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Returner RAW novel - chapter (97)
97화 대협객 (2)
명운이 구한 두 사람의 신분은 곧 밝혀졌다.
한 명은 일함이 알아본 것처럼 안석국의 공주였고, 다른 한 명은 대운국의 중신(重臣) 유무의 딸이었다.
그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곳에서 아라산 자객들에게 납치되어 이맘의 노리개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약물에 중독되어 있어서 의사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명운은 최상층에서 두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두 눈.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얼굴.
‘모두 약물 때문이었군.’
그가 일함에게 질문을 던졌다.
“의사라면 의원 같은 것입니까?”
“서역에서는 의원을 의사라 부른답니다.”
“그렇군요.”
일함이 그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여러 나라에서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렇게 빨리 말입니까?”
“전서구가 있으니까요.”
천산의 나라들은 전서구로 빠르게 소식을 교환했다.
“대협객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명운은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대협객이라니요. 친구를 위협하는 살수들을 처리한 것뿐입니다.”
“이제 천산에 살고 있는 모두가 공자님의 친구입니다.”
일함은 자신이 남자를 제대로 골랐다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공자님을 뵙길 원하고 계십니다.”
명운은 도민국에 온 이후, 한 번도 국왕을 만난 적이 없었다.
‘흠, 결국 한 번은 만나야겠지.’
그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폐하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공자님께서 원하시면 지금도 괜찮습니다.”
“지금 말입니까?”
“준비가 필요하시면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명운은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일 뵙도록 하죠.”
일함은 알현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내일 언제가 좋을까요?”
“아침 식사 직후가 좋을 것 같습니다.”
일함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는 예의를 갖춰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함이 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명운이 그녀를 불렀다.
“일함.”
일함이 몸을 돌렸다.
“필요하신 것이 있나요?”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함이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그럼, 전 누구에게 부탁하면 되는 겁니까?”
“제가 나간 뒤, 하산(河汕)이 들어와 공자님을 도울 것입니다.”
일함은 살짝 실망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쳇, 함께 식사하자고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녀가 나간 뒤, 건장한 무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공자님을 도울 하산이라고 합니다.”
명운은 구릿빛 얼굴의 무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하네.”
그는 일함과 마찬가지로 중원 말을 할 수 있었다.
명운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함 군주가 무관 중 중원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뽑은 것이겠지.’
도민국은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위치한 국가였기에 여러 나라의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장 일함만 해도 중원과 서역, 그리고 대식국과 몽고의 말을 할 수 있었다.
“군주님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준비했습니다.”
명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준비가 되었으면 함께 갑시다.”
그는 하산과 함께 방을 나섰다.
* * *
붉은 머리 소녀.
그녀의 이름은 일(一)이었다.
이름에 특별한 뜻은 없었다.
그녀는 부모를 기억할 수 없는 나이에 납치되었고, 그 뒤로는 쭉 암살자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
“차라리 죽여 줬으면 좋았을 것을.”
일은 왕궁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곳은 음습하고, 차가웠다.
끼익.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간수겠지.’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탁. 탁.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일은 발소리로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여자다.’
여자 간수일까?
그녀가 아는 한 천산산맥에는 여자 간수가 없었다.
‘누구지?’
일이 머릿속으로 물음을 던진 순간,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너였구나.”
일은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언니!”
그녀는 납치된 아이였기에 친 언니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두 사람은 몇 년 전에는 진짜 자매처럼 친한 사이였다.
“일, 어떻게 된 것인지 듣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겠니?”
일에게 질문을 던진 여인은 아라산의 살수였다.
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니,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라산 멸망의 처음과 끝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여인은 일의 이야기를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단 한 사람에게 아라산이 멸망했다고?”
그녀가 알고 있는 아라산은 무적이었다.
“나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한데 그는 너무나 강했어.”
여인이 일에게 물었다.
“너도 이길 수 없었단 말이냐?”
일은 그녀가 아는 여자 암살자 중에는 최고였다.
“나는 물론 어떤 자도 상대가 되지 않았어.”
“그렇다면 예언자께서는 어떻게 되신 것이냐?”
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예언자께서는 위층으로 도망치셨지만, 그 악마가 따라 올라갔어.”
“아만은? 아만은 무엇을 했단 말이냐?”
아만은 아라산에서 가장 뛰어난 암살자였다.
“죽었을 거야.”
“아만마저?”
“요새에 있던 사람은 나와 그 두 여자를 빼고 모두 죽었으니까.”
여인은 일의 대답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녀는 세상을 다 잃은 사람 같았다.
일이 처연하게 말했다.
“맞아, 언니, 우리는 어차피 죽어.”
여인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이제 죽는 수밖에 없구나.”
그녀가 차갑게 웃었다.
“하하하, 이렇게 죽을 줄 알았다면, 왜 그리 고생을 했을까?”
“언니, 그자를 죽여 복수할 거야?”
일의 물음에 여인이 되물었다.
“아만도 이기지 못한 자를 내가?”
“언니에게는 독이 있잖아.”
“그렇게 강한 자인데 독으로 될까?”
아라산에는 그녀 말고도 독을 쓸 수 있는 자가 많았다.
특히 아만과 예언자라 불리었던 이맘은 독을 쓰는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언니, 소원이 하나 있어.”
“소원?”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죽여 줘.”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러려고 이곳에 왔어.”
그녀는 아라산 출신 여인이 잡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죽음으로 해방시켜 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일은 눈빛이 흐려졌다.
“언니, 죽지 않으면 고문을 당하는 것이지?”
“맞아.”
“언니를 만나서 다행이야.”
“걱정하지 마. 나도 널 따라갈 테니까.”
일은 생각했다.
‘처참한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는 언니의 독침에 죽는 것이 훨씬 낫다. 이곳에서 언니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여인이 독침을 꺼냈을 때였다.
휙!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등을 강타했다.
퍼억!
“아!”
짧은 신음과 함께 그녀의 모든 동작이 멈췄다.
이윽고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일은 그를 보고는 경악했다.
“넌!”
그는 바로 악마였다.
“그녀를 죽이면 곤란하지. 내 노예니까 말이야.”
여인은 귀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명운의 말을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일이 노예라고?’
그녀는 일함 정도로 능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원의 말을 할 수 있었다.
잠시 뒤, 명운의 뒤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하산이었다.
그는 쓰러진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루(樓) 마마?”
그랬다.
첩자의 정체는 바로 국왕의 후궁 중 한 명인 루였다.
명운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인가?”
하산이 대답했다.
“루 마마이십니다.”
“내가 아는 그 마마가 맞는가?”
“루 마마는 국왕 폐하의 아내 중 한 명이십니다.”
명운은 혀를 찼다.
‘쯧, 벌집을 건드렸구먼.’
그는 하산의 어깨를 잡았다.
“급한 일일세. 어서 가서 일함을 불러오게. 도중에 아무도 만나면 안 되네.”
“알겠습니다.”
하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루와 일은 서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 틀렸다.’
‘언니, 이제 끝이야.’
그녀들은 끔찍한 고문과 죽음.
그 두 가지만이 자신들에게 남았다고 생각했다.
일 다향이 지났을 무렵.
일함이 하산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신가요? 공자께서 부르신다고 하여 급히 오긴 했습니다만.”
명운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하산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쪽 눈을 감아 주십시오.
일함은 그의 요구에 멈칫했다.
‘보아서는 안 되는 것?’
그녀는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산은 유능하긴 하지만, 도민국 병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알아서 안 되는 중요한 비밀이라면,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일함은 강단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양쪽 눈을 감았다.
명운은 그녀가 양쪽 눈을 감자마자 손을 뻗었다.
슉!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뭔가가 하산의 가슴을 관통했다.
“헉!”
하산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게…….’
그는 뭔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투욱.
일함은 하산이 숨을 거두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문으로 다가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고리를 걸었다.
철컥.
일함은 문고리를 걸고 나서야 명운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명운이 대답했다.
“말 그대로 그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인 것인가요?”
명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운이 없었던 것이죠.”
“그의 죽음에 죄가 있다면, 그를 뽑은 내게 있을 거예요.”
일함은 명운의 곁으로 와서 동작이 멈춘 여인을 살폈다.
“루 마마군요.”
그녀는 명운이 왜 하산을 죽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자님은 루 마마의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서 손을 쓰신 것인가요?”
명운이 말했다.
“그녀가 암살자인지, 아니면 암살자에게 협박을 받아 이곳에 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산은 그녀가 아라산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큰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했다.
‘궁전의 시녀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감옥 안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일이 입을 열었다.
“넌 왜 간수를 죽인 것이지? 간수는 너희 편이잖아.”
그녀는 중원 말을 몰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함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공자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명운이 대답했다.
“우선, 루 마마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 것입니다.”
그는 손을 뻗어 루의 아혈을 풀었다.
그러자 루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비밀을 가지고 날 이용하려 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난 죽을 테니까.”
명운은 그녀가 중원 말을 하자 가볍게 놀랐다.
“중원 말을 할 줄 아는군.”
일함이 그의 말을 받았다.
“루 마마는 천산산맥 동쪽 사람이니까요.”
천산산맥 동쪽은 청해와 이어져 있었다.
이곳에는 도민국보다 중원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함이 루에게 말했다.
“하산이 죽었기 때문에 마마의 비밀은 지켜질 것이에요. 그러니 죽는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루는 자신의 말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국왕이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난 죽는다.”
명운은 그녀에게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왜 죽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너 때문에 다 죽게 되었다.”
“그 이유나 말을 해 보시죠?”
루가 대답했다.
“네가 예언자님을 죽였기 때문에 나와 일은 해독약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죽게 될 것이다.”
명운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예언자와 해독약이라. 누군가 그녀에게 금제를 건 모양이군.’
약을 통한 금제는 천마신교에서 자주 쓰는 수법이었다.
“그가 쓴 독이 무엇인지 알면, 내가 당신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운의 말에 루는 미간을 좁혔다.
“난 예언자님이 쓴 독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고 해도 넌 날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맘이 쓴 독이 그리 쉽게 해독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명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곳에 다시 가야 하나?”
우란산 중턱에 위치한 아라산의 요새에는 예언자라 불리는 자가 사용한 독이 남아 있을 터였다.
일함이 물었다.
“그곳이라면 우란산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명운이 루를 일으켜 세우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만 그곳에 가기 전에 해 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것이죠?”
“그녀의 몸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일함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오, 옷을 벗기라는 말인가요?”
명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옷을 벗기지 않아도 조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점점 많이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흠, 내가 말을 잘못하고 있는 건가?’
명운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루를 자신의 앞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에 두 손의 장심을 가져갔다.
‘기로 그녀의 몸을 살핀다.’
기를 이용한 내상 치료는 무공 고수들이 흔히 하는 것이었다.
하나 이처럼 기로 독을 찾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