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eturner RAW novel - chapter (96)
96화 대협객 (1)
검신을 흐르는 희미한 물결무늬.
이런 무늬는 중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좋은 단검이군.”
명운이 상자에 넣은 단검 두 자루는 아래층에서 입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원에 팔면 상당한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군.”
물론 팔지 않고 선물로 쓸 수도 있었다.
‘양 좌사나 진이라면 꽤 좋아하겠지.’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붉은 머리 소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냥 가지 마!’
그녀의 마음속에 울리는 비명을 그가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명운은 계속해서 멀어져 갔다.
탁.
세 걸음.
드디어 그의 걸음이 멈췄다.
“흠, 그냥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명운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계단을 올라왔다.
붉은 머리 소녀는 그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드디어 죽을 수 있구나.’
그녀는 암살자로 키워졌기 때문에 죽음에 초연한 편이었다.
‘두려움에 떨다 죽는 것보다는 단칼에 죽는 것이 낫다.’
명운은 그녀 앞에 섰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널 그냥 풀어 주기에는 너무 위험할 것 같다.”
그가 찍은 혈도는 내일 아침이면 자연스럽게 풀릴 터였다.
그러나 혈도가 풀린 뒤가 문제였다. 그녀가 멀리 달아나지 않고, 아라산의 복수를 하겠다고 도민국에 잠입하면,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곤란하지.”
팍. 팍.
명운 짧게 혈도를 다시 찍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두 팔을 내리고, 다리 또한 붙였다.
소녀는 속으로 다시 한번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냥 죽여!’
그녀는 명운이 자신의 몸을 유린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운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그녀를 반듯하게 세운 뒤 왼쪽 어깨에 멨다.
“이러는 게 더 안전하겠지.”
명운은 오른손으로는 상자를 왼손으로는 붉은 머리 소녀를 감쌌다.
“자, 이제 끝이다.”
그는 더는 이곳에 올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 * *
조광은 여인과 상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명운이 상자 하나와 또 다른 여인을 메고 나타나자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제게 상자를 주십시오.”
명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문제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조광은 명운이 메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를 보며 물었다.
“그 소녀도 앞선 여인들과 같습니까?”
명운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아니, 이 아이는 내 노예일세.”
조광은 멈칫했다.
“노, 노예군요.”
명운은 만족 원정에서 잡은 포로들까지 다 풀어 주는 대범함을 보였다.
하나 붉은 머리 소녀만큼은 풀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저 소녀가 크게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조광은 명운이 그녀를 총애한다는 오해를 하고 말았다.
“더는 가져올 물건이 없으니, 이제 출발하지.”
조광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세 명의 여인과 상자들을 여섯 필의 말에 고루 나누었다.
“말이 많지 않았다면 다 가져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감일세.”
선두에는 명운이 후미에는 조광이 섰다. 그들은 말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대형을 짠 것이었다.
“공자님, 요새에는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조광이 쓰러뜨린 도망자는 모두 넷이었다.
‘공자님께서 쓰러뜨린 자들과 내가 쓰러뜨린 넷을 더하면 적의 숫자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운이 앞서 걸으며 대답했다.
“서른까지는 세었는데, 그 이상부터는 세지 않고 베었네.”
최소한 서른 명 이상이 아라산의 요새에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많은 적을 혼자 쓰러뜨리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명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대단할 것이 없었네.”
“한 명 말입니까?”
“여기 있는 이 아이 말일세.”
명운이 턱으로 가리킨 이는 붉은 머리 소녀였다.
조광은 가볍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 외모를 말씀하신 것이군요.”
명운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외모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 소녀가 마음에 드신 것이 아닙니까?”
명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조광, 아까부터 자꾸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군.”
조광은 명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화를 내시는 걸까? 혹시 속마음을 읽힌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과할 일까지는 아닐세. 그냥 자네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조광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주의하겠습니다.”
명운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내가 저 아이를 대단하다고 칭찬한 것은 움직임이 다른 암살자들과 달랐기 때문일세.”
조광은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암살자였습니까?”
“저 두 여인과 옷이 다르지 않나.”
조광은 명운이 처음 데려온 여인과 붉은 머리 소녀를 비교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옷이 다르군요.”
“저 소녀는 강하진 않았지만,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권법과 각법을 익히고 있었네.”
조광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의 흐름과 운용 역시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 말씀은… 금제를 거신 다음에 호위로 쓰실 것입니까?”
명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쓰진 않을 걸세.”
“그러면 그냥 노예입니까?”
“그것도 좀 그렇군.”
명운은 소녀에 대한 처분을 살짝 미루었다.
“조광, 자네 말이야. 여자들에게 유독 관심이 많은 것 같군.”
조광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말입니까?”
“자꾸 여인들에 대해 물어보지 않나?”
조광이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공자님의 여인에게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명운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여인에게?”
“저 소녀는 암살자라고 해도 두 여인은 다를 것이 아닙니까?”
명운은 재차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후…… 조광, 그냥 다른 말을 하도록 하지.”
“예?”
“자네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광이 대답했다.
“검법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 말일세.”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공입니다.”
천마신교의 무인이 무공을 좋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크, 지극히 천마신교 무인다운 대답이군.’
명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다른 것은 없나?”
“맛이 있는 요리 정도일까요?”
이번 대답은 명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요리인가?”
“의외의 대답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네. 나는 자네가 책이나 사색 같은 것을 이야기하리라 생각했네.”
조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과는 인연이 없습니다.”
“음, 그러면 자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경은이겠군.”
조광이 순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는 경은에게 약간의 호감이 있었지만, 종영세처럼 사모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닌가?”
“제가 어찌 경 소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명운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상하군. 경은의 요리 솜씨는 낙산원에서 제일 뛰어났을 텐데 말이야.”
조광은 자신이 또 한 번 오해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요리 때문이었구나.’
그가 대답을 고쳤다.
“공자님 말씀대로 경 소저의 요리 솜씨는 낙산원에서 제일입니다.”
“그런데 왜 좋아하지 않는가?”
조광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가 경 소저의 요리를 먹을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명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는 산길을 걸으면서 조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광이 요리와 수를 놓은 비단옷을 좋아할 줄이야.’
명운은 그가 검을 좋아했다면, 요새에서 입수한 것 중 하나를 그에게 내어 주려 했다.
하지만 조광은 무기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검법은 좋아하지만, 검은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앞뒤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조광.”
“예, 공자님.”
“셋째 형은 어떻던가?”
조광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공자님께서도 함께 원정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없었을 때 말일세.”
조광은 잠시 생각을 한 뒤에 대답했다.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원정에 임하셨습니다. 하지만 크게 패한 뒤에는 상당히 소극적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삼공자 명원은 명운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독한 구석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말이군.’
그는 낮에는 쉬고, 밤에는 산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드디어 도민국에 도착했다.
* * *
“공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시녀의 보고에 일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고?”
그녀는 맨발로 뛰어나갔다.
“군주님! 군주님!”
시녀가 신발을 들고 달려왔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궁전 입구에 이르자 명운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공자님!”
명운은 그녀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가 명운을 향해 두 손을 펼쳤다.
명운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를 안고 말았다.
“군주.”
“공자님.”
일함은 내친김에 입술을 내밀었지만, 명운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환대는 감사하지만, 몸이 더럽습니다.”
일함은 얼굴을 붉히며 한 걸음 물러섰다.
“더럽다니요. 이것은 적의 피가 아닙니까?”
명운이 그녀에게 되물었다.
“군주께서는 피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두렵지 않습니다. 적이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제 가족과 제가 대신 피를 흘렸을 테니까요.”
명운은 그녀가 일국의 군주답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데다가 마음까지 강하다. 일함은 훌륭한 여인이구나.’
그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그녀를 더 높이 평가했다.
잠시 뒤.
강하원과 수하들이 나타났다.
“공자님!”
“공자님을 뵙니다!”
명운과 조광은 미소로서 화답했다.
“잘 있었나?”
강하원이 두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공자님께서 홀로 가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 사람, 하늘이 무너지긴.”
강하원은 명운이 절세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크게 걱정을 했다.
“아라산은 토벌하신 것입니까?”
그의 물음에 일함도 귀를 쫑긋 세웠다.
‘정말 공자님께서 아라산을 토벌하신 것일까?’
적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면 도망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명운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일세.”
일함은 그의 대답에 매우 기뻐했다.
“역시 공자님이십니다!”
명운은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하, 이것은 좀 곤란하단 말이지.’
그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준 것은 조광이었다.
“군주님, 여기 이름을 모르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일함은 말 위에 매달려 있는 여인들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들은 누구죠?”
명운이 대답했다.
“아라산의 요새에 잡혀 있던 여인들입니다.”
일함은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처음 본 이는 붉은 머리 소녀였다.
“이 아이는 잘 모르겠네요.”
명운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닙니다.”
“네?”
“그녀는 아라산의 암살자입니다.”
명운이 말이 떨어지자 일함이 깜짝 놀라며 거리를 두었다.
“이 아이가 아라산의 암살자란 말인가요?”
명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제가 펼친 수법 때문에 그녀는 손가락 하나 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라산의 암살자들은 마술을 쓴다고 했어요.”
명운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소문일 뿐입니다.”
“정말인가요?”
“정말입니다.”
일함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는 다음 여인을 살폈다. 그녀는 두 번째 여인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은!”
“아는 사람입니까?”
일함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안석국(安石國)의 공주예요. 부왕과 함께 안석국에 갔을 때 본 적이 있어요.”
명운은 생각했다.
‘두 사람을 구해 오길 잘했군.’
그는 안석국의 공주를 구했으니, 크게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