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Lord's rebirth RAW novel - Chapter (1069)
1069화 한강성, 엽천청
근자의 성장세만 보면 한강성이 대형 종문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정작 실질적인 세력 범위는 황천각의 삼 분지 일에도 못 미쳤다. 대라천 소재 종문의 팔할 정도를 역사가 만년도 넘는 상고 종문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반면, 한강성처럼 최근 수백년 전에야 굴기한 종문은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후발 세력인 한강성은 황천각, 능소종 등 기존의 대형 종문으로부터 야금야금 세력을 침탈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능라군만 해도 예전에는 능소종에 예속되었으나 지금은 한강성의 차지였다. 바야흐로 이제 창오군을 삼킬 차례인 것이다.
근자에 들어 황천각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추세였다. 해서 창오군에 대한 통제력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노린 한강성이 창오군을 삼키려는 야심을 키워온 게 한두 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대놓고 야욕을 드러내자니 역풍을 맞을 게 우려되었다. 해서 노낙부를 배후에서 지원해 그들이 나서게 했고, 이것이 노낙부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노낙부가 보내온 전갈은 한강성 무사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한강성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숲에서 버러지처럼 굴러먹고 사는 다른 만족들과 마찬가지였을 자들이 아닌가.
지금처럼 번듯하게 사는 것도 한강성이 도와준 덕분이건만, 주제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냔 말이다.
오늘만 해도 저들은 너무도 당당히 한강성의 지원을 요구해왔다. 고지식하고 어리숙해 보였던 오랑캐들에게 저렇듯 교활하고 뻔뻔한 구석이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좌중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상석에 앉은 중년 무사에게 집중되었다. 도포 차림이 영락없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모습이었다.
한강성은 따로 군수를 두지 않았다. 대신 능라군의 집정자로서 만족 폭동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획책한 한강성 장로, 엽천청(葉天靑)이 전권을 쥐고 있었다.
엽천청의 신분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현임 한강성 성주, 엽유공(葉唯空)의 조카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존 강자, ‘성하산인(星河散人)’ 맹성하(孟星河)의 기명제자라는 것이었다.
엽유공과 맹성하 모두 무선급 강자다. 그런 존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에게 말이다.
그러니 엽천청의 실력 또한 비범한 게 당연했다. 그 역시 전갈 내용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이 후안무치한 오랑캐 놈들을 훈계할 필요가 있겠군. 사람은 함부로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알려줘야겠다는 말이다. 다만 훈계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리의 출수가 필요하다면 일단 출수하는 게 순서일 테지. 남만 소재 부락들 가운데 노낙부처럼 우리 한강성에 의탁하려는 부락의 수가 얼마 안 되니 잠시 봐줄 필요는 있을 듯하다. 이번에 노낙부가 궤멸당할 위험을 수수방관했다가 정말로 망해버리면 우리가 또 다른 노낙부를 키워야 할 테니, 그것도 성가신 일이지. 일단 노낙부를 침공한 그 역겨운 놈들부터 처리하고 창오군도 확실히 장악한 다음, 그때 가서 노낙부도 손봐줄 것이다! 오늘의 괘씸죄까지 물어 단단히 혼쭐을 내주리라!”
한강성 무사들도 그의 의견에 수긍의 뜻을 표했다. 이때, 앞서 노낙부 측 전갈을 전해왔던 무사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장로님, 지금까지 우리는 남만으로 갈 때, 매번 남안부를 가로질러갔습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해온 군수가 남안부를 황천각 휘하로 다시 편입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안부를 경유하는 대신, 남역을 빙 둘러 가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에 엽천청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남역을 둘러 가면 우리가 아무리 빨리 가도 열흘도 넘게 지체되지 않는가. 노낙부가 멸망한 다음에나 도착하게 될 테니 그건 안될 일이지. 새로 왔다는 그 창오군 군수에 대해서는 나도 들었느니라. 근자에 동역에서 이름깨나 날렸더군. 중인환시리에 능소종 헌원무쌍도 물리친 고존의 전인이고 말이지. 하지만 그래봤자 한낱 애송이에 불과한데,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덥썩 군수 자리를 받아서 왔다는 말인가. 성하산인을 스승으로 모신 나 정도나 되니 여기서 버티는 게지. 그놈이야 창오군에 제 무덤을 파러 온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황천각도 그렇지. 고작 진화련신 무사를 군수로 보내다니! 정말이지 황천각도 여간 형편없어진 게 아닌 모양이야. 노각주가 은거에 들어간 뒤로 저들은 내부 결속을 이루는 데도 실패했지. 중년 세대가 묵직하게 조직의 무게중심을 잡아야 할 텐데 그것도 못 하고, 청년세대도 육삼금 정도나 쓸 만하지 않던가. 그나마도 그냥 쓸 만한 정도에 불과할 뿐이지. 그러니 이래저래 황천각은 걱정할 거리가 못 된다. 고존의 전인이라고 해서 겁먹을 필요가 없단 말이지. 그러니 보란 듯이 남안부를 가로질러 가보자. 놈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겠는가!”
엽천청이 이러는 건 어깃장을 놓거나 광기를 부리려는 심산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였다. 사실 한강성은 처음부터 창오군을 집어삼킬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창오군의 전임 군수는 나이가 많다 보니 늘 안정 지향으로만 일관했다.
웬만해선 양보하고 말로 잘 해결하려들 뿐, 한강성과 전혀 적대하려 들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그의 성향이 되레 한강성을 더 부추긴 셈이 되어 결국 그를 음해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무상이 그의 사인을 친히 조사하러 왔을 때, 엽천청 무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죽 긴장했으면 엽유공에게 출수를 부탁하려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이무상도 한강성측에 대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대신, 만족 부락 몇 곳만 도륙 내는 선에서 분풀이를 대신하고 돌아갔다. 이 일을 계기로 한강성은 황천각의 실체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
황천각은 한강성과 맞서길 원치 않는 게 아니라, 맞설 능력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엽천청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아니,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솔직히 육삼금과 같은 동역행주나 해영종과 같은 노련한 천지통현 강자가 온다 해도 겁나지 않았다.
* * *
그 무렵 남안부 내. 서봉산 등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휴가 무슨 일로 자기들을 여기까지 부른 건지 알 길이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초휴는 그들이 봐온 군수 중에서도 단연 무책임한 군수였다. 동시에 전임 군수들과는 달리 이렇듯 전권을 대놓고 위임하는 군수도 처음이었다.
그러니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대신 초휴의 말마따나 창오군 만족들이 고분고분 조용해진 것은 그들이 안도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웬일인지 초휴가 창오군 내 주요 무사 모두를 남안부로 소집시킨 것이다. 그들 중 아무도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를 알지 못했다. 설마 대대적으로 만족 정벌에 나서기라도 하려는 걸까?
이번에도 역시나 서봉산이 큰맘 먹고 대표로 물었다.
“대인,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초휴가 진지하게 답했다.
“한강성 놈들이 조만간 우리 권역을 침범할 것이다. 창오군은 엄연히 우리 황천각 땅이니, 저들의 더러운 발이 이곳을 밟게 둘 수야 없지 않겠는가?”
초휴의 답변은 아무리 생각해도 뜬금없었다. 이에 서봉산이 또 물었다.
“한강성 놈들이 침범할 거라니요? 난데없이 저들이 여기에는 왜 온단 말입니까? 어디서 정보라도 입수하셨는지요?”
초휴가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한마디로 답했다.
“내 직감이다.”
좌중의 사람들은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지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마구 내뱉을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초휴는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직감이 그랬다. 원래 만족은 한번 싸움을 시작하면 어느 한쪽이 망할 때까지 죽도록 싸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노낙부는 얼마 싸워보지도 않고 방어 진법부터 구축하여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뭔가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닌 바에야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전임 군수의 죽음 및 노낙부의 근사한 장비들은 이 직감에 힘을 실어주었다. 십중팔구 한강성이 저들의 배후에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초휴에게 있어 노낙부의 영역 내에서 하계로 가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금 최대 관건은, 하계로 가는 통로가 남만 땅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이 남만 땅 전체는 그에게 있어 자신의 영역인 셈이었다. 자신 외에는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도 없고 발을 디딜 수도 없는 금단의 땅인 것이다. 한강성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서봉산 무리는 초휴의 직감 때문에 적의 침입을 경계해야만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초휴가 그렇다고 우기니 어쩌겠는가. 일단 지시에 따라서 적의 침입을 대비하는 수밖에.
그리고 다음 날 가찰이 황망히 나타나 보고했다.
“대인, 제자들이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한강성 놈들이 감히 경계선을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쯤 벌써 남안부로 진입했을 거랍니다!”
그 바람에 서봉산 등은 아연실색했다. 정말로 한강성이 온 것이다.
더불어 몇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가찰에게로 향했다. 저치가 언제부터 초 대인의 심복이 되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초 대인이 무얼 하러 어딜 가건 간에 그가 그림자인 것처럼 대동하긴 했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가찰이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젠장, 내가 원해서 이런 짓거리를 하는 줄 아나? 하지만 그들이 길게 신경전을 주고받기도 전에 초휴의 명이 떨어졌다.
“다들 가보자!”
* * *
그 무렵 남안부 경계에 이른 엽천청은 나 쓰러져가는 폐가 더미나 다름없는 남안부의 초라한 모습에 혀를 차고 있었다.
“쯧쯧, 황천각도 이제 확실히 한물갔군그래. 남만과 경계가 맞닿은 요충지를 이토록 허술하게 방치해 놓다니······. 잘만 활용하면 분명 큰 쓸모가 있을 텐데 이런 낭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가 여기를 접수하면 일단 만족과 대대적인 교역을 시도해봐야겠어. 그리하면 우리 실력도 증강될뿐더러, 저 우둔해 빠진 만족도 우리 손아귀에 꽉 틀어쥘 수 있을 테지.”
그러나 이때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중에야 창오군이 한강성의 것이 되건 말건, 지금은 내가 주인이다!”
초휴가 백 명도 넘는 황천각 정예 무사들을 거느리고 다가오자 엽천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기 오기 전부터도 창오군 신임 군수가 절대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일깨워준 이들이 있었다.
해서 비록 초휴를 얕잡아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조심하느라 여남은 명을 데려오긴 했다. 이 정도 인원이면 노낙부 쪽 일을 해결하기에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기가 여기 오리라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하지만 당혹감은 길게 가지 않았다. 그는 노련하게도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큰소리를 쳤다.
“창오군 군수인 초휴 소협이 아니신가? 소협의 이름은 빈도도 익히 들어봤소. 생각해보니 우리가 생판 남은 아닌 사이더군. 초 소협은 고존의 전인이고 나는 성하산인 일맥의 속가 제자이니, 다 같은 고존의 전인의 일맥인 셈이지. 초 소협도 그간 황천각에서 지낸 시간이 있었을 테니 근자에 황천각이 어떤 몰골인지 똑똑히 보았을 거요. 아무리 천년 거목이라도 뿌리가 썩어 문드러지면 쓰러지기 마련인 법! 황천각에 더는 희망이 없소.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해나 다름없단 말이지. 하지만 한창 중천에 뜬 해라면 어떻겠소? 이참에 한강성으로 들어오구려. 내 장담하건대, 황천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그대에게 주리다!”
초휴가 눈썹을 치켜떴다. 엽천청 이 자도 참 걸물이다. 남의 땅에 멋대로 발을 들이민 주제에 대뜸 영입제안부터 하다니.
예전 같았으면 초휴도 단번에 수락했을 것이다. 어차피 황천각에 몸담은 것도 거래의 일환일 뿐, 깊은 정이나 의리에 엮여서가 아니지 않은가. 누구든 더 많은 반대급부를 제시하는 쪽에 붙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하계로 통하는 길이 남만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창오군 군수 자리는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그것도 절대 남이 건드리지 못하게 확실히 끌어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초휴가 웃음을 터뜨리자 엽천청도 따라 웃었다. 자신의 제안에 상대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쾌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존의 전인 좋아하시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물러가라.”