
제갈전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을 때, 제갈세가 무인들은 이미 전장에서 몸을 뺀 다음이었다.
“제갈세가 다음은 누구일지 모르겠군.”
명운은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적이 물러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탁. 탁. 탁.
규칙적으로 울리던 목탁 소리가 멈춘 것은 한 사내가 누각에 오른 다음이었다. 고승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도장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고승이 목탁을 두드리던 곳은 과거 마교도들이 중원을 노려보던 누각이었다.
“대사께서 계신다고 들어서 바로 찾아왔습니다.”
고승은 목탁을 아래로 내렸다.
“도장께서 단순히 소승의 얼굴을 보자고 하셨단 말씀입니까?”
“안 되는 일이었습니까?”
“그럴 리 없겠지요. 하지만 도장께서는 항상 소승이 풀어야 하는 문제를 들고 오지 않았습니까?”
고승을 찾아온 도인은 무당파 일대제자 현원도장이었다. 그는 무당파 중진으로 지원 병력을 이끌고 무봉에 오른 참이었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행이군요.”
눈을 감고 있는 고승은 나한당주 혜인선사였다.
“대사께서는 제가 싫으신 모양입니다.”
혜인선사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면 왜 돌아앉아 계시는 것입니까?”
“소승은 천리(天理)를 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천리.
이는 먼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현원도장이 오른손을 들며 물었다.
“그래서 천리를 보셨습니까?”
“천리는 보고자 하는 마음이 크면 보이지 않고, 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이시군요.”
혜인선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도장께서는 소승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대사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해 본 것입니다.”
무당과 소림.
두 사람 모두 이런 선문답에는 익숙했다.
“도장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에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곳이 아니라 전장일 듯싶습니다.”
현원도장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잇달아 들려오고 있습니다.”
혜인선사 역시 전장의 소식을 보고받고 있었다.
“악 가주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산동악가 가주 악철군의 전사는 무봉에 주둔하고 있는 무림맹 제자들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현원도장이 목에 힘을 주었다.
“대사, 남궁 맹주를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주가 소승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구파일방이 무봉이 아닌 천봉으로 움직이게 된다면, 자칫 무림맹주 남궁민의 자존심이 훼손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대사, 아군이 패하고 난 다음이면 늦습니다.”
혜인선사는 그의 말을 듣고는 눈썹을 세웠다.
“도장, 그대는 백팔나한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오?”
“백팔나한 전부가 필요하진 않습니다.”
백팔나한 중 일부라도 빌려달라.
현원도장은 이렇게 부탁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헤인선사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현원도장은 아무도 소득 없이 누각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래로 내려오자 종남파 장문인 종남검왕 나운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소림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맹주의 눈치를 보는 모양이군요.”
“어쩌면 확전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오대세가에 구파일방까지 나선다면, 이는 정사대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확전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나운은 혜인선사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림이 중시하는 것은 마교의 토벌이 아니라 중원 무림의 수성이다.’
공격이 아닌 수비.
살인이 아니라 활인.
이것이 소림의 가르침이었다.
“도장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혼자라도 가 볼 생각입니다.”
현원도장은 무당 제자만으로 남궁민을 돕고자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소림이 움직이지 않으니, 무당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원도장은 나운에게 참전을 권유하지 않았다.
‘종남은 우리보다 소림에 더 기대고 있다.’
소림이 움직이지 않으면 종남도 움직이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나운이 목소리를 낮췄을 때였다.
서쪽에서 푸른 빛과 녹색 빛이 번쩍였다.
“맹의 신호입니다.”
푸른 빛은 철수.
녹색 빛은 변고였다.
“도장께서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현원도장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나운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종남도 함께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군을 구하는 일은 활인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려는 찰나.
혜인선사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 십팔나한 둘을 내어 드리겠소이다.
천봉에서 올라온 신호탄이 혜인선사마저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현원도장은 몸을 돌린 뒤 두 손을 모았다.
“대사의 도움이 감사드립니다.”
그는 짧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지원군 구성을 서둘렀다.
* * *
“서쪽에서 신호탄입니다!”
목소리를 높인 것은 천봉에 주둔하고 있는 천마신교 무인이었다.
“나도 보았다.”
천봉의 수비대장 예익은 미간을 좁힌 채 신호탄이 올라온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원군이 오긴 온 모양이군.’
그는 앞서 전서구를 통해 지원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전서를 받은 바 있었다.
“대장, 어떻게 할까요?”
수하들은 산으로 내려가 아군과 호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예익은 신중했다.
“무림맹의 함정일지도 모른다.”
“함정이란 말입니까?”
“놈들이 신호탄으로 우리를 꿰어 내려 하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최근 천봉을 포위하고 있던 무림맹 제자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이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정말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군이 도착한 것, 다른 하나는 굳게 수성하고 있는 그들을 끌어내기 위한 계책.
‘어느 쪽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예익은 확실하지 않다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영!”
그의 부름에 우영이라는 자가 앞으로 나왔다.
“대장, 부르셨습니까?”
“척후를 내보내 적진을 살펴라.”
“존명!”
예익은 산을 내려가기보다는 척후를 보내 적진을 정탐하고자 했다.
같은 시각.
무림맹주 남궁민은 말을 달리면서 솟아오른 신호탄을 보았다.
“북쪽이군.”
제갈직이 그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북쪽 전선은 이미 패퇴했을 터인데, 누가 신호탄을 쏘았는지 모르겠군요.”
남궁민은 미간을 좁혔다.
‘하주가 동쪽을 뚫었을 리는 없고. 북쪽을 공격했다면 아마도 제갈세가나 사천당가일 것이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북쪽에서 쏘아 올린 신호탄은 제갈세가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들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두두두두.
수십 필의 말이 질주하듯 초원을 내달렸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곧 동쪽에서 싸우고 있는 오행문주 하주와 정인사태의 눈에 들어왔다.
“저 깃발은?”
“남궁세가입니다.”
남궁세가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은 남궁맹주 또한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 맹주님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주의 물음에 정인사태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 문주, 우리가 맡은 전선도 돌파하고 있지 못한데, 어찌 맹주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용호대주 진백강이 지휘하는 병력에 막혀 언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쪽에서 신호탄이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아직 하북팽가와 제갈세가가 패퇴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하북팽가가 아직 건재하다고 생각했다.
“맹주께서 팽가를 돕는다면 어렵지 않게 일이 풀릴 것입니다.”
정인사태는 어디까지나 이쪽 전선에 집중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사실 이것이 정론이었다. 오행문주 하주는 그녀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맹주님과 팽가주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요.”
“두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하주는 시선을 다시 언덕으로 돌렸다.
‘전령이 오지 않은 이상, 큰 움직임을 가져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검을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물러서지 마라! 유리한 것은 아군이다!”
그러나 무림맹 제자들의 기세는 처음과 같지 않았다. 그들도 북쪽에서 올라온 신호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북쪽에 뭔가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혹시 소문의 대마두가 출전한 것 아니야?’
무림맹 무인들은 북쪽에서 올라온 신호탄 때문에 싸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진백강은 상대의 집중력이 흩어진 것을 깨닫고는 총공격을 지시했다.
“나를 따르라!”
그가 검을 들고 나서자 무림맹은 그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놈들이 공격한다.”
“물러나서 막아라.”
개방의 오 장로는 무림맹 무인들이 뒷걸음치는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교를 앞에 두고 어찌 물러나려 하는가!”
그는 타구봉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진백강은 오 장로가 무너지는 전선을 지탱하고자 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상대하겠다.”
쉬익!
바람 소리와 함께 검풍이 오 장로를 덮쳤다.
파팍!
오 장로는 타구봉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의 검풍을 무력화했다.
“어떤 놈이냐?”
진백강이 검을 세우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용호대주 진백강이다.”
오 장로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용호대주? 내가 알고 있는 진백강은 청룡대주뿐이다.”
진백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하면 그 진백강이 맞다는 말이군.”
“상대로서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오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구봉을 들었다.
“바로 그렇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검과 타구봉이 세차게 맞붙었다.
* * *
두 번째 전투가 끝난 뒤 임진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의 주변에는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귀혼단 출신 무인들이 있었다.
“제길!”
“다 죽여 버릴 테다!”
팍!
홧김에 죽은 적의 시신을 도륙 내는 이도 있었다.
“죽어! 죽으란 말이다!”
전장이란 이성적인 모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괜찮습니까?”
임진풍에게 다가와 말을 건 이는 문현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명운이었다.
“괜찮네.”
북쪽 전선의 모두는 명운이 제갈세가를 혼자 상대하는 광경을 목격한 바 있었다. 그 모습은 산동악가를 물릴 칠 때와 다름이 없었다.
“제가 더 빨리 왔어야 했습니다.”
제갈세가가 뒤에서 습격해 왔을 때 그는 휴식을 위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돌진 때는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걸세.”
명운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전멸했을 것이다.’
그는 물러난 적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북팽가도 전멸한 것은 아니고, 그들이 제갈세가와 합해 다시 쳐들어올 수도 있다.’
하북팽가와 제갈세가, 그리고 산동 무인들을 합하면 대략 백여 명이 넘었다. 그들이 재차 공격해 온다면 스무 명 남짓 남은 병력으로는 막아 내는 것이 힘들었다.
“이제 누가 지휘합니까?”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자 모두의 시선이 명운을 향했다.
“문 형제가 좋지 않겠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팔을 잃은 조장이 명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른팔을 잃었기 때문에 지휘가 아니라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문 형제, 자네가 지휘를 맡아 줄 수 있나?”
명운은 고개를 흔들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저는 검을 휘두르는 것만을 배웠을 뿐, 지휘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일신의 무공은 뛰어나지만, 모두를 통솔하는 것은 힘들다.
그가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다른 전선까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북쪽에만 묶여 있을 수 없다.’
조장이 그에게 재차 부탁했다.
“자네가 아니라면 적을 막을 수 없네.”
명운은 잠시 생각을 한 뒤 그에게 물었다.
“임 형이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임진풍.
그는 두 조장 이상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난 전투의 활약 덕분에 용호대에서 인기가 높았다.
“음, 임 형도 괜찮지.”
귀혼단 출신 무인들은 임진풍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 형제가 안 된다면 임 형으로 합시다.”
“그럽시다.”
임진풍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명운까지 부탁하자 지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미약하나마 최선을 다하겠네.”
북쪽의 용호대는 이렇게 해서 최소한의 수습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 덮쳐 온 파도보다 더 큰 파도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