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9)
29화 발묵화풍(潑墨畫風) (1)
귀신수(鬼神手) 장영(張永).
그녀의 신묘한 손놀림은 신교를 넘어 중원에서도 감히 따를 자가 없었다.
생사를 오가는 자는 정과 사를 가리지 않고 그녀의 손을 빌리고자 했다.
하나 그녀가 모든 이를 살려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귀신수의 의술로도 천명이 다한 자는 구할 수 없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천마신교 교주 명증.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심지가 다한 촛불이 꺼지듯 깊은 새벽, 유언조차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소교주이자 차기 교주인 명각은 당시 궁의였던 귀신수 장영에게 그 죄를 물었다.
장영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는 분노했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겠지.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날.
명각은 궁의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영을 처형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분노한 얼굴이었다.’
명운은 귀신수 장영이 바로 초예라 생각했다.
‘장영은 명의로 이름을 날린 장기의 수양딸이었다.’
그는 어떠한 경로로 그녀가 장기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노예 신분으로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흘러갈 수도 있었을 테고, 지난 경매에서 장기의 지인이 사들였을 수도 있었겠지.’
어쨌든 지금 그녀를 소유하고 있는 이는 명운이었다.
‘그녀를 가장 잘 쓰는 방법은 의술을 가르치는 것일 것이다.’
훌륭한 의원과 연을 맺는 것은 목숨을 하나 더 얻는 것과 같다 했다.
하물며 그 대상이 귀신수 장영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귀주석가에서 예상 이상의 선물을 받았군.’
그는 장기나 그와 버금가는 의원에게 초예를 제자로 보낼 생각이었다.
“공자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명운은 조광의 전갈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종영세와 관흠이 허리를 굽혔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명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위에 올랐다.
“적룡대로 가지.”
앞장선 것은 종영세였다. 그는 적룡대 출신으로 서숙에 오기 전까지 줄곧 그곳에 머물렀었다.
명운이 앞서가는 종영세를 호명했다.
“종영세.”
“예, 공자님.”
“적룡대주는 어떠한 사람인가?”
적룡대주 하청규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를 실제로 만나 본 이는 많지 않았다.
“저도 한 번밖에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명운이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허, 그 정도인가?”
적룡대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적었다.
“적룡대 사람들은 맡은 일이 그러하므로 외부에 모습을 보이는 일이 극히 드뭅니다.”
“그래도 뭔가 소문은 있을 것 아닌가?”
종영세가 대답했다.
“서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긴 합니다.”
명운은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화라, 천마신교 무인답지 않은 취미군. 하지만 그라면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종영세는 백호대와 대결 이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이 바뀌었다.
조광의 말에 따르면, 더 이상 여자에 시선을 두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무공에 전념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백호대와의 비무가 그 정도였나 싶군.’
종영세를 자극한 것은 백호대 대원들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가 무공에 전념하게 된 계기는 바로 조광이었다.
“저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곧입니다.”
명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았다.
반다경 정도를 걷자 적룡대 무관이 눈에 들어왔다.
“무관 규모는 그리 크지 않군.”
종영세가 명운의 말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이는 적룡대 전체의 일 할에 불과합니다.”
“그럼 구 할은 어디 있단 말인가?”
“절반은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고, 절반은 대산 깊숙한 곳에서 살행과 무공을 연마하고 있습니다.”
암살과 잠입이 주인 집단답게 대명궁에는 소수만이 머물러 있다는 말이었다.
무관 앞에 이르자 종영세가 목소리를 높였다.
“서숙의 칠공자께서 오셨다!”
무관의 문지기는 목소리를 높인 이가 종영세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네 녀석…….”
종영세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문지기를 보고는 호통을 쳤다.
“칠공자께서 오셨는데 안에 알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
문지기는 종영세 뒤에 말을 타고 서 있는 명운을 보곤 고개를 숙였다.
“공자께서는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얼굴을 찡그린 채 안으로 들어가 명운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보고를 받은 이는 급히 적룡대주 하청규를 찾았다.
“대주님, 대주님!”
하청규는 난을 치고 있었는데, 다급한 부하의 얼굴을 보곤 얼굴을 찡그렸다.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이냐?”
부하가 두 손을 모으며 답했다.
“서숙의 칠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청규가 붓을 놓으며 말끝을 올렸다.
“서숙의 칠공자가? 대체 왜?”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청규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흠, 공자를 밖에 두는 것은 예가 아니니, 안으로 모시거라.”
“존명.”
하청규는 돌아서는 부하의 뒷모습을 보며 콧등을 쓰다듬었다.
‘칠공자가 얼마 전 백호대를 깨뜨렸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우리 적룡대가 목표인가?’
그는 명운이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 * *
명운은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서화를 보고는 종영세가 말한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서화를 즐긴다는 말이 단순한 소문은 아니었군.’
그의 뒤에는 조광이 눈을 부릅뜬 채 서 있었다.
조광은 지난 석준명과 접선 때부터 명운의 호위를 도맡았다.
“대주께서 오십니다.”
시비의 전갈에 명운이 자세를 고쳤다.
잠시 뒤, 적룡대주 하청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청규가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는 깍듯이 인사를 했는데, 이는 명운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예였다.
‘백호대주와 태도가 완전히 다르군.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명운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았다.
“일이 있어 하 대주를 찾아왔나이다.”
하청규가 허리를 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누추한 곳이라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명운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서화의 깊은 향이 손님을 맞이하니, 운치가 있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청규는 명운의 청아한 대답을 들으며 생각했다.
‘열셋이라 했던가? 나이보다 훨씬 조숙해 보이는군.’
그는 명운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저희 적룡대에 일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바로 물어도 되겠습니까?”
명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 될 것이 없지요. 근래에 서숙에서 여쭌 일이 있었습니다.”
하청규는 이번 방문이 갑작스레 일어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 부대주가 서숙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서 직접 찾아왔다는 말이군.’
부대주 홍걸이 그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을 보면 큰일은 아닌 듯싶었다.
“어떤 일이 있으셨습니까?”
명운이 오른손을 탁자 위에 놓으며 대답했다.
“한 아이를 데려가고자 했습니다.”
하청규는 서숙에서 하급 무인 하나를 데려갔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하급 무인이 바로 종영세였다.
“공자님, 무인을 또 내어드리는 것은…….”
명운이 오른손을 세우며 그의 말을 끊었다.
“무인이 아니라 아이라 했습니다.”
하청규가 확인하듯 물었다.
“아이라 하셨습니까?”
명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사냥에서 잡힌 노예 중 하나입니다.”
노예 시장에서 사들인 아이를 살수로 만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흠, 흠, 이번에 들어온 노예 중 하나를 내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명운은 그의 말을 듣고는 손가락 셋을 폈다.
“산 가격의 세 배를 쳐 드리겠습니다.”
하청규는 아이를 내어 주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물렁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도 좋지는 않다. 여기서는 적당히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가 명운에게 말했다.
“돈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아니라면…….”
하청규는 명운이 어떠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는지 알고 있었다.
“비무는 안 됩니다.”
“돈도 비무도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처리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하청규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서화를 즐기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명운은 지난 생 내내 서화와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다.
‘서화로 승부를 걸어오면 이보다 쉬운 일이 없지.’
그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애써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즐기긴 하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닙니다.”
하청규가 오른손 식지를 세웠다.
“공자께서 한 작품의 주인을 맞추신다면 아이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서화의 주인을 맞추는 것이라면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하나 명운은 곤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름 없는 자의 그림이라면 어찌 맞출 수 있겠습니까?”
하청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없는 서생이 그린 그림을 맞추라 하면 그 누구도 맞추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알 만한 그런 화가의 그림을 가져올 것입니다.”
명운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었다.
“제가 알 만한 이의 그림이란 말입니까?”
하청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그는 쉽게 알 수 있다 말을 했지만, 누구나 아는 그런 그림을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쉽게 알 수 있는 그림이라면 그 승부에 응하겠습니다.”
하청규는 마지막으로 이번 승부를 정리했다.
“제가 보여 드린 그림의 주인을 맞추시면, 아이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반대로 공자께서 주인을 맞추시지 못하시면…….”
명운이 목에 살짝 힘을 주며 말을 받았다.
“순순히 물러가겠습니다.”
하청규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그림을 가져오겠습니다.”
그가 그림을 가져오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조광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번 승부는 문제가 있습니다.”
명운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을 받았다.
“무슨 문제 말인가?”
“하 대주에게 너무 유리한 승부입니다.”
명운이 재차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조광이 대답했다.
“전 그림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나 알 만한 그림이라는 것은 하 대주의 말뿐입니다. 약속과 달리 어려운 그림이 등장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명운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조광, 하 대주는 그런 사람이 아닐세.”
“공자님.”
명운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미 약속을 했네. 아이를 돌려받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
그는 태연한 모습을 연출했으나 실은 제법 자신이 있었다.
‘위작과 진짜를 구분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맞추는 것이라면 어려울 것이 없지.’
잠시 뒤.
하청규가 한 폭의 산수화를 들고 나타났다.
“준비되셨습니까?”
명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준비되었습니다.”
하청규는 미소와 함께 산수화를 묶었던 끈을 풀었다.
스르륵.
끈이 풀리면서 산과 소나무를 그린 그림이 탁자 위에 펼쳐졌다.
“이것은?”
하청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충분히 보시고 답하시면 됩니다.”
그는 명운이 산수화의 주인을 맞추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유명하지만, 그림 자체는 유명하지 않다. 화가의 작풍을 모른다면 맞추지 못할 것이다.’
하청규가 준비한 승부수는 유명한 작가의 유명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명운은 산수화를 보고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하청규가 뒷짐을 지자 조광은 속으로 혀를 찼다.
‘빌어먹을! 그림에 수작을 부렸구나!’
그는 명운이 순진하게 하청규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어떠십니까?”
하청규의 물음에 명운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청규는 승리를 확신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천천히 답을 하셔도 됩니다.”
그는 겉으로는 예의 바른 군자이나 속은 크게 비틀려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하는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살길이 없는데도 살길을 찾으려 하는 사냥감과 같구나.’
허청규가 옅은 미소를 지은 순간 명운이 입을 열었다.
“산줄기를 보면 보통의 작품들과 다른 기법을 사용했군요. 이것은 붓이 아닌 먹으로 직접 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물은…….”
그의 정확한 지적에 하청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붓이 아닌 먹으로 직접 그렸다라. 설마 알고 있는 건가?’
명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곳의 물은 손으로 비벼서 그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당대에 유행한 것으로 발묵화풍(潑墨畫風)이라 합니다.”
하청규는 발묵화풍이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 당했다. 내가 상대를 너무 쉽게 보았구나!’
명운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쪽을 꽤 얕본 모양이군. 방심한 상대를 기습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 봐줄 생각은 없다.’
그가 손을 뻗으며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송석(松石)의 모양과 그 뒤로 이어지는 선을 보면, 이 그림은 당대의 화가 중 한 사람인 위언의 그림이 아닐까 합니다.”
하청규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 훌륭하십니다. 이 그림은…… 위언의 수산강하도(水山江河圖)입니다.”
그는 비무를 펼치지 않았음에도 비무에서 진 것과 같은 타격을 받았다.
‘해설과 답까지 완벽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다.’
함정에 빠진 것은 명운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