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065)
1065화 구름 사이 명월이 그림자를 비추도다!
강기의 폭풍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는 절단된 사지만이 나뒹굴었다. 병기의 잔해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일순간 천지에 암흑이 드리워지더니 주위 공간마저 강력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갈라졌다. 그 환상 세계는 영역의 규칙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초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생소한 것들이 많았다.
군데군데 사람의 그림자도 보였다. 개개의 모습은 모호했으나, 하나같이 신선이나 부처처럼 초인적인 존재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순간 그들의 몸은 광대무변한 마기로 빚어진 먹구름에 뒤덮이고 말았다. 먹구름이 품은 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건 물론이려니와, 무색정대수인의 힘과도 흡사해 보였다.
아니, 그보다 한결 더 심오해 보였다. 초휴는 기를 쓰며 좀 더 또렷이 보려고 하는데, 이내 끝도 보이지 않던 마기의 먹구름이 갈라졌다.
뒤이어 운개명월(雲開明月)이란 말처럼 흩어진 구름 사이로 밝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밀히 말하면 도광(刀光)이 밝은 달처럼 엉겨서 먹구름에서 막 벗어난 자들의 신형 위에 쏟아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청천조영(靑天照影)이란 어귀처럼 맑은 창공에서 쏟아진 달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환히 비추었다.
다음 순간, 도망이 작렬하면서 사람들의 신형이 괴이하게 쪼개지더니 눈 깜짝할 새에 수북이 쌓인 사지 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장면을 끝으로 뇌리의 환상은 흩어졌다.
곧이어 초휴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심장에 가해진 압력을 견디지 못해 환상 세계에서 튕겨 나갈 뻔했다.
이 환상은 청춘우에 남겨진 표지였다. 아마도 독고유아와 대라천 강자가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당시에 남겨진 표지이리라. 여기서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점은, 방금 본 장면에서 독고유아는 도가 아닌 신통으로 상대를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강력하고도 괴이했던 그 신통은, 근본적으로 상대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초휴는 일전에 신통을 체험한 일이 있었고 본인이 사용한 적도 있었기에 독고유아가 신통을 썼음을 단정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알고 있던 수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신통을 말이다. 초휴가 청춘우를 통해 환상 세계를 엿본 시간은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했다.
합사로 만족들은 자기네 족장이 초휴의 단칼에 절명한 것을 보자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마치 삽시간에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군중 사이로 알록달록한 장식품들을 주렁주렁 걸친 노인네 하나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초휴를 노려보았다. 그는 합사로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은 쉼 없이 입을 놀려 무수한 음절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의 주술이 초휴의 눈앞에 환상을 빚어냈다.
백 장도 넘는 크기의 거대한 흑표범이 그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드는 게 아닌가. 초휴는 그 마신과도 같은 흑표범을 마주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너희 합사로 부족은 정말 역겹기 짝이 없구나.”
말과 함께 초휴의 신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이어 합사로 제사장은 자신의 주위가 온통 암흑천지로 변한 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몸이 마치 낭떠러지로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대로 계속 추락하면 무변 연옥에 떨어지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흑표범 한 마리가 집채만 한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범이 한입에 제사장을 삼킨 순간, 실제 세상에서의 그는 온몸의 칠공(七孔)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크게 두어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어느샌가 나타난 심마가 비아냥댔다.
“이렇게 쉽게 끝나다니, 약해도 너무 약하군. 예전에 너의 손에 죽은 그 화상과는 비교도 안 되겠어.”
하지만 초휴가 보기에는 합사로 제사장이 너무 약해서가 아니라, 합사로 전체에 재수가 옴 붙었기 때문인 듯했다. 저들의 족장이 하필 청춘우를 손에 넣는 바람에 이 꼴이 났으니 말이다.
게다가 저들의 제사장도 기껏 시전한 환술이 무용지물에 그치는 불운을 맞았다. 물론 머리가 단순하고 몸만 발달한 만족들이라면 환술이 일종의 ‘대량 살상 무기’ 노릇을 하고도 남을 터였다.
하지만 초휴는 대라천의 몇 안 되는 지존급 환술 강자의 하나인 범교 비슈누전 환혹천왕궁 궁주인 마리가와 한바탕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마리가에 비하면 일개 어린애 장난과도 같은 수준의 환술로 초휴에게 덤볐으니 당연히 좋게 끝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래저래 합사로 부족은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셈이다.
초휴가 파리를 때려잡듯 너무도 간단하게 합사로 부락 최강 실력자인 족장과 제사장을 해치우는 것을 보자 녹비와 흑걸은 그에 대한 경외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물론 초휴는 자기가 어떤 수법으로 그 둘을 해치웠는지 자상히 알려줄 만큼 겸손하지는 않았다.
수장 둘이 다 죽자 남은 합사로 사람들은 한주먹거리도 안 되었다. 그들이 연신 패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초휴가 흑걸에게 물었다.
“싸움에서 패한 적은 보통 어떻게 처리하는가?”
흑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연히 모조리 다 죽여야지요. 저들이 섬기는 신과 우리가 모시는 신이 엄연히 다른 데 왜 살려두겠습니까?”
초휴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족의 방식이 너무 잔혹하다고 여겨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고 세력의 간판을 내리는 일이야 초휴 본인도 수도 없이 해왔건만, 새삼 잔혹하다 느낄 일이 무에 있겠는가.
다만 이들의 방식대로라면 낭비가 과하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때에 따라 죽일 필요도 있고 뿌리째 도려낼 필요도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서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초휴의 철칙이었다.
흑걸이 댄 이유는 초휴가 보기에 너무 가소로웠다. 만족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역인을 못 따라잡는 이유가 단순히 실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초휴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
“저들 또한 신께서 창조하신 존재들이다. 근본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 저들이나 너희들이나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한 형제나 마찬가지인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다른 신을 믿는 건 문제겠으나, 그건 저들이 무지몽매하여 자신들이 이단에 빠졌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니, 너희가 잘 가르쳐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저들이 죽어도 말을 듣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녹비의 질문에 초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야 간단하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참된 신을 섬기기로 하면 흑라부의 일원으로 받아주어라. 회개를 거부할지라도 반항하지 않는 자는 노예로 삼았다가 다음번에 또 이런 싸움이 벌어질 때 맨 앞에 세워라. 그리고 마지막까지 회개도 거부하고 말도 듣지 않으며 반항만 일삼는 자는 최후에 죽여도 늦지 않다.”
흑라부를 손아귀에 넣었으나, 초휴가 보기에 그들만으로는 아직도 약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일단 급한 대로 진화연신을 통해 저들의 경지를 속성으로 높여주긴 했지만, 저들을 휘어잡을 만한 묘책이 더는 없었다.
하지만 초휴의 눈앞에는 흑라부를 동원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었다. 그러니 흑라부를 제라산맥 깊숙이에 존재한다는 막강 세력에 버금갈 만한 실력까지 반드시 올려놓아야 했다.
그러자면 흑라부 만족들에게 전쟁을 통해 더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전쟁을 치를수록 점점 더 실력이 늘 테니까.
해서 초휴는 자기 주머니에서 흑라부가 혹할 만한 무언가를 또 내놓는 대신, 합사로 만족을 받아들여 자체의 실력을 증강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에 흑걸이 수신호를 보내어 합사로 사람들을 죽이지 말고 생포하게 했다. 한나절이나 걸려 전장이 말끔히 치워진 그제야 초휴가 흑걸에게 말했다.
“나의 또 다른 신분이 무엇인지는 그대도 잘 알 테지. 해서 계속 남만에 머물 수는 없다. 그래도 창오군은 흑라부와 멀지 않으니 나와 연락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가찰을 남안부에 남겨둘 테니, 나를 찾을 일이 생기면 가찰을 통해 연통하라. 물론 그대들에게 하명할 일이 생기면 나 역시 가찰을 통해 연락하겠다.”
내내 초휴 뒤를 따르던 가찰이 쓴웃음을 지었으나 가타부타 토를 달진 않았다.
이미 초휴의 해적선을 타고 출항한 이상, 바다 한복판에서 내리면 물에 빠져 죽을 터였다.
지금으로서는 초휴에게 몸 바쳐 충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초휴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킬 거라는 쪽에 자신의 모든 걸 걸어버렸으니 말이다.
* * *
초휴가 창남부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곧장 폐관에 들어가 청춘우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서봉산을 비롯한 창오군 무사들은 초휴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함께 갔던 가찰은 왜 보이지 않는지 등이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는 못했다.
일전에 손건성과 마리가를 죽였던 일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히 남은지라, 그에 대한 경외심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더없이 독하고 악랄하며 실력도 어마무시한 상관을 만만히 대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밀실에서 초휴는 수중의 청춘우를 어루만지며 도신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보려 했다.
애석하게도 기령이 오래전 완전히 소멸하긴 했으나, 그래도 이 지존급 신병에는 표지가 남아 있었다. 눈곱만한 것이긴 해도 말이다.
초휴는 표지를 활성화함으로써 무슨 절기나 신통을 발견할 수 있을지 살폈으나 소득은 없었다.
청춘우를 처음 손에 쥐었던 때 보았던 그 환상 속의 장면이 도신에 유일하게 남은 표지인 듯했다.
청춘우와 파진자를 한데 나란히 놓아보니, 두 도에 서린 동일 원천의 힘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음이 확연히 느껴졌다.
초휴는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청춘우와 파진자를 하나로 융합시킬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도 모두 원시마굴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까닭에 재질이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게다가 청춘우의 기령이 이미 소멸했으니, 이 두 가지를 합쳐도 충돌이 일어날 염려는 없다고 봐야 했다.
다만 이 구상은 대라천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일전에 파진자를 통해서도 경험했듯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건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존재를 통해서만 정련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도가 한데 합쳐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도 정련시키자면 무근성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하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 방법은 아마도 과거에 대흑천신궁 사람들이 밟았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게 될 터였다.
현재 흑라부의 실력은 이미 남만 대세력 급으로 성장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초휴는 우선 그들을 내세워 실마리를 찾게 할 생각이었다.
다만 마리가의 기록에 의하면 먼젓번 하계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던 그 만족은 남만 깊숙한 곳에서 나고 자란 탓에 위치 표기는 잡다하게 많이 해놨지만, 초휴의 눈으로는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섣불리 찾아 나섰다가는 생고생만 할 게 뻔했다. 해서 먼저 흑걸 무리를 보내어 그 지역을 살펴보게 했다. 십중팔구 그들도 가본 적 없는 밀림지대겠지만, 그래도 그들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는 무엇이든 발견하는 즉시 자기에게 보고하라고 당부했다. 만족의 단순함이 이런 일을 시켜 먹기에는 딱 좋았다.
심계가 깊은 자들과는 달리, 잔꾀도 부리지 않고 딱히 질문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성실히 이행할 뿐, 무얼 찾고자 하는 건지 묻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그들은 신의 사자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일단 통로를 발견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겼으니, 초휴는 안심하고 폐관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