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066)
1066화 아득하기만 한 실마리
대라천에 온 지도 오래되었건만, 그간 한 번도 제대로 폐관 수련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구봉검종에서 폐관했던 게 그나마 유일했으나, 그마저도 단시간이었다. 원기 풍족한 최적의 수련 지인 대라천의 환경을 허비해온 셈이었다.
초휴의 폐관은 장장 한 달 남짓이나 이어졌는데 밖에서 이를 지켜만 보는 서봉산 무리는 어이가 없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도대체가 이따위 군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신출귀몰 사라지는 게 아니면 수련한답시고 들어앉아 있기만 할 뿐, 군수로서의 책무는 일절 하는 게 없으니 말이다.
황천각에서 이 양반을 군수로 보낸 이유가, 그냥 여기서 대접이나 받으며 한가하게 놀다 오라는 거였던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 달 후, 서봉산 무리는 남안부로부터 비밀스러운 연락을 받았는데, 그게 가찰이 보낸 것임을 알고 다들 대경실색했다.
남안부는 진작 창오군의 관할권 밖으로 방치되다시피 한지 오래여서 통신용 진법도 이미 해체되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종적이 묘연했던 가찰이 거기서 진법을 새로 구축해서 초휴 앞으로 소식을 보내온 것이다. 두 사람이 무슨 수작을 벌이는 중인 건지 모르니 다들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궁금하고 이상한 거야 그들 사정이고, 일단 밀실 문을 두드려 초휴에게 전갈을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갈의 내용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간단했다.
흑라부 사람들이 초휴가 시킨 일을 잘 해내어 ‘그곳’을 찾아냈으니, 언제든 가봐도 좋다는 얘기였다.
초휴는 전갈 내용을 챙겼다. 그리고 줄곧 무언가 물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봉산 등에게 눈길을 돌리며 한마디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니 해보시오. 무슨 말이든 좋으니까. 내가 그대들을 잡아먹기야 하겠소?”
그 말에 다들 속으로 외쳤다.
‘잡아먹지야 않겠지. 죽여버릴 테니까 문제지!’
무리 가운데 서봉산이 가장 연장자였다. 해서 그래도 초휴가 예대하는 편인 그가 대표로 나서서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대인, 대인께서는 엄연히 창오군의 군수이시니, 언제까지나 직무에 관여치 않고 계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육 공자와 절친하신 건 알지만, 대인께서도 황천각 내 돌아가는 사정을 아시다시피, 부각주가 대인의 직무 태만을 문제 삼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자 초휴가 되레 고개를 갸웃하며 술술 읊어댔다.
“관여라니? 창오군에 내가 따로 관여해야 할 일이 있었던가? 전임 군수가 죽은 경위야 각주 대인께서 몸소 조사하셨어도 아무것도 건진 게 없었잖소. 그런데 이제 와 내가 무슨 수로 조사를 또 한단 말이오. 게다가 조사해서 뭐가 나온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겠소? 한강성 문제만 해도 그렇지. 여태 시비 걸러 오는 놈이라곤 전혀 없는데 뭘 그리 신경 쓰는지 모르겠군. 저들이 시비를 걸면 그때 가서 그 관여라는 걸 해도 늦지 않소. 만족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 하나 없지. 내가 이 자리에 버티고 있는 한, 저들은 절대 함부로 굴지 못할 테니까. 모든 게 다 잘 해결되었다 그 말이오. 설령 상단들이 남만으로 진입하더라도 일부러 죽으려고 밀림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바에야 안전에는 전혀 문제없을 거요.”
초휴의 청산유수와도 같은 응수에 다들 넋이 나갔다. 사실 초휴가 언급한 일들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 만족 문제였다.
저들은 죽여도 겁먹지 않고, 때려도 굴복하지 않는다. 유화책도 길게 먹히지 않고, 강경책은 되레 저항만 불러오기에 십상이니까.
하여 사흘이 멀다고 사달을 일으켜 왔다. 그러나 지금 초휴의 말로는 저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패기로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더없이 확신에 찬 그의 표정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얄밉게도 초휴는 화통하게 손을 휘저으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남만에 다녀와야겠군. 서 형, 여기서는 그대가 최고 연장자고 경륜도 가장 깊으니, 당분간 내 자리를 대신 맡도록 하시오. 혼자 결정 못 할 중대사가 생기면 일단 내가 돌아올 때까지 묵혀 두도록 하고.”
그 말을 남긴 초휴는 또 홀연히 가버리고 말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잔뜩 얼어있던 그들의 입과 사지도 풀어졌다.
진종이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남만 쪽은 이미 해결되었다는 군수 대인의 말씀이 참말일까?”
서봉산도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겠지. 군수 양반이 일 처리는 종잡을 수 없어도 지금까지 빈말한 적은 없잖은가?”
한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심휘도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시험 삼아 상단을 조직해서 남만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정말로 안전한지 아닌지 확인해보는 거지.”
웬만한 다른 군에서는 황천각 지부의 운영 비용은 현지 무림 종문이 바치는 상납금으로 충당되었다. 하지만 창오군만은 예외였다. 땅덩이가 작지는 않지만, 대부분 지역이 밀림인 데다 무림 세력도 드물었다.
몇 안 되는 세력으로부터 상납금을 취해봤자 황천각 본부에 상납은 고사하고, 창오군 현지 무사들을 먹여 살리기도 빠듯했다. 따라서 창오군은 남만 특산물과 흉수 고기 등을 팔러 나온 만족과의 거래를 통해 가외 수입을 올리는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실질적인 수입원인 셈이었다.
서봉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시험해보세나.”
이렇듯 직무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상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으면 웬만해서는 흐뭇해서 자다가도 웃음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상사가 하필 초휴이다 보니 좋기는 개뿔! 머리만 지끈거리고 아팠다.
* * *
남안부.
그간 흑라부가 해온 일들 및 동향과 관련해 가찰이 초휴에게 사후보고를 하고 있었다. 흑라부는 초휴가 시킨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한시도 소홀하거나 꼼수를 부린 적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단순해도 정말로 바보 멍청이인 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그토록 강력한 힘을 얻자 더는 예전처럼 자기네 부락 내에만 갇혀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하여 초휴가 시킨 일을 수행할 일부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으로 평소 흑라부와 사이가 나빴거나 눈꼴시게 여겨왔던 부락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악신을 섬긴다는 명목을 내세워 궤멸해버린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모조리 죽이고 보는 방식은 아니었다. 초휴가 일러준 대로 순순히 투항하는 자는 받아주고 노예로 삼을 만한 자는 노예로 부렸으며, 씨알도 안 먹히는 골수분자들만 즉결처분해 버렸다. 이에 한 달도 못 되어 흑라부의 규모는 배나 불어났다.
이처럼 정벌전을 이어가니 새로이 천지 원기를 깨우치게 된 만족 전사의 수도 갈수록 늘어 갔다. 족히 수십 명도 넘는 전사들이 초휴가 ‘신의 선물’을 하사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흑라부의 실력이 단시일 내 이렇게나 급성장하자, 옆에서 지켜보는 가찰의 놀라움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휴가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만에 하나, 흑라부 측에 무슨 꼬투리라도 잡힌다면 그때 가서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초휴 본인은 자신만만했다. 만족 전사들의 실력을 급등시킬 비법이 오직 자기한테만 있지 않은가. 게다가 흑걸을 제외한 나머지 부락민들에게 내력진화를 시전할 때는 살짝 조작을 가해두었다.
이건 초휴가 만일에 대비해 심어둔 안전장치와도 같았다. 하지만 가급적 그걸 쓰는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사실 만족 사람들은 수하로서 꽤 유용했다. 이처럼 쓸모가 많은 병력을 잃으면 자신만 손해일 터였다.
가찰의 보고를 다 들은 초휴는 그를 앞세워 흑라부로 향했다. 한 달 못 본 사이에 흑걸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초휴가 강제로 증강시켜 놓은 실력에 이미 적응을 마친 게 분명해 보였다.
초휴가 나타나자 흑걸이 환히 웃으며 반겼다.
“사자 대인, 왜 이제야 오십니까. 우리 전사들이 또 신의 힘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이 천지 원기를 깨우친 이들이 많거든요.”
가찰이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댔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만족들은 시종일관 단순하고 직설적이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한 그대로 입에서 튀어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들이 초휴에게 무얼 바라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뻔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상투적인 인사말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저렇게까지 솔직한 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초휴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우선 흑라부 전사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후 그들을 앞세워 마리가의 자료에 기록된 곳으로 향했다.
오백년 전, 그곳에는 그 만족 사내 혼자만 살았다. 혼혈 혈통이 문제가 되어 어느 부락에서도 받아주지 않은 때문이었다.
군집 생활을 하는 만족들 세상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낭인 무사’였던 셈이다. 따라서 오백 년이 지나도록 그 사내 외의 다른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초휴는 자기가 확보한 자료상의 지형과 이곳의 실제 지형을 꼼꼼히 대조해보았다. 과연 흑라부 사람들이 제대로 찾아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분명했다. 하지만 초휴의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십 리 내를 샅샅이 수색해 보았지만, 하계로 넘어갈 수 있는 실마리의 ‘ㅅ’조차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하계로 통하는 입구를 그리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만만하게 찾아질 것 같으면 범교 측에서 진작 실마리를 찾아냈을 게 아닌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토록 기운을 빼고도 결과적으로 소득이 전무하니 낙담까지는 아니어도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건진 게 없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리가는 환혹천왕궁의 궁주로서 범교의 고위층 인사이니만큼, 그가 지녔던 자료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만에 하나 오류가 있었다 쳐도, 그 오류는 오백년 전 진작 불거져 대흑천신궁 사람들이 먼저 허탕을 쳤을 게 아닌가.
따라서 마리가의 자료가 틀렸다기보다는 무언가 일부 중요한 대목들이 누락된 게 분명했다. 범교는 장장 오백년에 걸쳐 단서를 찾았으며, 특히 최근에는 환혹천왕궁 궁주까지 친히 나서 찾으러 다녔던 것이다.
그의 환술 실력이면 만족 틈바구니에 파고들어서 이곳까지 찾아오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 한마디로 범교나 초휴를 막론하고 둘 다 이곳까지 찾아오는 것까지는 가능했으되, 소득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범교와 비교할 때, 흑라부라는 만족 대부락을 장악하고 있는 초휴가 더 유리한 편이긴 했다. 그들을 앞세워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만족 내의 일이야 만족이 더 잘 파악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초휴는 일단 흑라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따로 흑걸을 불러 물었다.
“만족 내 낭인······, 그러니까 혼자 떠돌아다니는 만족 전사들에 대해 혹시 아는 게 있는가?”
흑걸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잘 알다마다요. 그들 태반이 참으로 가련한 존재들이죠. 부락이 공격당해 통째로 없어졌거나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저질러 부락에서 쫓겨난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혼자 밀림 속에서 산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조상과 신령의 보호를 못 받는 자들은 더더욱 그렇지요. 물론 그건 그들이 가짜 신을 섬기기 때문이죠. 가짜 신 따위가 어떻게 보호를 해주겠습니까?”
초휴가 아래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만약에 말이다. 나는 분명 ‘만약’이라고 했다. 그대가 지금 당장 부락에서 쫓겨나 혈혈단신 제라산맥 깊은 데서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대가 본인의 거처 다음으로 자주 가서 얼쩡거리며 머물 만한 곳은 어디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